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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드 앗딘 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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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드 앗딘 장기는 12세기 셀주크 제국의 총독이자 장기 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아 시리아를 십자군으로부터 탈환하려 했으며, 십자군에 대항하여 이슬람 세계의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장기는 다마스쿠스와의 분쟁, 비잔티움 제국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1144년 에데사 백국을 정복하여 제2차 십자군의 발단을 제공했다. 1146년 암살당한 후 장기 왕조는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으며, 그의 아들 누르 앗딘은 시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를 탄생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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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드 앗딘 장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터키 군복을 입은 통치자
터키 군복을 입은 통치자: 긴 땋은 머리, 샤르부시 모피 모자, 부츠, 몸에 꼭 맞는 코트.
칭호아타베그
통치 지역모술, 알레포, 하마, 에데사
전체 이름이마드 앗딘 아타베크 장기 알말리크 알만수르
아랍어 이름أبو المظفر عماد الدين زنكي ابن قسيم الدولة آق سنقر ابن ايلترغان
로마자 표기Abū al-Muẓaffar ʿImād al-Dīn Zankī ibn Qasīm al-Dawla Āq-Sunqur ibn Īl-Turghān
통치
통치 기간1124년–1127년: 셀주크 와시트 및 바스라 총독
1126년–1127년: 셀주크 시흐나, 이라크 총독
1127년–1146년: 모술아타베그
대관식1127년, 모술, 셀주크 제국
계승자알레포: 누르 앗딘 장기
모술: 사이프 앗딘 가지 1세
왕조
왕조장기 왕조
개인 정보
출생1085년경
사망1146년 9월 14일 (61세)
사망 장소칼라트 자바르, 셀주크 제국
아버지아크 순쿠르 알하집
배우자주무르드 하툰
수크마나 하툰
사피야 하툰
종교수니 이슬람
군사 활동
주요 전투하마 공성전 (1130년)
알아타리브 전투 (1130년)
라파니야 전투
안티오크에 대한 장기 왕조의 군사 작전
킨나스린 전투
바린 전투
알레포 공성전 (1138년)
샤이자르 공성전
바알베크 공성전
에데사 공성전 (1144년)
사루지 함락

2. 어린 시절

이마드 앗딘 장기의 아버지는 셀주크 제국술탄 말리크샤 1세 치하에서 알레포 총독을 지낸 아크 순쿠르 알하집이었다. 그러나 아크 순쿠르는 1094년 다마스쿠스에서 시리아 셀주크 왕조를 세운 투투쉬 1세에게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당시 10세 정도였던 장기는 모술로 피신하여 그곳의 아타베그(총독)였던 케르보가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장기는 이후 모술 총독의 군대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처음에는 자왈리 사카와 휘하(1106년~1109년)에서, 다음은 마우두드 휘하(1109년~1113년)에서 복무했으며, 1114년부터는 아크순쿠르 알-부르수키 휘하에서 활동했다.[4]

1118년까지 모술에 머물렀던 장기는 그해 새로운 셀주크 제국 통치자 마흐무드 2세의 군대에 합류했다. 1119년 산자르가 술탄으로 즉위하자, 장기는 이라크 셀주크 술탄국(1119년~1131년)의 통치자가 된 마흐무드 2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8]

3. 셀주크 제국의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의 아버지 아크 순쿠르 알하집은 셀주크 제국술탄 말리크샤 1세 휘하에서 시리아 북부의 대도시 알레포 총독을 지냈다. 그러나 1094년 반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다 시리아 셀주크 왕조를 세운 투투슈에게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어린 장기는 북 메소포타미아(자지라)의 모술로 피신하여 그곳의 아타베그(총독) 카르부가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1127년, 당시 바스라의 사령관이었던 장기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스타르시드가 셀주크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술탄의 편에 서서 활약했다. 장기는 바그다드에서 마흐무드 2세를 도와 칼리프 군대를 격파하고 알-무스타르시드를 궁전에 유폐시키는 데 기여했다.[7] 이 공적으로 같은 해 모술의 태수(아타베그)로 임명되었고,[8] 이듬해인 1128년에는 당시 모술에 부속되어 있던 알레포에 입성하여 두 도시를 자신의 통치하에 통합하고 알레포를 본거지로 삼았다.

알레포에서 장기는 옛 군주였던 리드완의 딸이자 이전 아타베그들의 미망인이었던 여성과 결혼하여 아타베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장기 왕조를 창건했다.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장기에게 북부 메소포타미아(자지라)와 시리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셀주크 제국을 대신하여 십자군으로부터 시리아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겼다.

3. 1. 칼리프와의 갈등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1055년부터 셀주크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이는 오우즈 투르크족의 투그릴 베그가 시아파 부와이 왕조를 몰아낸 이후였다. 투그릴 베그는 스스로를 술탄이자 아바스 칼리프조의 보호자로 칭한 첫 셀주크 통치자였다.[5][6] 무함마드 1세 타파르 (재위 1105–1118) 시대까지 메소포타미아는 대셀주크 제국의 일부였으나, 그의 사후 아들 마흐무드 2세 (재위 1118–1131)는 이라크 지역만을 통치하게 되었고, 아흐마드 산자르가 제국의 나머지 영역을 다스렸다.[8]

1122년,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아랍 바누 마지야드 부족의 지도자 두바이스 이븐 사다카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모술에서 남부 이라크로 군사 원정을 명령했다. 이 원정은 악순쿠르 알-부르수키의 지휘 아래 장기와 알툰-타쉬 알-아부리가 이끌었다.[7] 이는 장기에게 첫 번째 주요 군사 지휘 경험이었으며, 그는 와시트 주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해당 지역의 이끄타(군사 봉토) 총독직을 받았다.[7] 1123년, 장기는 칼리프 군대와 연합하여 무바라키야 전투에서 두바이스를 격파했다.[7] 1124년에는 기존 직책에 더해 바스라의 군사 총독직까지 맡게 되었다.[7][8]

한편, 아바스 칼리프 알-무스타르시드 (재위 1118–1135)는 독자적인 세력 확장을 꾀하며 셀주크 술탄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에 마흐무드 2세는 칼리프를 제압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다.[7] 이 과정에서 장기는 결단력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여 셀주크 군대가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칼리프의 궁전을 약탈하는 데 기여했다.[7] 결국 칼리프는 평화를 요청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7] 이 공로로 장기는 1126년 4월, 와시트와 바스라 총독직에 더해 바그다드의 군사 총독을 의미하는 ''쉬흐나'' 칭호를 받으며 사실상 셀주크령 이라크 전역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7][8] 1127년, 악순쿠르 알-부르수키가 암살당하자 장기는 그의 뒤를 이어 모술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는 훗날 젠기 왕조의 기반이 되었다.[8]

그러나 장기의 후원자였던 술탄 마흐무드 2세가 1132년에 사망하면서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세력을 회복한 칼리프 알-무스타르시드는 셀주크 가문의 후계자 분쟁에 개입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장기는 다시 한번 칼리프를 제압하기 위해 바그다드로 진격했지만, 티크리트 근교에서 칼리프가 직접 이끄는 군대의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장기는 포로로 잡힐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 칼리프 군대에 속해 있던 티크리트 사령관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모술로 탈출할 수 있었다.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이후 장기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이 바로 훗날 장기의 아들 누르 앗딘을 섬기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살라딘이다.

장기를 격퇴한 알-무스타르시드는 1133년, 새로운 셀주크 술탄이 된 마수드에게 성대한 의식을 통해 충성 맹세를 받고 그의 술탄 지위를 승인하며 권력의 정점에 서는 듯했다. 기세를 몰아 칼리프는 장기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모술로 향했지만, 장기는 수개월에 걸친 모술 포위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이 실패는 칼리프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고, 그를 따르던 군 지휘관들과 민중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결국 알-무스타르시드는 1135년 술탄 마수드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2개월간의 억류 끝에 살해당했다.

3. 2. 다마스쿠스와의 관계

이마드 앗딘 장기는 일반적으로 십자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 이슬람교 세계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의 생애 대부분은 셀주크 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분가이자 본가와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의 지방 정권 부리 왕조와의 싸움에 집중되었다.[9] 1128년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였던 투그테킨이 사망하면서 생긴 권력 공백은 시리아를 다시 십자군의 공격에 노출시킬 위험을 안고 있었다.[9] 장기는 1127년 모술, 1128년 알레포의 아타베그가 되어 두 도시를 통일하고,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 2세에게 공식 통치자로 임명받았다. 그는 경쟁자인 칼리파 알무스타시드에 맞서 젊은 술탄 마흐무드 2세를 지지했다.

1130년, 장기는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 아타베그 타지 알 물크 부리에게 십자군에 공동으로 맞서자고 제안했으나, 이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는 다마스쿠스 군대가 도착하자마자 무장 해제시키고, 부리의 아들과 동생 사윈지를 인질로 잡았으며 하마를 점령했다.(하마 전투) 또한 호무스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모술으로 돌아갔다. 이후 부리의 아들과 다른 인질들은 다마스쿠스가 몸값으로 를 지불하고 풀려났다. 1131년, 장기는 부리에게 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칼리파 알무스타시드 휘하에 있다가 다마스쿠스로 도망친 무장 두바이스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두바이스는 알 힐라의 에미르였다. 칼리프의 사절이 두바이스를 데리러 오자, 장기는 이미 그를 살해한 뒤였고 사절단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마흐무드 2세가 1131년 사망하자 셀주크 왕조 내에서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장기는 이 혼란을 틈타 바그다드를 점령하려 했으나 칼리프 알무스타시드의 군대에 패배했고, 티크리트 사령관이었던 젊은 쿠르드족 장교 나짐 앗딘 아이유브(살라딘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모술로 도망쳤다. 훗날 아이유브는 장기의 군대에 합류하게 된다.

1134년, 장기는 아르투크 왕조의 문제에 개입하여 에미르 후삼 알딘 티무르타쉬(일가지의 아들)와 동맹을 맺고 그의 사촌 루큰 알다울라 다우드에 대항했다. 그러나 장기의 진정한 목표는 남쪽의 다마스쿠스였다. 1135년, 장기는 다마스쿠스의 새로운 에미르이자 부리의 아들인 샴스 알물크 이스마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다. 이스마일은 용맹했지만 잔혹한 통치로 인해 시민들의 반감을 샀고, 자신에 대한 암살 위협을 느끼자 장기에게 도시를 넘기려 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유력자들과 이스마일의 어머니 즈무르드 왕비는 과거 인질 사건 때문에 장기를 불신했고, 결국 즈무르드 왕비는 아들 이스마일을 암살하고 다른 아들 시하브 알딘 마흐무드를 에미르로 옹립했다.

장기는 이 소식을 듣고도 다마스쿠스 입성을 시도했지만, 도시의 실권을 장악한 무장 무이누딘 우누르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장기는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 협정을 맺었으나, 다마스쿠스를 얻지는 못했다. 돌아가는 길에 십자군 도시인 마아라트 알누만 등을 점령했지만 그의 명예는 실추되었다. 이후 호무스를 다시 공격하려 했으나, 호무스의 구원 요청을 받은 우누르가 도시를 장악하면서 또다시 실패했다.

1137년, 장기가 다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호무스를 공격하자, 우누르는 예루살렘 왕국트리폴리 백국에 도움을 요청하여 장기를 협공하려 했다. 장기는 우누르와 강화를 맺은 뒤 방향을 바꿔 십자군을 공격했고, 바린 요새에서 예루살렘의 풀크 왕이 이끄는 십자군을 격파했다. 풀크 왕은 요새에서 농성했으나, 장기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가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리한 조건으로 풀크와 강화하고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 황제의 목표는 안티오키아 공국이었고, 결국 안티오키아는 황제에게 굴복했다. 1138년 황제는 안티오키아 공작 안티오키아의 레몽, 에데사의 조슬랭 2세와 함께 시리아 공격을 개시했다. 장기는 아나톨리아, 바그다드, 시리아와 자지라의 무슬림 군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십자군과 황제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국 비잔티움-십자군 연합군은 샤이자르를 공격했지만, 장기의 군대와 내부 분열, 무슬림 증원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 달 만에 철수했다.

알레포 성채는 십자군 전쟁 동안 장기 왕조에 의해 요새화되었다. 이마드 앗딘 장기는 아들 누르 앗딘 (1147–1174년 통치)에 이어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통일하고 십자군이 도시를 반복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


1138년 5월 말, 장기는 다마스쿠스를 방문하여 즈무르드 왕비와 결혼했다. 즈무르드는 지참금으로 호무스를 장기에게 넘겨주었다. 장기는 즈무르드를 설득하여 아들 마흐무드로부터 다마스쿠스를 물려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139년 7월, 마흐무드가 암살당하자 장기는 암살자를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다마스쿠스로 향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통치자 우누르는 이미 도시 방비를 강화하고 예루살렘 왕국과 다시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장기는 다마스쿠스의 중요 거점인 바알베크를 공격했지만 점령에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우누르는 예루살렘 왕국과 공식적인 보호 동맹을 체결했다. 동맹 내용은 다마스쿠스가 장기를 배척하고, 위급 시 예루살렘과 연합군을 형성하며, 전쟁 비용을 지불하고 장기의 요새를 함께 공격하며, 인질을 제공하는 것 등이었다.

1140년 4월, 다마스쿠스를 압박하던 장기는 예루살렘 왕국의 구원군에게 협공당할 것을 우려하여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같은 해, 다마스쿠스-예루살렘 연합군이 장기의 요새 바니야스를 포위하자 장기는 이 요새를 포기했다. 다마스쿠스는 바니야스를 예루살렘에 넘겨주었고, 우누르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이후 장기는 북쪽으로 원정하여 아시프와 아르메니아인의 요새 히잔을 점령했다.

4. 십자군과의 전쟁

십자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 이슬람 세계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이마드 앗딘 장기는 셀주크 제국에서 분가하여 본가와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와의 경쟁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1130년, 장기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 부리에게 십자군에 맞서 연합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장기는 다마스쿠스 군대가 도착하자마자 무장 해제시키고, 부리의 아들과 동생 사빈지를 인질로 삼아 하마를 빼앗았다. 이후 호무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인질들의 몸값으로 5만 디나르를 받고 풀어주었다. 1131년에는 이 돈을 돌려주는 대가로, 칼리파 알무스타시드 휘하에 있다가 다마스쿠스로 망명한 무장 듀바이스를 넘겨받아 살해하기도 했다.

이후 장기는 셀주크 제국의 후계자 다툼에 휘말렸다. 그는 바그다드의 칼리파 알무스타시드를 한 차례 격파했으나, 티크리트 근교에서 칼리파의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이때 티크리트 사령관이었던 젊은 쿠르드족 장교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모술로 도망쳤다. 아이유브는 훗날 장기의 부하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이 바로 예루살렘을 탈환하게 되는 살라딘이다. 장기는 이후에도 바그다드와의 전투 및 자지라 분쟁에 개입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항상 다마스쿠스에 있었다.

1135년,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이 장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스마일은 내부의 불만과 암살 위협 때문에 도시를 장기에게 넘기려 했으나, 과거 인질 사건으로 장기를 불신하던 다마스쿠스 유력자들은 이스마일의 어머니 즈무르드 왕비와 모의하여 이스마일을 살해하고 그의 동생 마흐무드를 옹립했다. 장기는 이를 빌미로 다마스쿠스로 진격했지만, 도시의 실권자 우누르가 방어 태세를 갖추자 공격을 포기하고 휴전을 맺었다.

1137년, 장기는 다시 호무스를 공격했으나 우누르가 방어에 성공했다. 오히려 우누르는 예루살렘 왕국트리폴리 백국과 연합하여 장기를 압박했다. 장기는 우누르와 강화를 맺고 방향을 틀어 십자군 요새 바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는 장기가 예루살렘 왕국 군대와 벌인 첫 주요 전투였다.[10]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의 남하로 인해 장기는 풀크 왕 및 다마스쿠스와 서둘러 휴전을 맺어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갈등 참고)

1138년 5월, 장기는 이스마일을 살해하는 데 관여했던 즈무르드 왕비와 결혼하고 지참금으로 호무스를 얻었다. 그러나 즈무르드를 통해 다마스쿠스를 얻으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1139년, 마흐무드가 암살되자 장기는 이를 빌미로 다시 다마스쿠스로 진격했다. 하지만 실권자 우누르는 도시 방어를 강화하고 예루살렘 왕국과 다시 동맹을 맺었다. 장기는 다마스쿠스 외곽의 바알베크를 먼저 공격하여 점령했는데, 이때 항복한 수비대에게 안전을 약속하고는 이를 어기고 십자가형에 처했다.[11][12] 장기는 이 영지를 나짐 앗딘 아이유브에게 맡겼다.

1140년 4월, 장기는 예루살렘 왕국의 구원군이 다마스쿠스로 향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같은 해, 우누르가 이끄는 다마스쿠스-예루살렘 연합군이 장기의 요새 바니야스를 공격하자, 장기는 이 요새를 포기했다. 이후 몇 년간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왕국과의 큰 충돌은 없었으며, 장기는 북쪽으로 눈을 돌려 아시프와 아르메니아인의 히잔 요새 등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힘을 키운 장기는 마침내 1144년,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을 정복하여 이슬람 세계에 큰 승리를 안겨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에데사 백국 정복 참고)

4. 1. 비잔티움 제국과의 갈등

1137년, 장기는 호무스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으나, 호무스 영주 우누르는 다마스쿠스십자군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과 연합하여 장기에 대항하려 했다. 이에 장기는 우누르와 강화를 맺은 뒤, 방향을 바꿔 십자군 요새 바린을 공격했다. 예루살렘 왕 풀크가 이끄는 구원군이 도착했으나 장기에게 격파당하고 바린 성에서 농성하게 되었다. 장기는 포위 끝에 풀크로부터 요새 양도와 배상금을 받는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이때 장기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가 시리아 남부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때문에 장기는 풀크 및 다마스쿠스와 서둘러 휴전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비잔티움 황제의 초기 목표는 안티오키아 공국이었고, 포위 공격 끝에 안티오키아는 황제에게 항복했다. 이후 황제는 안티오키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과 에데사 백작 에데사의 조슬랭 2세와 동맹을 맺고 시리아에 대한 공동 공격을 개시했다.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 황제가 샤이자르 공성전에서 장기 세력에 맞서 지휘하는 모습 (프랑스 필사본, 1338년)


샤이자르 공성전(1138년)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 연합의 위협에 직면한 장기는 즉시 군대를 동원하는 한편, 아나톨리아, 바그다드셀주크 술탄, 시리아와 자지라의 다른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을 호소했다. 또한, 비잔티움 황제와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공작을 펼쳤다. 실제로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과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는 비잔티움 황제가 중동 지역에서 세력을 지나치게 확장하는 것을 경계하여 연합 작전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1138년 4월, 황제가 이끄는 비잔티움-십자군 연합군은 샤이자르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장기 군대의 효과적인 복병 공격과 연합군 내부의 불화, 그리고 이슬람 증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약 한 달 만인 5월에 황제는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장기는 비잔티움 제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4. 2. 에데사 백국 정복

1144년 가을, 장기는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으로 진격을 시작했다.[1] 에데사예루살렘 왕국의 종주권 아래 있었으나, 주민 대부분이 아르메니아인이었고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 비해 약하며 서양인 수도 적었다.[2] 또한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과 같은 다른 십자군 국가들과의 잦은 항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당시 강대국이었던 비잔티움 제국과 예루살렘 왕국은 각각 요안니스 2세 황제와 풀크 왕이 사망한 직후라 내부 사정으로 에데사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1][2]

이러한 고립된 상황에서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2세는 장기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인근 디야르바크르의 셀주크계 영주 카라 아스란과 동맹을 맺었다.[1][2] 1144년 가을, 조슬랭 2세가 전군을 이끌고 카라 아스란과 합류하여 서쪽 유프라테스강 근처 텔 바실(Tell Bashir) 방면으로 원정을 떠난 사이, 장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데사 포위를 시작했다.[1][2]

당시 에데사 도시에는 군대가 남아있지 않아 시민들만 있었고, 사제들이 방어를 지휘했다.[1][2] 에데사는 견고한 요새였지만, 공성전 경험이 없는 시민들과 지휘부는 효과적인 방어를 하지 못했다. 장기의 공병들이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는 것도 막지 못했다.[1][2] 수비 측의 거부로 휴전 협상은 실패했고, 장기는 1144년 12월 24일, 북쪽 성벽 아래에 파놓은 갱도에 목재와 기름, 유황을 채워 불을 질렀다. 이 불로 성벽이 무너지자 장기의 군대가 도시로 쏟아져 들어왔다.[1][2] 성 안으로 피신하려던 많은 시민들이 혼란 속에서 압사당했는데, 성곽 문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지휘하던 사제를 포함하여 5,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1][2]

장기는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고, 기독교도 대표들과의 협상 끝에 12월 26일 에데사는 공식적으로 항복했다.[1][2] 아르메니아인과 아랍계 기독교도는 풀려났지만, 서양인(프랑크인)은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귀족과 사제는 옷이 벗겨진 채 알레포로 보내졌으며, 일부는 처형되었다.[1][2] 조슬랭 2세는 이 모든 과정 동안 텔 바실에 머물러 있었다.[1][2]

에데사 백국의 함락은 최초의 십자군 국가가 멸망한 사건으로,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3]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이었던 멜리장드 여왕은 유럽에 특사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이는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2][3] 반면,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에 대한 첫 번째 주요 승리에 열광했으며, 칼리파는 장기에게 화려한 칭호를 수여했다. 후대의 무슬림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십자군에 대한 본격적인 ''지하드''의 시작으로 평가했다.[1][2][3]

5. 암살과 유산

1146년 9월, 이마드 앗딘 장기는 프랑크인 노예였던 야랑카시에게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암살당했다.[15] 서양 연대기 작가들은 이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역사가 이븐 알 아딤은 장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테베그는 폭력적이고 강력했으며,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갑작스럽게 공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말을 탈 때, 군대는 마치 두 가닥의 실 사이에 있는 것처럼 그의 뒤를 걸어가서, 작물을 짓밟을까 두려워했고, 누구도 두려움 때문에 (그들 중) 한 줄기라도 짓밟거나 말로 그 위를 지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 위반하면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는 (장기) "한 번에 한 명 이상의 폭군(자신을 의미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했다."[16]

장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군대를 혼란에 빠뜨렸고 군대는 와해되었다. 그러나 그는 장기 왕조의 창시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 왕조는 아들들에게 계승되었다.[17]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십자군에 맞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5. 1. 장기 왕조의 분열

1146년 9월, 이마드 앗딘 장기가 프랑크인 노예 야랑카시에게 암살당하자[15] 그의 군대는 큰 충격에 빠져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보물과 무기는 약탈당했고 장군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각지로 흩어졌다. 장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주변 세력에게 기회가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멜리장드는 장기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긴장감이 사라져 알레포와 에데사 공략 계획을 취소했고,[13] 안티오키아 공국의 레몽은 장기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알레포를 압박했다. 다마스쿠스의 우나르 역시 바알베크와 호무스 등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하여 시리아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2세 또한 에데사를 재빨리 탈환했다. 이처럼 장기가 이룩한 왕국은 순식간에 무너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장기의 사업은 그의 아들들에게 계승되었다. 장기 사후, 장기 왕조의 영토는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 사이프 앗딘 가지 1세모술을 중심으로 자지라(북부 이라크) 지역을, 차남 누르 앗딘 마흐무드는 알레포를 중심으로 시리아 지역을 물려받았다.[17] 특히 누르 앗딘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영토 확장에 힘썼다. 그는 곧 에데사를 다시 탈환하고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시리아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훗날 십자군에 맞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게 되는 살라흐 앗딘과 아이유브 왕조는 바로 누르 앗딘의 휘하에서 성장하여 자립하게 된다.

한편, 모술을 다스리던 사이프 앗딘 가지 1세가 1149년에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자 장기의 셋째 아들인 쿠트브 알딘 마우두드가 모술의 통치자가 되었다.[14]

5. 2. 누르 앗딘의 등장

장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군대에 큰 충격을 주었고,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흩어졌다. 보물과 무기는 약탈당했으며 장군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각지로 흩어졌다.[15] 예루살렘 왕의 미망인 멜리장드는 장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알레포와 에데사 공략 계획을 취소했다. 반면, 안티오키아의 레몽은 장기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알레포를 압박했고, 다마스쿠스의 우나르 역시 바알베크홈스 등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하여 시리아 대부분을 회복했다.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2세도 에데사를 잠시 탈환하는 등[17] 장기가 쌓아올렸던 세력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장기의 사업은 그의 아들들에게 계승되었다. 장기 사후, 장기 왕조의 영토는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 사이프 앗딘 가지는 자지라(북부 이라크) 지역을 중심으로 모술을 통치했고,[17] 차남 누르 앗딘은 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알레포를 다스리게 되었다.[17]

특히 누르 앗딘은 아버지의 유산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아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그는 곧 에데사를 다시 탈환하고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시리아 전역을 정복하며 십자군에 강력히 맞섰다. 훗날 이집트시리아를 통일하고 제3차 십자군에서 활약한 살라흐 앗딘은 바로 이 누르 앗딘의 휘하에서 성장했으며, 그가 세운 아이유브 왕조는 누르 앗딘의 군사 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6. 평가

(내용 없음)

참조

[1] 논문 A Turk in the Dukhang? Comparative Perspectives on Elite Dress in Medieval Ladakh and the Caucasus https://www.academia[...] Austrian Academy of Science Press
[2] 서적 The Reign of Zangī (521–541/1127–1146) University of London
[3] 서적 Zengi and the Muslim Response to the Crusades Routledge 2016
[4] 서적 The Reign of Zangi https://eprints.soas[...] University of London 1972
[5] 서적 Franks and Saracens: Reality and Fantasy in the Crusad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05-08
[6] 서적 A Concise History of Sunnis and Shi'is https://books.google[...] Georgetown University Press 2018-04-02
[7] 서적 The Reign of Zangi https://eprints.soas[...] University of London 1972
[8] 논문 Mosul and Aleppo Governor Imad Al-Din Zangi's Fight Against the Crusaders https://iupress.ista[...] 2020-06-30
[9] 문서 Gabrieli 1969
[10] 문서 Smail
[11] 문서 Maalouf, Crusades Through Arab Eyes
[12] 서적 The Crusades: The War for the Holy Land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2010
[13] 서적 Catalogue of twenty-eight illuminated manuscripts and two illuminated printed books, the property of Henry Yates Thompson, which will be sold at auction by Sotheby, Wilkinson & Hodge ... the 3rd of June, 1919 https://archive.org/[...] Dryden Press, J. Davy 1919
[14] 웹사이트 Copper alloy dirham of Qutb al-Din Mawdud ibn Zengi, al-Mawsil, 556 H. 1917.215.1000 https://numismatics.[...] American Numismatic Society
[15] 문서 Maalouf, ''Crusades Through Arab Eyes''
[16] 문서 Ibn al-‘Adim, ''Zubda''
[17] 인용
[18] 기타 라テン文字翻字: {{라テン翻字|ar|Abū al-Muẓaffar ʻImād al-Dīn Zankī ibn Qasīm al-Dawla Āq-Sunqur ibn Īl-Turgh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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