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프타니소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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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은 1800년부터 1807년까지 존재했던, 이오니아 제도의 7개 섬으로 구성된 자치 공화국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점령을 거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800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으로 수립되었으며, 귀족 공화국 형태를 띠었으나, 1806년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자율성이 약화되었다.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프랑스에 다시 할양되었고, 이후 영국 보호령을 거쳐 1864년 그리스 왕국에 편입되었다. 이 공화국은 그리스인들에게 자치 경험을 제공했으며, 그리스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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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타니소스 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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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7개 연합 섬 공화국 |
현지 명칭 | 그리스어: (로마자 표기: Heptánēsos Politeía)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Семи Соединённых Островов (로마자 표기: Respublika Semi Soyedinonnykh Ostrovov) |
일반 명칭 | 셉틴슐라 공화국 |
국가 | 러시아, 오스만 |
지위 | 보호국 |
지위 설명 |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 |
시대 | 근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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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종류 |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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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성립 | 사건: 러시아-오스만 점령 날짜: 1799년 |
건국 | 사건: 설립 날짜: 1800년 4월 2일 (구력 3월 21일) |
헌법 | 사건: 1차 헌법 날짜: 1800년 11월 1일 |
헌법 | 사건: 2차 헌법 날짜: 1803년 11월 23일 |
헌법 | 사건: 3차 헌법 날짜: 1806년 12월 27일 (시행되지 않음) |
멸망 | 사건: 프랑스에 할양 날짜: 1807년 8월 20일 |
이후 | 사건: 영국 보호령 날짜: 1815년 11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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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수도 | 코르푸 |
정치 체제 | 연방 과두제 의회 독립 공화국 |
수장 칭호 | 공작 |
초대 수장 | 스피리돈 게오르기오스 테오토키스 백작 |
초대 수장 임기 | 1800년–1803년 |
2대 수장 | 안토니오스 코모우토스 백작 |
2대 수장 임기 | 1803년–1807년 |
언어 | |
공용어 |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
경제 | |
통화 | 셉틴슐라 가제타 |
2. 역사적 배경
이오니아 제도는 코르푸, 팍시, 자킨토스, 케팔로니아, 레프카다, 이타카, 키테라 등의 섬들과 에피루스 본토의 파르가, 프레베자, 보니차, 부트린토 같은 해안 마을들로 구성된다. 이 지역은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은 유일한 그리스 지역으로 남았다.[6]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오니아 제도는 독특한 지역 문화를 발전시켰고, 서유럽의 사상과 문화를 그리스 세계에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베네치아 통치 하의 사회는 특권 귀족, 도시 중산층, 그리고 평민으로 나뉘어 있었다.
1770년 오스만 제국 치하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인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1774년 퀴추크 카이날지 조약으로 러시아의 보호 아래 그리스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등 점차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었다.[5]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멸망과 함께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며 귀족제를 폐지하고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특권을 잃은 귀족들의 반발과 과도한 세금 징수 등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했다. 1798년 가을, 러시아-오스만 연합 함대가 이오니아 제도를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1799년 3월 코르푸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통치는 끝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알바니아 지역의 실력자 테페데렌리 알리 파샤는 혼란을 틈타 본토의 프랑스령 요새들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후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이 수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2. 1. 베네치아 공화국의 멸망과 프랑스 통치 (1797-1799)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 제도(코르푸, 팍시, 자킨토스, 케팔로니아, 레프카다, 이타카, 키테라)와 본토의 일부 영토(파르가, 프레베자, 보니차, 부트린토)는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멸망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나폴레옹은 1796년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면서부터 이오니아 제도에 관심을 보였으며[9],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따라 이 섬들은 프랑스 공화국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었다.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따라 기존의 귀족 계급을 폐지하고 사회 및 종교 공동체(정교회, 가톨릭, 유대교) 간의 평등을 선언했다. 또한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고 섬에 지방 자치 정부를 수립했으며, 최초의 공교육 시스템을 만들고 그리스 최초의 인쇄기를 도입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섬들은 코르키라(Corcyre), 이타키(Ithaque), 에게해(Mer-Égée)의 세 데파르트망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특권을 잃은 구 귀족 계층의 반발은 당연했으며, 프랑스의 과도한 세금 부과와 반성직주의적 정책은 곧 일반 대중의 지지도 잃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이오니아 제도의 프랑스 점령은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일환으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공동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그레고리 5세는 프랑스를 비난하고 오스만 제국을 대신하여 섬 주민들에게 자치 정부 구성을 약속하며 봉기를 촉구했다.
1798년 가을, 러시아-오스만 연합 함대가 섬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냈고, 1799년 3월 4일(율리우스력 2월 20일)에는 코르푸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이 혼란을 틈타, 알바니아 지역의 실력자였던 테페데렌리 알리 파샤는 프랑스군으로부터 부트린토, 프레베자, 보니차 등 본토의 거점들을 빼앗았다.
2. 2. 러시아-오스만 연합군의 점령 (1798-1799)
프랑스의 이오니아 제도 점령은 특권을 상실한 지역 귀족들의 반감을 샀으며, 과도한 세금 부과와 반성직주의 정책 역시 일반 대중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특히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맥락 속에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두 제국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그레고리 5세는 프랑스의 통치를 "불경스럽다"고 비난하며 섬 주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는 오스만 정부를 대신하여, 프랑스 축출 후 섬들이 스스로 정부 형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1798년 가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연합 함대가 이오니아 제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연합 함대는 코르푸를 제외한 다른 섬들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혼란을 틈타, 알바니아 지역의 유력자였던 야니나의 알리 파샤는 부트린토, 프레베자, 보니차 등 에피루스 본토의 프랑스령 요새들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결정적으로 1799년 3월 4일(구력 2월 20일), 코르푸가 함락되면서 이오니아 제도에서 프랑스의 통치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로써 이오니아 제도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공동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3. 이오니아 7개 섬 공화국의 성립 (1800-1807)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프랑스 영토가 되었던 이오니아 제도는,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결성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연합군에 의해 1799년 점령되었다.
1800년, 이스탄불에서 체결된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따라 '''이오니아 7개 섬 연방국'''(Repubblica delle Sette Isole Unite|레푸블리카 델레 세테 이솔레 우니테it; Πολιτεία τῶν Ἑπτὰ Ἑνωμένων Νήσων|폴리티아 톤 헵타 에노메논 니손el)이 수립되었다. 이 국가는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그리스인들이 세운 최초의 자치 국가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5][11]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3년마다 공물을 바쳐야 했으며, 동시에 러시아 제국의 보호령이 되어 러시아군 주둔을 허용해야 했다.[5][11][10] 코르푸 섬이 행정 중심지가 되었고, 제한적이지만 귀족 중심의 헌법, 자체 국기, 외교권 등이 부여되었다.[5][11] 러시아군의 주둔은 테페데렌리 알리 파샤가 이오니아 제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10]
코르푸 섬의 명망 있는 카포디스트리아스 가문은 연방국의 정치에 참여했으며, 1803년에는 훗날 그리스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평의회에 참여했다.[11] 1803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헌법이 제정되었으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반대로 수정되었다.[8][12]
1807년, 알리 파샤가 레프카다 섬을 공격해오자 당시 외무 장관이었던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방어를 지휘하여 성공적으로 격퇴했다.[8][12] 이 시기 그리스 본토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던 많은 클레프테스들이 이오니아 제도로 피난했는데, 이들 중에는 훗날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마르코스 보차리스 등이 있었다.[13]
그러나 1807년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오니아 제도는 다시 프랑스군에 점령되었고, 이오니아 7개 섬 연방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1815년 영국 보호령인 이오니아 제도 합중국이 되었다가, 1864년에 이르러서야 그리스 영토로 편입되었다.[11]
3. 1. 1800년 콘스탄티노플 조약
1799년 6월 21일, 이오니아 제도 상원은 각 섬의 상류층 출신 12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플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했다. 이들의 임무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러시아 제국의 차르에게 감사를 표하고 신생 국가의 독립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또한, 대표단은 직접 작성한 헌법 초안의 비준을 요청하고, 알리 파샤가 점령한 부트린토, 프레베자, 보니차에서 철수하여 섬들의 해상 및 육지 경계를 회복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역할도 맡았다. 대표단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대사로 지명된 안젤로 오리오가 포함되었으며, 상원 의장직은 프랑스 통치 하 임시 시청을 이끌었던 명망 있는 테오토키스 가문의 백작 스피리돈 게오르기오스 테오토키스가 맡았다.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대표단은 오스만 제국이 섬의 독립을 인정할 의사가 없으며,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 있는 종속 국가를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표단 중 코르푸 출신 백작 안토니오 마리아 카포 디스트리아와 자킨토스 출신 백작 니콜라오스 그라데니고스 시구로스 데실라스는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남았고, 오리오와 클라다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오니아 제도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다. 이후 두 대표단은 새로운 국가의 정치 체제 성격을 두고 서신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1800년 3월 21일(구력)/4월 6일(신력),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콘스탄티노플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영국도 참여했다. 이 조약으로 '''7개 연합 섬 공화국'''(Repubblica delle Sette Isole Unite|레푸블리카 델레 세테 이솔레 우니테it; Πολιτεία τῶν Ἑπτὰ Ἑνωμένων Νήσων|폴리티아 톤 헵타 에노메논 니손el)이 창설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그리스인들이 세운 최초의 자치 국가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5][11]
조약에 따라 이오니아 제도는 각 섬이 일정 수준의 자치를 유지하는 연방 국가 형태를 띠게 되었다. 정치 체제는 "지도자와 유력자"가 이끄는 귀족 공화국인 라구사 공화국의 모델을 따랐으며,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75000piastre를 술탄에게 공물로 바쳐야 했다. 이는 술탄에게는 외교적 승리였으나,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 그레고리 5세와 러시아 함대 사령관 표도르 우샤코프로부터 스스로 통치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약속받았던 섬 주민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새로운 국가의 헌법은 추후 합의를 거쳐 조약 서명국들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되었다. 또한 신생 국가는 자체 군대가 없었기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군대가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요새에 주둔하며 안전을 보장하기로 했다. 한편, 본토의 월경지인 파르가, 보니차, 프레베자, 부트린토는 오스만 제국의 통제하에 남되, 다뉴브 공국과 유사한 특별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국가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고, 코르푸 섬이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다. 제한적이지만 귀족주의적 헌법, 국기, 외교권 등이 부여되었으며, 3년마다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5][11][10] 러시아군 주둔은 알리 파샤의 위협으로부터 제도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10]
3. 2. 1803년 헌법
1800년 이스탄불 조약에 따라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이오니아 7개 섬 연방국)이 성립된 후, 코르푸 섬의 명망가 가문 출신인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와 같은 인물들이 연방국의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1] 그는 1803년에 평의회에 참여하기도 했다.[11]1803년에는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8][12] 그러나 공화국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한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이 헌법의 내용에 만족하지 않고 변경을 강요했다.[8][12] 결국 러시아의 압력으로 인해 헌법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3. 3. 정치적 혼란과 분리주의 운동 (1800-1801)

1800년 12월 26일,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두 명의 사절이 코르푸에 도착했다. 이들은 '비잔틴 헌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헌법의 시행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황실 위원', 즉 술탄의 대리인이었다. 1801년 1월 13일,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의 국기가 코르푸에 공식적으로 게양되었다.
황실 위원의 임무는 시작부터 어려움에 부딪혔다. 초기 위원 중 한 명이었던 안토니오 마리아 카포디스트리아스는 곧 그의 아들인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훗날 그리스의 초대 국가 원수가 된다)로 교체되었지만, 문제는 계속되었다. 새로운 헌법은 귀족에게만 정치 권력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전 프랑스 공화국 통치 하에서 더 많은 시민권과 자유를 경험했던 평민들은 이러한 변화에 즉시 반발했다. 여기에 각 섬의 지역적 불만과 권력 다툼까지 더해지면서, 일부 섬에서는 공화국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정치적 긴장은 헌법 시행 이전인 1799년 후반부터 이미 존재했다. 귀족들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귀족과 다른 사회 계층 사이의 분열도 심각했다. 러시아 제국 해군 제독 표도르 우샤코프가 직접 감독한 코르푸에서는 새로운 임시 정부 구성이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다른 섬들은 상황이 달랐다. 계급 간의 대립과 개인적인 경쟁이 선거 과정을 지배했으며, 우샤코프의 대리인 니콜라이 티젠하우젠 백작의 독단적인 개입도 혼란을 부추겼다. 예를 들어 자킨토스에서는 1799년 9월 12일, 새 정부 선출을 위한 대의회 소집일에 귀족들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음모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주동자인 안토니오 마르티넨고는 티젠하우젠에게 뇌물을 주고 사면받았고, 그의 공모자 친토스는 총살당했다. 1800년 1월 18일에는 농촌 지역의 불안이 커지자 하층 계급을 억압하는 첫 조치가 발표되기도 했다.
비슷한 소요 사태는 다른 섬에서도 발생했다. 키티라에서는 폭동을 일으킨 농민들이 귀족과 상인을 공격하자 군대가 투입되어 질서를 회복했고, 레프카다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
특히 자킨토스에서는 경쟁 세력 간의 충돌이 끊이지 않으며 혼란이 계속되었다. 중앙 정부가 쿠데타를 계획하는 와중에, 오히려 친(親)영국적인 쿠데타가 먼저 발생했다. 1801년 2월 20일, 자킨토스는 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 이는 섬에 와서 군정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영국 대령 제임스 칼렌더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 대사였던 엘긴 백작은 이 계획을 즉시 비난했지만, 헌정 질서는 1801년 9월 12일 오스만 제국 선박 5척과 영국 전함 1척이 섬에 도착하고 나서야 회복될 수 있었다.
이타카에서도 잠시 비슷한 분리주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타카의 지방 정부는 자킨토스와 접촉하며 분리를 모색했다. 1801년 8월 18일, 황실 위원이 헌법에 따른 행정부를 세우기 위해 섬에 도착하자 지방 정부는 사임했다. 그러나 친영국적인 감정은 수도인 바티(Βαθύ|바티el)에 국한되었고, 섬의 농촌 주민들은 황실 위원의 노력을 지지하는 등 내부적인 입장 차이를 보였다.
3. 4. 알리 파샤와의 관계
1796년,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영유하던 이오니아 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오안니나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오스만 제국의 지방 유력자인 테페데렌리 알리 파샤에게 사자를 파견하였다.[8] 이듬해인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9]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이탈리아 전역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정도로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9]이러한 프랑스의 진출은 발칸 반도 남부에서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독자적인 세력 확장을 꾀하던 알리 파샤 간의 복잡한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아드리아 해를 넘어 레반트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감행하자, 이를 기회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는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한 공동 공격에 나섰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알리 파샤는 프랑스 군대의 협력을 얻어 에페이로스 일부와 프레베자 등을 점령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알리 파샤의 이러한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1799년, 오스만-러시아 연합 함대가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이오니아 제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서, 알리 파샤가 제도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이 수립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3. 5. 러시아 군단 창설과 대외 관계
1770년 오스만 제국 치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그리스인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남하 정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봉기 세력은 러시아 제국과 연계되어 있었다. 봉기는 오스만 제국의 아얀(지방 호족)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그리스 내 독립의 열기는 점차 고조되었다[6]。이 봉기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했다(동방 문제). 오스만 제국 자체의 약화와 더불어 1774년 체결된 퀴추크 카이날자 조약은 러시아 보호 하에 있는 그리스 상인들의 활동을 촉진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 이후 동지중해에서 프랑스 세력이 약화되자 그 이권을 그리스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오니아 제도는 베네치아와 프랑스의 지배를 거치며 분쟁 지역으로 부상했다[5]。 이오니아 제도는 1386년부터 1797년까지 베네치아,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프랑스, 1800년부터 1807년까지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공동 통치 하에 있었으며, 이후 1807년 프랑스, 1809년부터 1814년까지 영국 지배를 거쳐 1864년에 최종적으로 그리스 영토가 되었다[7]。
1796년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베네치아가 영유하던 이오니아 제도에 주목하여 이오안니나의 테페데렌리 알리 파샤에게 사절을 파견했다. 테페데렌리 알리 파샤(1750년? - 1822년)는 이오안니나와 알바니아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던 지방 호족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며 프랑스나 영국과 독자적인 외교를 펼쳤으나, 결국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1822년 살해되었다[8]。 이듬해 캄포 포르미오 조약 체결로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9]。 나폴레옹은 이 섬들이 이탈리아 본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9]。 이로써 발칸 반도 남부에서는 프랑스, 러시아, 알리 파샤 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나폴레옹은 아드리아 해를 넘어 레반트 지역까지 지배하려 했고, 1798년 이집트 원정을 감행했다.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는 연합하여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알리 파샤는 이 기회를 이용해 프랑스 부대의 도움을 받아 에페이로스 일부와 프레베자 등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1799년 오스만-러시아 연합 함대가 이오니아 제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코르푸의 새 정권 수립 이후에도 상황은 불안정했다. 1802년 3월 초, 테오토키스의 초청으로 영국군이 코르푸에 상륙하여 공화국 군대와 합류했다. 오스만 제국 또한 이 사건에 대해 불만을 품었지만, 최초의 헌법을 개정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오스만 제국은 원로원 의장직을 유지하고 있던 테오토키스에게 연합국, 제국 위원, 그리고 섬 주민들이 참여하는 적절한 심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전의 현상 유지를 복원하라고 지시했다. 농촌 인구는 코르푸 시로 진격하려 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명예 대표단'에 대한 경고와 농민들에게 연설한 프랑스 영사 로미유의 설득으로 인해 잠시 진정되었다.
상황이 여전히 불안정한 가운데, 러시아는 다른 열강들의 동의를 얻어 자국 군대를 섬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자킨토스 출신의 백작 조르지오 모체니고가 차르의 전권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피렌체 주재 러시아 대사였으며 잠시 동안 7개 섬 공화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특사로 활동했다. 한편, 아미앵 조약으로 프랑스, 스페인, 영국, 그리고 바타비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의해 구성된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4. 1806년 헌법 개정과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
1803년에 제정된 헌법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항의를 받아 변경되었다.[8][12] 1803년 헌법은 1806년에 개정될 예정이었으며, 게오르기 모체니고의 영향력은 이 개정 준비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체니고의 제안에 따라 상원은 헌법 개정안 연구를 위해 '십인위원회'(Δεκανδρία|데칸드리아ell)를 설치했고, 위원회의 제안은 모체니고의 의도를 반영했다.
1806년 9월 13일, 헌법 의회 대표 선출을 위해 소집된 sincliti|신클리티ita 선거는 모체니고가 각 섬에 미리 준비된 대표 명단을 보낸 사절을 파견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10월 27일 헌법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모체니고는 공직 후보자 명단을 준비해야 할 입법 의회를 자신이 선택한 인물들로 교체하고,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서기 겸 보고자로 임명했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12월 22일 헌법 초안을 헌법 의회에 제출했다. 상당한 반대가 있었지만,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동의를 얻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여 5일 후 새로운 헌법이 승인되었다.
새로운 1806년 헌법은 소득과 학위를 기준으로 하는 소위 '활동 귀족'에게 주권을 부여했다. 이 제한은 재정적으로 어려워진 일부 오래된 귀족 가문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입법권은 17명(코르푸 4명, 케팔로니아 4명, 자킨토스 4명, 레프카다 2명, 소규모 섬 각 1명)으로 구성된 입법 상원에 부여되었으며, 이 중 9명은 3년, 8명은 4년 임기였다. 행정권은 5명으로 구성된 principato|프린치파토ita에 주어졌다. '공화국 수장'(capi della repubblica|카피 델라 레푸블리카ita)으로 알려진 이 5명의 구성원은 코르푸, 케팔로니아, 자킨토스에서 각각 1명씩 선출되었고, 네 번째 구성원은 이 세 섬 또는 레프카다에서, 다섯 번째 구성원은 레프카다 또는 소규모 섬 중에서 선출되었다. principato|프린치파토ita는 1년 임기의 순환 대통령제를 운영했으며, 해당 연도의 대통령은 공화국의 국가 원수이자 공작(principe|프린치페ita)이 되었다. principato|프린치파토ita는 외무, 전쟁 및 해군, 내무, 재정, 사법부 장관 4명을 임명했다. 섬의 지방 정부는 변경되지 않았으나, 1806년 헌법은 이전 헌법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조항들을 다수 폐지했다. 특히 러시아가 국내 및 외교 문제에 개입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공화국의 자율성을 사실상 없앴다.
1806년 헌법 개정이 러시아 정부의 직접적인 지시였는지, 아니면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려 한 모체니고 주변 세력의 주도였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헌법'으로 알려지게 된 이 헌법은 러시아와 공화국 내 친러 세력의 입지를 강화했고, 이는 프랑스의 의심을 샀다. 결국 1807년,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오니아 제도는 다시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11]
5. 틸지트 조약과 공화국의 종말 (1807)
유럽 대륙의 정세 변화는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의 운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과 1806년 발발한 러시아-튀르크 전쟁 속에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서 프랑스 제1제국으로 외교 노선을 변경했다.[10] 1807년 1월 6일, 오스만 제국 정부(포르테)는 공화국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했음을 통보했다. 법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공화국은 러시아에 대항하여 오스만 측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프랑스 역시 특사를 소환하며 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던 이오니아 상원은 1807년 6월 17일, 프랑스에 대한 중립을 포기하고 러시아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오니아 제도를 탐내던 알리 파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은 알리 파샤는 공화국이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점을 이용하려 했다. 1807년 봄, 알리 파샤의 군대는 레프카다를 공격했다.[8][12] 그러나 러시아군과 술리옷 전사들의 증원, 그리고 산타 마우라 성 점령 실패로 인해 공격은 격퇴되었다. 이에 6월 2일, 상원은 공화국 정규군과 모든 섬의 민병대를 동원하여 레프카다에 '이오니아 야영지'(Campo Jonio|캄포 요니오ita)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요새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특별 위원으로 임명되어 이를 감독했다.[8][12] 레프카다 방어에는 그리스 본토의 클레프테스 지도자들도 대거 합류했는데, 카찬토니스, 키초스 보차리스, 디미트리오스 카라이스코스, 게오르기오스 바르나키오티스, 그리고 특히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등이 있었다.[13]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이곳에서 훗날 그리스 독립 전쟁의 주요 군사 지도자들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의 운명은 결국 유럽 열강들의 힘겨루기에 의해 결정되었다. 1807년 7월,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제1제국 사이에 체결된 틸지트 조약에 따라 이오니아 제도는 다시 프랑스에 할양되었다.[11] 1807년 8월 20일, 프랑스군이 코르푸에 상륙했고, 3일 뒤에는 세자르 베르티에 장군이 러시아 제독 드미트리 세냐빈으로부터 섬의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넘겨받았다. 러시아군이 철수하자 프랑스군은 모든 섬과 그리스 본토의 파르가까지 점령했다. 마침내 1807년 9월 1일, 베르티에 장군은 섬의 헌법을 보존하라는 초기 지침과는 달리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의 프랑스 합병을 선언했다. 이로써 7년간 존속했던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1]
6. 프랑스의 재점령과 영국의 지배 (1807-1864)
1807년,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오니아 제도는 다시 프랑스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이로써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연방국)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1] 이후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인 1815년, 이오니아 제도는 영국의 보호령인 이오니아 제도 합중국으로 재편되었다.[11] 최종적으로 이오니아 제도가 그리스의 영토가 된 것은 1864년의 일이었다.[11]
7. 의의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이오니아 제도 공화국의 건국은 그리스인들에게 약 3세기 반 만에 스스로 통치하는 경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3] 물론 이 시기 헌법은 제약이 많았고, 공화국의 존립 자체가 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의도에 크게 좌우되는 한계가 있었다.[14] 열강들은 알리 파샤나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과 더불어 이 지역의 귀속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그리스의 완전한 독립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치 경험은 이후 그리스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 공화국의 존재는 동방 문제를 국제 사회에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3]
7. 1. 그리스 독립 운동에 미친 영향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던 그리스 본토인들에게 중요한 피난처 역할을 했다. 특히 레프카다 섬과 같은 곳은 오스만 당국을 피해 도망친 클레프테스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으며, 이들은 섬을 근거지로 삼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해안 지역을 공격하기도 했다.[13] 알리 파샤의 탄압을 피해 술리족 약 3,000명도 코르푸 섬과 팍소이 섬 등 이오니아 제도로 피난했다. 이들은 이후 러시아가 조직한 '그리스 군단'에 편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이오니아 제도로 피난 온 클레프테스 중에는 훗날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영웅으로 활약하게 되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마르코스 보차리스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3]
한편, 공화국의 정치에 참여했던 코르푸 섬 출신의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803년 공화국 평의회에 참여했으며[11], 1807년에는 외무 장관으로서 알리 파샤의 레프카다 섬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8][12]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이 시기에 콜로코트로니스, 보차리스 등 그리스 본토에서 온 인물들과 교류하며 그리스의 독립을 강하게 지향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5][13] 그는 훗날 그리스 독립 전쟁을 이끌고 독립한 그리스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11]
비록 짧은 기간 존속했고 열강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은 그리스인들에게 약 350년 만에 스스로 통치하는 경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자치 경험은 이후 그리스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으며, 동방 문제를 국제 사회에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3]
8. 종교
에프타니소스 공화국 시기, 이오니아 제도의 주민 대다수는 기독교 신자였다. 코르푸와 자킨토스에는 소수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고, 케팔로니아에는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유대인이 거주했다.[4] 기독교 신자 중 절대다수는 동방 정교회 소속이었다. 하지만 코르푸, 자킨토스, 케팔로니아에는 상당수의 로마 가톨릭교 신자도 존재했다.
1803년에 제정된 공화국 헌법은 동방 정교회를 국가의 우세한 종교로 인정했다. 동시에 로마 가톨릭교 신앙의 자유로운 실천을 보장하고 보호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헌법은 공화국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권리를 법률로 규정하도록 했다.[3]
9. 언어
베네치아의 오랜 지배로 인해 이오니아 제도는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베네치아 시대 동안 이탈리아어는 공식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지만, 시골 지역 주민들은 계속해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이탈리아어(특히 베네치아 방언)가 더 널리 사용된 곳은 케팔로니아 섬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더 많은 주민들이 베네치아어를 모국어로 받아들였다.[1] 19세기까지 교육받은 도시 엘리트 사이에서는 이탈리아 문화와 언어가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했으며, 이탈리아어는 1851년까지 공식 언어로 남아 있었다. 반면 하층 계급은 그리스어만을 사용하는 단일 언어 사용자로 남아 있었다.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의 공식 언어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어였다. 그러나 1803년 헌법 제정으로 그리스어가 이탈리아어와 함께 공화국의 두 공식 언어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헌법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인쇄소에서 그리스어로 인쇄되었으며, 기술 용어에 이탈리아어 차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1803년에 승인된 새로운 헌법 자체는 이탈리아어로 작성되었다. 헌법을 기초한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고귀하고 풍부하며 조화로운 헬레닉 방언(그리스어)은 베네치아인에 의해 추방되었지만, 이제 다시 행정 언어가 되고 활동적인 시민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2]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헌법 제211조에 별도로 규정되었는데, 이 조항에 따라 1820년까지 공공 문서에서 그리스어가 이탈리아어를 완전히 대체하도록 목표를 설정했다.[3]
참조
[1]
서적
The Ionian islands: Manners and customs
https://books.google[...]
J. Haldane
2011-02-08
[2]
서적
Language and national identity in Greece, 1766–1976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0-12-10
[3]
웹사이트
COSTITUZIONE DELLA REPUBBLICA SETTINSULARE
http://www.dircost.u[...]
2015-04-18
[4]
웹사이트
1Ο ΕΝΙΑΙΟ ΠΕΙΡΑΜΑΤΙΚΟ ΛΥΚΕΙΟ ΑΘΗΝΩΝ : "ΓΕΝΝΑ∆ΕΙΟ" ΟΙ ΕΒΡΑΪΚΕΣ ΚΟΙΝΟΤΗΤΕΣ ΣΤΗΝ ΕΛΛΑΔΑ
http://users.sch.gr/[...]
Users.sch.gr
2015-04-18
[5]
문서
桜井(ギリシア史)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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桜井(ギリシア史)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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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藤、村田(ギリシアを知る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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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藤、村田(ギリシアを知る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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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ッドハウス(近代ギリシ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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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ッドハウス(近代ギリシ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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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藤、村田(ギリシアを知る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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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ッドハウス(近代ギリシ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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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ッドハウス(近代ギリシ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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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ッドハウス(近代ギリシ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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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藤、村田(ギリシアを知る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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