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무네하루
1. 개요
도쿠가와 무네하루는 1696년 나고야 번의 번주 도쿠가와 쓰나아리의 스무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729년 야나가와 번의 번주가 되었고, 1730년 형의 사망으로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제7대 당주가 되었다. 그는 규제 완화와 서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지만, 재정 적자로 인해 1739년 은퇴를 강요받고 유폐되었다. 이후 1764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묘사되었으며, 종종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대립하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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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
| 출생 | 겐로쿠 9년 음력 10월 28일 ( 1696년 11월 22일) |
| 사망 | 메이와 원년 음력 10월 8일 (1764년 11월 1일) |
| 아명 | 만고로 |
| 통칭 | 모토메 |
| 개명 | 마쓰다이라 미치하루 → 도쿠가와 무네하루 |
| 시호 | 영공 |
| 계명 | 장선원후예부식원령대거사 |
| 신호 | 부식산왕권현 (일길산왕권현) |
| 묘소 | 도쿠고잔 건중사 → 평화공원 |
| 관위 | 종5위하・주계두, 종4위하, 시종, 좌근위권소장, 종3위・좌근위권중장, 참의, 권중납언, 증종2위・권대납언 |
| 막부 | 에도 막부 |
| 주군 | 나카미카도 천황 → 사쿠라마치 천황 → 도쿠가와 요시무네 |
| 번 | 무쓰국야나가와 번주 → 오와리국나고야 번주 |
| 씨족 | 오와리 도쿠가와 가 → 오쿠보 마쓰다이라 가 → 오와리 도쿠가와 가 |
| 아버지 | 도쿠가와 쓰나노부 |
| 어머니 | 우메쓰 (선양원) |
| 양아버지 | 도쿠가와 쓰구토모 |
| 형제 | 요시미치, 쓰구토모, 마쓰다이라 요시타카, 마쓰다이라 미치마사, 무네하루, 마쓰히메 (마에다 요시노리의 부인,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양녀) |
| 아내 | 정실: 없음, 측실: 가이즈, 민부, 이요, 사콘, 오하루, 아훈 |
| 자녀 | 도미, 호송, 야치, 요리히메 (가쓰코, 후, 스테이: 고노에 우치사키의 부인), 구니마루 (만고로), 야오, 이쓰, 류치요, 지카히메 (양녀: 우에스기 무네후사의 부인: 친아버지는 야나가와 번 제2대 마쓰다이라 요시카타) |
| 특기 사항 | 저술: 온지정요, 다음 당주: 도쿠가와 무네카쓰 |
| 오와리 번주 (제7대) | 1730년 ~ 1739년 |
|---|
| 당주 (제4대) | 1729년 ~ 1730년 |
|---|---|
| 전임 | 마쓰다이라 요시자네 |
| 후임 | 오와리 종가 상속으로 인한 단절 |
| 번주 | 1729년 ~ 1730년 |
|---|---|
| 전임 | 마쓰다이라 요시자네 |
| 후임 | 일단 폐번 (마쓰마에 아키히로) |
-
야나가와번주 (무쓰국) -
마쓰다이라 요시자네
마쓰다이라 요시자네는 료가와 번 2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카타의 장남이자 어린 나이에 요절한 에도 시대 다이묘로, 번주가 되었으나 어린 나이로 가로가 번정을 운영했고, 요절 후 후계자가 없어 료가와 번은 개역되었다. -
야나가와번주 (무쓰국) -
마쓰마에 아키히로
마쓰마에 아키히로는 에도 시대 마쓰마에 번의 9대 번주로, 러시아 및 영국과의 북방 국경 문제에 직면했으며 에조 지역의 영토 축소와 야나가와 번 이봉을 겪고 사망했다. -
오와리번주 -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로서, 오와리 번주 재임 동안 경제 발전, 문화 사업, 무예 연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
오와리번주 -
도쿠가와 무네카쓰
도쿠가와 무네카쓰는 에도 시대 오와리번의 8대 번주로서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 번주가 되었으며, 긴축 정책을 통한 재정 재건, 학문소 창설, 형법 정비 등 번정 개혁을 추진하고 도쿠가와 종가에 많은 자손을 통해 혈맥을 전했다. -
오와리 도쿠가와가 -
기요스성
기요스성은 시바 요시시게가 축성한 성으로 오다 가문의 거성이 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주요 활동 무대이자 기요스 회의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기요스 고에시로 인해 폐성된 후 일부 유적과 복원된 천수각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오와리 도쿠가와가 -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로서, 오와리 번주 재임 동안 경제 발전, 문화 사업, 무예 연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도쿠가와 쓰나나리의 20번째 아들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손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인 센요인(宣揚院)이며, 아명은 방고로(萬五郎)였다. 형제로는 오와리 번의 4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미치와 6대 번주 도쿠가와 쓰구토모, 미노 다카스 번의 2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카 등이 있었다. 누이 마쓰히메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번 중 하나였던 가가 번의 번주 마에다 요시노리와 결혼했다. 무네하루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나 많은 측실을 두었으며, 그의 넷째 딸은 훗날 관백이 되는 고노에 우치사키와 혼인했다.
생전에 조정으로부터 종3위 권중납언의 관위를 받았으며, 사후에는 종2위 권대납언으로 추증되었다. 교호 원년(1716년) 종5위하 주계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교호 14년(1729년)에는 무쓰국 야나가와번의 3만 석 번주가 되었다. 이듬해 형 도쿠가와 쓰구토모의 뒤를 이어 고산케 필두인 오와리 번의 7대 번주가 되었고,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로부터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통춘(通春)에서 무네하루(宗春)로 개명했다.
번주가 된 후, 무네하루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교호 개혁의 긴축 재정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1731년에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담아 요시무네의 정책을 비판하는 책 温知政要일본어를 출판하여 쇼군과의 대립각을 세웠다.
결국 겐분 4년(1739년), 쇼군 요시무네와의 오랜 갈등 끝에 막부로부터 칩거 명령을 받고 강제로 은퇴당했으며, 나고야 성 내에 유폐되었다. 그의 뒤는 친척인 도쿠가와 무네카쓰가 이었다. 쇼군 요시무네가 사망한 후에야 성 밖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고, 메이와 원년(1764년)에 사망했다. 사망 시점까지 용서받지 못하여 그의 무덤에는 신분을 나타내는 금속 그물이 씌워지는 조치가 취해졌다.
사후 75년이 지난 덴포 10년(1839년), 당시 쇼군이 자신의 아들을 오와리 번주로 임명하면서 사면의 의미로 무덤의 금속 그물을 제거했으며, 같은 해 종2위 권대납언으로 추증되었다. 분세이 4년(1821년)에는 후시키 산노 곤겐(ja)으로 신격화되어 모셔지기도 했다.
2.1. 출생
겐로쿠 9년 10월 28일 (서기 1696년 11월 22일) 나고야에서 나고야 번 제3대 번주 도쿠가와 쓰나나리의 스무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만고로(萬五郎)였다. 어머니는 측실인 오우메노가타(於梅の方, 선양원(宣揚院))로, 도토미 가케가와 요코스카 낭인 미우라 다이지베에 가요시(三浦太次兵衛嘉祥)의 장녀였다. 무네하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손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린 시절 가족들이 잇따라 사망했다. 겐로쿠 11년(1698년)에는 할머니 치요히메가, 이듬해 겐로쿠 12년(1699년)에는 아버지 쓰나나리가, 겐로쿠 13년(1700년)에는 할아버지 도쿠가와 미쓰토모가 차례로 사망했다.
호에이 5년(1708년) 11월, 당시 번주였던 형 도쿠가와 요시미치로부터 편휘(이름 한 글자를 하사)를 받아 휘를 쓰루하루(鶴春)로 정했다. 요시미치는 막내 동생인 쓰루하루를 매우 아꼈으며, 저녁 식사도 함께 할 정도였다. 쇼토쿠 2년(1712년), 다른 형들인 도쿠가와 쓰구토모(훗날 6대 번주)와 마쓰다이라 요시타카(미치아쓰, 훗날 다카스번주)는 에도로 가서 종4위하에 서임되어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막부의 주요 가신) 반열에 올랐지만, 쓰루하루는 나고야에 남겨졌다.
호에이 6년(1709년) 3월, 구루메번주 아리마 노리후사(有馬則維)가 나고야 번의 고렌시(御連枝, 번주의 가까운 친척) 필두이자 다카스번주인 마쓰다이라 요시유키에게 만고로(쓰루하루)를 임시 양자로 삼고 싶다는 제안을 했으나, 이 이야기는 성사되지 않았다.
쇼토쿠 3년(1713년) 4월에 에도로 거처를 옮겼고, 호시노 도마(星野藤馬)를 소바요닌(側用人, 측근 시종)으로 삼았다. 그러나 같은 해 윤5월, 에도로 갈 때 동행했던 나고야 번사 두 명이 토혈 후 급사하거나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같은 달 나고야 번 고렌시인 야나가와번주 다치바나 아키타카(立花鑑任)가 사망하고, 7월에는 형 요시미치마저 사망했다. 이어 10월에는 요시미치의 뒤를 이은 조카이자 5대 번주 도쿠가와 고로타가 요절하자, 형 쓰구아키가 쓰구토모로 개명하고 6대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쓰루하루는 같은 해 12월에 원복(성인식)을 치르고 통칭을 구마(九郎太)로 바꾸어 마쓰다이라 쓰루하루(松平 通春)라 칭했다.
쇼토쿠 6년(1716년) 2월, 제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를 어전참배(쇼군을 직접 만남)하고, 3월에는 후다이 다이묘가 되어 마쓰다이라 쓰루하루로 불리게 되었다. 같은 해 연호가 교호로 바뀐 후, 교호 원년(1716년) 7월에는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으로 종5위하 주계두(主計頭, 회계 담당 관직)에 서임되었다.
교호 3년(1718년) 4월에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곧 회복했다. 같은 달, 형인 마쓰다이라 요시타카(미치아쓰)가 나고야성 아래에서 은거 및 근신 처분을 받았다. 12월에는 종4위하 시종(侍従)에 서임되었다. 쇼군 요시무네는 쓰루하루를 아껴, 특별히 매사냥에서 잡은 사냥감을 여러 차례 하사하고, 자신이 신임하는 후다이 다이묘들과 함께 모미지야마 동조궁(紅葉山東照宮) 예참을 명하는 등, 고몬(御門, 쇼군의 친척)으로서 각별히 대우했다. 교호 13년(1728년)에는 생모 선양원을 문병하기 위해 나고야로 내려갔다.
2.2. 번주 이전
도쿠가와 쓰나나리의 20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측실인 우메쓰(훗날 센요인(선양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손자에 해당하며, 아명은 만고로(萬五郎)였다. 그는 생전에 조정에서 종3위까지 올랐으며, 관직은 권중납언을 역임했다. 사후에는 종2위 권대납언으로 추증되었다.
겐로쿠 9년(1696년) 음력 10월 28일(양력 11월 22일), 나고야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우메쓰는 도토미국 가케가와 요코스카 낭인 미우라 다이지베에 가요시의 장녀였다. 겐로쿠 11년(1698년)에는 할머니 치요히메, 이듬해 겐로쿠 12년(1699년)에는 아버지 쓰나아리, 겐로쿠 13년(1700년)에는 할아버지 도쿠가와 미쓰토모가 연이어 사망했다.
형제로는 오와리번의 4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미치와 6대 번주 도쿠가와 쓰구토모, 미노 다카스번의 2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카 등이 있었다. 누이 마쓰히메는 가가번 번주 마에다 요시노리와 결혼했는데, 가가 번은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를 제외하면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번이었다. 무네하루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나 많은 측실을 두었고, 그의 넷째 딸은 훗날 관백이 되는 고노에 우치사키와 결혼했다.
호에이 5년(1708년) 11월, 형이자 당시 번주였던 요시미치로부터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쓰루하루(宗春)로 개명했다. 요시미치는 막내 동생인 무네하루를 매우 아껴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쇼토쿠 2년(1712년), 형 쓰구토모(당시 쓰구아키)와 미치아쓰(마쓰다이라 미치아쓰)는 에도로 가서 종4위하에 서임되어 후다이 중신(譜代重臣, 대대로 막부를 섬겨온 신하)이 되었지만, 무네하루는 나고야에 남았다.
호에이 6년(1709년) 3월, 구루메번 번주 아리마 노리유키가 나고야 번의 고렌시(御連枝, 번주의 가까운 친척) 필두이자 다카스번 번주인 마쓰다이라 요시유키에게 만고로(무네하루)를 임시 양자로 삼고 싶다는 제안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쇼토쿠 3년(1713년) 4월, 에도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윤5월에는 에도로 동행했던 나고야 번사 두 명이 토혈 후 급사하거나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같은 달 나고야 번 고렌시이자 야나가와번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요시마사가 사망했고, 7월에는 형 요시미치가, 10월에는 요시미치의 뒤를 이은 5대 번주 조카 도쿠가와 고로타마저 사망했다. 이에 형 쓰구아키가 쓰구토모로 개명하고 6대 번주가 되었다. 그해 12월, 무네하루는 원복(성인식)을 치르고 통칭을 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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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6년(1716년) 2월,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를 어전참배(쇼군 앞에서 직접 뵙는 것)했다. 3월에는 후다이 중신이 되어 성씨를 마쓰다이라로 바꾸어 마쓰다이라 구마 쓰루하루라 불렸다. 연호가 바뀐 교호 원년(1716년) 7월, 8대 쇼군으로 즉위한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에 따라 종5위하 주계두(主計頭, 회계를 담당하는 관직)에 서임되었다.
교호 3년(1718년) 4월, 천연두를 앓았으나 곧 회복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종4위하로 승진했다. 쇼군 요시무네는 무네하루에게 여러 차례 매사냥에서 잡은 사냥감을 하사하고, 자신이 아끼는 후다이 중신들과 함께 단풍산 동조궁(紅葉山東照宮) 참배를 명하는 등, 고몬(御門, 쇼군의 가까운 친척) 중신으로서 그를 아꼈다. 교호 13년(1728년), 생모 센요인을 문병하기 위해 나고야로 내려갔다.
교호 14년(1729년) 6월 11일(음력, 양력 7월 6일), 무쓰국 야나가와번의 3만 석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16일(음력, 양력 1730년 2월 3일)에는 시종을 겸임하게 되었다.
교호 15년(1730년) 9월에는 닛코의 도쇼구를 참배했다. 음력 11월 27일(양력 1731년 1월 5일), 형이자 오와리 번주였던 도쿠가와 쓰구토모가 사망하자, 다음 날 그의 유언에 따라 고산케 필두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하여 제7대 번주가 되었다.
다음은 무네하루가 오와리 번주가 되기 전까지의 주요 이력이다.
| 연도 (음력/양력) | 내용 |
|---|---|
| 1696년 (겐로쿠 9년) 10월 28일 | 나고야에서 도쿠가와 쓰나아리의 20번째 아들로 출생 (아명: 만고로). |
| 1708년 (호에이 5년) 11월 | 형 도쿠가와 요시미치로부터 편휘를 받아 '쓰루하루'로 개명. |
| 1713년 (쇼토쿠 3년) 12월 | 원복 후 통칭을 '구마'로 변경, '구마 쓰루하루'라 칭함. |
| 1716년 (교호 원년) 3월 | 후다이 중신이 되어 '마쓰다이라 구마 쓰루하루'로 칭함. |
| 1716년 (교호 원년) 7월 22일 (음력) | 종5위하 주계두 서임. |
| 1718년 (교호 3년) 12월 18일 (음력) | 종4위하 승서. 주계두 직위 유지. |
| 1729년 (교호 14년) 6월 11일 (음력) | 무쓰국 야나가와번 번주(3만 석)가 됨. |
| 1729년 (교호 14년) 12월 16일 (음력) | 시종 겸임. |
2.3. 야나가와 번주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야나가와 번주'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2.4. 오와리 번주
6대 번주 도쿠가와 츠구토모 시기인 쿄호 3년(1718년) 오와리 번의 재정은 금전 부문에서 1만 3379냥, 쌀 부문에서 7229섬의 흑자를 기록했다. 당시 쌀값을 1섬당 금 2냥으로 환산하면 총 2만 7837냥의 흑자였다. 쌀 수입은 주로 연공미와 부가세였고, 지출은 에도 비용과 가신 부양미 등이었다. 금전 수입은 연공 금과 삼역 은 등이었으며, 지출은 에도 비용, 관청 경비, 가문 비용, 가신 부양 등이었다. 쿄호 13년(1728년)에도 총 2만 8167냥의 흑자를 유지했다.
그러나 무네하루가 번주 자리를 계승한 쿄호 16년(1731년)에는 총 2만 7064냥의 적자로 돌아섰다. 그가 은퇴하기 전 해인 겐분 3년(1738년)에는 누적 적자가 금 7만 4607냥, 쌀 3만 6489섬 이상에 달해 총 14만 7585냥의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무네하루는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영지 내 백성들에게 과도한 차용금을 부과하여 민생을 압박했다.
무네하루의 뒤를 이은 8대 번주 도쿠가와 무네카츠는 검약 정책을 추진하여 엔쿄 4년(1747년)에는 재정을 다시 흑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금전 부문에서는 2만 8288냥이 부족했지만, 쌀 부문에서 11만 4779섬의 큰 흑자를 기록하여 총 1만 3612냥의 흑자를 달성했다.
2.5. 정책과 개혁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추진하던 긴축 재정 정책에 반발하여, 무네하루는 1731년 쇼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책 温知政要일본어를 출판하였다. 이는 쇼군 요시무네와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무네하루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번의 재정을 악화시켜, 영지 내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면서 서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1739년, 쇼군 요시무네와의 오랜 갈등 끝에 무네하루는 번주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나 나고야 성 내에 유폐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친척인 마쓰다이라 요시즈미가 미노 다카스 번에서 와서 오와리 번의 새로운 번주가 되었으며, 도쿠가와 무네카쓰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무네하루의 양자 형식이 아니라, 막부가 오와리 번을 회수한 뒤 무네카쓰에게 다시 수여하는 형태였다. 무네하루는 "전 오와리 중납언"으로 불리게 되었다.
유폐 초기에는 나고야 성 내 산노마루 저택(6대 번주 도쿠가와 츠구토모의 생모 센코인(泉光院)의 저택)에서 칩거했으며,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부모 묘소 참배를 포함한 외출이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고쇼지 참배 기록이 남아 있으며, 보리사인 겐추지 참배 시에는 시중 사람들이 등불을 밝혀 맞이했다는 기록도 있다. 번주 무네카쓰로부터 선물을 받기도 했으며, 쇼군 요시무네 또한 사자를 보내 안부를 묻는 등 비교적 유유자적한 칩거 생활을 보냈다.
호레키 원년(1751년), 쇼군 요시무네가 사망한 후, 호레키 4년(1754년)에는 나고야 번 역대 번주의 은거소였던 오시타야시키(御下屋敷)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겐추지나 고쇼지 참배가 허락되었으며, 찻잔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고, 불경을 외우는 등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측실 이즈미(호센인)와 오하루(테이칸인)는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메이와 원년 10월 8일(1764년11월 1일), 무네하루는 향년 69세(만 67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도쿠가와 쓰나노리로부터 이어진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사후에도 용서받지 못하여 그의 무덤에는 신분을 나타내는 금속 그물이 씌워졌으나, 75년 뒤 쇼군이 자신의 아들을 오와리 번주로 임명하면서 사면의 의미로 그물을 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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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온지정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무네하루는 1731년,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강조하던 과도한 절약 정책을 비판하는 책 温知政要일본어를 출판했다. 이 책의 출판은 쇼군 요시무네와의 오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5.2. 경제 정책
6대 번주 도쿠가와 츠구토모 시기인 쿄호 3년(1718년) 오와리 번의 재정은 금전 부문에서 수입 11만 9,041냥, 지출 10만 5,662냥으로 1만 3,379냥의 흑자를, 쌀 부문에서는 수입 13만 970섬, 지출 11만 3,741섬으로 7,229섬의 흑자를 기록했다. 당시 쌀값(1섬 = 금 2냥)으로 환산하면, 총 2만 7,837냥의 흑자 상태였다. 쿄호 13년(1728년)에도 총 2만 8,167냥의 흑자를 유지했다.
그러나 무네하루가 번주 자리를 계승한 쿄호 16년(1731년)에는 총 2만 7,064냥의 적자로 전환되었다. 그의 은퇴 직전 해인 겐분 3년(1738년)에는 누적 적자가 금 7만 4,607냥, 쌀 3만 6,489섬 이상에 달하여, 총 14만 7,585냥(쌀 적자를 당시 쌀값으로 환산하여 합산)의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재정 악화를 메우기 위해 영지 내 백성들에게 과도한 차용금을 부과하여 서민들의 생활을 압박하게 되었다.
무네하루의 뒤를 이은 8대 번주 도쿠가와 무네카츠는 긴축 재정을 실시한 결과, 엔쿄 4년(1747년)에는 금전 부문에서 2만 8,288냥의 적자가 있었으나, 쌀 부문에서 11만 4,779섬의 큰 흑자를 기록하여 총 1만 3,612냥(쌀 흑자를 당시 쌀값으로 환산하여 합산)의 흑자로 재정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2.5.3. 사회 정책
에도 막부의 긴축 재정 기조와는 달리, 요시무네와 대립하며 독자적인 정책을 펼친 무네하루의 사회 정책은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서민들의 삶과 문화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치 철학: 인(仁)과 '진실'을 핵심 가치로 삼아 정책 강령인 『温知政要일본어』와 조조(條々) 21개조에 반영했다. 법률과 규제는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 문화 진흥 및 규제:
* 도쇼구 제사, 나고야 기온 마츠리(덴노 마츠리), 본오도리 등 의미 있는 축제는 성대하게 개최하도록 장려했다.
* 야나가와시의 정월 물 뿌리기나 고쿠후노미야 신사의 나체 축제 중 액막이 남성 행사와 같이 인도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풍습은 금지했다.
* 유곽, 가부키, 각종 구경거리 등 개인의 취향에 맞는 오락 활동을 존중하고 장려했다.
* 스스로 사루가쿠(노·교겐), 가부키, 조선 통신사 등의 의상을 참고하며 패션 유행을 선도하고자 했다.
* 경제 및 행정:
* 규제 완화를 통해 상업 활동을 진흥시키고자 했다.
* 육제시(六斎市, 정기 시장) 개설을 적극적으로 허가하여, 역대 번주 중 가장 많은 허가 기록을 남겼다.
* 기후시 순행이나 이누야마 어전, 오시타야시키(御下屋敷) 체류 시 상인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며 의견을 청취했다.
* 소장(訴状) 등 서류 제출 시 간단한 형식적 오류가 있더라도 반려하지 않고 접수하도록 지시하여 행정 편의를 높였다. (조조 21개조)
* 사회 통합 및 복지:
* 분쟁이나 의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금지했다. (조조 21개조)
* 금지된 물품을 제외하고는 의복, 주택, 소지품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허용했다. (조조 21개조)
* 진심을 담은 선물 증여나 접대를 중요하게 여겼다. (조조 21개조)
* 오시타야시키나 이치가야 저택 등을 개방하여 서민과 상급 번사가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 ヤッコ일본어(하인 복장), 흰 소, 칠흑 말, 화려한 의상 등을 활용한 행차를 통해 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즐거움을 주고자 했다.
* 여성, 어린이, 신분이 낮은 사람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중시했다.
* 임기 중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 정책 홍보: 매니페스토이자 가훈의 성격을 지닌 『温知政要일본어』를 직접 저술하여 상급 가신들에게 배포함으로써 자신의 정책 방향을 명확히 알렸다.
2.6. 실각과 은거
1731년 무네하루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옹호하며 당시 막부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추진하던 교호 개혁의 과도한 긴축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책 『온치세이요』(ja)를 출판했다. 이는 쇼군 요시무네와의 오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겐분 4년 1월 12일(1739년 2월 19일), 무네하루는 막부로부터 칩거 명령을 받고 강제로 은퇴당했으며, 나고야 성 경내에 유폐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친척인 도쿠가와 무네카쓰가 오와리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요시무네가 사망한 후에야 무네하루는 성 밖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다.
메이와 원년 10월 8일(1764년 11월 1일)에 사망했으나, 죽을 때까지 막부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 무덤 위에 금속 그물이 씌워지는 조치가 취해졌다. 사후 계명은 쇼젠인 덴 아쓰요 후시키 겐테이 다이거시(ja)이며, 묘소는 나고야시 히가시구 쓰쓰이의 도쿠코잔 겐추지(ja)에 있다.
사후 시간이 흘러 분세이 4년(1821년), 무네하루는 후시키 산노 곤겐(ja)이라 불리며 오와리번 10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사에 의해 나고야 어시타야시키(ja) 내에 신으로 모셔졌다. 이후 매년 곤겐으로서 법요가 거행되었다. 무네하루가 사망한 지 75년이 지난 덴포 10년 11월 5일(1839년 12월 10일), 당시 쇼군이 자신의 아들을 오와리 번주로 임명하면서 사면의 의미로 무덤의 금속 그물을 제거했다. 또한 같은 날 종2위 권대납언으로 증위증관되었다.
2.7. 사후
1764년에 사망했지만,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용서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무덤 위에 금속 그물이 씌워졌다. 이후 쇼군이 무네하루가 죽은 지 75년 만에 자신의 아들을 오와리 영주로 임명했을 때, 사면의 표시로 그 그물을 제거했다.
3. 가족 관계
무네하루는 오와리 번 3대 번주 도쿠가와 쓰나나리의 20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측실 센요인(仙遊院, 본명 우메즈, 1673년 ~ 1743년)이다. 센요인은 미우라 다이지헤에 요시시게의 딸이다. 무네하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손자에 해당하며, 어릴 적 이름은 만고로(萬五郎)였다. 생전에 조정 관위는 종삼위 권중납언까지 올랐으며, 사후 종이위 권대납언이 추증되었다.
정실 부인은 없었으나 여러 측실을 두었다. 유일하게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자녀는 넷째 딸 르이(레이쥬인)로, 처음에는 구조 모토모토와 약혼했으나 모토모토가 요절하여 관백 고노에 우치사키와 혼인했다.
| 이름 | 생몰년 | 관계 | 비고 |
|---|---|---|---|
| 킨 (렌타이인) | 1713년 ~ 1751년 | 양녀 | 실부는 다카스 번 2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카타. 1736년 우에스기 무네후사에게 시집감. |
이 외에도 요절한 형제자매가 30명 이상 있었다.
4. 평가
도쿠가와 무네하루는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인해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대립했다. 1731년, 그는 요시무네가 추진하던 과도한 절약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책 『온치세이요』 (温知政要일본어)를 출판하며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결국 1739년, 요시무네와의 오랜 정치적 다툼 끝에 무네하루는 강제로 은퇴당하고 나고야 성 내에 유폐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친척인 도쿠가와 무네카쓰가 오와리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요시무네가 사망한 후에야 무네하루는 성 밖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지만, 1764년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용서받지는 못했다. 그의 무덤에는 신분을 나타내는 금속 그물이 씌워졌는데, 이는 당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반영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무네하루가 사망한 지 75년이 지난 후, 당시 쇼군이 자신의 아들을 오와리 번주로 임명하면서 사면의 의미로 무덤의 그물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무네하루에 대한 평가가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5. 대중 문화
TV 아사히의 인기 드라마 시리즈 폭れん坊 쇼군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삶을 허구적으로 다루면서, 도쿠가와 무네하루를 요시무네 암살과 쇼군 자리 찬탈을 노리는 악당으로 자주 묘사했다. 무네하루가 직접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의 부하들이 그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르거나 그가 쇼군이 되었을 때 보상을 기대하며 음모를 꾸미는 식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극 중에서 무네하루 역할은 초기에 나카오 아키라가 맡았고, 이후 니시오카 토쿠마가 연기했다.
소설 Blood Ninja에서는 주인공 타로의 아버지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적으로 등장한다.
도쿠가와 무네하루를 소재로 한 소설은 다음과 같다.
| 저자 | 제목 | 출판사/정보 |
|---|---|---|
| 오노 켄 | 『소슈 躍如』(상·중·하) | 킨들판 ASIN B07CN7ZHTQ, B07CVYZ4NN, B07D2C6NGV |
| 키타가와 유치 | 『도쿠가와 무네하루 〈에도〉를 뛰어넘은 선견력』 | 풍매사 ISBN 978-4-8331-0563-7 |
| 시미즈 요시노리 | 『오와리 춘풍전』(상·하) | 겐토샤 ISBN 4877281908, ISBN 4877281916 |
| 가이온지 초고로 | 『요시무네와 소슈』 | 분게이슌주 ISBN 4167135329 |
| 야즈 준 | 『도쿠가와 무네하루』 | 카이에츠 출판사 ISBN 4876971838 |
| 다카하시 와지마 | 『오와리 아오이 풍자전 - 도쿠가와 무네하루』 | TV 아이치 ISBN 978-4876972197 |
| 센다 타츠히코 | 『오와리 나고야 걸물전』 | 풍매사 ISBN 978-4-8331-0554-5 |
| 도요다 아리츠네 | 「오와리 나고야 이문」 - 『이문·미드웨이 해전 타임 패트롤 극비 파일』 수록 | 카도카와 쇼텐 ISBN 9784041377307 (무네하루의 정책이 타임 트래블러에 의한 것이라는 설정의 단편) |
| 하야미 슌 | 『밀명 장군 마쓰다이라 미치하루』 | 코스믹 출판 ISBN 978-4774762548 (백성을 위한 건의함을 진언한 미치하루를 눈여겨본 요시무네의 의뢰로 서민을 위해 세상을 바로잡는 무네하루의 젊은 시절을 그린 작품) |
여러 배우들이 TV 드라마 등에서 도쿠가와 무네하루를 연기했다.
| 배우 | 작품명 | 연도 | 방송사/매체 | 비고 |
|---|---|---|---|---|
| 타키타 유스케 | 오오카 에치젠 제1, 2부 | 1970년 - 1971년 | TBS | |
| 오세 코이치 | 오오카 에치젠 제3부 | 1972년 - 1973년 | TBS | |
| 스야 야스유키 | 오오카 에치젠 제4부 | 1974년 - 1975년 | TBS | |
| 이리카와 야스노리 | 오오카 에치젠 제10부 | 1988년 | TBS | |
| 아오야마 요시히코 | 오오카 에치젠 제11부 | 1990년 | TBS | |
| 나카오 아키라 | 폭れん坊 쇼군 I - VII | 1978년 - 1997년 | TV 아사히 | 권력욕이 강하고 자기 방어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몰라! 나는 아무것도 몰라!"라는 대사가 유행어가 되었다. |
| 나리타 미키오 | 폭れん坊 쇼군 II | TV 아사히 | 단 1회 출연했으며, 나카오 아키라의 대역으로 투입되었다. | |
| 니시오카 토쿠마 | 폭주 장군 VIII, 폭주 장군 IX | 1997년 - 1999년 | TV 아사히 | 같은 방송국의 드라마 『영주 풍래방 은둔 여행』에서는 2대 후의 번주인 무네무네를 연기하기도 했다. |
| 나카이 키이치 | 8대 장군 요시무네 | 1995년 | NHK 대하 드라마 | |
| 칸다 마사키 | 통쾌한 영주 도쿠가와 무네하루 ~ 요시무네에게 도전한 남자 | 1996년 | TV 아이치 | |
| 하기와라 류세이 | 불꽃의 봉행 오오카 에치젠노카미 | 1997년 | TV 도쿄 | |
| 쿠니히로 토미유키 | 미 장군·요시무네에게 도전한 남자 | 1998년 | TV 오사카 | |
| 쿠리즈카 아사히 | 도망자 오린 | 2006년 | TV 도쿄 | |
| 나츠하라 료 | 오오카 에치젠 2시간 스페셜 | 2006년 | TBS | 전 이름인 '통춘(通春)'으로 출연했다. |
| 야마다 쥰다이 | 도쿠가와 풍운록 8대 장군 요시무네 | 2008년 | TV 도쿄 | |
| 와타나베 다이 | 오오카 에치젠 | 2014년 | NHK BS 시대극 | |
| 스가 켄타 | 금의 전 ~ 백 투 더 NAGOYA~ | 2017년 | CBC 텔레비전 | 도쿠가와 무네하루가 현대 나고야시로 타임 슬립하는 가상 설정의 역사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다. |
| GACKT | 신·폭주 장군 | TV 아사히 |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해로 인해, 도쿠가와 무네하루는 종종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쇼군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 패배한 인물로 여겨지곤 한다. 앞서 언급된 폭れん坊 쇼군이나 오오카 에치젠과 같은 드라마에서도 오랫동안 이러한 설정으로 묘사되었으나, 이후 두 시리즈 모두 해당 부분을 수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