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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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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종원은 자가 자후이며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당나라 시대의 문인, 정치가, 사상가였다. 773년에 태어나 819년에 사망했다. 관직 생활 초기에 성공하여 진사에 합격하고 박학홍사과에 급제했으나, 개혁 정치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여 좌천되었다. 이후 영주와 유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 생활 동안 자연을 주제로 한 시와 기행문을 썼다. 그의 작품은 고문 부흥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대표작으로는 《영주팔기》와 시 "강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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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종원
이름유종원 (柳宗元)
로마자 표기Ryu Jong-won
출생773년
출생지융지, 산시 성
사망819년 11월 28일
사망지류저우, 광시 성
국적중국
직업철학자, 시인, 정치인
자 (字)자후 (子厚)

2. 생애

당나라의 문인이자 관리로, 자는 '''자후'''(子厚|자후중국어)이며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산서성 운성시 출신으로, 고종 때 재상을 지낸 유석(柳奭)의 후손이자 서초(西楚) 의제의 후예이다.

793년 진사 시험에 합격한 뒤 관직에 나아가 33세에 상서 예부 원외랑에 올랐다. 805년 덕종이 사망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왕숙문, 유우석 등과 함께 환관귀족 세력의 힘을 억제하고 정치를 쇄신하려는 개혁 운동(영정 개신)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거센 반발과 순종의 이른 퇴위로 인해 불과 7개월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개혁 실패 후 유종원은 정치범으로 몰려 영주 사마(司馬)로 좌천되었고(팔사마 사건), 이후 10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815년 잠시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으나 중앙 정계 복귀는 좌절되고, 다시 유주 자사(刺史)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결국 그는 다시는 중앙 관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819년 47세의 나이로 유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유주에는 그를 기리는 공원과 사당이 남아 있다.[1]

정치적으로는 불운한 삶을 살았지만, 좌천 이후 유배지에서의 경험은 그의 문학 세계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는 봉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봉건론(封建論)〉과 같은 글을 통해 합리주의적인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우화적인 기법을 사용한 산문을 통해 세상과 인간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한 비판 정신을 담아냈다. 또한 유배지의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한 시를 지어 왕유, 맹호연, 위응물과 함께 뛰어난 자연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산문에서는 한유와 함께 고문 부흥 운동을 이끌며 당송팔대가로서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좌천 이후 영주와 유주 시절에 쓰였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산서성 운성시 출신으로, 자는 '''자후'''(子厚|자후중국어)이다.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가까이는 고종 때 재상을 지낸 유석(柳奭)의 후손이며, 멀리는 서초(西楚) 의제의 후예이다.

어린 시절, 12세부터 16세까지 지방 관료였던 아버지 유진을 따라 강남, 강서, 담주 등지를 여행했다. 정원 9년(79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고, 정원 14년(798년)에는 어려운 관료 등용 시험인 박학홍사과에도 합격하여 집현전 정자(정부 서적 편찬 담당)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전현 위(경찰 관료), 감찰어사(행정 감독관) 등을 역임하며 젊고 유능한 관료로서 경력을 쌓았다.

덕종 치세 말기인 8세기 말, 당나라 조정에서는 환관 세력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에 맞서는 젊은 개혁파 관료들이 부상하고 있었다. 왕숙문을 중심으로 한 이 개혁 그룹에 유우석과 함께 참여하여 정계 쇄신을 목표로 활동했다. 이들은 환관과 그들을 이용하는 귀족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805년 정월, 덕종이 사망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왕숙문 등 개혁파는 정치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유종원도 예부시랑에 임명되어 개혁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득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보수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게다가 순종마저 병약하여 즉위 8개월 만인 그해 8월에 퇴위하게 되었다. 순종의 퇴위와 함께 개혁 정책은 불과 7개월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영정 개신), 유종원을 포함한 개혁파는 모두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정쟁에서 패배한 개혁파는 정치범으로 몰려 처벌받게 되었다. 유종원은 사형은 면했지만, 수도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소주의 자사(지방 장관)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보수파가 장악한 조정에서는 이 처분마저 가볍다고 여겨 재검토가 이루어졌고, 결국 유종원이 소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사 직위마저 박탈당하고 더 낮은 직급인 영주(현재의 후난성 영주시)의 원외사마(정식 업무가 없는 좌천직)로 다시 좌천되었다(팔사마 사건).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유종원 동상


영주에서 10년간 유배 생활을 한 뒤, 원화 10년(815년) 잠시 장안으로 소환되었으나, 다시 유주(현재의 광서성 유주시) 자사로 임명되어 떠나야 했다. 결국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원화 14년(819년) 유주에서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유주에는 그를 기리는 공원과 사당이 남아 있다.[1]

유종원은 짧은 생애의 상당 부분을 좌천되어 보냈기에 관직 이동이 적었고, 정치적으로는 불운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좌절은 오히려 그를 위대한 문학가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좌천 이후에 쓰였으며, 특히 유배지에서의 경험은 그의 , 우화, 사색적인 기행문, 그리고 유교, 도교, 불교 사상을 아우르는 에세이 창작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왕유, 맹호연, 위응물 등과 함께 뛰어난 자연 시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산문 분야에서는 한유와 더불어 고문 부흥 운동을 이끌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2. 2. 영정 개신과 좌천

덕종 치세 말기인 8세기 말, 당나라 조정에서는 환관 세력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에 맞서 젊은 관료들이 개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왕숙문을 중심으로 한 이 개혁파는 정계 쇄신을 목표로 삼았고, 유종원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 유우석과 함께 여기에 참여했다.

805년 정월, 덕종이 세상을 떠나고 순종이 즉위하자 개혁파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유종원은 33세의 나이로 상서예부원외랑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예부시랑까지 오르며 개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들은 환관귀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정치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게다가 개혁을 지지했던 순종마저 병약하여 즉위 8개월 만인 805년 8월에 퇴위하면서, '영정 개신'이라 불리는 이 개혁 운동은 불과 7개월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개혁 실패 후, 유종원을 비롯한 개혁파 인사들은 정치범으로 몰려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유종원은 사형은 면했지만, 수도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소주의 자사(지방 장관)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보수파가 장악한 조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처벌을 강화하여, 유종원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사 직위를 박탈하고 더욱 외진 영주의 원외사마(실권 없는 한직)로 다시 좌천시켰다. 유종원을 포함해 함께 좌천된 8명의 핵심 인물들을 일컫는 '팔사마 사건'은 당시 개혁파에 대한 보수 세력의 탄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유종원의 나이는 33세였다.

영주에서 10년 동안 머물던 유종원은 원화 10년(815년)에 잠시 장안으로 소환되었으나, 중앙 정계 복귀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다시 유주 자사로 임명되어 떠나야 했다.[1] 결국 그는 819년 유주에서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정치적으로는 불운한 삶이었지만, 좌천 이후 쓴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오히려 문학가로서 유종원의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2. 3. 유주 자사와 죽음

영주에서 10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던 유종원은 원화 10년(815년)에 잠시 장안으로 소환되었다.[1] 그러나 중앙 정계 복귀의 기대와 달리, 그는 다시 유주 자사로 임명되어[1]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유주 자사로 부임한 그는 그곳의 지방 장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그의 유배 생활은 문학적으로는 오히려 꽃피는 계기가 되었는데, 유주 시절에도 , 우화, 사색적인 기행문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1] 오늘날 유주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공원과 사당이 남아 있다.[1]

결국 유종원은 중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원화 14년(819년) 유주에서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1] 그는 비교적 단명했고 오랫동안 유배지에 머물렀기 때문에 관직 경력은 순탄치 못했다. 그러나 한유가 그의 묘지명에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정치적 불운과 좌절이 오히려 그를 위대한 문학가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영주와 유주 등 좌천된 이후 쓰였다.

3. 작품 활동

유종원은 시와 산문 양쪽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기행문은 좌천지인 영주(永州)에서의 경험을 담은 《영주팔기(永州八記)》이며, 약 180편의 시가 현재까지 전해진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관직에서 벗어난 자유를 노래하는 반면, 다른 일부는 귀양살이의 슬픔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시로는 여러 중국화 작품에 영감을 준 "강설(江雪)"이 있다.

그는 동시대의 한유와 함께 고문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육조 시대부터 · 시대까지 유행했던 사륙변려문의 지나친 형식주의와 수사적 기교를 비판하고, 내용 전달(達意)을 중시했던 진· 시대의 고문을 본받아 간결하면서도 내용이 충실한 새로운 문체를 추구했다. 이러한 그의 문학관은 유교의 도(道)를 담는다는 '재도(載道)' 문학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유종원은 춘추시대 역사를 다룬 《국어》를 비판하는 《비국어(非國語)》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후대의 학자 유장(劉 章, 1095년경–1177년), 강단례(江端禮), 그리고 우집(虞 集)의 동생인 우반(虞槃, 1300년경 활동) 등은 유종원의 비평에 반박하며 《비비국어(非非國語)》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2]

이 외에도 "삼계(三戒)", "송청전(宋淸傳)", "포사자설(捕蛇者說)" 등 우화 형식의 산문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사상적으로는 유교, 도교, 불교의 삼교 사상을 절충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며,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선승들과 가깝게 교류하고 친구 한유의 불교 배척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등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유주(柳州) 시절에는 영주 시절에 비해 작품 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유주에서의 체류 기간은 영주의 절반 정도였지만, 그 기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냈다. 고온 다습한 기후, 풍토병, 맹수, 이민족과의 문화적 차이 및 충돌, 관리 부족 등 열악한 자연 및 사회 환경과 각기 등 지병 악화로 인해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3. 1. 시

주 문징의 산수화, 유종원의 시 "강설"의 마지막 두 구절이 오른쪽에 쓰여 있음 ("")


유종원의 시는 약 180편이 전해지며, 이 중 5편은 《당시삼백수》에 실렸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벼슬에서 벗어난 자유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다른 일부는 귀양살이의 슬픔을 노래한다.

시는 도연명의 영향을 받아 간결한 표현 속에 담담한 정취를 담아내는 자연시를 주로 썼다. 당나라 시대 비슷한 경향의 시인인 왕유, 맹호연, 위응물 등과 함께 '왕맹위류(王孟韋柳)'로 불리기도 했다. 다만 그의 시에는 정치적 불만이나 슬픔이 짙게 배어 있으며, 수도를 떠나 외딴 곳의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온전히 산수(山水)에 몰입하지 못하는 독자적인 경향을 보인다.

'강설'(江雪중국어)은 그의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로, 여러 중국화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강설'은 유종원이 영주(永州) 사마(司馬)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설(江雪)'''
원문훈독현대어역
千山鳥飛絶천산(千山) 조비절(鳥飛絶)온 산에 새들의 나는 모습이 사라지고,
萬徑人蹤滅만경(萬徑) 인종멸(人蹤滅)온갖 길에 사람의 발자취도 없어졌네.
孤舟簑笠翁고주(孤舟) 사립옹(簑笠翁)외로운 배 위에는 도롱이와 삿갓을 쓴 노인이,
獨釣寒江雪독조(獨釣) 한강설(寒江雪)홀로 차가운 강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낚시질을 하고 있네.


주요 저작


  • 유하동집(柳河東集) 45권
  • 외집 2권

3. 2. 산문



유종원의 가장 잘 알려진 산문 작품은 기행문 모음집인 《영주팔기(永州八記)》이다. 그는 영주(永州, 현재의 후난성 영릉구)로 좌천되었을 때 이 글들을 썼다. 당시 영주는 기후적으로 아열대에 속하며 다른 민족도 섞여 사는 문자 그대로의 "이향(異鄕)"이었다. 유종원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밀려난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 장안과는 다른 이질적인 풍물을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감상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영주팔기》이다. 이 작품들에는 중앙에서 격리된 작가의 처지에 대한 우수(憂愁)가 짙게 배어 있다.

《영주팔기》는 다음 여덟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원제
시득서산연유기始得西山宴遊記중국어 (처음으로 서산을 얻어 연유하는 기록)
고무담기鈷鉧潭記중국어 (고무담의 기록)
고무담서소구기鈷鉧潭西小丘記중국어 (고무담 서쪽 작은 언덕의 기록)
지소구서소석담기至小丘西小石潭記중국어 (작은 언덕 서쪽 소석담에 이르는 기록)
원가갈기袁家渴記중국어 (원가갈의 기록)
석거기石渠記중국어 (석거의 기록)
석간기石間記중국어 (석간의 기록)
소석성산기小石城山記중국어 (소석성산의 기록)



※ 모두 『유종원문집』 권29에 수록되어 있다. "고무(鈷鉧)"는 불다리미, 즉 옛날 다리미를 뜻하며, 이와 모양이 비슷한 못(潭)이 영릉구에 있다.

유종원은 또한 《비국어(非國語)》를 저술하여 춘추시대 역사를 다룬 《국어》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후대의 학자 유장(劉 章, 약 1095–1177), 강단례(江端禮), 그리고 우집(虞 集, 1272–1348)의 동생인 우반(虞槃, 활동 시기 1300년경) 등은 유종원의 비평에 반박하며 《비비국어(非非國語)》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2]

이 외에도 "삼계(三戒)", "송청전(宋淸傳)", "포사자설(捕蛇者說)" 등 우화 형식의 산문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문학사적으로 유종원은 동시대의 한유와 함께 고문 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육조 시대부터 · 시대까지 유행했던 사륙변려문의 지나친 형식주의와 수사적 기교를 비판하고, 내용 전달(達意)을 중시했던 진· 시대의 고문(古文)을 본받아 간결하고 내용이 충실한 새로운 문체를 추구했다. 그의 산문은 유교의 도(道)를 담아내는 '재도(載道)' 문학의 모범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상적으로는 유교, 도교, 불교의 삼교 사상을 절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선승들과 가깝게 교류했으며, 친구인 한유가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등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4. 사상

유종원은 문학자이자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사상가, 법가, 무신론자, 유물론자, 합리주의자로도 평가받는다. 그는 무신론적 입장을 가졌음에도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옹호했으며, 유교, 제자백가, 불교 사상을 아우르는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의 정치 사상을 대표하는 구호는 맹자의 말을 빌린 "생인(人民)을 귀하게 여기고, 사직(社稷)(국가)은 그 다음이다"라는 명언이다. 이처럼 국가보다 백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은 무신론왕권신수설에 대한 부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유종원은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 사상을 비판했다. 그는 "성인의 뜻은 신이나 하늘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하늘의 문제와 땅의 문제를 분리하고자 했다.

그는 천명을 인정하면 정치의 최종 책임이 하늘에 돌아가게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하늘은 그저 위에 있는 검은 물체일 뿐, 백성의 뜻을 알거나 스스로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결국 정치의 책임 소재는 불분명해진다고 생각했다. 유종원은 이러한 천명 사상이 실제로는 황제의 독단적인 통치나 환관의 권력 남용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며,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결국 백성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정치의 책임을 하늘의 뜻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5. 일화

원화 15년(815년), 조정의 소환 통지를 받은 유종원은 사면을 기대하며 친구 유우석과 함께 급히 입궐했다. 그러나 그는 더 먼 곳인 류저우로 좌천되었고, 유우석은 번주로 발령받았다. 유종원은 고령의 노모를 모시고 있는 유우석을 염려하여, 자신의 임지인 류저우가 번주보다 이동 거리가 짧으니 서로 임지를 바꿔달라고 조정에 요청했다. 이 요청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재상 배도의 중재로 유우석의 임지는 장안에서 조금 더 가까운 연주 자사로 변경되었다. 이 일화는 유종원의 깊은 우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참조

[1] 웹사이트 Liuzhou Tourism https://web.archive.[...] 2014-09-11
[2] 논문 A Third Look at "Li Wa Zhuan" http://www.maneyonli[...]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3] 서적 出たらめの記 東亜堂書房
[4] 문서 清代に[[沈徳潜]]が編さん。全四章で第一章目のみ韓愈
[5] 문서 「柳宗元」項目を参照
[6] 서적 창려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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