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순 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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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순 태씨는 고구려 무장의 후손인 태금취를 시조로 하고 영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대씨(大氏)에서 태씨(太氏)로 성이 바뀐 유래에는, 발해 멸망 후 고려 태조가 발해 유민에게 태씨를 하사했다는 설과, 대조영을 태조영으로 기록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 시대 문과에 급제한 태두남이 있으며,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에 집성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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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 태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가문 이름 | 영순 태씨 |
종류 | 씨족 |
국가 | 조선 |
민족 | 미상 |
주요 가문 | 미상 |
칭호 | 미상 |
경칭 | 미상 |
영지 | 경상북도문경시 |
창건 | 미상 |
단절 | 미상 |
멸망 | 미상 |
시조 | 태중상 태금취 |
마지막 당주 | 미상 |
현재 당주 | 미상 |
저명한 인물 | 대조영 태완선 |
분가 | 미상 |
씨족 정보 | |
한글 | 영순 태씨 |
한자 | 永順太氏 |
로마자 표기 | MR식: Yŏngsun T'ae-ssi 2000년식: Yeongsun Tae-ssi |
인물 정보 | |
주요 인물 | 태두남 태완선 태종학 태현실 |
2000년 인구 | 4,142명 |
순위 | 미상 |
2. 역사
족보에 의하면 중시조 태금취(太金就)는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이다. 태금취는 고려 고종 때 금교(金郊)에서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올라 영순군(永順君)에 봉해졌다.[1] 후손들은 대중상을 도시조로, 태금취를 시조로 하고 영순(永順)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대중상을 도시조로, 태금취를 시조로 하는 영순 태씨는 족보에 따르면 중시조 태금취(太金就)는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이다. 태금취는 고려 고종 때 금교(金郊)에서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영순군(永順君)에 봉해졌다.[3]
협계 태씨는 태수한의 첫째 아들 태집성에서 유래하며, 영순 태씨는 태수한의 둘째 아들 태웅성에서 분파했다.[1] 남원, 나주, 밀양 등을 본관으로 삼는 태씨가 있으나 모두 한 뿌리에서 갈라진 것이다.[1]
조선 후기에 편찬된 『영순 대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는 상장군·병마원수로 영천군에 봉해진 태웅성의 아들 태금취이며, 도시조 태중상의 18세 손이다.[3] 태금취는 고려 고종 때 김교에서 Mongol military tactics and organization|몽골의 군사 전술 및 조직영어를 격퇴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그 후 영순군에 봉해져 상주군 북면 임하촌에 정착했으며, 그 자손의 일부는 합계 태씨로 분립되었다.[1]
태두남(1486년~1537년) - 본관은 영순(永順). 자는 망이(望而), 호는 서암(西菴)이다. 발해 국왕 대조영의 후손으로, 유광(有光)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치생(致生)이고, 아버지는 효정(孝貞)이다. 1513년(조선 중종 8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형조좌랑·정랑, 개령현감, 경상도도사, 사예, 사도시첨정, 전라도 암행어사, 장령, 남원부사, 선산부사, 직강, 사섬시정(司贍寺正), 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53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7]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발해촌[4]
영순 태씨는 조선시대에 무과 급제자 4명, 문과 급제자 1명, 생원시 합격자 4명, 진사시 합격자 3명을 배출하였다.[1]
조선 후기에 편찬된 『영순 대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는 상장군·병마원수로 영천군에 봉해진 태웅성의 아들 태금취이며, 도시조 태중상의 18세 손이다.[3] 『합계 태씨 족보』에서는 태금취가 고려 고종 때 김교에서 Mongol military tactics and organization|몽골의 군사 전술 및 조직영어을 격퇴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그 후 영순군에 봉해져 상주군 북면 임하촌에 정착했으며, 그 자손의 일부는 합계 태씨로 분립되었다고 기록한다.[1] 남원 태씨, 나주 태씨, 밀양 태씨도 있지만, 모두 영순 태씨와 합계 태씨에서 분적되었다. 특히 합계 태씨는 전라북도 임실군과 옥구 등에 집거하고 있으며, 남원 태씨는 현재 북한에 많이 살고 있다.[3]
본관인 영순에 관해서는, 『고려사』 권57 지리지2 경상도 상주목조에 "언전(諺伝), 주 북면 임하촌 사람의 성씨가 태씨인 자가, 도적을 잡아 공이 있어 그 마을을 높여 영순현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증보문헌비고』 권52 제계고·부씨족·태씨조에 "고려 시대, 영순 부곡민, 태씨 성을 가진 자가 있어, 도적을 잡아 공이 있어 부곡을 높여 현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임하촌은 부곡으로 추정된다.[5] 고려 시대의 부곡 또는 소는 지방 행정 제도의 일환을 이루는 행정 구역이지만, 군현에 예속되어 주민 전체가 국가가 부과한 특정 역을 세습적·집단적으로 의무화한 정치적, 사회 경제적으로 낮은 처지에 놓여 금, 은, 동, 철, 자기, 기와, 숯, 먹, 종이, 명주, 견, 차, 생강, 미역, 소금, 어류 등의 물품의 생산·공납이 의무화되어 있었다.[5]
기타무라 히데토는 "기록에 나타나는 당시의 태씨의 실례를 보면, 어느 시기의 망명자의 경우에도, 고려에서의 정치적, 사회 경제적 지위·처지는, 어느 쪽이라고 하면, 낮고 열등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5]
3. 대씨(大氏)가 태씨(太氏)로 바뀐 연유
대씨(大氏)가 태씨(太氏)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발해가 멸망한 뒤 934년(태조 17)에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 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자, 고려 태조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에게 원보수(元甫守)의 벼슬과 함께 태씨(太氏)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동국통감(東國通監)』에서 대조영(大祚榮)을 태조영(太祚榮)이라 한 후로 자손들이 태씨를 칭하였다는 것이다.
4. 분파
5. 본관
본관인 영순에 관해서는, 『고려사』 권57 지리지2 경상도 상주목조에 "언전(諺伝), 주 북면 임하촌 사람의 성씨가 태씨인 자가, 도적을 잡아 공이 있어 그 마을을 높여 영순현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5] 고려 시대의 부곡 또는 소는 지방 행정 제도의 일환을 이루는 행정 구역이지만, 군현에 예속되어 주민 전체가 국가가 부과한 특정 역을 세습적·집단적으로 의무화한 정치적, 사회 경제적으로 낮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5]
기타무라 히데토는 "기록에 나타나는 당시의 태씨의 실례를 보면, 어느 시기의 망명자의 경우에도, 고려에서의 정치적, 사회 경제적 지위·처지는, 어느 쪽이라고 하면, 낮고 열등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5]
6. 인물
7. 집성촌
8. 과거 급제자
시험 종류 합격자 수 합격자 명단 무과 4명 태명철, 태진희, 태형엽, 태우일 문과 1명 태두남 생원시 4명 태두남, 태석룡, 태언룡, 태응규 진사시 3명 태두남, 태석룡, 태순민
8. 1. 무과
성명 |
---|
태명철 |
태진희 |
태형엽 |
태우일 |
8. 2. 문과
태두남8. 3. 생원시
태두남, 태석룡(太錫龍), 태언룡(太偃龍), 태응규(太應奎)[1]8. 4. 진사시
태두남, 태석룡, 태순민참조
[1]
웹사이트
태씨(太氏) 본관(本貫) 영순(永順)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9-07
[2]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7
[3]
웹사이트
발해 대조영의 후손 太氏 연원과 현황
https://www.yeongnam[...]
2006-10-03
[4]
웹사이트
발해 대조영 후손들이 경북 경산에 모여사는 이유는…
https://www.joongang[...]
2017-05-25
[5]
서적
고려시대의 발해계 민관견
대수관서점
1998-09
[6]
인물
[7]
서적
학사집 권7,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집의 태 공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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