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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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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밀 놀데는 1867년 덴마크 남부 슐레스비히에서 태어난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이다. 그는 목각 세공사로 시작하여 뮌헨, 파리 등지에서 유학하며 인상주의를 익혔고, 드레스덴의 표현주의 그룹 '다리'에 참여했으나 탈퇴 후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원색을 사용한 강렬한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가 특징이며,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시베리아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원시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1920년대 초부터 나치당을 지지하며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보였으나,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작품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전쟁 후에는 '그리지 않은 그림들'을 바탕으로 활동을 재개했으며, 1956년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최근 나치 협력 논란과 약탈 미술품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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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놀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9년의 놀데
본명한스 에밀 한센
출생일1867년 8월 7일
출생지놀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프로이센 왕국, 북독일 연방
사망일1956년 4월 13일
사망지Seebüll,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서독
국적독일-덴마크
활동
직업화가, 판화가
사조표현주의
주요 작품읽는 젊은 여성 (1906년)
꽃밭 (인물 없음) (1908년)
꽃밭 (우텐바르프) (1917년)
꽃과 구름 (1933년)
기타
서명Nolde autograph.png

2. 생애

에밀 놀데는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 출신의 화가로, 초기에는 목공예와 응용미술을 공부했으나 30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강렬한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를 통해 북독일의 풍경, 종교적 주제, 인간 내면 등을 표현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으며, 다리파(Die Brücke)와 같은 표현주의 그룹과 잠시 교류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시베리아동남아시아 등을 여행하며 원시예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 하에서는 그의 작품이 '타락한 예술'(Entartete Kunstdeu)로 분류되어 전시 및 제작 활동에 큰 제약을 받는 등 탄압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활동을 재개하여 1956년 사망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2. 1. 초기 생애 (1867-1901)

에밀 놀데(Emil Nolde)는 본명 한스 에밀 한센(Hans Emil Hansen)으로 1867년 프로이센 슐레스비히 공국(현 덴마크 남부 슐레스비히)의 부르칼(Burkal) 마을 근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으며, 덴마크 및 프리지아 혈통의 농민이었다. 놀데는 농장에서 성장했지만, 스스로 농장 생활에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으며 세 명의 형제들과는 다른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1884년부터 1891년까지 플렌스부르크에서 목각 세공 및 삽화 기술을 배웠고, 젊은 시절에는 가구 공장에서 일하며 뮌헨, 칼스루에, 베를린 등지를 여행했다. 1889년에는 칼스루에 응용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2]

1892년부터 1898년까지 스위스 장크트갈렌의 산업 및 응용예술 박물관(Industrie- und Gewerbemuseum, 현재의 섬유 박물관) 부설 학교에서 그림 강사로 재직했다.[3] 이 시기 그가 그린 알프스산을 의인화한 그림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이를 통해 화가로서 본격적인 공부를 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898년, 놀데는 독립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교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뮌헨, 파리, 코펜하겐 등지로 유학하며 인상주의 화풍을 익혔다. 1899년에는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수학했으며, 이 시기 닷하우의 자연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1901년, 34세의 나이에 미술에 완전히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2. 2. 미술 수업과 초기 활동 (1898-1912)

1898년, 뮌헨 미술학교 입학이 거절되자, 에밀 놀데는 이후 3년 동안 사설 그림 수업을 받고 파리코펜하겐 등지를 유학하며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 화풍을 익혔다. 그는 또한 닷하우의 자연파와 교류하기도 했다.

1902년, 덴마크 여배우 아다 빌스트룹과 결혼하고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훗날 그의 작품을 지지하게 되는 수집가 구스타프 쉬플러와 화가 카를 슈미트-로틀루프를 만났다. 이 해부터 그는 자신의 출생지 이름을 따 성을 '놀데'로 바꾸었다. 북방 고향에 대한 애정은 그를 점차 인상주의와는 다른 길로 이끌었다.

1906년, 그는 드레스덴의 혁명적인 표현주의 그룹 다리(Die Brücke)의 초청을 받아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원래 고독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1년 남짓 활동한 후 이듬해 말 탈퇴하여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4]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베를린 분리파의 회원이었다.[4] 하지만 1909년 그의 종교화 《성령강림제》가 인상파 중심의 베를린 분리파 미술전에서 전시를 거부당하자, 그는 공개적인 질문장을 통해 지도부에 반론을 제기하며 분리파와 결별했고, 결국 제명되었다.[4] 이 사건은 '다리' 그룹 화가들과 분리파 내 신세대 혁신가들이 놀데를 표현주의의 주요 인물로 여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9년, 놀데는 북독일의 작은 마을 루테뷔르에 정착하여 '그리스도의 생애' 연작을 비롯한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12년 무렵, 그는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남태평양 지역의 전시품들을 120점 이상 스케치하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는 "남자, 여자, 고양이"(1912)와 같은 작품에 반영되었다.[5] 같은 해, 바실리 칸딘스키가 이끄는 뮌헨 기반의 그룹 청기사(Der Blaue Reiter)와 함께 전시회를 열었으며, 이 시기 그는 예술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어 작품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6]

2. 3. 원시주의와 동방 여행 (1913-1920)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놀데는 시베리아를 거쳐 동양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어서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방문하여 그곳의 원시예술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는 원시예술이 가진 단순하고 소박한 형식 속에서도 화려하고 때로는 기괴하게 느껴지는 강렬한 생명력의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경험은 놀데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으며, 이후 그의 작품에서 주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 가면과 인형 등의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4. 나치 정권 시대의 탄압 (1920-1945)

놀데는 1920년대 초부터 나치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de )의 지지자였으며, 덴마크 지부의 회원이 되었다.[7] 그는 유대인 예술가들에 대한 반유대주의적이고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했으며, 표현주의를 독일적인 양식으로 간주했다.[8] 이러한 견해는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나 프리츠 히플러(Fritz Hippler) 같은 일부 나치 당원들에게도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형태의 모더니즘을 "타락한 예술(Entartete Kunstde)"로 규정하며 배척했고, 나치 정권은 공식적으로 놀데의 작품을 규탄했다. 그때까지 그는 독일에서 큰 존경을 받았으나, 그의 작품 1,052점이 박물관에서 제거되었는데, 이는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많은 수였다.[9] 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의 나치 가우라이터 발두르 폰 시라흐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한 후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1937년 타락한 예술 전람회에 그의 작품 일부가 포함되어 공개적으로 비난받았다.

1941년 이후로는 사적으로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기간 동안 북독일의 제뷔르에 은신하며 수백 점의 작은 수채화를 비밀리에 그려 숨겼고, 이를 "그리지 않은 그림들(Ungemalte Bilderde)"이라고 불렀다.

1942년, 놀데는 색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은빛 파랑, 하늘색, 천둥색이 있다. 모든 색에는 영혼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거나 나를 밀어내고, 자극제로 작용한다. 예술적 감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색깔은 색깔이고, 음색은 음색일 뿐이다…그것이 전부다. 천국에서 지옥에 이르기까지 인간 정신에 미치는 모든 영향은 간과된다.[10]


2. 5. 전후 활동과 사망 (1945-195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에밀 놀데는 다시 한번 Pour le Mérite 훈장을 받으며 영예를 얻었다.[11][12] 나치 정권 시기, 그림 제작을 금지당했을 때 비밀리에 그렸던 작은 크기의 수채화 연작 '그리지 않은 그림들'(Ungemalte Bilderde)을 바탕으로 전후에 다시 큰 규모의 작품들을 제작하며 화가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1956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노르트프리슬란트군 노이키르헨의 일부인 제뷔르에서 사망했다. 같은 해 제뷔르 놀데 재단(Stiftung Seebüll Ada und Emil Noldede)이 설립되었고, 이듬해인 1957년에는 그의 삶과 작품을 기리는 박물관이 제뷔르의 자택에 개관했다.

3. 작품 세계

에밀 놀데의 작품 세계는 독일 표현주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특히 강렬한 색채대담하고 단순화된 형태를 통해 인간의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유화뿐만 아니라 목판화, 에칭, 수채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풍경, , 종교적 주제, 베를린의 밤 풍경 등 폭넓은 소재를 다루었다. 특히 오세아니아 등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영향을 미쳤다.[5]

놀데의 작품 중 성경 이야기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종교화는 비록 전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작가 스스로 예술적 전환점으로 여길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5][16]

나치 정권 하에서는 그의 작품이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탄압받았다. 그림 그리기가 금지된 상황에서도 놀데는 비밀리에 작은 수채화 연작인 '그리지 않은 그림들'(Ungemalte Bilder|웅게말테 빌더de)을 제작하며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9]

3. 1. 주요 특징

놀데 작품의 주요 특징은 원색을 많이 사용한 강렬한 색채단순화된 형태이다. 이는 빈센트 반 고흐오세아니아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베를린 시절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여 남태평양 지역의 전시품을 120점 이상 스케치했으며, 이는 카메룬에서 논란 속에 독일로 옮겨진 이브라힘 엔조야 왕의 옥좌를 묘사한 "남자, 여자, 고양이"(1912) 같은 작품에 반영되었다.[5]

회화 외에도 놀데는 목판화수채화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판화 작업은 에칭 231점, 목판화 197점, 석판화 83점, 헥토그래프 4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며, 풍경, 종교적 이미지, 꽃, 폭풍우 치는 바다, 베를린의 밤 풍경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특히 수채화는 북독일의 풍경과 초목 등을 소재로 하여 재료의 특성을 살린 뛰어난 기술을 보여준다.

3. 2. 종교화

놀데의 전체 예술 작품에서 종교적 이미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작지만, 그는 일부 종교 작품을 자신의 예술 발전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여겼다.[15][16]

독일-덴마크 국경 근처의 작은 종교 공동체에서 농부의 아들로 자란 놀데는 어린 시절 성경 전체를 읽으며 유대-기독교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7][16] 초기 종교 작품(1900~1904)에서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장-프랑수아 밀레나 오노레 도미에와 같은 기존 화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16]

1906년은 놀데에게 전환점이 된 해였다. 그는 인상주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순간의 감정을 강조하고 밝은 색상을 사용하며 2차원적 표현에 중점을 둔 종교적 주제를 그리기 시작했다.[16] 42세이던 1909년, 독극물이 든 물을 마시고 죽을 고비를 넘긴 경험은 그가 종교 미술에 더욱 헌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8] 같은 해 북독일 루테뷔르에 정착하여 이후 ''그리스도의 생애'' 연작 등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년 이후 제작된 놀데의 종교 작품들은 에칭을 포함하여 이전 작품들보다 더 어둡고 다소 불길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16] 그의 아내 아다조차 놀데의 대담하고 강렬한 표현에 놀라, 9부작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처음 며칠 동안은 그 영향이 너무 강해서 몰래 훔쳐보는 것만 가능했습니다."라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16][19]

그러나 그의 매우 강렬한 종교화는 종종 "종교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나치 정권 하에서는 "퇴폐예술"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결국 1937년 그의 작품들은 독일 전역의 미술관에서 압수되어 "퇴폐미술전"에 출품되어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수모를 겪었다.

3. 3. '그리지 않은 그림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은 모든 형태의 모더니즘 예술을 "타락한 예술"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에밀 놀데 역시 이러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나치 정권은 놀데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비난했으며, 당시 독일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1,052점을 박물관에서 철거했다. 이는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도 많은 수였다.[9] 놀데는 나치 가우라이터였던 발두르 폰 시라흐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하는 등 항의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1937년 뮌헨에서 열린 타락한 예술 전람회에 그의 작품 일부가 전시되는 수모를 겪었다.

나치의 탄압은 더욱 심해져, 1941년부터는 개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금지되었고 미술학교에서 제명되었으며 화구 구입까지 제한받았다. 이러한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놀데는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감시를 피해 아주 작은 크기의 수채화 약 1,300점을 일본 종이 등에 비밀리에 그려 숨겨두었다. 놀데는 이 작품들에 스스로 '그리지 않은 그림들'(Ungemalte Bilder|웅게말테 빌더d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2년, 놀데는 색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은빛 파랑, 하늘색, 천둥색이 있다. 모든 색에는 영혼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거나 나를 밀어내고, 자극제로 작용한다. 예술적 감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색깔은 색깔이고, 음색은 음색일 뿐이다…그것이 전부다. 천국에서 지옥에 이르기까지 인간 정신에 미치는 모든 영향은 간과된다.[10]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놀데는 나치 시대 동안 비밀리에 그려두었던 '그리지 않은 그림들'을 바탕으로 다시 유화 작업을 시작하며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3. 4. 기타 주제

회화 외에도 놀데의 작품에는 다양한 소재를 담은 다수의 판화(종종 컬러)와 수채화가 포함된다. 주요 소재로는 풍경, 종교적 이미지, 꽃, 폭풍우 치는 바다, 베를린의 밤 풍경 등이 있다. 특히 독일 뉴기니 원정을 다룬 유명한 회화 시리즈는 남태평양 제도, 모스크바, 시베리아, 한국, 일본, 중국을 방문한 경험을 담고 있다.

그의 판화 작품에 대한 쉬플러의 ''리종 카탈로그''에는 에칭 231점, 목판화 197점, 석판화 83점, 헥토그래프 4점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히틀러 정권 하에서 그림 그리는 활동이 금지되었던 시기에 일본 종이에 수채화로 그린 1,300점의 작품 시리즈를 남겼는데, 이를 스스로 "그리지 않은 그림들"이라고 명명했다.

4. 논란과 비판

에밀 놀데는 그의 예술적 성취와는 별개로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해 있다. 특히 나치당에 대한 그의 지지와 반유대주의적 시각은 중요한 비판 지점이다.[7][8]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표현주의 작품들은 나치 정권에 의해 '타락한 예술'(Entartete Kunstde)로 규정되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9]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작품 다수가 박물관에서 철거되었고, 일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약탈 미술품 문제로 이어져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22][2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놀데는 명예를 회복했지만,[11][12] 최근 그의 나치즘 동조 행적과 이를 둘러싼 역사적 평가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13][14]

4. 1. 나치 협력 논란

놀데는 1920년대 초부터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의 지지자였으며, 덴마크 지부 회원이 되었다.[7] 그는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며 유대인 예술가들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했고, 표현주의를 독일적인 양식으로 여겼다.[8] 이러한 생각은 요제프 괴벨스나 프리츠 히플러 같은 다른 나치 당원들에게도 공감을 얻었다. 괴벨스는 특히 놀데의 수채화 꽃 그림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모더니즘 예술 전반을 '타락한 예술'(Entartete Kunstde)로 규정하며 배척했고, 결국 나치 정권은 놀데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비판하고 탄압했다. 당시 독일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던 놀데의 작품 1,052점이 박물관에서 철거되었는데, 이는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많은 수치였다.[9] 놀데는 이에 항의하며 비엔나의 나치 가우라이터였던 발두르 폰 시라흐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하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그의 작품 일부는 1937년 뮌헨에서 열린 타락한 예술 전람회에 전시되어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1941년부터는 미술 활동과 화구 구입까지 금지당하며 사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놀데는 비밀리에 수백 점의 작은 수채화를 제작하여 숨겨두었는데, 그는 이를 '그려지지 않은 그림들'(Ungemalte Bilderde)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놀데는 다시 명예를 회복하여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는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11][12]

하지만 그의 예술적 성취와 별개로, 최근 학계에서는 놀데의 나치즘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그의 정치적 신념, 그리고 예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그가 유대인이 아닌 비판자들까지 유대인으로 몰아붙였던 행위 등이 재조명되고 있다.[13] 2019년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서 열린 "에밀 놀데: 독일의 전설, 나치 정권 시대의 예술가" 특별전은 놀데 스스로 드러낸 나치 성향과 이를 축소하려 했던 전후 미술사학계의 경향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14]

4. 2. 약탈 미술품 문제

나치 정권은 에밀 놀데의 작품을 타락한 예술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그의 작품 1,052점이 박물관에서 철거되었는데, 이는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많은 수였다.[9] 일부 작품은 1937년 타락한 예술 전람회에 전시되기도 했다.

이후 놀데의 작품 중 일부가 나치에 의해 약탈된 미술품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모더나 미술관이 소장한 1917년 작 ''Blumengarten (Utenwarf)''이다.[22] 이 작품은 약 400만달러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며, 원래 소유주는 독일계 유대인 난민이었던 오토 나단 도이치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독일을 탈출하여 1938년 말이나 1939년 초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그의 상속인 중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작품 반환을 요구했다. 2007년 스웨덴 정부는 미술관 측에 상속인들과 합의할 것을 권고했다.[23][24] 해당 작품은 1967년 스위스 경매를 통해 모더나 미술관에 판매된 것이었다.[25]

2015년에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렌토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놀데의 1915년 작 ''Maiwiese (Maienwiese)'' [5월의 초원] (Inv. Nr. 94)을 원 소유주였던 오토 지그프리트 율리우스 박사의 상속인들에게 반환했다.[26][27]

반면, 2000년 독일 뒤스부르크의 빌헬름 렘브룩 미술관 재단은 브로츠와프(과거 브레슬라우)의 미술품 수집가였던 이스마르 리트만 박사 유족의 놀데 작품 ''Buchsbaumgarten (Boxtree Garden)'' 반환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28]

5. 주요 작품

놀데의 예술 작품에서 종교적 이미지는 비교적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는 일부 작품을 예술가로서 자신의 발전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여겼다.[15][16] 독일-덴마크 국경 근처의 작은 종교 공동체에서 농부의 아들로 자란 놀데는 성경 전체를 읽으며 유대-기독교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7][16] 초기 종교 작품(1900~1904)에서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고 장-프랑수아 밀레나 오노레 도미에와 같은 선배 예술가들과 차별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6]

1906년은 놀데에게 전환점이 된 해였다. 그는 인상파 스타일에서 벗어나 순간의 감정을 강조하고 밝은 색상을 사용하며 2차원적 표현에 중점을 둔 종교적 주제를 묘사하기 시작했다.[16] 1909년, 42세의 나이에 독극물이 든 물을 마시고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후 종교 미술에 대한 그의 헌신은 더욱 깊어졌다.[18] 1911년 이후 놀데의 종교적 작품들은 에칭을 포함하여 이전보다 더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16] 그의 아내 아다조차 그의 대담한 표현에 놀라, 9부작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처음 며칠 동안은 그 영향이 너무 강해서 몰래 훔쳐보는 것만 가능했습니다."라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16][19]

놀데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판화 중 하나인 "예언자"(The Prophet, 1912)는 20세기 미술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20] 주요 작품 및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작품명 (원제)제작 연도매체/기법소장처비고
젊은 여성과 아이의 초상--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성의 초상1926년경-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젊은 소녀의 초상1913–1914-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언자 (Prophet)1912목판화현대미술관 (뉴욕)20세기 미술의 아이콘으로 평가[20]
젊은 커플 (Young Couple)1913-현대미술관 (뉴욕)
독서하는 젊은 여성 (Lesende junge Frau)1906캔버스에 유채킬 미술관 (Kunsthalle Kiel)[20]
꽃정원(인물 없이) (Blumengarten (ohne Figur))1908캔버스에 유채개인 소장2012년 2월 8일 소더비 경매에서 327만달러에 낙찰[20][21]
안나 비드의 정원 (Anna Wieds Garten)1907캔버스에 유채개인 소장
상승하는 구름 (Steigende Wolken)1927캔버스에 유채하겐 칼-에른스트-오스하우스 박물관 (Karl-Ernst-Osthaus-Museum, Hagen)
큰 해바라기 (Grosse Sonnenblumen)1928캔버스에 유채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꽃과 구름 (Blumen und Wolken)1933캔버스에 유채하노버 슈프렝겔 미술관 (Museum Sprengel, Hanover)[20]
학자와 소녀1912-뒤셀도르프 미술관



최근 몇 년 동안 놀데의 그림들은 세계적인 주요 경매 회사들의 경매에서 수백만 달러의 가격에 낙찰되었다. 2012년 2월 8일,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꽃정원(인물 없이)"(Blumengarten (ohne Figur))가 327만달러에 낙찰되었다.[21]

“꽃 정원”(인물 없음)(''Blumengarten, ohne Figur''), 캔버스에 유채, 1908.


“파이프를 든 머리(자화상)”, 석판화, 19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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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Emil Nolde – Biography and Offers – Buy and Sell https://www.ketterer[...] 2019-12-01
[3]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Biography Gale 1998
[4] 간행물 Nolde, Emil https://www.deutsche[...] Neue Deutsche Biographie 1999
[5] 서적 Nicht wiederzuerkennen. Kulturgüter aus Kamerun in der deutschen Bildproduktion. In: Atlas der Abwesenheit: Kameruns Kulturerbe in Deutschland Reimer Verlag 2023
[6] 서적 New Worlds: German and Austrian Art, 1890–1940 Yale University Press 2001
[7] 서적 Emil Nolde: The Artist during the Third Reich Prestel 2019
[8] 서적 Grove Dictionary of Art 1996
[9] 서적 Emil Nolde: Unpainted Pictures Hatje Cantz Publishers 2000
[10] 서적 Nolde: Forbidden Pictures Marlborough Fine Art Ltd. 1970
[11] 웹사이트 Emile Nolde http://bestarts.org/[...]
[12] 서적 Die Mitglieder des Ordens. 2 1882–1952. http://www.orden-pou[...] Gebr. Mann Verlag 1978
[13] 서적 The Artist during the Third Reich Prestel 2019
[14] 뉴스 To the Bitter End https://www.lrb.co.u[...] London Review of Books 2019-11-25
[15] 서적 Das eigene Leben. Die Zeit der Jugend 1867–1902 1931
[16] 서적 Emil Nolde: Retrospective Prestel 2014
[17] 서적 Das eigene Leben. Die Zeit der Jugend 1867–1902 1945
[18] 서적 Jahre der Kämpfe 1934
[19] 기타 Ada Nolde to Luise Schiefler Archiv der Nolde Stiftung Seebüll 1912-02-00
[20] 웹사이트 Emil Nolde – The German Expressionist Master of Darkness Ezine Articles
[21] 뉴스 Sotheby's London Impressionist & Modern art evening sale totals $125,504,018 http://www.artdaily.[...] Art Daily
[22] 뉴스 Painting and Press Release http://www.artknowle[...] Art Knowledge News
[23] 뉴스 Stockholm museum in row over Nazi loot http://www.thelocal.[...] The Local 2008-02-01
[24] 뉴스 Moderna Museet and the Heirs of Otto Nathan Deutsch Reach Settlement on Disputed Painting https://artdaily.cc/[...] artdaily.cc
[25] 뉴스 Nazi Victim's Heirs Lose Patience With Sweden on Art (Update1) https://www.bloomber[...] Bloomberg L.P. 2008-01-29
[26] 웹사이트 Lentos Kunstmuseum Linz - Provenance research https://www.lentos.a[...]
[27] 뉴스 Linz restituiert Emil Noldes "Maiwiese" - Linz restitutes Emil Nolde's 'Meadow in May' https://www.lootedar[...] Der Standard
[28] 웹사이트 Provenance Research: Stiftung Wilhelm Lehmbruck Museum, Duisburg (Wilhelm Lehmbruck Museum Foundation, Duisburg) https://www.loote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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