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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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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산 전투는 1950년 7월 5일, 한국 전쟁 발발 후 미국 지상군이 처음으로 참전한 전투이다. 스미스 특별기동대가 북한군의 남침을 늦추기 위해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수적 열세와 장비 부족으로 인해 3시간 만에 후퇴했다. 이 전투는 미군의 준비 부족과 북한군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미군은 평택, 대전 등에서 연이어 전투를 치르며 부산까지 후퇴했다. 오산 전투는 북한군의 진격을 잠시 지연시키는 데 기여했고, 이후 오산에는 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참전 용사들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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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전투 이름오산 전투
영어 표기Battle of Osan
일본어 표기烏山の戦い
위치경기도 화성군 오산면 죽미령
일부한국 전쟁
날짜1950년 7월 5일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
지휘관
지휘관 1윌리엄 F. 딘 미 제24사단장 소장 겸 주한 미 지상군 사령관
존 H. 처치 동부사령관 준장
조지 B. 바스 포병사령관 임시 준장
리처드 W. 스테픈스 제21연대장 대령
찰스 B.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장 중령
찰스 토마스 B중대장 중위
리차드 W. 다쉬머 C중대장 대위
밀러 O. 페리 제52포병대대장 중령
드웨인 L. 스코트 A포대장 중위
백인엽 제17연대장 대령 (7월 3일 부상)
김희준 제17연대장 중령 (7월 4일부터)
이관수 제1대대장 소령
송호림 제2대대장 소령
오익경 제3대대장 소령
지휘관 2리영호 제3사단장 소장
김창봉 제7연대장 대좌
김병종 제8연대장 중좌
김만익 제9연대장 대좌
안백성 포병대장 대좌
리권무 제4사단장 소장
최인덕 제5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16연대장 대좌
김희준 제18연대장 대좌
유경수 제105기갑사단장 소장 (7월 5일 승격)
병력
병력 1보병 540명
병력 2보병 5,000명
전차 36대
사상자
사상자 1전사 60명
부상 21명
포로 82명
1개 곡사포 파괴
5개 곡사포 파손
사상자 2전사 42명
부상 85명
전차 1대 파괴
전차 3대 파손
사용 부대
부대 1미국 21 보병 연대 1대대
제52 야전 포병 대대 A 포대
부대 2조선인민군 제4보병사단
제105기갑사단
제16 보병 연대
제18 보병 연대
제107전차연대
이미지
바주카포를 겨냥하는 미군 병사
오산 전투에서 미군 바주카대전차포 사수가 북한군 전차를 향해 바주카대전차포를 겨냥하고 있다.

2. 배경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의 전면적인 대한민국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8]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를 갖춘 북한군은 기습 공격을 통해 대한민국 국군을 격파하며 빠르게 남진했다. 서울이 함락되고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가 남쪽으로 후퇴하는 위기 상황에 직면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한 군대 파병을 결의했다.

미국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제7함대와 극동함대를 파견하여 해상 봉쇄와 항공 지원을 제공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지상군 파병을 명령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지역의 미군 병력은 지속적으로 감축된 상태였고, 가장 가까운 부대였던 일본 주둔 미 제8군의 제24보병사단도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윌리엄 F. 딘 소장은 제24보병사단 예하 3개 연대 중 제21보병연대가 가장 전투 준비가 잘 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과달카날 전투 참전 경험이 있는 찰스 브래드포드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제21보병연대 1대대를 우선적으로 한국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 부대는 C-54 스카이마스터 수송기를 통해 한국으로 공수되어,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다른 미군 부대가 한국에 도착할 시간을 버는 지연 작전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2. 1. 조선인민군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밤, 조선인민군은 10개 사단, 8만 9천 명의 병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면 침공했다.[8] 북한군은 6개 방향으로 이동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대한민국 국군은 조직과 장비 부족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은 남한 병사들의 저항을 격파하며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대부분의 남한군은 후퇴했고, 북한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정부와 군대는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2. 2. 미국의 참전 결정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 30일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8] 맥아더는 주일 미군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미 제24보병사단을 한국으로 전개시키라고 명령했다.[9]

이에 따라 제8군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찰스 B.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가 편성되었다.[10] 이 부대는 7월 1일부터 비행기로 부산에 공수되어 부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다음날 아침 8시에 대전에 도착했다.[9]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보병 406명(B, C 2개 소총중대, 75mm 무반동총 1개 소대, 4.25인치 박격포 1개 소대, 대대 본부중대, 통신소대)과 포병 134명(미 제52포병대대 A포대 105mm 포 6문)으로 구성되었다.[10]

2. 3.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편성

미국 제8군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1대대가 주축이 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950년 7월 1일부터 비행기를 통해 부산에 공수되었다.[9] 이 부대는 제21연대 1대대를 중심으로 보병 406명과 포병 134명으로 구성되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대대장은 찰스 B.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으로, 과달카날 전투에서 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장교였다.[10]

보병 부대는 2개 소총중대(B중대, C중대), 75mm 무반동총 1개 소대, 4.25인치 박격포 1개 소대, 대대 본부중대 및 통신소대로 구성되었다. 포병 부대는 미 제52포병대대 A포대로, 105mm 곡사포 6문, 50구경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4정, 바주카 4개를 보유했다.[10] 105mm 곡사포에는 고폭탄(HE) 1,200발이 장착되어 있었지만, 전차 장갑을 관통할 수는 없었다. 포대에는 고폭탄 대전차탄(HEAT) 6발만 지급되었으며, 이 탄약은 모두 주요 포대 배치 지점 앞에 위치한 6번 곡사포에 할당되었다.

스미스 중령은 윌리엄 F. 딘 소장으로부터 부산 도착 후 대전으로 이동, 최대한 부산에서 먼 북쪽에서 적을 지연시키고, 북쪽에서 주 도로를 차단하며, 존 H. 처치 장군을 만나라는 작전 명령을 받았다. 스미스 중령은 전방지휘소에서 처치 장군에게 신고하고 오산 북방 죽미령까지 지형정찰을 실시한 후 대전으로 복귀했다. 그날 밤, 부대는 기차로 이동하여 평택과 안성에 1개 중대씩 배치되었고, 대대지휘소는 평택에 설치되었다.

제24사단의 첫 부대는 6월 30일 일본 이타즈케 공군기지를 출발했다. 이 부대는 장비가 부족하고 병력이 미달이었다. 제21보병연대 제1대대는 미국 육군 대대의 정규 편제인 3개 중대가 아닌 2개 중대(B중대와 C중대)만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대대본부중대 필요 병력의 절반, 통신 소대의 절반, 그리고 낡은 M9A1 바주카 로켓 발사기 6개, 75mm 무반동총 2개, 4.2인치 박격포 2개, 60mm 박격포 4개로 무장한 중화기 소대의 절반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장비의 상당 부분은 병력이 부족한 제21연대의 다른 부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작전부대 병사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없는 10대 청소년들이었으며, 기초 훈련을 겨우 8주 받았다. 작전부대 장교 중 3분의 1만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투 경험이 있었고, 입대 병사 중 6명 중 1명만 전투 경험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자원하여 작전부대에 합류했다. 병사들은 각각 탄약 120발과 이틀치 C-레이션만 지급받았다.

7월 1일까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한국에 완전히 도착하여 대전에 잠시 본부를 설치했다. 이후 부대는 북한군에 대항하기 위해 철도와 트럭으로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북한군의 공세에 대한 초기 충격을 흡수하고[1] 더 큰 북한군 부대의 진격을 지연시켜 더 많은 미군 부대가 한국으로 들어올 시간을 벌기 위한 임무를 가지고 한국에 파병된 여러 소규모 미군 부대 중 첫 번째였다.

3. 전투

7월 3일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 남하하기 시작하자, 7월 4일 대전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하게 된 윌리엄 F. 딘 소장은 존 H. 처치 장군을 부사령관에 임명하고, 조지 B. 바스 준장을 평택에 보내 스미스 중령에게 오산 북방에서 방어를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Soldiers carrying their bags off of a train in a Korean train station
한국에 도착하는 스미스 부대.


7월 5일 03:00시경 스미스 부대는 철로와 도로 사이 좌측 능선에 B 중대, 철로 좌측 우측 고지에 C 중대를 배치하고, 각 중대 지역에 75mm 무반동총 1정씩을 배치했다. 4.2인치 박격포는 B 중대 후방 약 365.76m 지점에 예비로 배치했다. 밀러 O. 페리 중령은 보병진지 후방 약 약 1828.80m 지점에 5문의 포를, 보병과 포병진지 중간 언덕에 대전차 포탄 6발을 가진 1문의 포를 배치했다.

Map of a group of U.S. positions on two hills north of a town, with movements of large Chinese forces moving south and enveloping them
오산 전투 지도


07:00시경 수원 인근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07:30분경 전차 대열이 접근했다. 08:00시경 8대의 전차가 미군을 향해 접근했다.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 전차를 상대로 첫 교전을 벌였으나, 대전차 포탄 부족과 화력 열세로 큰 피해를 입었다. 09:00경 첫 교전이 종료된 후, 북한군 보병 부대가 도착하여 11:45분경 양측 보병 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3시간 동안 전투가 이어졌으나, 스미스 부대는 포병과의 연락 두절, 소총탄 부족으로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했다. 스미스 중령은 C중대를 먼저 철수시켰고, B중대 2소대는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한 채 다급히 철수했다.

스미스 중령은 잔류병을 이끌고 7월 6일 천안에 도착했다.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한 B중대원 일부는 며칠 후 오산에 도착하거나, 동해안이나 서해안에서 조각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기도 했다. 스미스 부대원 540명 중 150명이 전사하고, 포병대대 장교 5명과 병사 26명이 실종되었다. 대부분의 장비는 북한군에 노획되었으나, 북한군 4사단도 전사자 42명, 부상자 85명, 전차 4대를 손실했다.

A soldier's body lying on the ground with his hands tied behind his back.
북한군에게 붙잡혀 살해된 미 제24사단 21보병연대의 병사

3. 1. 북한군 전차 부대와의 교전

7월 5일 오전 7시 30분경, 스미스 특수부대는 북한 제105기갑사단 제107전차연대 소속 T-34/85 전차 8대가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11] 미군은 오전 8시 16분에 북한군 전차에 첫 포격을 가했다.[11] 보병 부대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서 여러 발의 105mm 곡사포탄을 맞았지만, 북한군 전차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50년 북한군의 표준 전차였던 T-34 전차는 오산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전차들이 700m까지 접근하자, 75mm 무반동총이 발사되어 선두 전차에 직격탄을 명중시켰지만, 전차는 손상되지 않았다.[11] 북한군 전차는 반격했지만 미군의 위치를 찾지 못해 효과가 없었다.

전차들이 보병 전선에 도달하자, 올리 코너 소위는 약 13.72m 거리에서 2.36인치 로켓 22발을 발사했다. 일부만 발사되었지만, 여러 발이 T-34의 장갑이 얇은 후면 장갑에 명중했다. 그러나 탄두는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고, 북한군 전차는 계속 전진했다. 전차들은 도로봉쇄를 무시하고 도로를 따라 진격했는데, 이는 도로봉쇄가 한국군에 의해 설치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1] 전차들이 도로 정상에 도달하자, 전방 곡사포가 HEAT탄을 발사하여 선두 전차 2대를 손상시키고 한 대를 불태웠다.[11] 불타는 전차의 승무원 중 한 명이 PPSh-41을 들고 나타나 미군 기관총 부대원 한 명을 사살한 후 자신도 사망했는데, 이 미군 병사가 한국 전쟁 지상전 최초의 사상자였다.[11]

HEAT탄이 소진된 곡사포는 고폭탄을 발사하기 시작했지만, 세 번째 T-34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전차들은 진격을 계속했고, 미군의 곡사포와 바주카포 사격을 무시했다. 미군은 105mm 포탄이 북한군 T-34의 궤도에 명중하여 손상시킴으로써 또 다른 T-34를 무력화시켰다. T-34 전차의 궤도가 보병과 포병 부대 사이의 통신선을 절단하여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밀러 O. 페리는 무력화된 전차의 승무원을 항복시키려고 할 때 북한군 소화기 사격에 다리를 다쳤다. 그의 포병 부대는 효과 없이 북한군 전차에 계속 사격을 가했다.[11]

한 시간 이내에 25대의 T-34 전차로 이루어진 두 번째 대열이 특수부대에 접근했다. 새로운 T-34 대형은 별다른 조직 없이 하나 또는 두세 대씩 밀집하여 진격했다. 곡사포 포대는 대열의 또 다른 전차의 궤도에 명중시켜 무력화시키고 3대를 더 손상시켰다. 북한군 전차는 전방 곡사포(6번)를 파괴하고 승무원 중 한 명을 부상시켰으며, 추산 20명의 보병을 사상하고 보병 전선 뒤에 주차된 모든 차량을 파괴했다. 주 포병 위치에서 5문의 105mm 포 중 하나가 근접탄에 의해 약간 손상되었다.[11] 포병대원 중 여러 명이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지만, 페리는 대부분을 설득하여 복귀시켰다.

스미스는 나중에 포탄이 오래되어 성능이 저하되었다고 믿었다고 진술했지만, 2.36인치 바주카의 비효율성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 장갑차에 대해 반복적으로 입증되었다. 평시 방위력 감축으로 인해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은 소련 전차를 무력화할 수 있는 M28A2 HEAT 대전차탄을 장착한 개량형 M20 3.5인치 "슈퍼 바주카"를 받지 못했다.[11] 마지막 전차들이 전선을 통과한 후, 약 한 시간 동안 북한군은 발견되지 않았다.

3. 2. 북한군 보병 부대와의 교전

제4보병사단 소속 제16보병연대와 제18보병연대 2개 연대의 병력 약 5,000명이 소장 이권무 사령관 지휘하에 서울에서 진격해 왔다.[11] 이들은 T-34-85 전차 3대를 선두에 세우고 미군 방어선으로 접근했다. 이들은 이전에 진격한 전차들과 교신하지 않았고, 미군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전 11시 45분, 북한군 보병 행렬이 미군으로부터 약 1,000 야드 (914 미터) 거리까지 접근하자, 스미스 중령은 특공대가 보유한 모든 무기를 사용하여 사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1] 박격포, 기관총, 포병 및 소총 사격으로 여러 대의 트럭이 파괴되면서 행렬은 흩어졌다. 선두 전차 3대는 스미스 특공대에서 약 300 미터 거리까지 접근하여 사격을 가했다.

그 뒤를 따르던 약 1,000명의 북한군 보병은 도로 동쪽 논밭에 형성되어 미군을 측면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스미스는 북한군에 대한 포격을 명령하려 했지만, 통신이 두절되어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45분 이내에 도로 서쪽에 또 다른 포위 부대가 형성되어 스미스는 도로 동쪽으로 소대를 이동시켜야 했다. 그러자 미군 보병은 북한군의 박격포와 포병 사격을 받기 시작했다.[11]

3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탄약이 부족하고 통신이 두절되었으며, 포병 지원도 받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3. 3. 미군의 후퇴

7월 5일 오후 2시 30분경, 스미스 중령은 탄약 부족과 통신 두절을 이유로 미군의 철수를 명령했다.[11] 북한군은 미군 부대의 양측면과 후방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스미스 중령은 부대가 차례대로 질서 정연하게 철수하도록 지시했다. C중대가 먼저 철수했고, 그 뒤를 미군 의무병, 본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B중대가 뒤따랐다.[11]

하지만 B중대 2소대는 철수 명령을 받지 못했다. 이 소대는 자신들이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질서 정연한 철수는 불가능했고, 부상병들을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도 없었다. 2소대는 대부분의 장비를 현 위치에 남겨두고 철수했으며, 이 장비들은 북한군에게 노획되었다.[11]

생존자 대부분은 포로 생활을 면했지만, 들것에 실린 여러 명의 부상당한 병사들과 함께 의무병 한 명이 남겨졌다. 이후 미군 부상병들은 들것에 누운 채 총살당한 채 발견되었고, 의무병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11]

이후 후퇴는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퇴각으로 변했다. 스미스 특임부대는 병사들이 적의 사격에 가장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철수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11] 스미스 특임부대 생존자들은 A포대 위치에 도달했다. 포병대원들은 남은 5문의 곡사포의 조준경과 약실을 제거하여 무력화시키고, 나머지 특임부대원들과 함께 질서 정연하게 오산 북쪽 교외로 이동했다.[11] 그곳에서 대부분 부대의 은닉된 수송 차량들을 온전한 상태로 발견했다. 북한군의 공격을 받지 않은 차량들은 평택천안으로 출발하여 도중에 낙오자들을 태우고, 결국 2차 방어선을 구축한 24보병사단 부대에 합류했다.[11]

해가 지기 전에 250명이 미군 전선으로 복귀했고, 약 150명이 사망, 부상 또는 실종되었다. 다른 낙오자 대부분은 그 후 며칠 동안 미군 전선에 합류했다. B중대 2소대의 마지막 낙오자들은 5일 후 북한군보다 30분 먼저 천안에 도착했다. 초기 집계 결과, 스미스 특임부대는 전사 20명, 전상 또는 전사 130명, 포로 약 36명의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수치는 사망 60명, 부상 21명, 포로 82명(이 중 32명은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으로 수정되었다. 이 사상자 수는 스미스 특임부대의 40%에 달했다.[11] 부산 돌파 공세 당시 북쪽으로 진격하던 미군은 나중에 24보병사단 병사들의 시체 여러 구가 들어있는 얕은 무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뒤통수에 총을 맞았고, 손은 통신선으로 뒤로 묶여 있었다.[11]

4. 전투 결과 및 영향

스미스 부대의 패배로 미 지상군 투입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막을 수 있다는 더글러스 맥아더윌리엄 F. 딘의 기대는 무너졌다.[12] 매슈 리지웨이는 맥아더가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하고 1개 대대만 투입한 것은 지나친 오만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미군 참전을 예상치 못한 인민군이 전선 재정비에 들어가면서 미군이 10일을 벌었다며,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13]

오산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지상전에 참여한 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미군의 전쟁 준비 부족, 낙후된 무기, 훈련 부족 등을 드러냈고, 잘 훈련된 북한군에 대적하기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미군은 훈련 부족으로 조기에 진지를 버리고 북한군에게 장비와 부상자를 넘겨주기도 했다. 스미스는 너무 오래 자리를 지켜 북한군에게 포위당하고 후퇴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넓은 기념비 앞에 흰색 해군 제복을 입은 수병들이 줄지어 서 있고, 녹색 군복을 입은 다른 군인이 옆 연단에 서 있는 모습
오산에 있는 스미스 특수부대 기념비 앞에 있는 한국 해군 병사들


스미스 특수부대는 큰 패배를 당했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몇 시간 지연시키는 임무를 완수했다.[13] 이후, 미 제24보병사단평택 전투, 천안 전투, 전의-조치원 전투, 금강 방어선 전투, 대전 전투 등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계속 패배하여 부산까지 밀려났다. 그곳에서 부산 주변 전투가 벌어져 결국 북한군이 패배했다.

한국군도 동쪽에서 지연전을 펼쳤지만, 스미스 부대와 제34보병연대가 후퇴하면서 좌익의 위험 때문에 미군에 맞춰 후퇴해야 했다.[7] 미 제24사단은 대전 전투에서도 크게 패하여, 연합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으로 몰리게 되었다.

3개월 후인 9월 19일, 오산은 남쪽에서 진격하는 미군과 UN군이 북쪽에서 진격하는 제10군단 부대와 만난 곳이 되었다. 제10군단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한군을 기습한 후 공세를 펼치고 있었고, 양측의 공세로 북한군은 남쪽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한국 전쟁 후 수년 동안 미군은 스미스 특수부대가 훈련을 받았던 일본 지역을 기념 장소로 사용했다. 오산 전투터에도 스미스 특수부대 기념비가 세워졌고,[3] 2010년 오산 전투 60주년, 2011년 61주년 기념식 등 매년 오산 전투 기념식을 거행한다.[4][5]

4. 1. 미군의 피해

스미스 부대는 철수 과정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스미스 특임부대 생존자들은 A포대 위치에 도달했고, 포병대원들은 남은 5문의 곡사포의 조준경과 약실을 제거하여 무력화시킨 후, 나머지 특임부대원들과 함께 오산 북쪽 교외로 이동하여 대부분의 부대 수송 차량을 확보했다. 이 차량들은 북한군의 공격을 받지 않고 평택과 천안으로 이동하여 낙오자들을 태우고 2차 방어선을 구축한 24보병사단 부대에 합류했다.

해가 지기 전 250명이 미군 전선으로 복귀했고, 약 150명이 사망, 부상 또는 실종되었다. B중대 2소대의 마지막 낙오자들은 5일 후 북한군보다 30분 먼저 천안에 도착했다. 초기 집계 결과, 스미스 특임부대는 전사 20명, 전상 또는 전사 130명, 포로 약 36명의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수치는 사망 60명, 부상 21명, 포로 82명(이 중 32명은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으로 수정되었다. 이 사상자 수는 스미스 특임부대의 40%에 달했다.

부산 돌파 공세 당시 북쪽으로 진격하던 미군은 24보병사단 병사들의 시체 여러 구가 들어있는 얕은 무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뒤통수에 총을 맞았고, 손은 통신선으로 뒤로 묶여 있었다.

4. 2. 북한군의 피해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은 약 42명이 사망하고 85명이 부상당했으며, 전차 4대가 파괴되거나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12] 이 전투로 북한군의 진격은 약 7시간 지연되었다.[13]

4. 3. 전략적 영향

스미스 부대의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투입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막을 수 있다는 더글러스 맥아더윌리엄 F. 딘의 기대는 무너졌다.[12]

매슈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조선인민군 10개 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지나친 오만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패배를 오히려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군 참전을 예상치 못한 인민군이 전선 재정비에 들어가면서 미군이 10일을 벌었다는 이유였다.[13]

이후 미 제24보병사단평택 전투, 천안 전투, 전의-조치원 전투,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 대전 전투 등에서 북한군 3, 4 사단, 제105전차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오산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지상전에 참여한 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미군의 전쟁 준비 부족, 낙후된 무기, 훈련 부족 등을 드러냈고, 잘 훈련된 북한군에 대적하기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병력 수 차이도 전투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은 훈련 부족으로 조기에 진지를 버리고 북한군에게 장비와 부상자를 넘겨주기도 했다. 스미스는 너무 오래 자리를 지켜 북한군에게 포위당하고 후퇴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약점은 한 달 동안 다른 미군 부대에서도 나타났다.

스미스 특수부대는 큰 패배를 당했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몇 시간 지연시키는 임무를 완수했다. 제24보병사단의 제34보병연대는 평택에 주둔했으나, 평택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제24보병사단은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여러 차례 교전했지만, 비슷한 결과를 겪었다. 일주일 만에 대전으로 후퇴했고, 대전 전투에서 다시 패배했다. 북한군은 미군을 계속 압도하며 부산까지 밀어붙였고, 그곳에서 부산 주변 전투가 벌어져 결국 북한군이 패배했다.

한국군도 동쪽에서 지연전을 펼쳤지만, 스미스 부대와 제34연대가 후퇴하면서 좌익의 위험 때문에 미군에 맞춰 후퇴해야 했다.[7] 미 제24사단은 대전 전투에서도 크게 패하여, 연합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으로 몰리게 되었다.

5. 오산 전투에 대한 평가와 논란



오산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지상전에 참여한 사건이었다.[3] 이 전투는 미군이 전쟁에 대비가 부족하고 무기가 낙후되었으며, 훈련 및 경험이 부족하여 훈련이 잘 된 북한군에 대적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4] 교전 병력 수의 차이도 전투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은 훈련 부족으로 조기에 위치를 버리고 북한군에게 장비와 부상자를 넘겨주었다.[5] 스미스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북한군이 미군 부대를 포위, 후퇴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4] 이러한 약점은 이후 한 달 동안 다른 미군 부대에서도 나타났다.[4]

스미스 특수부대는 큰 패배를 당했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몇 시간 지연시키는 임무를 완수했다.[5] 전투 중 제24보병사단 제34보병연대는 남쪽으로 약 24.14km 떨어진 평택에 주둔했으나, 평택 전투에서 패배했다.[5] 이후 제24보병사단은 한 달 동안 북한군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교전했으나, 대전으로 후퇴했고 대전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는 등 비슷한 결과를 겪었다. 북한군은 미군을 계속 압도하며 제8군을 부산까지 밀어붙였고, 부산 주변 전투에서 결국 패배했다.

세 달 후인 9월 19일, 오산은 남쪽에서 진격하는 제8군과 북쪽에서 진격하는 제10군단 부대가 만난 곳이다. 제10군단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한군을 기습한 후 공세를 펼쳤고, 양측 공세로 북한군은 남쪽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한국 전쟁 후 수년 동안 미군은 스미스 특수부대가 훈련받았던 일본 지역을 기념 장소로 사용했다. 오산 전투터에도 스미스 특수부대 기념비가 세워졌고, 한국에 본부를 둔 제8군이 매년 기념식을 거행한다.[3] 2010년 7월 16일, 오산 전투 60주년 기념식에서 제8군 지휘부는 오산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스미스 특수부대를 언급하며 이 전투를 "오늘날까지도 존재하는 사상 전쟁의 시작"이라고 묘사했다.[4] 61주년에도 미군과 오산 관계자들은 기념식을 열어 특수부대를 기억했다.[5]

6. 기념 및 추모 사업

오산에는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이라는 기념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박물관과 기념비가 있으며 2020년 7월에 개장했다.[2]

참조

[1] 뉴스 President-elect Trump – the 'West Wing' lesson http://www.jpost.com[...] 2016-11-15
[2] 뉴스 오산 죽미령에 유엔초전기념 평화공원 9월 개관 https://n.news.naver[...]
[3] 웹사이트 Remembering Task Force Smith http://www.army.mil/[...] United States Army 2012-07-16
[4] 웹사이트 Task Force Smith honored at 60th anniversary ceremony in Korea http://www.army.mil/[...] Eighth United States Army 2012-07-16
[5] 웹사이트 Task Force Smith remembered on 61st anniversary http://www.army.mil/[...] Eighth United States Army 2012-07-16
[6] 웹사이트 http://www.chosunonl[...]
[7] 간행물 1966
[8] Youtube 특집다큐 69년전 오늘, 오산 죽미령 전투 현장을 가보다! https://www.youtube.[...]
[9]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美스미스부대 한국 도착 https://news.naver.c[...]
[10] 웹사이트 http://www.army.mil.[...]
[11] 서적
[12] 서적 한국전쟁사 1권 행림출판 1992
[13] 뉴스 40년 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4 http://www.kinds.or.[...] 한국일보 199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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