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현왕후의 종증손이자 윤유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윤유곤의 양자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암행어사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광해군 시기에는 김제남을 복주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파평군에 봉작되었다. 인목대비 폐모론과 김제남 및 영창대군 사형을 주도한 일로 탄핵을 받았으나, 이후 공조참의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해 있으며, 윤선도와 인척 관계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산 2-4번지에 있으며, 고조모 연안부부인 담양전씨 묘 아래, 양아버지 윤유곤의 묘 오른쪽 언덕에 묘좌(卯坐)로 매장되었다.
윤의중(尹毅中)을 통해 고산 윤선도의 생가 고모부이자 양가로는 5촌 당고모부가 된다. 또한 정여립의 옥사 때 희생된 이발(李潑)은 그의 처형의 남편으로 손윗동서가 된다.
2. 생애
2. 1. 초기 활동
1561년(명종 16)에 태어났으며 생일은 미상이다. 성종의 제3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종증손으로, 그의 오빠 윤탕로의 증손자였다. 생부는 성삼문의 문집을 복원, 처음 간행한 윤유후이다. 한성부서윤 윤유후의 아들이나, 자녀 없이 죽은 충의위, 전력부위 행충좌위 부사용 윤유곤의 양자가 되었다. 친형 윤조(尹肇)는 선공감감역관이었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별좌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전함사 별좌(典艦司別坐)로 재직 중, 정유재란이 터지자 앞장서서 달아났다는 이유로 그해 9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1] 1600년(선조 33) 비변사에서 정유재란 때 먼저 달아난 신하들의 명단을 서계, 보고하였다.[2] 이후 주부를 거쳐 사헌부감찰, 판관 등을 역임했다.
이후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거쳐 신계 현령(新溪縣令)으로 재직 중, 전임지인 토산현감 재직 당시 아내의 장사를 치른 뒤, 경내에다 묘지(墓地)를 잡고, 그곳에 전토(田土)를 많이 점유해 놓았다 하여 사헌부로부터 논핵을 당했다.[3]
1604년(선조 37) 7월 11일 당진 현감(唐津縣監)에 임명되고, 1606년 3월 충청도 암행 어사 이극신(李克信)이 선조에게 지방관의 실태를 보고할 때, "당진 현감(唐津縣監) 윤공(尹鞏)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힘써서 조사(詔使)의 지공물(支供物)을 모두 관에서 마련하고 백성을 번거롭히지 않았습니다. (唐津縣監尹鞏, 政務平民, 天使支待之物, 自官措備, 不煩民力。)" 하였다.
2. 2. 관료 생활
1611년(광해군 3) 아산현감(牙山縣監)으로 부임한 후, 이웃 읍의 과부의 노비를 빼앗아 관아에 숨겨두어 과부가 길에서 울부짖은 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4] 1612년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임명되고, 1612년(광해군 4년) 12월 18일 화약 1백 15근과 철환(鐵丸) 3천 개를 마련한 공로로 광해군이 친히 칭찬하고 가자하였다.[5] 1613년 1월 7일 승정원에서 경기 수사 유지신(柳止信), 충홍 수사 이지효(李止孝), 합천 군수 윤공(尹鞏) 등이 사소한 준비를 하였다고 중한 금옥관자(金玉貫子)로 가자(加資)했다며, 잘못이라 지적하고 이를 개정할 것을 상주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6] 곧 양사가 그의 승진 개정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듣지 않았다.[7]
1613년 5월 25일 김제남을 복주(伏誅)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8][9] 한편 박이서(朴彛叙)가 남양(南陽)에 있는 그의 전지를 빼앗기도 하여 논란이 되었다.[10] 1615년 8월 5일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계로 보고하여, "수십 석을 씨부릴 만한 넓이의 첨지 윤공(尹鞏)의 남양(南陽)에 있는 언답(堰畓)을 빼앗아, 그의 사돈인 유지신(柳止信)이 경기 수사로 있을 때 수군 수천 명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아 전답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 그의 아들 박로가 가서 그 역사를 감독하였는데 얼마 안 걸려서 완성시켰다" 하였다.[11]
인조반정 후 그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모론에 참여한 일로 계해정사록에 실려, 공격당하였다.
1623년 문외출송당했다가 1625년(인조 3) 6월 25일 다시 파평군에 봉작되었다. 그는 정국 공신 파천군(坡川君) 윤탕로(尹湯老)의 적장손 자격이었으므로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2. 3. 생애 후반
1626년 12월 4일 김제남 사형과 영창대군 사형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도당을 거느리고 앞장서 흉소(凶疏)를 하여 대군을 주살하고 김제남을 엄하게 국문하여 나라의 법을 바루도록 하라는 청을 하였다는 이유였다. 사간원이 탄핵하자 인조가 듣지 않았다.[12]
사간원은 거듭 탄핵해서 그를 삭탈관작시키고, 문외출송시켰다. 다시 되돌아와 공조참의를 지냈다.
1628년 8월 28일 파평군(坡平君)에 임명되고[13], 그해 9월 신·구 공신(新舊功臣) 및 여러 적장(嫡長)들에게 각각 1등급씩 가자할 때 적장자격으로 가선 대부로 승진하였다.[14] 1628년 10월 4일 사헌부로부터 광해군 때 상소에 앞장선 일로 탄핵을 당했지만 인조가 듣지 않았다. 1629년 사망했다.
3. 사후
4. 가족 관계
5. 기타
그는 광해군 당시 인목대비 폐모론에 참여하고, 김제남 등을 죽일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윤선도하고는 인척간이라 서로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참조
[1]
역사기록
직무를 유기하고 도망간 관원들의 처벌, 가옥 훼철의 금지, 임실 현감 경종지의 교체를 사헌부가 아뢰다
선조실록
1597-09-27
[2]
역사기록
비변사에서 정유 왜란 때 먼저 달아났던 벼슬아치의 이름을 올리다
선조실록
1600-02-07
[3]
역사기록
헌부에서 문여의 일과 윤공의 비리를 아뢰다
선조실록
1603-06-12
[4]
역사기록
사간원이 헌납 오정을 체차하고 이신의와 윤선정의 가자의 개정을 청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11-01-08
[5]
역사기록
화약 등을 마련한 공으로 합천 군수 윤공에게 가자(加資)하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612-12-18
[6]
역사기록
승정원이 김영국의 노직(老職)에 관한 공사·윤공 등의 가자(加資) 개정을 청하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613-01-07
[7]
역사기록
양사가 공신 추가 녹훈 논의와 교하에 대한 명을 거둘 것 등을 청하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613-01-17
[8]
역사기록
전 군수 윤공 등이 상소하여 이의 및 김제남의 처단을 청하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613-05-25
[9]
역사기록
전 군수 윤공 등이 상소하여 이의 및 김제남의 처단을 청하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1613-05-25
[10]
역사기록
우부승지 한찬남이 자신이 우연히 언급한 말로 간신히 인피하였음을 들어 대죄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15-07-22
[11]
역사기록
양사에서 전 참판 박이서의 징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15-08-05
[12]
역사기록
간원이 폐비론에 참여한 파평군 윤공의 삭탈 관직과 문외 출송을 아뢰다
인조실록
1626-12-04
[13]
역사기록
김완·문회·윤공·김광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인조실록
1628-08-28
[14]
역사기록
신·구 공신 및 여러 적장들에게 각각 1등급씩 가자를 명하다
인조실록
1628-09-26
[15]
서적
有明朝鮮國通政大夫敦寧府都正尹公墓碣銘 幷序
호음유고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