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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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사흔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 예종, 성종 시대에 걸쳐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자시강원 세마, 내자감 직장을 거쳤다. 세조 즉위 후 왕후의 친척이라는 배경과 능력을 인정받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좌익원종공신,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에 녹훈되었고, 파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우의정을 역임했으나, 1485년 사망했으며,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의를 표했다.
어려서부터 풍채와 재질이 범상치 않아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1444년(세종 26년) 음보로 관직에 출사하여 세자시강원 세마가 되었다가 여러 관직을 지낸 후 내자감직장을 역임하였다. 직장으로 있으면서 몸가짐과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누구라도 반드시 지적하곤 하였다.
2. 생애
1455년 6월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후의 친형제라서가 아니라, 그 인품과 역량을 인정받아 군기감정(軍器監正)으로 출사(出仕)하였고, 이어서 정랑(正郞)으로 재직 중,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예문사가 되었으며, 형조참의·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460년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때 의정부의 전리를 소환하여 마음대로 문책하였다 하여 언관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 61년 다시 복권되어 등용, 인수부 부윤에 임명되었으며 한성부 판윤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1462년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중추원사(中樞院事)를 거쳐 같은 해 8월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로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1466년 지중추부사, 1468년 숭록대부를 거쳐 1469년(예종 1)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성종이 즉위하던 1469년 12월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되면서 행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471년(성종 2) 성종을 옹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로 순성 명량 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곧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훈척공신(勳戚大臣)으로 총병(摠兵)의 직위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운영하였다 하여 1473년(성종 4년) 사헌부대사헌 서거정(徐居正) 등으로부터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1475년 의정부우의정에 올랐으며, 지경연사를 겸하였고, 1476년 영경연사가 되었다. 이 무렵 종진(腫疹)에 걸렸는데, 그를 특별히 아낀 왕이 직접 진귀한 약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 결국 1485년 사망하였다. 부음을 들은 성종은 몹시 애통해하며 철조를 명하여 조의를 표했다. 파주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2. 1. 초기 생애
어려서부터 풍채와 재질이 범상치 않아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1444년(세종 26년) 음보로 관직에 출사하여 세자시강원 세마가 되었다가 여러 관직을 지낸 후 내자감직장을 역임하였다. 직장으로 있으면서 몸가짐과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누구라도 반드시 지적하곤 하였다 한다.
1455년 6월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후의 친형제라서가 아니라, 그 인품과 역량을 인정받아 군기감정(軍器監正)으로 출사(出仕)하였고, 이어서 정랑(正郞)으로 재직 중,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예문사가 되었으며, 형조참의·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460년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때 의정부의 전리를 소환하여 마음대로 문책하였다 하여 언관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 61년 다시 복권되어 등용, 인수부 부윤에 임명되었으며 한성부 판윤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1462년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중추원사(中樞院事)를 거쳐 같은 해 8월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로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1466년 지중추부사, 1468년 숭록대부를 거쳐 1469년(예종 1)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성종이 즉위하던 1469년 12월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되면서 행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성종을 옹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로 1471년(성종 2) 순성 명량 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곧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훈척공신(勳戚大臣)으로 총병(摠兵)의 직위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운영하였다 하여 1473년(성종 4년) 사헌부대사헌 서거정(徐居正) 등으로부터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1475년 의정부우의정에 올랐으며, 지경연사를 겸하였고, 1476년 영경연사가 되었다. 이 무렵 종진(腫疹)에 걸렸는데, 그를 특별히 아낀 왕이 직접 진귀한 약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 결국 1485년 사망하였다. 부음을 들은 성종은 몹시 애통해하며 철조를 명하여 조의를 표했다. 파주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2. 2. 세조 ~ 성종 시대
1455년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뒤, 왕후의 친형제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그 인품과 역량을 인정받아 군기감정(軍器監正)으로 출사(出仕)하였다. 이어서 정랑(正郞)으로 재직 중,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예문사가 되었으며, 형조참의·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460년 호조참판에 올랐으나, 의정부의 전리를 소환하여 마음대로 문책하였다 하여 언관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 61년 다시 복권되어 등용, 인수부 부윤에 임명되었으며 한성부 판윤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1462년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중추원사(中樞院事)를 거쳐 같은 해 8월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로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1466년 지중추부사, 1468년 숭록대부를 거쳐 1469년(예종 1)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성종이 즉위하던 1469년 12월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되면서 행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471년(성종 2) 성종을 옹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로 순성 명량 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곧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훈척공신(勳戚大臣)으로 총병(摠兵)의 직위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운영하였다 하여 1473년(성종 4년) 사헌부대사헌 서거정(徐居正) 등으로부터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1475년 의정부우의정에 올랐으며, 지경연사를 겸하였고, 1476년 영경연사가 되었다. 이 무렵 종진(腫疹)에 걸렸는데, 그를 특별히 아낀 왕이 직접 진귀한 약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따르면, 윤사흔은 왕실의 친족(親族)으로서 좋은 벼슬을 고루 거쳐 직위가 1품에 이르렀고, 의정부(議政府)의 고관직에 제수되었을 적에는 대간(臺諫)들이 이를 비판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한다. 윤사흔이 크게 취하여 언관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 마음대로 하여 보아라. 나는 이미 대광(大匡)을 얻었다.'고 호통쳤다고 한다.
2. 3. 사후
윤사흔은 1485년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성종은 몹시 슬퍼하며 애통해 하였고, 철조를 명하여 조의를 표했다. 묘소는 파주 교하면 당하리에 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3. 가족 관계
4.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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