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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스 페테르 야콥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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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옌스 페테르 야콥센은 윌란 반도에서 태어난 덴마크 작가로, 소설, 단편, 시를 남겼다. 그는 식물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찰스 다윈의 저서를 덴마크어로 번역했으며, 20세 무렵 무신론자가 되었다. 야콥센은 결핵으로 인해 문학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으며, 소설 《마리 그루베 부인》과 《닐스 뤼네》를 통해 여성의 성적 욕망과 무신론자의 고뇌를 다루었다. 그의 작품은 토마스 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음악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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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스 페테르 야콥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옌스 페테르 야콥센
옌스 페테르 야콥센
출생1847년 4월 7일
출생지덴마크 티스테드
사망1885년 4월 30일 (38세)
사망지덴마크 티스테드
직업작가

2. 생애

옌스 페테르 야콥센은 1847년 윌란 북부의 항구 도시 티스테드에서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부터 식물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코펜하겐 대학교에 진학하여 식물학을 전공했다.[1] 초기에는 과학 연구에 몰두하여 안홀트와 뢰쇠 섬의 식물상을 조사하고[1], 조류 연구로 대학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찰스 다윈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아 그의 주요 저작인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를 덴마크어로 번역하여 소개했다.[1]

20세 무렵 신앙의 위기를 겪고 무신론자가 되었으며[2], 이는 그의 삶과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젊은 나이에 결핵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과학 연구보다는 문학 창작에 점차 집중하게 되었다. 특히 당대 유명 비평가 게오르그 브란데스와의 만남은 그가 문학의 길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

야콥센은 1876년 17세기 실존 인물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역사 소설 『마리 그루베』를 발표하여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80년에는 무신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의 고뇌와 신념을 탐구한 『닐스 뤼네』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입센, 릴케 등 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무신론자의 성경’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몇몇 단편 소설을 발표했으나, 1885년 결핵으로 인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야콥센은 윌란 북부의 항구 도시 티스테드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부유한 선주이자 석탄 상인이었고, 그는 다섯 자녀 중 장남이었다.[1] 어릴 적부터 과학, 특히 식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9세에는 이미 그 지방의 모든 식물을 알 정도로 식물학에 열중했다. 이러한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은 평생 이어졌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학교를 다녔고, 16세에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식물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괴테, 실러, 빌란트 등 독일 작가의 작품을 섭렵했으며, 18세에는 셰익스피어를 발견하고 탐독했다. 1868년에는 코펜하겐 대학교 학생 신분이었다.[1]

20세 무렵, 그는 신앙의 위기를 겪었다. 키르케고르, 성경, 포이어바흐, 하이네 등의 저작을 읽으며 고뇌한 끝에 무신론자가 되었다.[2] 그는 훗날 "고통스러운 내적 갈등을 거쳐, 종교를 떠났다"라고 회고했다.

1870년, 그는 식물학을 직업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코펜하겐의 한 과학 단체로부터 안홀트와 뢰쇠 섬의 식물상을 보고하는 임무를 받았다.[1] 이 시기 찰스 다윈의 이론에 깊이 매료되어, 덴마크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저작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를 덴마크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1] 또한 1872년에는 다년간의 조류 연구를 정리하여 대학으로부터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결핵에 걸렸고, 이 병은 결국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1] 늪이나 강에서의 무리한 식물 및 조류 채집 활동이 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질병은 이후 그의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1]

2. 2. 과학 연구와 다윈의 영향

야콥센은 어릴 적부터 과학, 특히 식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 9세 때 이미 고향 티스테드 지방의 모든 식물을 알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식물학에 열중했으며, 이러한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은 평생 이어졌다. 1868년 코펜하겐 대학교 학생이 된 그는 식물학을 전공했다.

1870년, 야콥센은 코펜하겐의 한 과학 단체로부터 안홀트와 뢰쇠 섬의 식물상을 보고하도록 파견되어 연구를 수행했다.[1] 1872년에는 다년간의 조류(藻類)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대학으로부터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구를 위한 무리한 활동은 그의 건강에 영향을 미쳐, 이 무렵부터 가슴 통증을 앓기 시작했다.

이 시기 찰스 다윈의 연구는 야콥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다윈의 연구가 덴마크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를 덴마크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1] 이 번역 작업은 1873년에 진행되었다.

젊은 시절 결핵에 걸린 것은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요양을 위해 남유럽을 여행하면서 과학 연구에서 점차 멀어졌고, 대신 문학 창작에 집중하게 되었다.[1]

야콥센은 무신론자였는데[2], 이는 20세 무렵 겪은 신앙의 위기와 여러 사상가들의 저작 탐독 끝에 형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그가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고 번역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2. 3. 문학으로의 전환과 무신론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식물학을 전공하며 과학자의 길을 걷던 야콥센은 20세 무렵 신앙의 위기를 겪었다. 키르케고르, 성경, 포이어바흐, 하이네 등 다양한 사상가들의 저작을 탐독한 끝에 무신론자가 되었다.[2] 그는 훗날 "고통스러운 내적 갈등을 거쳐, 종교를 떠났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신념의 변화는 그의 개인사에도 영향을 미쳐, 1870년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던 약혼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무신론으로 약혼녀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파혼을 결심했다.

같은 시기, 야콥센은 문학에 대한 관심도 키워나갔다. 입센의 『페르 귄트』에 깊은 감명을 받아 북유럽 사가를 소재로 한 작품 구상에 착수했으며, 이는 훗날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곡을 붙인 『구레의 노래』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이때 장편 소설 『무신론자』를 구상했는데, 이는 이후 『닐스 뤼네』로 발전하게 된다.

과학 연구도 계속하여, 1870년에는 안홀트와 뢰쇠 섬의 식물상 보고를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1] 또한 당시 덴마크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찰스 다윈의 이론에 매료되어 그의 주요 저작인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를 덴마크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1] 1872년에는 다년간의 조류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대학으로부터 금상을 수상했으나, 연구 과정에서의 무리가 건강 악화로 이어져 젊은 시절부터 앓기 시작한 결핵이 심화되었다.

1873년, 야콥센은 유명 비평가 게오르그 브란데스를 만났다. 브란데스는 야콥센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격려에 힘입어 야콥센은 역사 소설 『마리 그루베』 집필을 시작했다.[1] 그의 질병은 남유럽으로의 요양 여행을 촉진했고, 이는 그를 과학 연구에서 점차 멀어지게 하고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마리 그루베』는 1876년 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병세가 깊어지는 와중에도 야콥센은 창작 활동을 이어갔고, 1880년 마침내 『닐스 뤼네』를 고향 집에서 완성했다. 이 작품은 신에 저항하며 시와 연애로 인간성을 고양시키려 했으나, 결국 살아가는 근거와 목적을 잃어가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인물을 창조하여,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무신론자의 성경'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야콥센은 이후 단편 『베르가모의 흑사병』, 『페언스 부인』 등을 발표했으나, 1885년 결핵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 4. 작품 활동과 죽음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에 깊은 감명을 받은 야콥센은 문학 창작에 눈을 돌렸다. 그는 북유럽의 전통적인 이야기인 사가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시 《콜마크와 스텐게르데》를 썼고, 시와 단편을 엮은 연작 《선인장 꽃이 피다》에도 착수했다. 비록 《선인장 꽃이 피다》는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훗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대규모 칸타타 『구레의 노래』를 작곡했다. 또한 이 시기에 장편 소설 『무신론자』를 구상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닐스 뤼네』로 발전하게 된다.

1872년, 야콥센은 《신 덴마크 월간》이라는 잡지에 중편 소설 『모언스(Mogens)』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오랜 기간 진행해 온 조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코펜하겐 대학교로부터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구를 위해 늪이나 강에서 무리하게 표본을 채집했던 탓인지, 이때부터 결핵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873년에는 찰스 다윈의 중요한 저작인 『종의 기원』과 『인간의 진화와 성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을 덴마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동시에 첫 장편 소설 『마리 그루베 부인』 집필을 위해 도서관에서 17세기 관련 고문헌들을 수집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건강이 악화되자 요양을 겸해 독일드레스덴, 뮌헨, 체코프라하, 오스트리아, 이탈리아피렌체, 로마 등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1876년 말, 마침내 장편 소설 『마리 그루베 부인(Fru Marie Grubbe)』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17세기에 실존했던 아름다운 귀족 여성 마리 그루베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그녀는 국왕의 이복동생, 귀족 기사, 자신의 집 하인 등 여러 남성과의 관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평범한 뱃사공의 아내가 된 인물로, 야콥센은 그녀의 복잡한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소설은 출간 즉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여러 나라에서 번역 제의를 받았다.

1880년, 결핵이 점점 심해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야콥센은 고향 티스테드의 집에서 또 다른 장편 소설 『닐스 뤼네(Niels Lyhne)』를 기적적으로 완성했다. 이 작품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시와 사랑을 통해 인간성을 드높이려 하지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점차 잃어가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려 하는 한 무신론자의 고뇌를 그렸다. 『닐스 뤼네』는 입센이나 독일의 시인 릴케 같은 당대의 문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며, 일부에서는 ‘무신론자들의 성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단편 소설 『베르가모의 흑사병(Pesten i Bergamo)』, 『페언스 부인(Fru Fønss)』 등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으나, 결국 1885년 결핵으로 인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세계

야콥센은 비록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두 편의 소설, 일곱 편의 단편 소설, 그리고 사후에 출판된 시집 한 권을 통해 덴마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는다. 그의 작품은 섬세한 심리 묘사, 자연주의적 경향, 그리고 예술성을 추구하는 독특한 문체로 특징지어진다.

대표작으로는 17세기 덴마크 귀족 여성의 삶을 통해 여성의 성적 욕망과 주체성을 탐구한 역사 소설 마리 그럽 (1876)과, 무신론자의 실존적 고뇌와 운명을 그린 닐스 린 (1880)이 있다. 이 소설들은 각각 D. H. 로렌스나 알베르 카뮈의 작품 세계를 예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3] 단편 소설집 《모겐과 기타 소설》(1882) 역시 그의 문학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산문보다 후기 낭만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으며, 몽환적이면서도 자연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야콥센은 정치보다는 과학심리학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인간 내면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작품은 후대의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 토마스 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헤르만 헤세 등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3][4][5] 또한 프레데릭 델리우스나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같은 작곡가들도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3. 1. 주요 주제와 특징

야콥센의 작품은 소설 두 편, 단편 소설 일곱 편, 사후 출판된 시집 한 권으로 양은 적지만, 그를 덴마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역사 소설 《마리 그럽》(1876, 영문 번역: 《17세기의 여성 마리 그럽》 1917)은 여성을 성적 존재로 다룬 최초의 덴마크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소설은 17세기 덴마크 귀족 여성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그녀가 독립적이고 만족스러운 에로틱한 삶을 추구하며 왕족에서 뱃사공의 아내로 사회적 지위가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는 여러 면에서 D. H. 로렌스가 다루게 될 주제를 예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콥센의 두 번째 소설 《닐스 린》(1880, 영문 번역 1919)은 가혹한 현실 속에서 무신론자의 운명을 추적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믿음 부재가 비극과 개인적 위기를 통해 시험받는 과정을 겪으며, 전쟁 속에서 환멸을 느끼지만 끝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전기 작가 모르텐 회이 옌센은 이 소설이 알베르 카뮈의 작품을 예견한다고 평가했다.[3]

그의 단편 소설들은 《모겐과 기타 소설》(1882, 《모겐과 기타 이야기》로 번역, 1921, 그리고 《모겐과 기타 이야기》, 1994)에 모여 있다. 이 중 "모겐"(1872)은 젊은 몽상가가 사랑과 슬픔, 그리고 새로운 희망 속에서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그의 공식 데뷔작이다. "안개 속의 총성"은 증오와 복수의 무익함을 다룬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을 받은 이야기이며, "베르가모의 페스트"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은 유혹 속에서도 종교에 매달리는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프루 퓐스》(1882)는 재혼을 원하는 미망인이 이기적인 자녀들과 갈등하며 비극적인 단절을 맞는 슬픈 이야기이다. 《모겐과 기타 소설》과 《닐스 린》은 모두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프란츠 자베르 카푸스에게 보낸 편지(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극찬을 받았다.[4]

야콥센의 시는 산문보다 후기 낭만주의의 영향을 더 짙게 보여준다. 많은 작품이 쓸쓸하고 몽환적이며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자연주의적인 면모도 함께 지닌다. 대표작으로는 난해한 시로 평가받는 "미켈란젤로의 손 그림에 대한 아라베스크"(1875년경)가 있는데, 이 시는 예술이 삶의 의미로서 불멸성을 대체하려는 시도를 주제로 다룬다. 그의 시들은 1890년대 덴마크 상징주의 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야콥센은 동시대 많은 작가들과 달리 정치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주로 과학과 심리학에 몰두했다. 그는 무엇보다 '예술가'였으며, 그의 산문과 시에서 보이는 섬세한 묘사 능력과 장면 구성 능력은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때로는 그의 문체가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소설은 단순한 사건 전개보다는 다채로운 장면들을 포착하여 제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작품 수는 적지만 야콥센의 국제적인 영향력은 상당했다. 독일에서는 그의 소설과 시가 널리 읽혔으며, 토마스 만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작가 조지 기싱과 D. H. 로렌스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았다. 기싱은 1889년과 1890년에 《닐스 리네》의 레클람 판을 읽고 "예전보다 더 존경한다"고 썼다.[5] 야콥센의 작품은 특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산문에 큰 영감을 주었다. 릴케는 ''Briefe an einen jungen Dichter'' (번역: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1929)에서 프란츠 자비에르 카푸스에게 야콥센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하며, 릴케는 항상 성경과 야콥센의 전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덧붙였다. 또한, 릴케의 유일한 소설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번역: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 (1910)는 부분 자전적이지만, 가혹한 세상에서 무신론자의 운명을 그린 야콥센의 두 번째 소설 ''닐스 리네'' (1880)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외에도 야콥센은 20세기 초 헨리크 입센, 지그문트 프로이트, 헤르만 헤세, 슈테판 츠바이크, 그리고 T. E. 로렌스 등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은 모두 그의 작품에 대해 언급했다. 토마스 만은 한 인터뷰에서 "아마도 지금까지 내 스타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J. P. 야콥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3]

그는 또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데릭 델리우스의 ''페니모어와 게르다''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는 야콥센의 책에서 가져온 주제를 기반으로 한다. 쇤베르크는 또한 로베르트 프란츠 아르놀트가 번역한 야콥센 텍스트를 그의 여섯 개의 노래, 작품 3의 4번으로 설정했다.

3. 2. 문학적 영향

야콥센의 작품은 두 편의 소설, 일곱 편의 단편 소설, 그리고 사후에 출판된 시집 한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양은 많지 않지만,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덴마크 작가 중 한 명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야콥센은 많은 동시대 작가들과 달리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의 주요 관심사는 과학심리학이었다. 그는 주로 '예술가'였으며, 그의 산문과 시에서 "그림"이나 아라베스크와 같은 장면을 창조하는 능력은 그의 예술성의 중요한 부분이다. 때로는 이러한 스타일이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줄거리 중심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장면을 포착한 스냅샷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평가받는다.

작품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야콥센의 국제적인 영향력은 상당했다. 독일에서는 그의 소설과 시가 널리 읽혔으며, 토마스 만에게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작가 조지 기싱과 D. H. 로렌스 역시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싱은 1889년과 1890년에 닐스 리네의 레클람 판을 읽고 "예전보다 더 존경한다"고 언급했다.[5]

야콥센의 작품은 특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산문에 큰 영감을 주었다. 릴케는 그의 저서 Briefe an einen jungen Dichter|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deu (1929)에서 프란츠 자비에르 카푸스에게 야콥센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하며, 자신은 항상 성경과 야콥센의 전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덧붙였다. 또한, 릴케의 유일한 소설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deu (1910)는 부분적으로 자전적인 작품이지만, 가혹한 세상에서 무신론자의 운명을 그린 야콥센의 두 번째 소설 닐스 리네 (1880)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외에도 야콥센은 20세기 초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여기에는 헨리크 입센, 지그문트 프로이트, 헤르만 헤세, 슈테판 츠바이크, 그리고 T. E. 로렌스 등이 포함되며, 이들은 모두 그의 작품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토마스 만은 한 인터뷰에서 "아마도 지금까지 내 스타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J. P. 야콥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3]

그는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레데릭 델리우스의 오페라 ''페니모어와 게르다''와 아르놀트 쇤베르크칸타타 ''구레의 노래''는 야콥센의 책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를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쇤베르크는 또한 로베르트 프란츠 아르놀트가 번역한 야콥센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그의 여섯 개의 노래, 작품 3 중 네 번째 곡을 작곡했다.

야콥센의 Samlede Skrifterdan (전집)는 홍콩 디즈니랜드 테마파크의 타잔의 나무집 어트랙션에서 난파선에서 건져낸 책 중 하나로 등장하기도 한다.

4. 작품 목록


  • ''모겐스''(1872)
  • ''마리 그루베 부인''(1876)
  • ''닐스 린''(1880)
  • ''베르가모의 페스트''(1881)
  • ''모겐스와 다른 단편들''(1882)
  • ''시집''(1886)
  • ''스케치와 초고''(1886)

5. 한국어 번역본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Jacobsen, Jens Peter EB1911
[2] 서적 The new encyclopedia of unbelief Prometheus Books
[3] 서적 A Difficult Death: The Life and Work of Jens Peter Jacobsen Yale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Ranier Maria Rilke: Letters to a Young Poet http://www.sfgoth.co[...] 2007-12-04
[5] 서적 London and the Life of Literature in Late Victorian England: the Diary of George Gissing, Novelist Harvester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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