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 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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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노 백국은 로마 제국 시기에 벨가이족 네르비족의 지역에 위치했으며, 프랑크 제국 시기에 에노 백작령으로 형성되었다. 900년경 레니에 1세가 에노 백작 작위를 받으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로타링기아 공국을 거쳐 독일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 사이의 국경 지역이 되었다. 레니에 가문의 통치가 이어지다 분할과 재통합을 겪었으며, 10세기에는 레기나르 가문과 관련된 기록이 나타난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플랑드르 백국과 연합하여 통치되었고, 14세기에는 홀란드 백작, 제란트 백작을 겸했다. 15세기에는 부르고뉴 네덜란드에 편입되었고,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17세기에는 프랑스와의 분할을 겪었으며, 18세기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 네덜란드 왕국, 벨기에 왕국으로 귀속되어 현대 에노주가 되었다. 에노라는 이름은 하인 강에서 유래되었으며, 지리적으로는 스헬데 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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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 백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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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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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몽스 |
공용어 | 프랑스어 피카르디어 라틴어 (종교, 신학)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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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존속 기간 | 기원후 900년경 / 1190년 – 1797년 |
시작 사건 | 백국 통합 |
주요 사건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흡수 (1477년 8월 18일) |
가입 | 부르군트 관구 가입 (1512년) |
종료 사건 | 프랑스에 합병 (1797년) |
이전 국가 | 몽스 브라반트 방백국 발랑시엔 |
계승 국가 | 부르고뉴 네덜란드 |
정치 | |
정치 체제 | 봉건제 영주국 |
통치자 칭호 | 에노 백작 |
초대 통치자 | 레니에 1세 (초대 레니에 백작) |
통치 기간 | ?–898년 |
주요 통치자 | 보두앵 2세 (1071–98년) |
주요 통치자 | 선량공 필리프, 부르고뉴 공작 (1432–67년) |
주요 통치자 | 마리, 부르고뉴 공작 부귀공 마리 (1477–82년) |
마지막 통치자 | 프란츠 2세, 신성 로마 황제 (마지막 백작) |
통치 기간 | 1792–97년 (1835년 사망) |
현재 국가 |
2. 역사
에노 백작령은 900년경 로렌 공작 레니에 1세가 "에노 백작" 작위를 가지면서 로타링기아 왕국 지역에 세워졌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4세가 사망하자, 레니에는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에게 가담했다. 그의 아들 기슬베르는 925년 하인리히 1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로타랑기아 공국은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한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939년 기슬베르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들은 로타랑기아 공작 작위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에노 지역 통치는 계속하였다. 레니에 3세는 브룬 공작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958년에 폐위되고 파문당했다. 에노 백작령은 분할되었으나, 998년 레니에 가문은 몽스 백작령을 되찾았다. 1051년 에르망 백작이 사망하고, 그의 미망인 리실드는 보두앵 4세와 재혼했다. 1067년 보두앵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에노와 몽스의 통치자가 되었고, 로베르 1세와의 상속 분쟁 중 1071년 카셀 전투에서 전사한 아르눌 3세가 뒤를 이었다. 로베르가 플랑드르를 획득했지만, 리실드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저지 로렌을 유지했다. 부활한 에노 백작령은 다음 세 직할 백작령의 재봉건화를 통해 생겨났다.
- 몽스 백작령
- 브라반트 방백령의 남부 지역
- 발랑시엔의 오토 후작령
신성 로마 제국의 영지로서 에노 백작령의 통일은 1071년에 이루어졌다. 리실드와 보두앵 2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영지를 매각하려 했고, 하인리히 4세는 리에주 주교후에게 영지를 사들여 리실드에게 돌려주고 저지 로렌 공작의 반봉건적 관계에 두었다.
에노 백작들은 플랑드르, 홀란트 백작들과 강력한 혈연적 유대 등 몇 가지 역사적 연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로 에노 백작령은 다음과 같이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 에노와 플랑드르: 1067–71년과 1191년–1246년
- 에노와 홀란트: 1299년–1436년
- 에노와 바이에른슈트라우빙: 1356년–1417년

1417년 바이에른슈트라우빙의 빌헬름 2세가 사망한 후, 에노는 1432년에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출신의 선량공 필리프에게 홀란트와 함께 넘겨준 빌헬름의 딸 에노 여백작 자클린 (자코바)가 상속했다. 최후의 독립적인 여백작은 1436년 10월 8일 헤이그 인근 테일링겐 성에서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했고, 그녀의 영지는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에 흡수됐다.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남계 공작은 단절되었다. 같은 해 샤를의 딸 부귀공 마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했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는 그의 친척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려하여, 네덜란드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프랑스군은 긴가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에노는 1482년 아라스 조약으로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1556년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되었다. 1579년 에노는 합스부르크령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로 한 아라스 동맹의 일원이였던 반면, 북부의 위트레흐트 동맹은 반란을 일으켜 1581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세웠다.
1659년 피레네 조약과 1679년 네이메헌 조약으로 에노 백작령은 두 개로 나뉘었다. 발랑시엔, 르케누아, 아베느 도시 인근의 남부 지역이 루이 14세가 통치하는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프랑스 에노 참고). 몽스를 주변으로 하는 북부 지역은 스페인령 합스부르크에 남았다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들이 1794년까지 이곳을 통치하다가, 프랑스 제1공화국에게 흡수됐다.
2. 1. 기원과 초기 역사 (9세기-10세기)
로마 제정 시기에 에노는 대부분 벨가이족계 네르비족들의 ''키비타스''들에 위치했다. 로마의 지배가 끝나면서 이 지역은 살리 프랑크족의 네우스트리아 내 영주의 지배하에 놓였다. 샤를마뉴 시대부터 프랑크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렸다.에노 백작령은 900년 경, 프랑크 제국의 황제 로타리우스 1세의 손자인 로렌 공작 레니에 1세가 "에노 백작" 작위를 가지면서 로타링기아 왕국 지역에 세워졌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루스 왕조계 왕 루도비쿠스 4세가 사망하자, 레니에는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가 통치하던 서프랑크 왕국에 가담했다. 그의 아들 기슬베르는 925년에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이후 로타랑기아 공국은 독일 왕국의 일부가 되어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939년 기슬베르가 사망한 후, 레니에 가문 출신의 그의 후계자들은 로타랑기아 공작 작위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에노 지역 통치는 계속하였다. 에노 백작 레니에 3세는 브룬 공작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958년에 폐위되고 파문당했으며, 에노 백작령은 분할되었다. 그러나 998년에 레니에 가문은 몽스 백작령을 되찾았다.
하인호가 백국임을 나타내는 최초의 기록은 831년, 843년, 870년에 카롤링거 왕조가 분할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9세기부터 시작하여 하인호를 언급하는 중세 초기의 기록 대부분은 이를 백국보다는 '파구스'(pagus), 즉 영토 또는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8세기와 9세기의 증언에서는 이를 통치한 특정 백작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연도 | 내용 |
---|---|
750년 | 피핀 3세의 문서에서 in pago Hainoavio라는 장소를 언급 |
779년 | 샤를마뉴의 문서에서 in pago Haginao라는 장소를 언급 |
831년 | 경건왕 루이는 제국 분할 시 아들 루트비히 2세의 바이에른 영토에 뫼즈강 서쪽의 Ainau를 포함시킬 것이라고 발표. 이 기록은 그곳이 백국인지 파구스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음 |
843년 | 베르덩 조약은 베르탱 연대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스헬데강과 라인강 사이의 지역 중 hainaum을 언급하며, 이 지역이 로타르 1세의 중부 왕국에 속하게 되었고 백국임을 암시 |
844년 | 로타르 1세의 문서에서 in pago Hainoense [...] pago Hainnioense라는 장소를 언급 |
847년 | 대머리 샤를의 문서에서 pago Hagnuensi라는 장소를 언급 |
852년 | 로타르 1세의 문서에서 pago Haynau라는 장소를 언급 |
855년 | 로타르 2세의 문서에서 pago Hainau라는 장소를 언급 |
870년 | 대머리 샤를의 문서에서 pago Hainao라는 장소를 언급 |
870년 | 메르센 조약은 백국인 comitatus Hainoum을 언급하며, 이를 서부 왕국에 할당 |
872년 | 대머리 샤를의 문서에서 pago Hainau라는 장소를 언급 |
유럽의 이러한 중세 초기의 '파구스' 중 다수는 로마 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로마 제국이 벨기카 세콘다 로마 속주에 위치한 이 지역에 대한 중앙 집권적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이곳은 프랑크 군대의 군사 통치자였던 힐데리크 1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와 이후의 카롤링거 왕조는 많은 로마 구역을 유지했고, '파구스'를 관리하기 위해 백작들을 임명했다.
10세기 에노 백국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지역을 강력하고 반항적인 로렌 가문이자, 레기나르(Reginar)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한 레기나르 왕조와 연관짓고 있다. 하지만, 이 가문이 나중에 로렌 전역에서 중요한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지만, 그 권리의 정확한 성격은 불분명하며, 레기나르 3세 이전에 에노 백국을 소유했는지도 증명할 수 없다.
레기나르 1세가 에노를 직접 지배했다는 유일한 중세 기록은 생-캉탱의 뒤도에 의해 언급되었는데, 이 시기에 대해서는 신뢰할 수 없는 기록으로 간주된다. 14세기 후반의 ''아날레스 한노니아''는 에노 백국의 전설적인 기원을 다루며, 레기나르 1세를 몽스의 백작으로 묘사하는데, 이 칭호는 그의 후손들이 이어받았다.
동시대 기록에서 에노의 일부와 연관된 최초의 백작은 에노 백작 시게하르트였다. 그는 리에주 동쪽의 ''파구스'' 리우가스의 백작으로 더 명확하게 묘사되었다.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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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2년 | 시가하르드의 백국은 리에주의 파구스(in pago Leuchia in comitatu Sigarhardi)에 있는 방드레와 에스느를 포함 |
908년 | 백국과 파구스 에노(in pago ac in comitatu Hainuensi sitem)의 일부로 묘사된 로베스 수도원(Laubacensum abbatiam)과 파구스 리우가스(in pago ac in comitatu Liwensi positum) 및 백국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튁스에 관한 합의에 참여한 백작으로 기록 |
915년 | 튁스는 리우가스의 파구스와 시게하르드의 백국(in pago Leuviensi atque in comitatus Sichardi sitam) 모두에 속하는 것으로 묘사 |
916년과 919년 | 서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 3세의 리에주 근처 에르스탈에서 발행된 두 문서에 등장 |
920년 | 크레스팽 수도원에 대한 보조금과 관련된 문서에서 "존경받는" 백작으로 기록 |
925년부터 에노를 포함한 로렌은 동부 왕국인 "독일"의 일부가 되었다. 939년, 레기나르 가문은 독일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이 반란의 지도자였던 레기나르 1세의 아들 로렌 공작 길버트가 사망했다.
레기나르 2세(943년 이전 사망), 레기나르 1세의 차남은 11세기 후반 브로뉴의 제라르의 전기(Vita)에서 에노 백작으로 언급되었지만, 이 작품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1] 그의 아들 에노 백작 레기나르 3세 또한 에노의 백작이었을 수 있다. 더욱 확실한 것은 그가 대 브루노 공작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추방되었으며 제국 금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울리히 논은 그가 몽스를 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2]
953년 또는 그 이후에 ''캄브레의 주교들의 행적''에는 에노 파구스 출신(라틴어: ex pago Hainoula)의 아멜리크라는 백작이 언급된다.[3] 이것은 일반적으로 에노가 이미 두 명 이상의 백작의 관할권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몽스와 관련된 백작 외에도, 아물리크는 발랑시엔을 기반으로 하는 백국을 소유했을 것이다.[4]
그러나 동시대 기록에서 언급된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에노 백작은 고데프리드라고 불렸으며, 레기나르 3세가 추방된 해인 958년부터 등장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964년 이탈리아에서 사망한 하로렌 공작 고드프리 1세로 여겨진다.
고드프리가 이탈리아에서 죽은 후, 에노에서는 로렌 백작 리샤르에 의해 대체되었는데, 그는 아마도 리에주 ''파구스''에서 백국을 소유했던 동일한 리샤르 백작일 것이다. 972년 그는 사망했다. 973년 두 귀족 형제 발랑시엔 백작 베르너와 르네는 몽스 근처에서 레기나르 3세의 두 아들 레기나르 4세와 루뱅 백작 람베르 1세와 싸우다 죽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 또한 973년, 아멜리크와 리치조라는 백작이 에노의 크리스핀 수도원에 대한 왕실의 보조금에 등장했다.[5] 아멜리크는 위에 언급된 953년의 백작으로, 발랑시엔 또는 그 근처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리치조는 972년에 사망한 리샤르 백작의 형제인 리치윈일 가능성이 높다.
레그나리드 형제들은 에노, 심지어 몽스를 얻는 데에도 수십 년 동안 성공하지 못했다. 캄브레 주교들의 ''게스타''는 고데프리드와 아르눌프라는 두 백작이 리치조와 아멜리크의 뒤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두 백작은 979년 캄브레 방어에 참여했고 다른 기록에도 등장한다. 그들은 베르덩 백작 고드프리 "포로", 발랑시엔의 아르눌프와 동일인으로 여겨진다.
998년에 레기나르 4세는 고드프리로부터 에노의 몽스 백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6] 역사가 미셸 드 와하는 이 보고서를 신뢰할 수 없으며, 그들이 985–1015년 사이에, 아마도 1007년 이후에 통제권을 얻었다고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레기나르 4세는 101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레기나르 5세가 뒤를 이었다. 레기나르 4세의 형제 람베르는 루뱅 백작이 되었으며, 1015년 에노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발랑시엔 백국은 약 1011년 발랑시엔의 아르눌프가 사망한 후 기록에서 사라졌으며, 이 에노 지역은 플랑드르 백국에 의해 인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2. 중세 전성기 (11세기-13세기)
로렌 공작 레니에 1세가 900년경 "에노 백작" 작위를 가지면서 로타링기아 왕국 지역에 에노 백작령이 세워졌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4세가 사망하자, 레니에는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에게 가담했다. 그의 아들 기슬베르는 925년 하인리히 1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로타랑기아 공국은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한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1]939년 기슬베르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들은 로타랑기아 공작 작위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에노 지역 통치는 계속하였다. 레니에 3세는 브룬 공작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958년에 폐위되고 파문당했다. 에노 백작령은 분할되었으나, 998년 레니에 가문은 몽스 백작령을 되찾았다. 1051년 에르망 백작이 사망하고, 그의 미망인 리실드는 보두앵 4세와 재혼했다. 1067년 보두앵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에노와 몽스의 통치자가 되었고, 로베르 1세와의 상속 분쟁 중 1071년 카셀 전투에서 전사한 아르눌 3세가 뒤를 이었다. 로베르가 플랑드르를 획득했지만, 리실드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저지 로렌을 유지했다. 부활한 에노 백작령은 다음 세 직할 백작령의 재봉건화를 통해 생겨났다.[1]
- 몽스 백작령
- 브라반트 방백령의 남부 지역
- 발랑시엔의 오토 후작령
신성 로마 제국의 영지로서 에노 백작령의 통일은 1071년에 이루어졌다. 리실드와 보두앵 2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영지를 매각하려 했고, 하인리히 4세는 리에주 주교후에게 영지를 사들여 리실드에게 돌려주고 저지 로렌 공작의 반봉건적 관계에 두었다.[1]
에노 백작들은 플랑드르와 홀란트의 백작들과 강력한 혈연적 유대 관계를 맺었다. 에노 백작령은 다음과 같이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1]
- 에노와 플랑드르: 1067–71년과 1191년–1246년
- 에노와 홀란트: 1299년–1436년
- 에노와 바이에른슈트라우빙: 1356년–1417년
르네르 V세는 아버지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포로" 고드프리드의 손녀와 결혼했다. 플로렌의 게라르 주교는 이 부부가 근친 관계임에도 이 결혼을 받아들였다.[1]
1051년, 리칠데는 보두앵 6세와 결혼했다. 1067년 보두앵 6세는 에노와 플랑드르의 통치자가 되었다. 아르눌 3세가 계승했지만, 로베르 1세와의 상속 분쟁으로 1071년 카셀 전투에서 사망했다. 로베르는 플랑드르를 얻었지만, 리칠데는 신성 로마 제국의 로렌 저지대 영토를 유지했다. 부활한 에노 백국은 다음 세 직할 백국에서 나타났다.[1]
- 몬스 백국
- 옛 브라반트 구역의 남부
- 오토 왕조의 발랑시엔 변경백령
에노 백국의 통일은 1071년 이루어졌으며, 리칠데와 보두앵 2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봉토를 팔려고 했다. 하인리히 4세는 리에주 주교에게 봉토를 구입하여 리칠데에게 반환하도록 명령했다.[1]
보두앵 2세는 플랑드르 백국을 상속받지 못했지만, 보두앵 3세, 보두앵 4세, 보두앵 5세는 플랑드르 백작의 남성 계열에 속했고, 두 계열은 다시 합쳐졌다. 보두앵 5세는 1169년 마르그리트와 결혼하여 플랑드르의 "보두앵 8세"가 되었고, 플랑드르, 에노, 나뮈르는 한 영주 아래 통일되었다.[1]
다음 세대에서 나뮈르는 플랑드르 및 에노와 다른 아들에게 주어졌고, 보두앵 6세/9세 아래 함께 유지되었으며,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의 초대 라틴 황제가 되었다. 나뮈르의 필리프 1세는 에노의 섭정이었지만 나뮈르 지배권을 놓고 룩셈부르크와 싸워야 했다. 보두앵 자신은 불가리아에서 사망했으며, 두 명의 상속녀를 남겼다. 조앤은 통치했지만 1244년에 후손 없이 사망했고, 마르그리트는 1244년부터 통치했으며 두 번 결혼했다. 그녀의 두 남편의 계열은 플랑드르와 에노를 나누었다.[1]
- 아베느의 장은 에노의 아베느 백작의 새로운 계열을 창시했으며 1257년에 사망했다.
- 담피에르의 기는 플랑드르 백작의 새로운 계열을 창시했으며 1305년에 사망했다. 그는 또한 나뮈르의 백작이 되었지만 이 상속은 다른 자녀에게 주어졌다.[1]
2. 3. 중세 후기 (14세기-15세기)
레니에 가문 출신 후계자들은 로타링기아 공작 작위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에노 지역 통치는 계속하였다. 에노 백작 레니에 3세는 브룬 공작을 상대로 벌인 반란이 실패한 후, 958년에 폐위되고 파문당하였다. 이때 에노 백작령은 분할되었다. 그러나 998년에 레니에 가문은 몽스 백작령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마지막 백작 에르망이 1051년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 리실드는 플랑드르 백작 및 프랑스의 봉신 보두앵 4세와 재혼했다. 1067년 보두앵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는 에노와 몽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로베르 1세와 상속 분쟁 중 1071년 카셀 전투에서 전사한 아르눌 3세가 이어받았다. 전투의 승자 로베르가 플랑드르를 획득했지만, 그의 형수 리실드는 결혼 지참금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 인접한 저지 로렌을 유지했다. 그렇게 부활한 에노 백작령은 세 직할 백작령의 재봉건화를 통해 생겨났다:- 몽스 백작령
- 브라반트 방백령의 남부 지역
- 발랑시엔의 오토 후작령
신성 로마 제국의 영지로 에노 백작령의 통일은 1071년에 아르눌을 격퇴시키고, 리실드와 그녀의 아들 보두앵 2세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매각하려 하면서 이뤄졌다. 하인리히 4세는 리에주 주교후에게 그 영지를 사들이라 명했고, 그것들을 통일된 백작령으로서 리실드 백작부인에게 돌려주었고 저지 로렌 공작의 반봉건적 관계에 두었다.
에노 백작들은 플랑드르, 홀란트 백작들과 강력한 혈연적 유대 등 몇 가지 역사적 연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로 에노 백작령은 다음과 같이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 에노와 플랑드르: 1067–71년과 1191년–1246년
- 에노와 홀란트: 1299년–1436년
- 에노와 바이에른슈트라우빙: 1356년–1417년
1417년 바이에른슈트라우빙의 빌헬름 2세가 사망한 후, 에노는 1432년에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출신의 선량공 필리프에게 홀란트와 함께 넘겨준 빌헬름의 딸 에노 여백작 자클린 (자코바)가 상속했다. 최후의 독립적인 여백작은 1436년 10월 8일 헤이그 인근 테일링겐 성에서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했고, 그녀의 영지는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에 흡수됐다.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남계 공작은 단절되었다. 같은 해 샤를의 딸 부귀공 마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그의 친척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려 하여, 네덜란드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프랑스군은 긴가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에노는 1482년 아라스 조약으로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1299년부터 에노 백국의 백작 장 2세는 모친을 통해 홀란드 백작과 제란트 백작을 겸했다. 그는 또한 플랑드르 백작이 되려는 시도에 실패했다. 그의 손자 빌헬름이 1347년에 사망한 후, 같은 영지들은 그의 여동생에게 넘어갔고, 바이에른-슈타우빙 공작위를 소유한 비텔스바흐 왕가의 구성원들이 이를 소유하게 되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이 분가는 1436년까지 에노 백국을 소유했다.[1]
비텔스바흐 가문은 홀란드의 파벌에 의해 부분적으로 촉발된 소위 고리-대구 전쟁에서 서로 다투었다. 1417년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2세가 사망한 후, 에노는 그의 딸 자클린에게 상속되었고, 그녀는 사촌인 선량공 필리프에게 강력한 적수를 두었다.[1]
1428년, 에노, 홀란드, 제란트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은 선량공 필리프가 획득했다. 1432년 자클린은 에노, 홀란드, 제란트의 상속권을 필리프 공작에게 양도해야 했다. 마지막 독립 백작 부인은 1436년 10월 8일 초에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헤이그 근처 테이링겐 성에서 사망했으며, 그곳에 묻혔다. 그녀의 영지는 부르고뉴 네덜란드에 편입되었다.[1]
필리프는 이미 부르고뉴 공작, 플랑드르 백작, 아르투아 백작, 나뮈르 백작, 프랑슈-콩테 백작이었으며, 나중에는 브라반트 공작, 림부르크 공작, 룩셈부르크 공작이 되었다. 프랑스 왕가의 분가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으며 에노는 그 일부였다. 그러나 필리프의 아들인 용담공 샤를은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사망했고, 부르고뉴 공작의 남성 계통은 단절되었다. 같은 해, 샤를의 딸 부르고뉴의 마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으며, 에노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다.[1]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사촌인 샤를의 죽음을 이용하여 네덜란드 침공을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는 1479년 기네가트 전투에서 패배했고, 에노는 1482년 아라스 조약에 의해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통합되었다.[1]
2. 4. 근세 (16세기-18세기)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남계 공작은 단절되었다. 같은 해 샤를의 딸 부귀공 마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했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는 그의 친척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려하여, 네덜란드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프랑스군은 긴가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에노는 1482년 아라스 조약으로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1556년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되었다. 1579년 에노는 합스부르크령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로 한 아라스 동맹의 일원이였던 반면, 북부의 위트레흐트 동맹은 반란을 일으켜 1581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세웠다.[1]1659년 피레네 조약과 1679년 네이메헌 조약으로 에노 백작령은 두 개로 나뉘었다. 발랑시엔, 르케누아, 아베느 도시 인근의 남부 지역이 루이 14세가 통치하는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프랑스 에노 보기). 몽스를 주변으로 하는 북부 지역은 스페인령 합스부르크에 남았다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들이 1794년까지 이곳을 통치하다가, 프랑스 제1공화국에게 흡수됐다.[1]
3. 지리
에노의 이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인 강에서 유래되었다. 이 강은 뱅쉬와 현대의 샤를루아 사이의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 발원하여 스헬데 강으로 흘러들어간다.[1] 초기 기록에서 에노는 하인 강 남쪽, 상류 삼브르 강, 헬프 마주어, 헬프 미뇌르, 그리고 아베스-쉬르-엘프 구의 ''아베스누아'' 지역까지 확장되었다.[1]
에노의 ''파구스''(지방 또는 영토)는 스헬데 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셀 강까지 뻗어 있었으며, 이 지역의 중요한 로마 도시인 파마르스 (로마의 ''파눔 마르티스'')는 종교 및 행정 중심지였다.[1] 중세 초기 기록에서는 에노의 ''파구스'' 내의 장소를 ''파구스 파노마르테니스'' 내에 있는 것으로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에노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거나 파눔 마르티스가 하위 ''파구스''의 근거지였음을 나타낸다.[1] 10세기 수도승 폴쿠인에 따르면, 에노는 고대 로마 이름을 기독교 이전의 미신과 관련된 새로운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1]
가장 오래된 중세 기록에서 발견되는 에노의 지리적 정의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4]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아베스를 포함한 지리적 에노는 벨가이족 네르비이의 ''시비타스''에서 가장 오래된 개발 지역을 형성했으며, 이들은 에노의 바베이 (로마의 ''바가쿰'')에 초기 수도를 두었다.[4]
에노 주변의 다른 지역은 다음과 같다.
- ''아베스누아'' 남쪽, 티에라슈의 숲과 언덕 너머에는 현대의 엔 주의 일부인 라옹의 ''파구스''와 주교구가 있었는데, 이곳은 로마 시대 레미의 옛 ''시비타스''의 일부였다.[5]
- 남서쪽으로는 센 강 너머에 캉브레의 ''파구스''가 있었으며, 이는 네르비이의 ''시비타스''의 수도가 되었고, 나중에는 에노와 브라반트를 관할하는 중세 주교의 자리였다.[6] 이 지역은 현대 프랑스 캉브레 구와 거의 일치하며, 캉브레 구와 주교구는 때때로 "''캉브레지''"라고 불린다.[6]
- 발랑시엔에서 스헬데 강 건너 바로 서쪽에는 오스테르반트(fr, de, nl)라고 불리는 ''파구스''가 있었는데, 이곳은 로마 시대에 아트레바테스의 ''시비타스''의 일부였다. 오스테르반트는 중세 시대에 플랑드르 백작령과 에노 백작령이 경쟁했던 지역이었다. 현대 프랑스에서 오스테르반트는 두에 구와 정의가 유사하다.
- 북쪽에는 스헬데 강과 딜 강 사이에 뻗어 있고 현대의 알스트, 브뤼셀을 포함하는 브라반트 ''파구스''의 가장 오래된 형태가 있었다. 중세와 현대 에노는 옛 브라반트 ''파구스''의 남쪽으로 뻗어 있다.
- 하인 강 동쪽에는 한때 주요 경계를 정의했던 ''실바 카르보나리아''("숯 숲")가 있었다. 그 너머 지역은 오늘날 샤를루아, 나뮈르, 루벤을 포함하며, 모두 로마 투르구룸의 시비타스와 중세 리에주 교구 내에 있었다.
4. 어원
에노 백국의 어원은 게르만어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앞부분은 강 이름(현대의 하인(Haine), 아마도 게르만어에서 유래)이고, 뒷부분은 원래 게르만어 *awj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마스트리흐트 북쪽 뫼즈 강 유역의 파구스(pagus)인 "마사우(Masau)"와 같이, 여러 고대 프랑크족 가우(gau) 이름에서 나타난다. 에노 백국의 현대 네덜란드어 및 독일어 이름인 "헨너고우언(Hennegouwen)"과 "헨네가우(Hennegau)"에서 사용된 관련 단어인 "가우(gau)" 역시 사용되었지만, 이 특정 지역에 관한 중세 문서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1][2]
5. 각주
형식의 인용 템플릿만 남기고, 나머지 불필요한 템플릿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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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간행물
Nonn p.127
https://www.dmgh.de/[...]
MGH SS XV
[2]
간행물
Nonn p.129
https://www.dmgh.de/[...]
MGH SS XV
[3]
간행물
Gesta Episcoporum Cameracensium
https://www.dmgh.de/[...]
MGH edition
[4]
서적
Vanderkindere 1902
[5]
간행물
MGH Diplomata
Otto I
[6]
간행물
MGH SS X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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