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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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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우는 후한 말기의 인물로, 유주 자사를 거쳐 대사마까지 역임했다. 그는 청렴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 명성이 높았으며, 오환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장거, 장순의 난을 진압하고 유주목으로 임명되었으며,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거부했다. 이후 공손찬과의 갈등 끝에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공손찬의 몰락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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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유우
본관쉬저우둥하이군탄현
백안(伯安)
작위양분후(襄賁侯)
사망일193년 11월
사망 장소톈진 / 베이징
직업군사 장군, 정치인, 군벌
관직
태위(太尉)189년
사례교위(司隷校尉)? ~ 184년 이전
감릉상(甘陵相)184년 ~ ?
종정(宗正)? ~ 188년
유주자사(幽州刺史)188년 ~ 189년
대사마(大司馬)189년 ~ 190년
태부(太傅) (명목상)190년 ~ 193년
가계
아버지유수(劉舒)
자녀유화
기타
로마자 표기Liu Yu

2. 가계와 초기 생애

유우의 조상은 산둥성 탄현(郯縣) 출신으로, 동해국에 속해 있었다. 그의 가문은 광무제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다가 폐위되어 동해왕이 된 유강(劉彊)의 후손이다. 유우의 할아버지 유가(劉嘉)는 광록훈(光祿勳)을 지냈고, 아버지 유서(劉舒)는 단양군(丹陽郡) 태수를 지냈다.[2]

유우는 영제(재위 168–189) 통치 기간 동안 감릉국상(甘陵國相), 종정(宗正), 유주 자사(幽州刺史), 태위(太尉) 등 한나라 정부의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그는 재임 중 훌륭하고 청렴하며 자비로운 통치로 명성을 얻었다. 오환, 선비 등 유주의 소수 민족과 부여, 예맥 등 한나라 북쪽 국경 근처의 외국도 그를 존경하여 감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한나라 조정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양분후(襄賁侯)로 봉했다.

3. 유주 통치와 이민족 정책

유우는 청렴하고 학식이 빼어나 군(郡)에서 군리로 일하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郞)이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유주자사에 이르렀는데, 민정에 능하고 온후하며 사려가 깊었다. 그는 명성과 지위에 의지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고 검약한 태도를 지켰으므로, 영내의 백성들은 물론 국경 밖의 여러 이민족들에게도 큰 신뢰를 얻었다. 임기가 끝나자 조정에서는 유우를 중앙으로 불러 상서령, 광록훈을 거쳐 종정으로 임명했다.

이후 유주에서는 오환양주의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으나, 군량이 지급되지 않은 데에 반감을 품고 본국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때 장거가 장순과 함께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유우는 유주자사로 부임한 후, 뛰어난 통치와 이민족에 대한 포용 정책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유화 정책을 펼쳐 이민족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유주 지역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주의 백성들과 오환, 선비와 같은 소수 민족, 부여, 예맥과 같은 외국은 평화를 유지했다.[2]

당시 유우의 공덕과 치적은 중국에서 견줄 자가 없었으므로 청주, 서주의 백성들 중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우의 다스림을 받고자 이주한 자는 백만 가구에 이르렀다. 유우는 이들을 모두 거두어들이며 이들이 자립하여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도왔는데, 유우의 훌륭한 통치에 유민들은 대부분 자신이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유우는 비록 고관의 지위에 있었으나, 타고난 성품이 검소하여 의관은 해지고 신발은 기워서 신으며 식사에 고기가 놓이는 일이 없었으므로, 멀리서 온 이름난 선비들 중에서는 이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영한 원년 (189년) 9월, 동탁이 헌제를 옹립하자 유우는 대사마로 승진하고 양분후에 봉해졌다.[6]

3. 1. 장거, 장순의 난 진압

187년, 장순과 장거 등은 오환구력거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장순의 난). 이들은 오환과 연합하여 (薊)를 함락시키고 여러 군의 태수들을 죽였으며, 그 무리는 10여만 명에 이르렀고 장거는 스스로 천자를 자칭했다.[6] 공손찬이 반격하여 장거를 격파했으나, 관자성(管子城)에서 도리어 포위당하여 많은 군사를 잃고 패했다.[6] 하북의 4주가 모두 약탈당했으나 이를 막지 못했다.[6]

188년 3월, 조정에서는 유우를 유주목으로 임명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6] 유우는 계에 도착하자, 먼저 주둔한 병사들을 물리게 하고 은혜와 신의를 넓게 펼치는 것에 힘썼으며 사절을 보내 이해를 설명하고 장순의 수급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6] 유우는 오환 사이에서도 인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구력거 등은 싸우지 않고 유우에게 귀순했다.[6] 또한 장거, 장순의 무리에게도 상을 내리며 회유책을 펼친 결과 장거, 장순은 세력을 잃고 선비에게 달아나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6]

4월, 조정에서는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유우를 태위로 임명하고, 양비(襄賁侯)로 봉했으나 유우는 이를 사양하고 다른 인물들을 천거하는 겸손함을 보였다.[6]

4. 황제 추대와 거부

191년 발해태수 원소기주 한복을 비롯한 산동의 여러 제장들은 헌제동탁에 의해 옹립된 괴뢰 군주이며, 멀리 변방에 유폐되어 존재 의의조차 상실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황실의 웃어른이자 현명하고 인망 높기로 이름난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으나, 유우는 이를 참람한 짓으로 여겨 거부하였다.[7] 원소는 거듭 유우에게 존호를 바쳤으나, 유우는 흉노 땅으로 달아나서라도 이를 거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고, 결국 원소는 추대를 포기했다. 한복 등은 유우에게 영상서사(領尙書事)가 되어 천자를 대신해 벼슬을 내리도록 권유했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 한편, 연합군 내에서 원술은 자신이 황제가 되어 왕조를 건국할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현명한 유우가 즉위하면 자신의 야망에 장애가 될 것이라 판단하여 겉으로는 공의를 내세우며 유우의 옹립을 반대했다.

5. 공손찬과의 갈등과 최후

191년, 발해태수 원소기주 한복을 비롯한 산동의 여러 제장들은 헌제동탁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 군주이며, 멀리 변방에 유폐되어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황실의 어른이자 현명하고 인망 높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으나, 유우는 이를 옳지 못한 행동으로 여겨 거부했다.[7] 원소는 거듭 유우에게 존호를 바쳤지만, 유우는 차라리 흉노 땅으로 달아나 관계를 끊겠다며 거절하여 원소는 결국 포기했다. 한복 등은 유우에게 영상서사(領尙書事)가 되어 천자를 대신해 벼슬을 내리도록 권유했으나, 유우는 이 역시 거절했다. 원술은 황제가 되어 왕조를 건국할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유우가 등극하면 자신의 야망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겉으로는 공의를 내세워 반대했다.

한편 유우는 심복인 전주와 선우은을 장안으로 보내 헌제를 알현하게 했다. 헌제는 기뻐하며 장안에 있던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를 유우에게 보내 자신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화는 유주로 가던 중 원술을 만나 자신의 뜻을 설명했는데, 원술은 겉으로는 헌제와 황실을 옹호하며 유우를 원군으로 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유화에게 자신도 황제 구원에 합류하겠다며 유화를 보내주지 않고 유우에게 서신을 쓰게 했다. 유우는 유화의 서신을 받고 3천 기병을 보냈으나, 공손찬은 몰래 공손월을 보내 원술과 손잡고 유우가 보낸 군사를 빼앗게 했다. 이로써 유우와 공손찬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192년,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이 심해져 원소를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공손찬은 여러 차례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군사를 이끌고 원소를 공격했다. 유우는 싸움으로 주위를 피폐하게 만드는 공손찬의 행동을 재앙으로 여겨 이를 말렸으나, 공손찬은 따르지 않았다. 유우는 공손찬에게 지급하던 녹봉과 양식을 줄이고 조정에 상주하여 공손찬의 군사행동을 허락하지 않도록 했다. 황실의 충신을 자처하며 헌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던 원소를 대역죄인으로 규정했던 공손찬은 유우의 조치에 분노하여 유우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살해했다. 유우는 조정에 이 사실을 고했고, 공손찬 역시 유우가 물품 지급을 줄인 것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공손찬은 원소에게 패한 후 유우가 있던 계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주둔했다. 유우는 대화를 시도하며 공손찬과 만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공손찬이 난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유우는 공손찬의 군세가 흩어진 틈을 타 선공을 펼쳤으나, 군사 지휘가 서투르고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는 데 지나치게 신경 쓴 탓에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손찬의 역공에 대패하고 거용(居庸)으로 퇴각했으나 곧 가족들과 함께 공손찬에게 붙잡혔다.

193년, 조정에서 단훈(段訓)을 사자로 보내 유우와 공손찬의 벼슬을 높였는데, 공손찬은 단훈을 협박하여 유우가 원소와 결탁해 황제를 칭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계의 저자에서 유우 일가족을 처형하게 하고 유우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5. 1. 유우의 죽음이 초래한 결과

유우가 죽자 많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유우를 따르던 관리들은 공손찬을 비난하며 죽임을 당했고, 미돈은 유우의 머리를 빼앗아 장사지냈다.[7] 유우의 아들 유화는 원술에게서 벗어나 원소에게 의탁했고, 원소는 유화를 이용하여 공손찬을 공격했다. 결국 공손찬은 민심을 잃고 패망하여 자살했다.

공손찬이 유우를 죽인 사건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 공손찬의 몰락: 유우의 죽음은 공손찬의 인망을 크게 떨어뜨렸고, 원소에게 공손찬을 공격할 명분을 주었다. 황족을 살해한 공손찬은 공공의 적이 되었고, 결국 패망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유비와의 관계 단절: 공손찬과 친분이 있던 유비는 유우의 죽음에 분노하여 공손찬과 관계를 끊었다.
  • 북방 정세 불안: 공손찬의 행위에 반발한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켜 북방 정세가 불안해졌다.


하지만 유우의 검소한 생활과는 달리, 그의 처첩들은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어 유우의 본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4]

6. 평가

유우는 재임 기간 동안 훌륭하고 부패하지 않으며 자비로운 통치로 명성을 얻었다. 심지어 오환, 선비 등 유주의 소수 민족 부족과 부여, 예맥 등 한나라 북부 국경 근처의 외국 왕국도 그를 매우 존경하여 그의 관할 구역에서 감히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2]

7. 섬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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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10th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Chu'ping'' era, per Emperor Xian'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The month corresponds to 12 Nov to 11 Dec 193 in the Julian calendar.
[2] 서적 Fan Ye cited [[Xie Cheng]]'s work in vol.73 of ''Houhanshu'' for Liu Yu being a descendant of Liu Jiang and the identity of Liu Yu's father. Liu Yu'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only mentioned that his grandfather was Liu Jia.
[3] 서적 『三国志 (歴史書)』「公孫瓚伝」の注に引く『呉書』
[4] 간행물 後漢書/卷73#劉虞
[5] 서적 자치통감
[6] 서적 제9권 후한서 189
[7] 서적 권6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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