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와리 도쿠가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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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에 의해 창설된 가문으로, 기슈 도쿠가와가와 함께 쇼군 후계자 부재 시 쇼군 자리를 계승할 권리를 가졌다. 250년 이상 오와리 번을 통치하며 나고야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에도 시대에는 쇼군을 배출하지 못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후작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공익재단법인 도쿠가와 레이메이카이가 운영하는 도쿠가와 미술관 등을 통해 가문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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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 도쿠가와가 | |
---|---|
개요 | |
성씨 | 도쿠가와 |
성씨 (일본어) | 徳川 (尾張) (도쿠가와 (오와리)) |
본관 | 오와리 |
가문 | 도쿠가와 가문 |
작위 | 다이묘 |
창시자 | 도쿠가와 요시나오 |
마지막 통치자 | 도쿠가와 무네치카 |
현재 당주 | 도쿠가와 요시타카 |
설립 연도 | 1610년 |
해체 | 현재 존속 |
분가 | 다카스-마쓰다이라 가문 (高須松平家) |
가계 정보 | |
본성 | 칭: 세이와 겐지 |
가조 | 도쿠가와 요시나오 |
종별 | 무가 화족 (후작) |
출신지 | 셋쓰국 야마시로국 |
근거지 | 오와리국 도쿄부 |
주요 인물 | 도쿠가와 무네하루 도쿠가와 요시카쓰 |
지류 | 다카스 (요쓰야) 마쓰다이라 가문 (무가, 자작) 도쿠가와 요시히로 가문 (남작) |
2. 역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에 의해 창설되었다. 요시나오는 원래 ''마쓰다이라 요시토시''(松平義利)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1621년에 요시나오로 개명했고, 1636년에는 도쿠가와 성을 얻었다. 이 가문은 기슈 도쿠가와가(요시나오의 이복형제인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후손)와 함께, 쇼군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쇼군 자리를 계승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2] 250년 이상 동안 현재의 아이치현나고야시 주변 지역인 오와리 번을 통치했으며, 나고야성을 주요 거점으로 사용했다.[3]
도쿠가와 가문 내에서 선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도 시대 동안 오와리 도쿠가와가 출신 쇼군은 없었다.[4] 도쿠가와 무네하루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와의 정책 갈등으로 인해 1739년에 은퇴를 강요받았으며,[5][6] 그의 사촌 도쿠가와 무네카쓰로 대체되었다.[6] 요시나오의 주요 부계 혈통은 1800년, 도쿠가와 무네치카의 죽음으로 단절되었다.[7] 이후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기슈가와 미토 도쿠가와가에서 반복적인 양자를 들이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겐추지는 에도 시대부터 이 가문의 보대사가 되었으며, 많은 가문 수장들이 이곳에서 화장되었다.[13]
2. 1.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를 시조로 한다. 요시나오는 1603년에 이에야스로부터 가이국에 봉해졌지만, 가이 통치는 고후성의 대리인 히라이와 치카요시가 담당했고, 요시나오 자신은 슨푸성에 있었다. 1606년에 요시나오는 형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유적을 잇는 형태로 오와리국 기요스로 이봉되었다. 그때 가신단이 편성되어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에도 시대를 통해 나고야번을 다스렸다.도쿠가와 쇼군가에 후계자가 없을 때는 다른 고산케와 함께 후사를 낼 자격을 가졌지만,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사망한 후, 기이 도쿠가와가 출신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오와리가의 도쿠가와 쓰구토모를 제치고 8대 쇼군으로 취임했다. 그 후 고산쿄가 창설되거나, 고산쿄의 계통이 나고야 번주가 된 영향도 있어, 오와리가와 요시나오의 직계 자손에서는 결국 쇼군을 배출하지 못했다. 번조(藩祖) 요시나오의 유언인 "왕명에 의해 거행되는 일"을 비전의 번훈(藩訓)으로 삼아 대대로 전해온 근왕 가문이었다.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분가(고렌시)로서, 2대 미쓰토모의 서자가 분가하여 창시한 3개의 가문이 있다. 무쓰국 야나기카와번을 다스린 야나기카와 마쓰다이라가(오쿠보 마쓰다이라가), 미노국 다카스번을 다스린 다카스 마쓰다이라가(요쓰야 마쓰다이라가), 1만 석을 내분분지된 가와다쿠보 마쓰다이라가이다. 야나기카와가 4대 마쓰다이라 미치하루가 오와리가를 잇고(7대 도쿠가와 무네하루), 가와다쿠보가 2대 마쓰다이라 도모아쓰(후의 오와리 8대 도쿠가와 무네카쓰)가 다카스가를 이음으로써, 가와다쿠보, 야나기카와 양가는 단절되고, 다카스가만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1799년에 오와리가에서, 1801년에는 다카스가에서 요시나오의 남계 자손은 단절되었다.[7] 19세기 이후의 오와리가는 양자 상속을 반복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10대 도쿠가와 나리아키부터 제13대 요시쿠라까지 요시무네(잇키 도쿠가와가·무네타다)의 혈통의 양자가 번주로 강요되었지만, 이에 반발한 오와리파는 제14대 요시카쓰(요시히로)를 다카스가에서 맞이하는 데 성공하여 막부로부터의 간섭을 약화시켰다.
요시카쓰는 1858년에 다이로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하여 안세이 대옥에 의해 은거 근신을 명받았다. 이이 암살 후에 복권하여 제1차 조슈 정벌의 정장 총독이 되었지만, 적극적이지 않아 재정벌에는 반대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신정부의 의정을 맡았다. 이어지는 보신 전쟁에 나고야번 군은 관군으로 종군하여, 전승 후의 1869년에는 군공으로 요시카쓰에게 상전록 1만 5000석이 영세 하사되었다.
2. 2.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1880년, 도쿠가와 요시카쓰는 그의 사위(양자)를 후계자로 임명했다.[4][8] 요시아키라는 이후 화족으로 인정받아 1884년에 후작이 되었다.[9]같은 해 판적봉환에 의해, 제16대 도쿠가와 도쿠나리(요시노리)는 나고야번 지사로 전직함과 동시에 화족에 올랐다.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2만 6907석이었다. 1876년(메이지 9년) 금록공채증서 발행 조례에 기초하여 가록 및 상전록(실액 3750석)의 합계 3만 657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공채의 액수는 73만 8326엔 8전 5리에 달하는 거액으로, 화족 수급자 5위의 금액이었다.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막대한 자산 중 약 43만 엔을 제15 국립은행에 출자하여 배당금을 재투자했고, 사족수산을 위해 홋카이도 유라쿠부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야쿠모정을 개척하는 등, 유신 후에도 높은 정치적・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17]
메이지 전기 당시 당주인 제18대 요시히로의 본가는 도쿄시 혼조구 요코즈나정에 있었다. 당시 가령은 마지마 후유미치, 코세 신타로였고, 가후는 이노우에 쿄, 토키 나가히사, 요시다 토모유키, 오쓰 나오유키였다.[18]
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 공포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었지만, 작위 기준을 정하는 서작 내규는 후작위에 대해 "구세이카가 도쿠가와 구 삼가 구 대번 지사 즉 현미 15만 석 이상 구류큐번왕 국가에 훈공이 있는 자"라고 규정하여, 요시히로는 후작에 서임되었다. 분가인 도쿠가와 요시히로도 아버지 요시카쓰의 유신 공적에 의해 남작에 서임되었다.
1892년(메이지 25년), 요시히로는 도쿄 혼조구 요코즈나정에서 나고야시 히가시구 오오소네(현재의 도쿠가와원)로 본가를 옮겨 나고야로 이주했다. 1900년(메이지 33년)에는 메이린 중학교를 개설하고 가산 보존에 힘썼다.
요시히로는 1887년(메이지 20년) 이후 홋카이도에 개인 농장을 소유하여 대농장주가 되었고, 홋카이도 야마코시군 야쿠모정에 별장을 소유했다. 1891년(메이지 24년)에는 가나가와현 오이소정(1895년(메이지 28년)에 요시히로에게 양도),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도치기현 닛코하라정(1897년(메이지 30년) 매각)에도 별장을 건설했다.
1898년(메이지 31년) 당시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소득은 약 11만 6천 엔으로, 소득 순위 12위, 화족 중 7위였다. 재무 수지 개선은 1890년(메이지 23년)부터 오와리가의 어상담인이 된 가토 다카아키에 의한 바가 컸으며, 그 이전에는 수지가 엇비슷했지만, 가토에 의해 수지가 대폭 개선되어 자산이 3배에서 10배가 되었다고 한다.
1921년(다이쇼 10년)에는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1924년(다이쇼 13년)에는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별장을 건설했다.
제19대 요시치카 때, 오와리가의 사무소(1913년)와 본적(1920년)을 나고야에서 도쿄[19]로 옮기고, 1910년대 이후 메이린 중학교를 아이치현에 양도, 집기를 경매에 부치고 묘지를 집약하는 등 나고야의 시설・집기 등을 정리하고 건물과 소유지를 대대적으로 처분했다. 요시치카는 1931년(쇼와 6년)에 재단법인 오와리 도쿠가와 레이메이카이를 설립하여, 처분한 보물의 매각 이익 등으로 오오소네의 요시히로 저택 터에 도쿠가와 미술관, 메지로에 호사문고・도쿠가와 생물학 연구소를 개설했다.
전후 1946년(쇼와 21년)에 요시치카가 전쟁 협력자로 공직 추방을 당하고, 1947년(쇼와 22년)에 화족 제도 폐지로 작위를 상실했다. 재산세 적용으로 자산의 약 8할을 상실, 보유하고 있던 남만주 철도 주권이 무가치가 되었고, 야쿠모정의 도쿠가와 농장은 농지법 적용을 받아 일부 산림을 남기고 해방되었다.
이로 인해 거액의 부를 잃은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재정난으로 메지로 저택을 세이부에 매각, 호사문고는 1950년(쇼와 25년)에 번정 자료 등을 도쿠가와 임정사 연구소에 남기고 나고야시에 매각되었으며, 도쿠가와 생물학 연구소는 1970년(쇼와 45년)에 폐쇄, 시설은 야쿠르트에 매각되었다.[20][21]
2016년(헤이세이 28년) 현재, 공익재단법인 도쿠가와 레이메이카이가 도쿠가와 미술관과 도쿠가와 임정사 연구소를 운영[22], 주식회사 야쿠모 산업이 메지로 저택 터에 건설된 외국인 거류자용 임대 주택과 야쿠모정에 남겨진 산림을 운영하고 있으며,[23][24] 오와리가의 당주는 레이메이카이 회장, 미술관 관장, 야쿠모 산업 사장에 취임하고 있다.[25]
2. 3. 전후
메이지 유신 이후 1880년, 도쿠가와 요시카쓰는 그의 사위인 도쿠가와 요시아키라(양자)를 후계자로 임명했다.[4][8] 요시아키라는 이후 화족으로 인정받아 1884년에 후작이 되었다.[9]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양자 입양은 1908년 도쿠가와 요시치카에게,[10][11] 그리고 1955년에는 홋타 가문 출신의 요시노부에게 두 번 더 이루어졌다.[12]3. 역대 당주
대수 | 이름 | 초상화 | 생몰년 | 재임 기간 | 비고 |
---|---|---|---|---|---|
초대 | 도쿠가와 요시나오 | -- | 1601년 ~ 1650년 | 1603년 ~ 1650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 |
2대 | 도쿠가와 미쓰토모 | -- | 1625년 ~ 1700년 | 1650년 ~ 1693년 | 요시나오의 장남. |
3대 | 도쿠가와 쓰나나리 | -- | 1652년 ~ 1699년 | 1693년 ~ 1699년 | 미쓰토모의 장남. |
4대 | 도쿠가와 요시미치 | -- | 1689년 ~ 1713년 | 1699년 ~ 1713년 | 쓰나나리의 장남. |
5대 | 도쿠가와 고로타 | -- | 1711년 ~ 1713년 | 1713년 | 요시미치의 장남. |
6대 | 도쿠가와 쓰구토모 | -- | 1692년 ~ 1731년 | 1713년 ~ 1730년 | 쓰나나리의 차남. |
7대 | 도쿠가와 무네하루 | -- | 1696년 ~ 1764년 | 1730년 ~ 1739년 | 쓰나나리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무네와의 정책 갈등으로 은퇴.[5][6] |
8대 | 도쿠가와 무네카쓰 | -- | 1705년 ~ 1761년 | 1739년 ~ 1761년 | 미쓰토모의 손자. |
9대 | 도쿠가와 무네치카 | -- | 1733년 ~ 1800년 | 1761년 ~ 1799년 | 무네카쓰의 장남. 두 아들과 네 명의 양자가 모두 먼저 사망하여 요시나오의 주요 부계 혈통 단절.[7] |
10대 | 도쿠가와 나리아사 | -- | 1793년 ~ 1850년 | 1800년 ~ 1827년 |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출신 양자. |
11대 | 도쿠가와 나리요시 | -- | 1819년 ~ 1839년 | 1827년 ~ 1839년 | 도쿠가와 쇼군가 출신 양자,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친자. |
12대 | 도쿠가와 나리토시 | -- | 1810년 ~ 1845년 | 1839년 ~ 1845년 | 타야스 도쿠가와가 출신 양자,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친자. |
13대 | 도쿠가와 요시카네 | -- | 1836년 ~ 1849년 | 1845년 ~ 1849년 | 타야스 도쿠가와가 출신 양자. |
14대, 17대 | 도쿠가와 요시카쓰 | -- | 1824년 ~ 1883년 | 1849년 ~ 1858년, 1870년 ~ 1883년 | 미토번 6대 번주 도쿠가와 하루모리의 증손. 안세이 대옥으로 은거, 근신 후 복권. |
15대 | 도쿠가와 시게노리 | -- | 1831년 ~ 1884년 | 1858년 ~ 1863년 | 요시카쓰의 친동생. |
16대 | 도쿠가와 요시노리 | -- | 1858년 ~ 1875년 | 1863년 ~ 1870년 | 요시카쓰의 친자. |
4. 계보
오와리 도쿠가와가 계보 | |
---|---|
범례 | 굵은 선은 친자, 파선은 양자, 굵은 글씨는 당주 |
colspan="2" | |
|-
| colspan="2" | 무네카쓰는 무네하루의 양자가 되지 않고, 번령은 일단 몰수한 후 무네카츠에게 내려지는 형식을 취했다.
|-
| colspan="2" |
|}
|-
| colspan="2"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째 아들 도쿠가와 요시나오를 시조로 한다. 요시나오는 1603년에 이에야스로부터 가이국에 봉해졌지만, 가이 통치는 고후성의 대리인 히라이와 치카요시가 담당했고, 요시나오 자신은 재국하지 않고 슨푸성에 있었다. 1606년에 요시나오는 형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유적을 잇는 형태로 오와리국 기요스로 이봉되었다. 그 때 가신단이 편성되어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에도 시대를 통해 나고야번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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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계자가 없을 때는 다른 고산케와 함께 후사를 낼 자격을 가졌지만,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사망한 후, 기이 도쿠가와가 출신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오와리가의 도쿠가와 쓰구토모를 제치고 8대 쇼군으로 취임했다. 그 후 고산쿄가 창설되거나, 고산쿄의 계통이 나고야 번주가 된 영향도 있어, 오와리가와 요시나오의 직계 자손에서는 결국 쇼군을 배출하지 못했다. 번조(藩祖) 요시나오의 유언인 "왕명에 의해 거행되는 일"을 비전의 번훈(藩訓)으로 삼아 대대로 전해온 근왕의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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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분가(고렌시)로서, 2대 미쓰토모의 서자가 분가하여 창시한 3개의 가문이 있다. 무쓰국 야나기카와번을 다스린 야나기카와 마쓰다이라가(오쿠보 마쓰다이라가), 미노국 다카스번을 다스린 다카스 마쓰다이라가(요쓰야 마쓰다이라가), 1만 석을 내분분지된 가와다쿠보 마쓰다이라가이다. 야나기카와가 4대 마쓰다이라 미치하루가 오와리가를 잇고(7대 도쿠가와 무네하루), 가와다쿠보가 2대 마쓰다이라 도모아쓰(후의 오와리 8대 도쿠가와 무네카쓰)가 다카스가를 이음으로써, 가와다쿠보, 야나기카와 양가는 단절되고, 다카스가만이 오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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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그러나 1799년에 오와리가에서, 1801년에는 다카스가에서 요시나오의 남계 자손은 단절되었다. 19세기 이후의 오와리가는 양자 상속을 반복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10대 도쿠가와 나리아키부터 제13대 요시쿠라까지 요시무네(잇키 도쿠가와가·무네타다)의 혈통의 양자가 번주로 강요되었지만, 이에 반발한 오와리파는 제14대 요시카쓰(요시히로)를 다카스가에서 맞이하는 데 성공하여 막부로부터의 간섭을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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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요시카쓰는 1858년에 다이로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하여 안세이 대옥에 의해 은거 근신을 명받았다. 이이 암살 후에 복권하여 제1차 조슈 정벌의 정장 총독이 되었지만, 적극적이지 않아 재정벌에는 반대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신정부의 의정을 맡았다. 이어지는 보신 전쟁에 나고야번 군은 관군으로 종군하여, 전승 후의 1869년에는 군공으로 요시카쓰에게 상전록 15000석이 영세 하사되었다.
|}
5. 관련 사원
겐추지(나고야시 히가시구)는 에도 시대부터 이 가문의 보대사였으며, 많은 가문 수장들이 이곳에서 화장되었다.[13]
6. 오와리 도쿠가와 가의 저택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에 의해 창설된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나고야성을 주요 거점으로 사용했다.[3] 이 외에도 오존 오시타야시키, 아오이 오시타야시키 (두 곳 모두 나고야시 히가시구에 위치), 호리바타초의 신 고텐(新御殿) 등이 있었다. 오와리가의 보물들은 나고야의 도쿠가와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높은 정치적・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17] 메이지 시대에는 도쿄와 나고야 등지에 저택을 소유했다. 메이지 전기 당주인 제18대 요시히로의 본가는 도쿄시혼조구 요코즈나정에 있었다.[18] 이 저택은 메이지 11년(1878년)에 오하라가에서 구입하여 아이키치정에서 이사해 본가로 삼았던 저택이다(후에 나고야로 이사한 후에 도쿠가와 요시히로 남작에게 양도했다). 메이지 25년(1892년) 요시히로는 도쿄에서 나고야시히가시구오오소네(현재의 도쿠가와원)으로 본가를 옮겼다.
다이쇼 10년(1921년)에는 가나가와현가마쿠라, 다이쇼 13년(1924년)에는 나가노현가루이자와에 별장을 건설하였다. 제19대 요시치카 때, 오와리가의 사무소(1913년)와 본적(1920년)을 나고야에서 도쿄[19]로 옮겼다. 전후, 재정난으로 메지로의 저택을 세이부에 매각하였다.
기타 저택
- 고마키 어전(아이치현 고마키시)
- 사카시타 어전(아이치현 카스가이시)
- 아사미야 어전(아이치현 카스가이시)
- 요코스카 어전(아이치현 토카이시 타카오코스카마치 고테이) - 도쿠가와 미츠토모가 칸분 6년(1669년)에 지은 별장. 린코테이(臨江亭)라고도 불렸다. 미츠토모 사후의 쇼토쿠 5년(1715년)에 철거되었지만, 그 70년 후인 텐메이 5년(1785년)에 새롭게 요코스카 대관소가 설치되었다.
7. 오와리 도쿠가와 후작가
1869년 판적봉환으로 제16대 도쿠가와 도쿠나리(요시노리)는 나고야번 지사가 되었고, 동시에 화족이 되었다. 1884년 화족령 공포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었는데, 작위 기준을 정하는 서작 내규는 후작에 대해 "구세이카가 도쿠가와 구 삼가·구 대번 지사 즉 현미 15만 석 이상·구류큐번왕·국가에 훈공이 있는 자"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요시히로는 후작에 서임되었고, 분가 도쿠가와 요시히로도 아버지 요시카츠의 유신 공적에 의해 남작에 서임되었다.
1892년 요시히로는 도쿄 혼조구 요코즈나정에서 나고야시히가시구오오소네(현재 도쿠가와원)로 본가를 옮겨 나고야로 이주했다. 1900년 메이린 중학교를 개설하고 가산 보존에 힘썼다.
요시히로는 1887년 이후 홋카이도에 개인 농장을 소유하여 대농장주가 되었고, 홋카이도 야마코시군야쿠모정에 별장을 소유했다. 1891년 가나가와현 오이소정(1895년 요시히로에게 양도), 1889년 도치기현 닛코하라정(1897년 매각)에도 별장을 건설했다. 1921년 가나가와현가마쿠라, 1924년 나가노현가루이자와에 별장을 건설했다.
제19대 요시치카 시기, 오와리가 사무소(1913년)와 본적(1920년)을 나고야에서 도쿄로 이전했다.[19] 1910년대 이후 메이린 중학교를 아이치현에 양도, 집기를 경매에 부치고 묘지를 집약하는 등 나고야 시설・집기 등을 정리, 건물과 소유지를 대대적으로 처분했다. 그 구장품 일부는 『도쿠가와 장군가 어삼가 어삼경 구장품 총람』(미야타이 출판사)에 편집・수록되었다. 요시치카는 1931년 재단법인 오와리 도쿠가와 레이메이카이를 설립, 처분한 보물 매각 이익 등으로 오오소네 요시히로 저택 터에 도쿠가와 미술관, 메지로에 호사문고・도쿠가와 생물학 연구소를 개설했다.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2만 6907석이었다.[16] 메이지 9년(1876년) 금록공채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 및 상전록(실액 3750석)의 합계 3만 657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공채 액수는 73만 8326엔 8전 5리로, 화족 수급자 중 5위였다.[17]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이 막대한 자산 중 약 43만 엔을 제15 국립은행에 출자하고 배당금을 재투자했다. 또한 사족수산을 위해 홋카이도 유라쿠부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야쿠모정을 개척하는 등, 유신 이후에도 높은 정치적・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18]
메이지 전기 당주인 제18대 요시히로 대의 본가는 도쿄시 혼조구 요코즈나정에 있었다. 당시 가령은 마지마 후유미치, 코세 신타로였고, 가후는 이노우에 쿄, 토키 나가히사, 요시다 토모유키, 오쓰 나오유키였다.[19] 메이지 31년(1898년) 당시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소득은 약 11만 6천 엔으로, 소득 순위 12위, 화족 중에서는 7위였다. 메이지 23년(1890년)부터 가문의 어상담인이 된 가토 다카아키에 의해 재무 수지가 크게 개선되어, 이전에는 수지가 엇비슷했지만 가토 부임 이후 자산이 3배에서 10배로 증가했다.
쇼와 21년(1946년) 요시치카가 전쟁 협력자로 공직 추방을 당하고, 쇼와 22년(1947년) 화족 제도 폐지로 작위를 상실했다. 재산세 적용으로 자산의 약 8할을 상실했고, 남만주 철도 주권은 무가치해졌으며, 야쿠모정의 도쿠가와 농장은 농지법 적용으로 일부 산림을 제외하고 해방되었다. 이로 인해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거액의 부를 잃고 재정난에 처했다. 메지로 저택은 세이부에 매각되었고, 호사문고는 쇼와 25년(1950년) 번정 자료 등을 도쿠가와 임정사 연구소에 남기고 나고야시에 매각되었으며, 도쿠가와 생물학 연구소는 쇼와 45년(1970년) 폐쇄 후 야쿠르트에 시설이 매각되었다.
헤이세이 28년(2016년) 현재, 공익재단법인 도쿠가와 레이메이카이가 도쿠가와 미술관과 도쿠가와 임정사 연구소를 운영,[22] 주식회사 야쿠모 산업이 메지로 저택 터에 건설된 외국인 거류자용 임대 주택과 야쿠모정에 남겨진 산림을 운영하고 있다.[23][24] 오와리가 당주는 레이메이카이 회장, 미술관 관장, 야쿠모 산업 사장에 취임하고 있다.[25]
7. 1. 당주
- 18대 (후작) 도쿠가와 요시노리 (다카마쓰 마쓰다이라가에서 양자, 부인은 17대 요시카쓰의 딸)
- 19대 (후작) 도쿠가와 요시치카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에서 양자, 부인은 18대 요시노리의 딸)
- 20대 도쿠가와 요시토모 (요시치카의 장남. 종전을 기점으로 가독을 상속[1], 1947년 5월, 화족 제도의 폐지에 따라 작위 상실[2])
7. 2. 어상담인회 (御相談人会)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과의 옛 신하 관계에 따른 가문의 고문회이다.[22] 1908년에 19대 당주인 요시치카가 가문을 상속했을 때, 다나카 후지마로를 어상담인장으로, 가토 다카아키, 나가이 큐이치로, 나루세 마사오, 나카무라 오사무, 요코이 도키요시, 카타기리 조사쿠 등 6명이 어상담인이었다.[23][24] 이후 하치야 시로, 와타나베 조타로, 오스미 미네오, 마쓰이 이와네 등 육해군 장교들이 어상담인이 되었다.[25]7. 2. 1. 어상담인장 (御相談人長)
- 다나카 후지마로: 1908년 요시치카(義親)의 가독 상속 시 어상담인이었다.[1]
- 가토 다카아키: 1909년부터 1926년까지[2] 재정을 관리하였으며,[3] 요시레이(義禮)의 양자 후보로 요시치카를 선택했다.[4]
7. 2. 2. 어상담인 (御相談人)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옛 신하 관계에 따른 가문의 고문회이다.[22] 1908년에 19대 당주인 요시치카가 가문을 상속했을 때, 다나카 후지마로를 어상담인장으로, 가토 다카아키, 나가이 큐이치로, 나루세 마사오, 나카무라 오사무, 요코이 도키요시, 카타기리 조사쿠 등 6명이 어상담인이었다.[23][24] 이후 하치야 시로, 와타나베 조타로, 오스미 미네오, 마쓰이 이와네 등 육해군 장교들이 어상담인이 되었다.[25]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다나카 후지마로 | 1908년 ~ ? | 요시치카(義親)의 가독 상속 시의 어상담인장[23] |
가토 다카아키 | 1890년 ~ 1926년 | 재정을 관리[24], 요시레이(義禮)의 양자 후보로 요시치카를 선택.[25] |
나가이 히사이지로 | 1890년 12월 ~ 1913년 | |
나루세 마사오 | ? ~ ? | |
나카무라 오사무 | ? ~ ? | |
요코이 도키요시 | ? ~ ? | |
가타기리 스케사쿠 | 1903년 ~ 1915년 | |
호리 에쓰노조 | 1908년 10월 30일 ~ 1914년 4월 30일 | |
가이베 고조 | 1914년 ~ ? | |
사카모토 기사노스케 | 1920년 ~ ? | |
마쓰이 이와네 | ? ~ ? | |
야시로 로쿠로 | ? ~ ? | |
와타나베 조타로 | ? ~ ? | |
오스미 미네오 | ? ~ ? | |
사토 고지로 | ? ~ ? | |
마지마 데이히코 | ? ~ ? |
7. 3. 가직 (家職)
1869년 판적봉환으로 제16대 도쿠가와 도쿠나리(요시노리)는 나고야번 지사가 되었고, 동시에 화족이 되었다.
1908년 19대 당주 요시치카가 가독을 상속했을 당시, 도쿄(별저)에는 가부(家扶) 미즈노 마사노리 외 3명, 나고야 오조네 본저에는 가령인 카이베 코조 외 가부 4명, 가종 8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1884년 화족령 공포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었는데, 작위 기준을 정하는 서작 내규는 후작에 대해 "구세이카가 도쿠가와 구 삼가·구 대번 지사 즉 현미 15만 석 이상·구류큐번왕·국가에 훈공이 있는 자"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요시히로는 후작에 서임되었고, 분가 도쿠가와 요시히로도 아버지 요시카츠의 유신 공적에 의해 남작에 서임되었다.
1892년 요시히로는 도쿄 혼조구 요코즈나정에서 나고야시히가시구오오소네(현재 도쿠가와원)로 본가를 옮겨 나고야로 이주했다. 1900년 메이린 중학교를 개설하고 가산 보존에 힘썼다.
요시히로는 1887년 이후 홋카이도에 개인 농장을 소유하여 대농장주가 되었고, 홋카이도 야마코시군야쿠모정에 별장을 소유했다. 1891년 가나가와현 오이소정(1895년 요시히로에게 양도), 1889년 도치기현 닛코하라정(1897년 매각)에도 별장을 건설했다.
1921년 가나가와현가마쿠라, 1924년 나가노현가루이자와에 별장을 건설했다.
제19대 요시치카 시기, 오와리가 사무소(1913년)와 본적(1920년)을 나고야에서 도쿄로 이전했다.[19] 1910년대 이후 메이린 중학교를 아이치현에 양도, 집기를 경매에 부치고 묘지를 집약하는 등 나고야 시설・집기 등을 정리, 건물과 소유지를 대대적으로 처분했다. 그 구장품 일부는 『도쿠가와 장군가 어삼가 어삼경 구장품 총람』(미야타이 출판사)에 편집・수록되었다. 요시치카는 1931년 재단법인 오와리 도쿠가와 레이메이카이를 설립, 처분한 보물 매각 이익 등으로 오오소네 요시히로 저택 터에 도쿠가와 미술관, 메지로에 호사문고・도쿠가와 생물학 연구소를 개설했다.
헤이세이 28년(2016년) 현재, 공익재단법인 도쿠가와 레이메이카이가 도쿠가와 미술관과 도쿠가와 임정사 연구소를 운영,[22] 주식회사 야쿠모 산업이 메지로 저택 터에 건설된 외국인 거류자용 임대 주택과 야쿠모정에 남겨진 산림을 운영하고 있다.[23][24] 오와리가 당주는 레이메이카이 회장, 미술관 관장, 야쿠모 산업 사장에 취임하고 있다.[25]
7. 3. 1. 가령 (家令)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2만 6907석이었다.[16] 메이지 9년(1876년) 금록공채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 및 상전록(실액 3750석)의 합계 3만 657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공채 액수는 73만 8326엔 8전 5리로, 화족 수급자 중 5위였다.[17]메이지 전기 당시 당주인 제18대 요시히로 대의 본가는 도쿄시혼조구 요코즈나정에 있었다. 당시 가령은 마지마 후유미치, 코세 신타로였고, 가후는 이노우에 쿄, 토키 나가히사, 요시다 토모유키, 오쓰 나오유키였다.[18]
메이지 31년(1898년) 당시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소득은 약 11만 6천 엔으로, 소득 순위 12위, 화족 중에서는 7위였다. 메이지 23년(1890년)부터 오와리가의 어상담인이 된 가토 다카아키에 의해 재무 수지가 크게 개선되어, 이전에는 수지가 엇비슷했지만 가토에 의해 자산이 3배에서 10배가 되었다고 한다.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가령(家令)을 역임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임 기간 |
---|---|
아마베 코조(海部昂蔵) | 1903년(메이지 36년) 12월 19일 - 1914년(다이쇼 3년) 5월 |
호리 에츠노조(堀鉞之丞) | 1914년(다이쇼 3년) 9월 - |
스즈키 신키치(鈴木信吉) | 1929년(쇼와 4년) - |
7. 3. 2. 가부 (家扶)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2만 6907석이었다.[16] 메이지 9년(1876년) 금록공채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 및 상전록(실액 3750석)의 합계 3만 657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공채 액수는 73만 8326엔 8전 5리로, 화족 수급자 중 5위였다.[17]오와리 도쿠가와가는 이 막대한 자산 중 약 43만 엔을 제15 국립은행에 출자하고 배당금을 재투자했다. 또한 사족수산을 위해 홋카이도 유라쿠부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야쿠모정을 개척하는 등, 유신 이후에도 높은 정치적・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18]
메이지 전기 당주인 제18대 요시히로 대의 본가는 도쿄시 혼조구 요코즈나정에 있었다. 당시 가령은 마지마 후유미치, 코세 신타로였고, 가후는 이노우에 쿄, 토키 나가히사, 요시다 토모유키, 오쓰 나오유키였다.[19]
메이지 31년(1898년) 당시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소득은 약 11만 6천 엔으로, 소득 순위 12위, 화족 중에서는 7위였다. 메이지 23년(1890년)부터 가문의 어상담인이 된 가토 다카아키에 의해 재무 수지가 크게 개선되어, 이전에는 수지가 엇비슷했지만 가토 부임 이후 자산이 3배에서 10배로 증가했다.
쇼와 21년(1946년) 요시치카가 전쟁 협력자로 공직 추방을 당하고, 쇼와 22년(1947년) 화족 제도 폐지로 작위를 상실했다. 재산세 적용으로 자산의 약 8할을 상실했고, 남만주 철도 주권은 무가치해졌으며, 야쿠모정의 도쿠가와 농장은 농지법 적용으로 일부 산림을 제외하고 해방되었다.
이로 인해 오와리 도쿠가와가는 거액의 부를 잃고 재정난에 처했다. 메지로 저택은 세이부에 매각되었고, 호사문고는 쇼와 25년(1950년) 번정 자료 등을 도쿠가와 임정사 연구소에 남기고 나고야시에 매각되었으며, 도쿠가와 생물학 연구소는 쇼와 45년(1970년) 폐쇄 후 야쿠르트에 시설이 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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