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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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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지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종증손이며,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아버지이다. 1475년에 태어나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돈녕부사,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하고 파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딸이 중종의 계비가 되면서 정치적 입지를 얻었으나, 국구임에도 사치스러운 행동으로 비판을 받았다. 1520년 어머니의 상을 당한 후 병을 얻어 1534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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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임
기본 정보
이름윤지임
관직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본관파평 윤씨
족보상의 위치윤頊의 첫째 아들
윤지임
휘 (한글)윤지임
휘 (발음)윤지임
작위파산부원군
작위 (한자)坡山府院君
작위 (한글)파산부원군
작위 (발음)파산부원군
초명미상
중향
자 (한자)重郷
자 (한글)중향
자 (발음)중향
미상
아호미상
시호정평
시호 (한자)靖平
시호 (한글)정평
시호 (발음)정평
출생1475년
출생지한성부
사망1534년 5월 26일
사망지미상
사인미상
생부미상
생모미상
아버지윤頊
어머니영일 정씨 (정済의 딸)
배우자전성부부인 이씨 (이덕숭의 딸)
자녀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문정왕후
윤원로
윤원형
미상
매장지미상

2. 생애

1475년(성종 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자시 판관 윤욱이며, 어머니는 정몽주의 4대손녀인 영일 정씨이다.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종증손이며,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와는 8촌 관계이다. 부인은 관찰사 이덕숭의 딸인 전의 이씨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장원서 별제 등을 지냈다. 1517년 그의 딸이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로 간택되면서[2] 정치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간택 직후 여러 단계를 건너뛰어 돈녕부 도정에 임명되었고[3], 곧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까지 올랐다.[4]

1518년 전함사 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은 그가 직무를 수행하기에 무지하다며 여러 차례 반대했다.[5][6][7][8][9] 결국 외척의 정치 관여를 경계해야 한다는 정사룡 등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체아직으로 교체되었다.[10][11][12] 이후 다시 영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고, 1522년에는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에 봉해졌다.[14]

그러나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학자의 첩을 강탈했다는 의혹으로 사헌부의 국문 요구를 받거나[13], 제릉 제관으로서의 불성실한 태도와 농번기 매사냥 등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근신 처분을 받는 등[16][17]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다. 윤지임 본인은 평소 외척의 정치 개입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나[10], 정작 그의 아들 윤원형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이 되어 대윤(大尹)의 윤임 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키며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520년 어머니 상을 당한 뒤 얻은 병으로 오랜 기간 투병했으며, 1534년 경기도 교하의 선산에 가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사후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및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475년(성종 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자시 판관을 지낸 윤욱이고, 어머니는 영일 정씨로 포은 정몽주의 4대손이자 감찰 정제(鄭濟)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를 지낸 윤계겸이며, 증조부는 우의정을 역임한 윤사흔이다. 또한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의 종증손(從曾孫)에 해당한다.

아버지 윤욱은 내자시 판관을 지냈으나 일찍 사망하여, 윤지임은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성인처럼 상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종증조부(증조부 윤사흔의 형제)인 윤사분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증조부이기도 하다.[19] 이에 따라 윤지임은 장경왕후에게는 8촌 오빠가 되고, 대윤의 영수 윤임에게는 8촌 형이 되는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부인은 전성부부인(全城府夫人) 전의 이씨로, 관찰사 이덕숭의 딸이다.

2. 2. 관직 생활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장원서 별제(別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무관직을 거쳐 별좌(別座)를 지냈으며, 1510년(중종 5년)에는 과의교위(果毅校尉) 행충무위 부사과(行忠武衛副司果)가 되었다.

1517년 4월 5일, 그의 딸이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로 간택되면서[2]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간택 다음 날인 4월 6일에는 곧바로 돈녕부 도정(都正)에 임명되었고[3], 이는 여러 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같은 해 7월 3일에는 보국숭록대부 판돈녕부사를 거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승진했다.[4]

1518년(중종 13년) 7월 7일에는 전함사 제조(提調)에 임명되었으나, 대간[5]은 윤지임이 무지하여 직책에 부적합하다고 여러 차례(7월 10일, 7월 11일, 7월 14일) 중종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중종은 그가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라는 이유로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6][7][8][9] 결국 8월 8일 정사룡 등이 한나라 문제 때의 국구 두광국이나 후한 마원처럼 외척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례를 들어 주장하자[10], 다음 날인 8월 9일 윤지임은 체아직[11]으로 교체되었다.[12]

1519년(중종 14년)에는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15일, 사헌부는 윤지임이 학자의 첩을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삼고 강제로 관계를 맺은 흔적이 있다며 국문할 것을 청했으나, 중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13]

1522년(중종 17년) 4월 29일에는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에 봉해졌다.[14] 국구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1526년에는 제릉의 제관으로 참여한 후 황해도 강음현에서 목욕을 하고 다음 제례에 불참하거나, 농사가 중요한 시기에 매사냥을 즐겨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대간[16]의 탄핵을 받아 근신 처분을 받기도 했다.[17]

윤지임은 평소 한나라 문제가 국구 보광(寶廣)의 정치 참여를 막았던 고사를 언급하며 외척의 정치 개입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의 아들 윤원형은 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이 되어 대윤(大尹)의 영수이자 윤지임의 8촌인 윤임 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사후에는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에 추증되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2. 3. 논란과 비판

국구로서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행동에 절제가 없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농번기에 매사냥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처첩을 빼앗는 등의 행위로 문제가 되었다.

1518년 7월 7일, 대간[5]은 윤지임이 전함사 제조의 직책을 맡기에는 무지하다며 중종에게 교체를 건의했으나, 중종은 윤지임이 국구라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6] 대간은 7월 10일, 7월 11일, 7월 14일에도 거듭 같은 내용을 아뢰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7][8][9] 같은 해 8월 8일, 정사룡전한두광국이나 후한의 마원 등 외척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던 역사적 사례를 들며 윤지임 또한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10] 이 주장은 다음 날인 8월 9일 받아들여져 윤지임은 해당 직책에서 체아[11]되었다.[12]

1519년 6월 15일, 사헌부는 윤지임이 한 학자의 첩을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삼고 강간한 흔적이 있다며 그를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중종은 이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13]

1526년 5월 23일, 대간[16]은 윤지임의 또 다른 부적절한 행동을 지적했다. 제릉(齊陵)의 제관이었던 윤지임이 제사를 마친 후 황해도 강음현에서 목욕을 했다는 이유로 다음 제례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농사가 한창인 시기에 매사냥을 즐겨 백성들에게 소란과 폐해를 끼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일로 윤지임은 근신하라는 명을 받았다.[17]

윤지임은 평소 한 문제가 국구 두광국의 정치 참여를 막았던 고사를 언급하며 외척의 정치 개입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0] 그러나 정작 그의 아들 윤원형은 훗날 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이 되어 대윤(大尹) 윤임 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는 윤지임 본인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과였다.

2. 4. 사망

1520년 어머니 연일 정씨의 상을 당했을 때 얻은 병으로 여러 해 동안 병석에 있었다. 1534년 4월 9일 경기도 교하의 선산에 참배하러 가던 중 병이 재발하여 3일 만에 사망하였다. 정확한 사망 원인이 된 병명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같은 해 6월 11일 경기도 교하군 와초동(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 당하리)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사후

사망 후 6월 11일 경기도 교하군 와초동(瓦草洞, 현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 내 곤좌간향(坤坐艮向)에 부인과 함께 쌍분으로 안장되었다. 근처에는 아버지 윤욱의 묘가 있다. 아들 덕분에 순충적덕보기공신(純忠積德輔祈功臣)에 봉해지고, 증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 묘가 있으며, 신도비문과 비문은 이사구(李思句)가 글을 짓고, 윤안인(尹安仁)이 글씨를 썼다.

4. 가족 관계

'''윤지임의 직계 가족'''
관계이름생몰년비고
할아버지윤계겸(尹繼謙)1442 ~ 1483공조판서(추증), 시호 공양공
할머니김해 김씨? ~ ?김진손(金震孫)의 딸
아버지윤욱(尹頊)1459 ~ 1485내자시판관(증 영돈녕부사)
어머니영일 정씨? ~ 1520정제(鄭濟)의 딸, 정몽주의 증손
부인전성부부인 전의 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1475 ~ 1511이덕숭의 딸
이름 미상? ~ ?
향단(香團)? ~ ?


  • '''정실 전의 이씨 소생'''
  • * 장남 : 윤원개(尹元凱)
  • ** 자부 : 이씨, 이보(李俌)의 딸

손자 : 윤기(尹紀)
손자 : 윤강(尹綱)
손녀 : 윤씨, 구윤(具潤, 본관은 능성)의 처

  • * 차남 : 윤원량(尹元亮, ? ~ 1569)
  • ** 자부 : 장씨, 현령 장일취(張日就)의 딸

손자 : 윤소(尹紹)
손자 : 윤찬(尹纘)
손자 : 윤치(尹緻)
손녀 : 숙빈 윤씨(淑嬪 尹氏, ? ~ 1595), 인종의 후궁

  • * 삼남 : 윤원필(尹元弼, 1496 ~ 1547)
  • ** 자부 : 정씨, 현감 정찬(鄭纘)의 딸

손자 : 윤윤(尹綸)
손자 : 윤위(尹緯)
손자 : 윤회(尹繪)
손자 : 윤집(尹緝)
손자 : 윤백원(尹百源)

  • ** 자부 : 이씨, 주부 이량(李亮)의 딸

손자 : 윤구(尹絿)

  • * 장녀 : 윤씨
  • * 차녀 : 문정왕후(1501 ~ 1565)
  • ** 사위 : 중종(1488 ~ 1544) - 조선의 제11대 임금
  • * 오남 : 윤원형(尹元衡, 1509 ~ 1565)
  • ** 자부 : 김씨, 김안수(金安遂)의 딸

손자 : 윤계(尹繼)
손자 : 윤효원(尹孝源)
손자 : 윤충원(尹忠源)
손자 : 윤담연(尹覃淵)
손녀 : 윤씨, 이영민(李榮敏), 김귀남(金貴男)의 처

  • '''첩 미상 소생'''
  • * 서자 : 지손(支孫)
  • * 서자 : 서손(庶孫)
  • * 서자 : 방손(傍孫)
  • * 서자 : 저손(低孫)
  • * 서녀 : 윤씨

  • '''첩 향단(香團) 소생'''
  • * 서자 : 윤선지(尹善指)
  • ** 서손자 : 윤욱(尹昱)

서증손자 : 윤필세(尹必世)
* 서고손녀 : 윤씨, 강윤조의 처

  • '''기타'''
  • * 사돈 : 성종 - 조선의 9대 임금 (중종의 아버지)
  • * 장인 : 이덕숭(李德崇, ? ~ 1504)
  • * 장모 : 남양 홍씨, 홍순성(洪循性)의 딸
  • * 8촌 여동생 : 장경왕후(1491 ~ 1515) - 중종의 제2왕비, 윤사분의 증손녀
  • * 8촌 동생 : 윤임(尹任, 1487 ~ 1545) - 대윤의 영수, 윤사분의 증손자

5. 평가

중종실록에 따르면, 윤지임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검소했다.[18] 유생(儒生)으로 평민(布衣) 신분이던 시절부터 비단옷을 입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하여, 외척 중에서는 현명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8]

그러나 긍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 양반 사대부나 평민의 처첩을 함부로 빼앗아 지탄을 받았으며,[19] 1518년 윤여필과 함께 각각 군기시와 전함서 제조로 임명되었을 때는 대간으로부터 학식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9] 국구(國舅)가 된 후에도 농번기에 매사냥을 즐기는 등 행동에 절제가 부족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19]

한편으로는 한나라 문제(文帝)가 국구 보광(寶廣)의 정치 참여를 막았던 고사를 언급하며 외척의 정치 개입과 전횡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9] 하지만 정작 그의 아들인 윤원형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이 되어 대윤(大尹) 윤임 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권력을 휘두르는 등 외척으로서의 폐단을 보여주었다.[19]

이처럼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데, 중종실록의 사관은 윤지임의 졸기(卒記)에서 그의 성품과 생활 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외척(外戚) 중의 현명한 사람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했다.[18] 비록 처첩 문제나 학식 부족 등으로 비판받았지만, 행동은 민첩하고 신중했다는 평가도 있다.[19]

6. 기타

대윤의 영수인 윤임에게는 8촌 형이었고, 장경왕후에게는 8촌 오빠였다.[19] 또한 장경왕후의 아버지인 윤여필, 윤여해 형제는 그의 7촌 재종숙(再從叔)이었으므로, 윤지임은 윤여필에게 7촌 조카가 된다.

그는 며느리를 통해 윤임과 이중 인척 관계를 맺기도 했다. 윤임의 장인 이보(李俌)[20]의 다른 딸이 윤지임의 맏아들 윤원개와 혼인했기 때문이다.[21] 윤원개윤원로, 윤원형 등의 형이자 문정왕후의 오빠였으며,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에게는 백부가 된다.

한편, 인종의 후궁인 숙빈 윤씨는 윤지임의 손녀딸(차남 윤원량의 딸)이자 문정왕후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처럼 윤지임 가문은 부계 혈연뿐 아니라 혼인을 통해 여러 겹의 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참고로 조선 시대에는 대전회통 등 법전에서 8촌까지를 친척으로 규정했다.

윤지임은 평소 한나라 문제(文帝)가 국구(國舅, 왕의 장인) 보광(寶廣)의 정치 참여를 막았던 고사를 인용하며 외척의 정치 개입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작 그의 아들 윤원형은 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이 되어 대윤(大尹)의 윤임 일파를 숙청한 을사사화를 주도하고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이는 조선 시대 외척 문제가 되풀이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7. 윤지임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문서 国舅
[2]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27 http://sillok.histor[...] 1517
[3]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27 http://sillok.histor[...] 1517
[4]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28 http://sillok.histor[...] 1517
[5] 문서 台諫
[6]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33 http://sillok.histor[...] 1518
[7]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33 http://sillok.histor[...] 1518
[8]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33 http://sillok.histor[...] 1518
[9]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33 http://sillok.histor[...] 1518
[10]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34 http://sillok.histor[...] 1518
[11] 문서 逓児
[12]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34 http://sillok.histor[...] 1518
[13]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36 http://sillok.histor[...] 1519
[14]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44 http://sillok.histor[...] 1522
[15]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54 http://sillok.histor[...] 1525
[16] 문서 台諫
[17]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56 http://sillok.histor[...] 1526
[18] 웹사이트 『中宗実録』巻第77 http://sillok.histor[...] 1534
[19] 문서 윤사분-윤보-윤여필-장경왕후, 윤임 남매, 윤사흔-윤계겸-윤욱-윤지임-문정왕후, 윤원량, 윤원로, 윤원형
[20] 문서 중종실록 52권, 중종 19년 10월 27일 무오 1번째기사 1524년 명 가정(嘉靖) 3년 헌부가 정원의 파직을 청하고, 이현령의 일이 온편치 못함을 아뢰다
[21] 문서 중종실록 53권, 중종 20년 2월 9일 무술 1번째기사 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헌부에서 법사를 무시한 이보를 파직하고 중죄로 다스릴 것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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