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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드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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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드비가는 1373년에서 1374년 사이에 헝가리 부더에서 태어난 폴란드 국왕이자 헝가리 왕인 러요시 1세의 딸이다. 그녀는 쿠야비아 피아스트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1384년 10세의 나이로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야드비가는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과 약혼했으나, 폴란드 귀족들의 반대로 요가일라와 결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형성했다. 그녀는 문화 사업과 자선 활동에 힘썼으며, 크라쿠프 대학교 재건에 기여했다. 야드비가는 1399년 2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1997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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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드비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야드비가의 인장
야드비가의 인장
칭호폴란드 여왕
재위 기간1384년 10월 16일 – 1399년 7월 17일
대관식1384년 10월 16일 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이전러요시
이후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섭정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1386–1399)
섭정 유형공동 통치자
출생일1373년 10월 3일 – 1374년 2월 18일 사이
출생 장소부다, 헝가리 왕국
사망일1399년 7월 17일 (25세)
사망 장소크라쿠프, 폴란드
매장지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매장일1399년 8월 24일
왕가카페 왕조 > 앙주 가문
아버지러요시 1세
어머니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
배우자요가일라(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자녀엘리자베타 보니파치아
종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기타 정보
훈장성 야드비가 훈장
성인 정보
시복일1986년
시복 결정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성일1997년
시성 결정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 어릴 적 생애

야드비가가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있는 모습


야드비가는 헝가리 왕국의 수도 부더에서 태어났다[27]. 헝가리폴란드의 왕이었던 러요시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코트로마니치 에르제베트 사이에서 태어난 세 번째 딸이었다. 야드비가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는 모두 폴란드의 공주였기 때문에, 야드비가는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와 연결되어 있었다[27]. 역사학자 오스카 할레치는 야드비가의 혈통은 다른 어떤 곳보다 폴란드 쪽이 더 많다고 결론지었다. 야드비가는 1373년 10월 3일에서 1374년 2월 18일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야드비가는 조상인 실레시아의 헤드비지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아들이 없었던 러요시 1세는 자신의 딸들에게 왕국을 물려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유럽의 왕실들은 세 명의 딸들을 중요한 신붓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1374년 8월 18일, 레오폴 3세는 그의 장자 빌헬름과 야드비가의 결혼을 제안했다. 폴란드 귀족 사절단은 러요시 1세의 딸들 중 한 명이 폴란드의 왕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들 스스로의 권한도 1374년 9월 17일 코지체 특권으로 확장되었다[27]. 폴란드 귀족들은 러요시 1세의 요구에 따라 마리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러요시 1세는 1375년 3월 4일 빌헬름과 야드비가의 결혼에 동의했다. 예혼식은 하인부르크에서 1378년 6월 15일 열렸다. 레오폴 공작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정복할 예정이었던 트레비소를 야드비가에게 주기로 합의했다. 예식 후에 야드비가는 오스트리아에서 약 2년간 살았고, 이 시간 중 대부분을 비엔나에서 보냈다.

러요시 1세는 1379년 9월 가장 영향력이 큰 폴란드 귀족들에게 어린 여동생 마리어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부탁했다. 마리어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와 약혼했다. 야드비가와 빌헬름의 약혼은 1380년 2월 12일 러요시 1세와 레오폴 3세가 만나 확인을 했다. 헝가리의 귀족들도 이를 승인하여 야드비가와 빌헬름이 헝가리의 왕이 된다는 것에 합의했다.

1382년 7월 25일, 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은 지기스문트에게 공식적인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러요시 1세는 1382년 9월 11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야드비가는 러요시 1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3. 왕위 계승 분쟁

야드비가의 여동생 마리어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헝가리의 왕위계승자가 되었다.[29] 즉위식 이후, 어머니인 에르제베트는 마리어의 약혼자 지기스문트를 대신해 헝가리를 통치할 권리를 얻었다.[30] 지기스문트는 마리어의 대관식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러요시가 폴란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기스문트를 파견했기 때문이다.[31] 러요시의 죽음을 안 이후, 지기스문트는 "폴란드 왕국의 군주"라는 칭호를 채택하고, 마워폴스카의 마을들로부터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11월 25일 비엘코폴스카의 귀족들은 라돔스코에 모여 러요시 1세의 딸이 폴란드에 정착한다면, 그녀 이외에 누구에게도 충성을 맹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워폴스카의 귀족들도 12월 12일 비실리차에 모여 비슷한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에르제베트 여왕은 귀족들에게 특사를 파견해 자신의 딸들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러요시의 요구에 따라 지기스문트가 받은 폴란드 귀족들의 충성 서약은 무효화되었다.

에르제베트의 딸들은 모두 외국의 왕자들과 결혼했고, 외국 왕자들은 폴란드에서 인기가 없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외국인 군주를 반대했고 피아스트 왕조의 일원이 폴란드 왕좌의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에르제베트 여왕의 삼촌 브와디스와프 그니에코프스키가 이미 러요시의 통치 중 폴란드를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니에코프스키는 수도 서원을 받고 부르고뉴의 디종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갔다. 교황 우르비노 6세에 맞서 러요시 1세를 왕으로 승인하지 않은 반교황 클레멘트 7세는 그니에코프스키를 수도 서원에서 풀어주었으나, 그의 수도승 신분을 버리게 하지는 않았다. 한편, 마소비아 공작이었던 시에모비트 4세가 더 강력한 후보로 등장했다. 시에모비트는 비엘코폴스카의 대중과 귀족으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에르제베트 여왕의 대표들은 1383년 2월 시에라츠에 모여 폴란드인 대표가 마리어에게 했던 충성 서약의 신의를 무효화했다. 특사는 에르제베트가 야드비가가 부더에서 대관식을 치른 후 20세까지 부더에 산다는 조건 하에 야드비가를 폴란드로 보낼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고 말했다. 폴란드 귀족은 처음에 제안을 수용했으나 곧 왕위 공백기간이 3년 더 늘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에라츠에서 귀족들은 3월 28일 다시 만남을 가졌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시에모비트 4세를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할 예정이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시에모비트와 야드비가의 결혼을 제안했다. 텡친스키가의 일원이었던 얀 텡친스키는 귀족들에게 시에모비트의 선출을 연기하자고 설득했다. 귀족들은 야드비가가 대관식 이후 폴란드에 산다는 조건을 걸고 5월 10일까지 야드비가를 기다리기로 합의했다. 귀족들은 도브진 지역과 그니에프쿠프, 루테니아를 폴란드 왕국에 반환해줄 것을 요구했다.

야드비가의 아버지인 러요시 1세의 죽음 이후 브와디스와프 그니에코프스키는 폴란드 왕위후보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


한편, 얀 텡친스키와 셍지부이 파우카를 비롯한 얀의 동료들은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던 요가일라와 협상을 시작했다. 시에모비트의 지지자들은 그니에즈노의 대주교였던 보젱타 스 코소비츠 수행원들에 끼여서 크라쿠프에 진입하려고 했지만 마을 주민들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성문을 닫아버렸다. 야드비가는 5월 10일까지 폴란드에 도착하지 못했다. 에르제베트의 특사는 카르파티아산맥에서 홍수가 발생해 야드비가가 도착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시에모비트는 군대를 일으켜 칼리시까지 진격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8월 시에라츠에 모여 시에모비트를 왕으로 선출하려고 했으나 보젱타 대주교는 대관식을 맡는 것을 거부했다. 코시체에서 에르제베트 여왕은 폴란드 지방의 대표단에게 11월 전까지 야드비가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 에르제베트 여왕은 야드비가나 마리어 중 한 명이 아이 없이 죽을 때 살아남은 한 명에게 왕국을 물려주기로 했다. 시에모비트는 칼리치를 포위공격했고, 에르제베트 여왕은 지기스문트를 파견했다. 시에모비트는 카리치를 점령하는데 실패했지만 지기스문트의 병사들의 행동에 대한 소식으로 지기스문트는 폴란드에서 더욱 인기가 떨어졌다. 셍지부이 파우카는 에르제베트 여왕과 협상하기 위해 달마티아자다르로 향하는 대표단을 이끌게 되었는데, 에르제베트는 셍지부이를 감금했다. 에르제베트는 크라쿠프의 바벨성을 본부로 삼기 위해 폴란드로 헝가리 병사들을 보냈는데, 파우카는 탈출해 에르제베트의 병사들이 성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데 성공했다.

라돔스코에서 3월 초에 의회가 열렸고, 폴란드 전 지역의 대표단은 야드비가가 2달 이내로 폴란드로 오지 않을 시 시에모비트를 왕으로 선출한다고 결정했다. 대표단은 임시 정부를 꾸리고 왕위 공백 기간 동안에 폴란드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은 폴란드의 귀족들과 시민들에게만 있음을 명시했다. 에르제베트는 더 이상 야드비가의 대관식을 미룰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야드비가를 폴란드로 보냈다. 야드비가의 도착 날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이는 얀 스 차른쿠프의 기록이 이 사건 이전에 끝나기 때문이다.

4. 통치

야드비가는 1384년 10월 16일 크라쿠프에서 보잔타 대주교에 의해 폴란드 왕으로 즉위했다.[28] 당시 전통적인 합의에 따라 "왕"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야드비가의 배우자가 왕의 칭호를 쓰는 것을 방지하고, 그녀가 여왕임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었다.[28]

폴란드 귀족들은 야드비가의 약혼자였던 합스부르크의 빌헬름을 통치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대공과의 결혼을 제안했다.[29] 요가일라는 1385년 1월 특사를 보내 결혼을 요청했고, 야드비가는 어머니 에르제베트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29] 에르제베트는 폴란드에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을 허락하며, 딸과 폴란드 귀족, 성직자들이 기독교와 폴란드에 이익이 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29]

빌헬름의 아버지 레오폴 3세는 빌헬름과 야드비가 사이의 약혼을 서둘렀지만, 빌헬름은 바벨성 진입이 허용되지 않았다.[30] 야드비가와 빌헬름의 결혼에 대한 기록은 불명확하고 대조적이지만, 빌헬름이 폴란드를 떠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30]

요가일라는 1385년 8월 크레보 연합에 서명하면서, 야드비가와 결혼하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빌헬름에게 보상금 200000플로린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3] 1386년 2월, 요가일라는 루블린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폴란드의 왕이자 영주"로 선포되었고,[3] 크라쿠프에서 세례를 받고 브와디스와프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받았다. 며칠 뒤,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는 야드비가와 결혼했고, 1386년 3월 4일 왕으로 즉위했다.[3] 폴란드는 이원 통치 국가가 되었으며, 야드비가와 요가일라는 긴밀하게 협력했다.[3]

1387년, 야드비가는 군대를 이끌고 루테니아로 진군하여 총독들의 항복을 받아냈고, 몰다비아의 보이보드 페트루 2세는 왕족 부부에게 경의를 표했다.[3]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의 결혼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지만, 야드비가는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와만 부부 관계를 가졌다고 맹세했다.[3]

1392년, 헝가리의 지그문트는 독일 기사단과 폴란드 분할 협상을 시작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침략 위협으로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15] 야드비가는 마리아를 만나고 크라쿠프로 돌아왔으며,[15] 오폴레의 브와디슬라프의 중재로 지그문트와 독일 기사단 단장 콘라트 폰 발렌로데 사이의 협상이 계속되었다.[16]

야드비가는 공정함과 지혜로 유명한 중재자였으며,[17] 스키르가일로와 비타우타스를 화해시키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갔다.[17] 1395년 마리아가 사망하면서 야드비가는 헝가리의 상속자가 되었고,[18] 왈라키아의 블라드 1세는 야드비가와 남편을 마리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인정했다.[18] 헝가리와 폴란드의 대표자들 간의 평화 협상은 합의로 끝났고, 야드비가는 "헝가리의 상속자" 칭호를 채택했다.[18]

1395년부터 1399년까지 야드비가는 튜튼 기사단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397년 초, 야드비가는 벨즈 공국(루테니아)과 쿠야비를 받아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음을 보여주었다.[8] 야드비가와 융잉겐은 브워츠와베크에서 만났지만 타협에 이르지 못했고,[8] 튜튼 기사단은 오폴레의 블라디슬라우스에게 야드비가에 대한 도브지니의 권리를 대표하도록 위임했다.[8] 야드비가는 튜튼 기사단과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지만, 콘라트 폰 융잉겐은 평범한 기사를 보내 그녀를 만나게 했다.[8]

야드비가는 10년 넘게 아이가 없다가 1398년 말 또는 1399년 초에 임신했다.[9] 1399년 6월 22일 딸 엘주비에타 보니파차(Elżbieta Bonifacjapl)가 태어났지만, 3주 후인 7월 13일에 사망했다.[13] 야드비가 역시 죽어가고 있었고, 남편에게 안나 오브 칠리와 결혼하라고 조언한 뒤, 딸이 죽은 지 4일 만인 1399년 7월 17일에 사망했다.[15] 야드비가와 그녀의 딸은 바벨 대성당에 함께 묻혔다.[17]

야드비가의 석관, 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4. 1. 대관식

15세기의 야드비가 여왕 초상화. 현재는 에 위치한 빈 미술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러요시 1세의 죽음 이후 폴란드에서 발생한 왕위 공백 기간은 야드비가가 폴란드에 도착하면서 끝났다. 15세기 폴란드 역사학자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수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이 야드비가를 환영하기 위해 크라쿠프에 모였다.[28] 1384년 10월 16일 보잔타 대주교가 야드비가를 폴란드 왕으로 임명했을 때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야드비가는 당시 전통적인 합의에 따라 "왕"으로 임명되었다. 로버트 W. 놀은 폴란드 귀족들의 합의 없이는 야드비가의 배우자가 왕의 칭호를 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야드비가를 "왕"으로 임명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스티븐 C. 로웰은 야드비가가 왕으로 임명된 것이 전통적인 합의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부족하며, 야드비가가 왕후가 아닌 여왕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왕"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보잔타, 크라쿠프 주교 얀 라들리차, 포즈난 주교 도브로고스트, 브와디스와프 2세 오폴레 대공은 야드비가가 왕위에 오른 첫 해 동안 그녀의 신임을 받은 신하들이었다.

4. 2. 빌헬름과의 파혼

폴란드 귀족들은 빌헬름을 통치자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29] 그들은 경험이 부족한 빌헬름과 그의 오스트리아 친족들이 폴란드의 이익을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워폴스카의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대공과 야드비가가 결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385년 1월 요가일라는 특사를 크라쿠프에 파견해 야드비가와 결혼하는 것을 요청했다. 야드비가는 대답을 회피하며 어머니 에르제베트만이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요가일라의 특사단은 헝가리로 가서 에르제베트 여왕을 만났다. 에르제베트는 폴란드에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을 허락하며 자신의 딸과 폴란드의 귀족 및 고위 성직자들이 기독교와 폴란드에 이익이 되는 것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29]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 그리고 비엘코폴스카의 귀족들이 크라쿠프에 모였고,[29] 다수의 귀족들이 요가일라의 결혼 제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했다.

"고라치의 디미트르", 야드비가가 성문을 돌파하여 빌헬름과 합류하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한편, 빌헬름의 아버지 레오폴 3세는 1385년 7월 말 부더에 도착해 빌헬름과 야드비가 사이의 약혼의 첫날 밤 치르기를 8월 16일 이전에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에르제베트 여왕은 약혼에 대한 옛 합의를 확인하고 블라디슬라우스 대공에게 식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고위 성직자가 야드비가의 원숙함을 시험한다면 20살 이전에 야드비가의 결혼 성례를 할 수 있었다. 에체르곰 주교 데메트리우스는 필요한 서류들을 발행했다. 빌헬름은 8월 초순에 크라쿠프에 도착했으나 바벨성 진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얀 드우고시는 야드비가와 빌헬름이 프란치스코회 수녀원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빌헬름과 야드비가의 결혼에 대한 동시대 기록은 불명확하고 대조적이다. 공식적인 크라쿠프 지방정부 기록에 따르면 1385년 8월 23일 여왕의 결혼을 축하할 경우를 대비해 도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사면했다. 그러나 동시대 오스트리아의 기록인 "Continuatio Claustroneubuzgis"에 따르면 빌헬름이 결혼 성례를 치르기 전에 폴란드인들이 빌헬름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드우고시는 빌헬름이 "여왕의 침대방"에 도착한 이후 모욕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인해 성에서 쫓겨났다고 적었지만, 야드비가는 "많은 사람들이 빌헬름 대공과 밤을 지냈고", "한 밤을 치른 것"을 안다고 기록했다.[30]

빌헬름이 여왕의 침대방에 들어갔을 때 폴란드 귀족들이 성으로 진입해 빌헬름을 쫓아내었다는 것이 드우고시의 기록이다. 드우고시에 따르면 이 굴욕 이후 야드비가는 바벨성을 떠나 빌헬름에게 합류하려고 했으나 성문이 잠겨 있었고,[31] 야드비가는 이에 도끼로 성문을 깨부수라고 지시했지만[31] 고라치의 디미트리가 야드비가를 설득해 돌아가게 했다. 오스카 할레치는 드우고시의 이야기를 "단순히 낭만적인 전설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로버트 I. 프로스트는 그것은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이 폴란드를 떠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4. 3. 요가일라와의 결혼

요가일라는 1385년 8월 크레보 연합에 서명하면서, 야드비가와 결혼하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합스부르크의 빌헬름에게 보상으로 200000플로린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3] 그는 이 약속을 지켰다. 크레보 연합 이틀 후, 튜턴 기사단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했다.[3]

1386년 1월 11일, 폴란드 영주들의 사절은 요가일라에게 야드비가와 결혼하면 그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알렸다.[3] 요가일라는 루블린으로 가서 2월 초에 열린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폴란드의 왕이자 영주"로 선포되었다.[3] 그는 크라쿠프로 가서 세례를 받고, 2월 15일 바벨 대성당에서 기독교식 이름인 브와디스와프를 받았다. 사흘 뒤, 35세의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는 12세의 야드비가와 결혼했다.[3]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는 결혼 후 발행된 첫 번째 헌장에서 자신을 ''dominus et tutor regni Poloniae''("폴란드 왕국의 영주이자 수호자")로 칭했다.[3]

보드잔타 대주교는 1386년 3월 4일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를 왕으로 즉위시켰다.[3] 이로써 폴란드는 이원 통치 국가로 변모했다.[3] 야드비가와 남편 요가일라는 긴밀하게 협력했다.[3] 야드비가는 남편을 따라 대폴란드 지역으로 가서 지역 영주들을 달랬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했다.[3]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왕족 부부의 결혼에 대해 문의하기 위해 사절 마피올루스 데 람푸냐노를 크라쿠프로 보냈다.[3] 람푸냐노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튜턴 기사단은 합스부르크의 빌헬름을 지지하는 선전전을 시작했다.[3]

1387년, 야드비가는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루테니아로 진군했고, 총독들은 항복했다.[3] 몰다비아의 보이보드 페트루 2세는 왕족 부부를 방문하여 경의를 표했다.[3]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는 야드비가가 루테니아인들에게 부여한 특권을 확인했다.[3] 야드비가는 신민들에게 남편에게 자신과 똑같은 존경을 표하도록 지시했다.[3]

빌헬름의 요구에 따라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의 결혼에 대한 새로운 조사를 시작했다.[3] 야드비가는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와만 부부 관계를 가졌다고 맹세했다.[3]

왕관을 쓴 어린 여성이 무릎을 꿇고 늙고 수염이 난 남자가 들고 있는 성경에 손을 얹고 있다
''야드비가 여왕의 맹세'', 요제프 심믈러 작, 1867년

4. 4. 지기스문트와의 분쟁 (1392–95)

헝가리의 지그문트는 1392년 초, 폴란드를 분할하는 문제에 대해 독일 기사단과 협상을 시작했다.[15] 야드비가는 스타라 류보브냐에서 마리아를 만나고 크라쿠프로 돌아왔다.[15] 지그문트와 독일 기사단 단장 콘라트 폰 발렌로데 사이의 협상은 오폴레의 브와디슬라프의 중재로 계속되었다.[16] 헝가리의 남쪽 국경이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노출되어 지그문트는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16] 콘라트 폰 융겐겐은 폴란드와 협상을 시작했고,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사절은 폴란드를 지지했다.[16]

슈테판 1세 몰다비아의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에 대한 충성 맹세, 지그문트에 대항


야드비가는 공정함과 지혜로 유명한 훌륭한 중재자였다.[17] 스키르가일로와 비타우타스를 화해시키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갔다.[17]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17] 1395년, 마리아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야드비가는 자녀가 없는 여동생의 헝가리 상속자가 되었다.[18] 왈라키아의 블라드 1세는 야드비가와 남편을 마리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인정했다.[18]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는 폴란드-헝가리 국경에서 군대를 소집했지만, 헝가리 궁정 백작과 에스테르곰 대주교가 헝가리에 대한 침공을 막았다.[18] 콘라트 폰 융겐겐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가 연합하면 기독교 세계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18] 지그문트의 반대자들은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의 주장을 지지했다.[18] 헝가리와 폴란드의 대표자들 간의 평화 협상은 합의로 끝났고, 야드비가는 "헝가리의 상속자" 칭호를 채택했지만, 지그문트에 대해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8]

4. 5. 튜튼 기사단과의 분쟁 (1395–99)

리투아니아와 튜튼 기사단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야드비가와 그녀의 폴란드 고문들은 1396년 6월에 그랜드 마스터 콘라트 폰 융잉겐을 폴란드로 초청하여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8] 오폴레의 블라디슬라우스와 마조비아의 시에모비트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는데, 이들은 루테니아의 일부와 쿠야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1397년 초, 야드비가는 이 지역이 그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블라디슬라프-요가일라로부터 벨즈 공국(루테니아)과 쿠야비를 받았다.[8] 그러나 야드비가와 그녀의 폴란드 고문들은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어했다. 이에 대응하여 블라디슬라프-요가일라는 루테니아의 대부분의 폴란드 "스타로스타" (알더먼)를 현지 정교회 귀족으로 교체했다.[8]

야드비가와 융잉겐은 6월 중순에 브워츠와베크에서 만났지만, 타협에 이르지 못했다. 튜튼 기사단은 오폴레의 블라디슬라우스에게 야드비가에 대한 도브지니의 권리를 대표하도록 위임했다.[8] 야드비가와 그녀의 남편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한 후 그곳으로 돌아온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7월 14일에 만났다.[8] 지기스문트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튜튼 기사단 사이에서 중재를 제안했고, 그들은 타협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8] 야드비가의 요청에 따라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스는 1397년 7월 20일에 프라하에 리투아니아 학생들을 위한 대학 설립을 허가했다.[8] 야드비가는 11월 10일에 대학 설립 헌장을 발행했다.[8]

야드비가는 튜튼 기사단과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지만, 콘라트 폰 융잉겐은 1398년 5월에 평범한 기사를 보내 그녀를 만나게 했다.[8] 블라디슬라프-요가일라의 사촌 비타우타스 역시 튜튼 기사단과 협상을 시작했는데, 이는 그가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를 자신의 통치하에 통일하고 교황청으로부터 왕관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8] 요한 폰 포실게의 연대기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비타우타스에게 서신을 보내 블라디슬라프-요가일라가 그녀에게 지참금으로 부여한 연간 공물을 지불하라고 상기시켰다.[8] 야드비가의 요구에 분노한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영주들의 의견을 구했고, 그들은 야드비가의 공물 요구를 거부했다.[8] 1398년 10월 12일, 그는 블라디슬라프-요가일라의 승인 권한을 언급하지 않고 튜튼 기사단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8] 오스카 할레키는 포실게의 "충격적인 이야기"는 소문을 바탕으로 한 발명이거나 연대기 작가의 추측이라고 말한다.[8]

4. 6. 임신과 죽음 (1399)

야드비가는 10년 넘게 아이가 없었는데, 튜턴 지역에서 쓰여진 연대기에 따르면, 이것이 그녀와 남편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다.[8] 1398년 말 또는 1399년 초에 임신했다.[9]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는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왈라키아를 방어하기 위한 작전을 협상하기 위해 3월 초에 크라쿠프로 왔다.[10]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는 루스 공국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골든 호드를 정복한 티무르에 맞서 원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11] 얀 드우고시의 연대기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폴란드 귀족들에게 비타우타스의 원정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그 이유는 실패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었다.[12] 그러나 할레키는 비타우타스의 원정에 참여한 많은 수의 폴란드 기사들이 드우고시의 보고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반박한다.[13]

왕실 부부의 출산을 예상하여,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는 자신과 그의 아내 안나를 대신하여 은으로 만든 요람을 포함한 값비싼 선물을 왕실에 보냈다.[8] 야드비가와 요가일라의 자녀를 위해 쓰여진 첫 번째 운세는 1398년 9월 중순에 아들을 예언했다.[9] 그러나 1399년 6월 22일 바벨 성에서 딸이 태어났다. 당시의 보고에 따르면, 아이는 조산아였다.[10] 운세에 따르면, 그녀는 실제로 약간 늦게 태어났다. 그러나 6월 18일 출산 예정일은 9월 중순에 임신에 대한 의심을 없앨 것이다.[11]

갓 태어난 공주는 엘즈비에타 보니파차(Elżbieta Bonifacjapl, Elžbieta Bonifacijalt)로 명명되었는데, 야드비가의 어머니와 1399년 5월 5일 서한에서 보니파체 또는 보니파차로 이름을 지을 것을 조건으로 대부가 되기로 동의한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녀는 크라쿠프 주교 피오트르 브슈 라돌린스키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12] 그러나 이 아기는 1399년 7월 13일, 단 3주 후에 사망했다.[13] 야드비가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스타니스와프 오브 스카르비미에르지는 그녀가 살아남기를 바라며, 그녀를 폴란드의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사람들의 정신적 어머니로 묘사했다.[14] 그녀는 남편에게 카지미에시 3세의 손녀인 안나 오브 칠리와 결혼하라고 조언했고, 요가일라는 그녀의 조언을 따랐다. 야드비가는 신생 딸이 죽은 지 4일 만인 1399년 7월 17일에 사망했다.[15]

야드비가와 그녀의 딸은 여왕의 유언에 따라 1399년 8월 24일 바벨 대성당에 함께 묻혔다.[17] 550년 후인 1949년 7월 12일, 그들의 무덤이 열렸고, 아기의 부드러운 연골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18]

5. 유산

야드비가는 사망 직후부터 폴란드에서 널리 존경받았다.[14] 스타니스와프 오브 스카르비미에르츠는 그녀를 "가장 기독교적인 여왕"이라고 칭송했고, 자토르의 파울은 그녀의 무덤에 놓인 밀랍 인형을 언급했다.[14] 15세기 초 설교들은 야드비가가 전통적인 여성 성인의 미덕을 지녔다고 강조했으며, 학자들은 크라쿠프 대학교 복원에 기여한 점을 언급했다.[14]

그녀의 성인 추대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기적 전설이 전해진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야드비가의 십자가"와 "야드비가의 발"이다.

야드비가는 바벨 대성당의 검은 십자가 앞에서 자주 기도했는데, 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고 전해진다.[15] 이 "성 야드비가의 십자가"는 현재도 그 자리에 있으며, 그녀의 유물이 그 아래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중세 신비주의자로 여겨진다.[15]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가난한 석공에게 자신의 장신구를 주었는데, 그가 작업하던 석고 바닥에 여왕의 발자국이 기적적으로 남았다고 한다. "야드비가의 발"로 알려진 이 발자국은 크라쿠프의 한 교회에서 볼 수 있다.[15] 성체 축일 행렬 중 익사한 구리 세공인의 아들이 야드비가의 망토 덕분에 살아났다는 전설도 있다.[16]

1979년 6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석관에서 기도했고, 1986년 8월 8일 전례성성은 그녀의 시복을 공식 확인했다. 교황은 1997년 6월 8일 크라쿠프에서 야드비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14]

5. 1. 업적

야기에워와의 결혼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가능하게 하여 동유럽 중부에 대규모 국가를 건설하게 했다. 야드비가가 사랑했던 약혼자 빌헬름 대신 '나이 많은' 야기에워와 결혼한 결정은 폴란드 역사에서 조국을 위한 희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1] 이 결혼으로 리투아니아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야드비가는 튜튼 기사단과의 평화를 유지하여 폴란드가 전쟁을 준비할 수 있도록 했다.[2] 또한 문화 및 자선 활동에 힘써, 새로운 병원, 학교, 교회를 설립하고 오래된 것들을 복원했다.[3] 교회 예배에서 자국어 사용, 특히 폴란드어로 된 찬미가를 장려했으며, 성경은 그녀의 명령에 따라 폴란드어로 번역되었다.[4]

카지미에시 3세가 1364년에 크라쿠프 대학교를 설립했지만, 그의 사후에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5] 야기에워와 야드비가는 공동으로 보니파시오 9세에게 크라쿠프에 신학부 설립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은 1397년 1월 11일에 이를 허가했다.[6] 야드비가는 크라쿠프 중심 거리에 대학교 건물들을 구입했다.[7] 그러나 학부는 야드비가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400년 7월 26일에 야기에워에 의해 재설립되었으며, 대학 복원 자금은 야드비가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보석 판매를 통해 부분적으로 조달되었다.[8]

5. 2. 성인 추대

야드비가는 사망 직후부터 폴란드에서 존경받았다.[14] 스타니스와프 오브 스카르비미에르츠는 그녀의 장례를 위해 작곡한 설교에서 그녀를 "가장 기독교적인 여왕"이라고 칭송했다.[14] 자토르의 파울은 그녀의 무덤에 놓인 밀랍 인형에 대해 언급했다.[14] 15세기 초에 쓰여진 설교들은 야드비가가 자비와 은혜와 같은 거룩한 여성의 전통적인 미덕을 대표한다고 강조했다.[14] 15세기 초 학자들은 또한 크라쿠프 대학교 복원에 대한 야드비가의 기여를 언급했다.[14]

그녀의 성인 추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많은 기적에 대한 전설이 전해졌다. 가장 잘 알려진 두 가지는 "야드비가의 십자가"와 "야드비가의 발"이다.

야드비가는 바벨 대성당 북쪽 통로에 걸려 있는 큰 검은 십자가 앞에서 자주 기도했다. 이 기도 중 하나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성 야드비가의 십자가"인 이 십자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며, 그녀의 유물이 그 아래에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중세 신비주의자로 여겨진다.[15]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발에서 장신구를 떼어 도움을 청한 가난한 석공에게 주었다. 여왕이 떠나자 그는 석고가 이미 굳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방문 전에 석공의 작업장 석고 바닥에서 그녀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야드비가의 발"로 알려진 이 발자국은 크라쿠프의 교회 중 한 곳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15]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성체 축일 행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구리 세공인의 아들이 강에 빠져 익사했다. 야드비가는 소년의 시신에 자신의 망토를 던졌고, 소년은 다시 살아났다.[16]

1979년 6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석관에서 기도했고, 전례성성은 1986년 8월 8일 그녀의 시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교황은 1997년 6월 8일 크라쿠프에서 야드비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14]

6. 대중 문화

크시슈토프 코노프카가 쓴 《헤드비지스. 왕국의 상속녀》(2021)는 야드비가의 초기 생애와 통치를 다룬 폴란드 역사 소설로, 야드비가,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따라간다.[17] 야드비가는 폴란드 역사 드라마 《왕관의 왕들》 세 번째 시즌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다그마라 브르제크가 연기한다. 어린 야드비가는 나탈리아 볼스카와 아멜리아 자바츠카가 연기한다.[18]

야드비가는 턴제 전략 게임 《문명 VI》에서 폴란드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종교와 영토 확장에 특화되어 있다. 그녀는 또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II: 데피니티브 에디션 - 공작의 새벽에서 자신만의 캠페인에 등장한다.[19]

야드비가는 모바일/PC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즈》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다.

참조

[1] 문서
[2] 서적 Jagiellonowie Wydawnictwo Literackie 1996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웹사이트 Interview about Queen Jadwiga of Poland http://www.muzeumhis[...] 2011-12-23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웹사이트 St. Hedwig of Poland - Saints & Angels - Catholic Online https://www.catholic[...] Catholic Online 2018-10-18
[15] 웹사이트 Legend of the little foot of Queen Jadwiga http://krakow.travel[...] 2022-03-23
[16] 문서
[17] 웹사이트 Hedvigis. Dziedziczka królestwa {{!}} Krzysztof Konopka https://lubimyczytac[...] 2022-03-15
[18] 웹사이트 Nowe odcinki "Korony królów" od września w TVP1. Dagmara Bryzek i Wasyl Wasyłyk w rolach głównych (wideo) https://www.wirtualn[...] 2019-08-16
[19] 웹사이트 Age Of Empires 2: Definitive Edition adds new civilisations – the Poles and the Bohemians https://www.rockpape[...] 2022-05-16
[20] 서적 Jagiellonowie Wydawnictwo Literackie 1996
[21] 웹사이트 Legend of the little foot of Queen Jadwiga http://krakow.travel[...] 2022-03-23
[22] 문서
[23] 웹사이트 Hedvigis. Dziedziczka królestwa {{!}} Krzysztof Konopka https://lubimyczytac[...] 2022-03-15
[24] 웹사이트 Nowe odcinki "Korony królów" od września w TVP1. Dagmara Bryzek i Wasyl Wasyłyk w rolach głównych (wideo) https://www.wirtualn[...] 2019-08-16
[25] 웹사이트 Civilization® VI – The Official Site {{!}} News {{!}} Civilization VI: King Jadwiga Leads Poland https://civilization[...] 2023-06-17
[26] 웹사이트 Age Of Empires 2: Definitive Edition adds new civilisations - the Poles and the Bohemians https://www.rockpape[...] 2022-05-16
[27] 서적 Jagiellonowie Wydawnictwo Literackie 1996
[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3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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