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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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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동인은 1849년 양산 출신의 승려로, 조선 말 개화 사상을 수용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일본 승려들과 교류하며 서구 문물을 접했고,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했다. 1879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고, 어니스트 사토우에게 영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교 활동을 펼쳤다. 김홍집과 함께 귀국하여 고종에게 일본의 개국 필요성을 설파했고, 신사유람단 파견을 추진했으나 1881년 암살당했다. 그는 개화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지만, 친일적 행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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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인

2. 생애

이동인은 1870년대 초부터 일본에 관심을 갖고 강화도 사건 통역을 맡았던 일본 본원사 승려 楓玄哲|풍현철일본어과 교류했다. 1878년 정토진종 대화파가 부산에 동본원사 별원을 열자 그곳을 드나들며 일본인들과 인맥을 넓혔고, 불교도인 김옥균을 알게 되었다.[7]

1879년 김옥균, 박영효 등의 지원을 받아 일본으로 밀항했다. 교토 동본원사에 머물며 일본어를 배우고 도쿄로 이동, 동본원사 승려 寺田福寿|테라다 후쿠주일본어의 소개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다. '조야(朝野)'라는 가명을 쓰며 후쿠자와 저택을 드나들었다.[1]

또한, 어니스트 사토우를 만나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고,[2] 사토우는 이동인을 신뢰하여 영국 대리 공사의 허락을 받아 "영국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온 김홍집과 만나 친분을 쌓고, 같은 해 9월 함께 귀국했다.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을 알게 되었고, 고종을 알현하여 일본의 국정과 개국의 필요성을 설파하여 총애를 받았다.

1880년 10월, 주일 청 공사 하여장에게 미국·조선 조약 체결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일본에 갔고, 한 달간 도쿄에 머무르며 일본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귀국했다. 1881년 2월, 탁지부 탁리기무아문 참모관에 임명되어 "신사유람단" 파견을 추진했으나, 같은 해 3월경 조선 왕조 정권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3] 거만한 태도가 암살의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3]

2. 1. 승려 생활과 개화 사상

이동인은 1849년 조선 경상도 양산군(지금의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계나 출신 성분,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 부산 범어사에서 승려 생활을 했으며, 양산 통도사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4] 1860년대부터 한성부 봉원사에서 활동하였다.

한자와 일어에 능했던 이동인은 일본 혼간 사(本願寺)의 부산 별원을 왕래하면서 일본 승려들로부터 입수한 만국사기(萬國事記)와 세계 각국의 풍물 사진을 청년 관리들에게 전해 주었다. 1879년 3월에는 일본 불교 오타니 파 혼간사의 부산별원에 드나들면서 서구 여러 나라에 관한 사진과 〈만국사기〉, 성냥 등을 얻어서는 서울 봉원사에서 김옥균, 서재필, 유대치, 오경석 등에게 개화 문물을 보여주며 개화파와 교류하였다.[6]

1870년경 유대치의 소개로 김옥균 등을 만나게 되었다. 1870년대 초, 이미 일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강화도 사건의 통역을 맡았던 본원사 승려 楓玄哲(풍현철)과 교류를 맺었다. 1878년 정토진종 대화파가 부산에 동본원사 별원을 열고 포교 활동을 시작하자, 그곳을 드나들며 일본과의 인맥을 더욱 넓혔다. 또한, 불교도인 김옥균을 알게 되었다. 이동인이 혼간 사 부산별원에 드나들었다는 것은 오쿠무라의 〈조선국포교일지〉에 의하여 1878년 6월 2일부터 2회, 12월 9일부터 4회에 걸쳐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7]으로 확인되었다.

2. 2. 일본 밀항과 활동

1879년 3월부터 이동인은 오쿠무라의 포교소(부산 별원)에 드나들면서 일본 밀항을 준비했다.[8] 김옥균은 승려였던 이동인이 일본에 가고 싶어하는 것을 딱하게 여겨 그의 일본행을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건의했다.[9] 1879년 6월, 이동인은 유대치 등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이 밀항은 일본의 국정을 살피고 세계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8]

이동인은 오쿠무라와 마에다(前田獻吉) 영사의 주선으로 교토에 가서 혼간 사 본산에 머물면서 일본어를 배웠다.[9] 1879년 4월, 득도식을 하고 일본 진종(眞宗)의 승려가 되었고, 도쿄 아사쿠사 별원(草別院)에 기숙하면서 주지 스즈키(鈴木惠順)의 보살핌을 받으며 일본 외무성의 요인들을 비롯한 여러 일본 명사들과 접촉하였다.[9] 후쿠자와 유키치와 교류하고,[9] 일본 각지를 다니면서 미국과 프랑스, 영국 선함과 백인들을 만나보기도 했다. 어니스트 사토우를 방문하여 영국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2] 또한 일본·중국의 유지들과 간친회로서 아시아 및 세계 정세를 분석하고 구미제국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활동하던 흥아회(興亞會)에 출석하는 등 일본 조야의 정계,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유의 폭을 넓혔다.[9]

2. 2. 1. 제2차, 제3차 일본 방문과 외교 활동

1880년 6월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이동인의 식견에 감동한 김홍집은 그를 조선 조정에 추천했다.[9] 1880년 9월, 이동인은 김홍집과 함께 귀국했다.[9] 귀국 후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을 알게 되었고, 민영익의 주선으로 고종을 알현하여 일본의 국정과 개국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2]

1880년 10월, 이동인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3] 그는 주일 청나라 공사 하여장에게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3] 이 과정에서 이동인은 아사노 도진(淺野東仁)으로 개명하고[4] 일본 외무성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10]

2. 3. 신사유람단 파견과 암살

1880년 9월, 김홍집과 함께 귀국한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 임명되어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파견을 막후에서 추진했다.[5] 신사유람단은 조선 정부가 일본의 근대 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이동인은 김옥균1881년일본에 갈 것을 결심하고 고종에게 여러 번 건의하여 설득할 때, 신사유람단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이동인은 이원회와 함께 일본과의 군함 구매 비밀교섭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4][5] 1881년 5월,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서울에서 암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4] 다소 거만한 태도를 보인 것이 암살의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3]

3. 평가

이동인은 조선 말기 개화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불교 승려였던 그는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개화 사상을 접하고, 이를 조선에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일본, 청나라, 미국 등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다.[11] 1879년 3월에는 일본 불교 혼간 사 부산별원에 드나들며 서구 문물을 접하고, 김옥균, 서재필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였다.[6]

1880년 6월, 일본에 머무르던 이동인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과 만나 그의 추천으로 조선 조정과 연을 맺게 되었다.[9]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을 만나고, 고종에게 일본의 국정과 개국의 필요성을 설파하여 총애를 받았다.[11]

그러나 이동인이 일본 불교계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 때문에 그를 친일 인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임혜봉은 이동인이 일본의 조선 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했다고 비판했다.[7] 이동인이 개화 문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 일본 불교의 접근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7]

한 불교학자는 이동인이 더 오래 살았다면 한국의 개화와 불교 근대화에 더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5] 그의 이른 죽음은 조선 개화 운동에 큰 손실로 여겨진다.

4. 기타

이동인은 암살되었는데, 그 배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수구파 세력이나 일본 내 세력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거만한 태도를 보인 것이 암살의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3]

4. 1. 이동인 암살 배후설

이동인의 암살 배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수구파 세력이나 일본 내 세력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다소 거만한 태도를 보인 것이 암살의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3]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이신명
조부이세위
부친이덕중
모친김숭렴의 딸


6. 이동인을 연기한 배우

배우드라마 제목방영 연도방송사
김순철풍운1982년KBS1
박경순서재필1982년MBC
이도련대원군1990년MBC
김갑수찬란한 여명1995년KBS1


참조

[1] 문서
[2] 문서
[3] 뉴스 朝鮮王朝末期の「開化党」に通説覆す新研究登場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2017-08-13
[4]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5] 서적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6] 서적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7] 서적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8] 서적 친일정치 100년사 동풍 1995-07-01
[9] 서적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0]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1] 서적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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