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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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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는 9세기 사만 왕조의 아미르로, 형 나스르 1세가 사망한 892년부터 사망한 907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부하라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호라즘을 정복하고 주변 지역을 통합하여 사만 왕조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스마일은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상업을 발전시켜 부하라를 이슬람 세계의 주요 도시로 만들었으며, 쿠란의 페르시아어 번역과 수니파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사파르 왕조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압바스 왕조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려 했으며, 투르크족과의 교류를 통해 세력을 넓혔다. 이스마일은 90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타지키스탄에서 기려져 통화와 산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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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세기 중동의 군주 - 아흐마드 이븐 이스마일
    아흐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907년부터 914년까지 사만 왕조의 아미르로 재임하며 시스탄을 정복했으나, 시스탄 반란과 튀르크족 노예에게 암살당했고 아랍어 중심 정책 실패로 민심을 잃었지만 사후 순교한 아미르로 불렸다.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기본 정보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의 주화, 우스루샤나 조폐국. AH 280년 (893-4 CE) 발행.
이름이스마일 사마니
페르시아어(에스마일 사마니)
완전한 이름 (페르시아어)(아부 이브라힘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사마니)
완전한 이름 (로마자 표기)Abu Ibrāhīm Ismā'īl ibn-i Aḥmad-i Sāmāni
타지크어(이스모일리 소모니)
다른 표기 (페르시아어)(아부 이브라힘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다른 표기 (영어)(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통치
작위사만 제국의 아미르
재위 기간892년 8월 – 907년 11월 24일
이전 통치자나스르 1세
다음 통치자아흐마드 사마니
후계자아흐마드 사마니
가문
왕가사만 왕조
왕조 형태왕조
개인 정보
출생일849년 5월
출생지페르가나
사망일907년 11월 24일
사망지부하라
매장지사마니드 영묘, 부하라
종교수니 이슬람
아버지아흐마드 이븐 아사드

2. 배경

나스르 1세는 호라즘 군대의 약탈로 황폐해진 부하라를 점령하기 위해 형제인 이스마일을 파견하였다. 부하라 주민들은 이스마일을 환영하였으며, 그는 이곳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부하라에서 거둬들인 세금 분배에 대한 의견 대립이 형제 사이에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이스마일이 승리하였지만,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에게 인정받은 나스르를 공식적으로 타도하지는 못하고 부하라에 머물렀다. 시스탄 지역의 사파르 왕조가 트란스옥시아나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일이 나스르를 폐위시키는 것은 침략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892년에 나스르가 사망할 때까지 이스마일은 나스르를 공식적인 지배자로 인정하였다.

2. 1. 가문 배경

사만 왕조는 발흐 출신으로, 박트리아 출신임을 시사한다. 사만 가문은 이슬람 이전 사산 제국 시대에 파르티아의 미흐란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란 7대 명문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혈통을 과장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원래 에프탈족의 후손일 수 있다. 5세기 후반에 그들은 투하리스탄/박트리아를 통제했고, 남부 트란스옥시아나의 일부도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발행한 동전 중 하나가 사산 왕조의 동전 스타일이 아닌 에프탈족의 동전과 동일한 스타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고 옹호했으며, 이슬람 이전의 많은 관료적 칭호를 사용했는데, 아마도 그들의 통치가 사산 제국의 연속이라는 믿음을 퍼뜨리려는 목표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스마일은 사만 후다를 선조로 둔 아흐마드 이븐 아사드|아흐마드 이븐 아사드fa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만 후다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여겨진다.[21]

2. 2. 초기 생애

이스마일은 849년 페르가나에서 아흐마드 이븐 아사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나스르 1세라는 형이 있었다.[21] 나스르 1세는 864/5년에 사만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나스르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마일은 호라즘 군대의 약탈로 황폐해진 부하라를 장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부하라 시민들은 이스마일을 안정과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인물로 여겨 그를 환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금 분배를 둘러싼 의견 불일치로 나스르와 이스마일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이스마일이 승리하면서, 이 둘 사이에는 투쟁이 벌어졌다. 비록 이스마일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장악했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형을 몰아내지 않고 부하라에 머물렀다. 이는 나스르가 칼리프로부터 트란스옥시아나의 공식적인 임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칼리프의 눈에는 나스르가 이 지역의 유일한 합법적 통치자였다. 게다가 시스탄의 사파르 왕조는 트란스옥시아나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고, 나스르를 몰아내는 것은 사파르 왕조에게 침략의 구실을 제공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마일은 892년 8월 나스르가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나스르를 통치자로 인정했고, 그 이후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잡았다.

이스마일은 사만 후다를 선조로 둔 احمد بن اسد|아흐마드 이븐 아사드fa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만 후다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여겨진다.[21]

나스르의 통치 시대에 이스마일은 부하라를 공략하고 호라즘의 지배로부터 부하라를 해방시켰다. 이스마일은 부하라를 거점으로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스마일은 부하라에서 거둬들인 세수를 형 나스르에게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 간의 대립이 일어났다. 나스르의 권위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에 의존하고 있었고, 아바스 왕조 역시 마와라안나흐르의 통치자를 나스르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일은 사실상의 왕조 통치자로서 군림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파르 왕조도 마와라안나흐르의 지배를 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군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892년, 형 나스르가 사망함에 따라, 사실상에서 명실상부하게 사만 왕조의 아미르가 되었다.

3. 집권과 통치

나스르 1세는 호라즘에 의해 약탈되고 황폐화된 부하라 점령을 위해 형제인 이스마일을 파견하였다. 부하라 주민들은 이스마일을 환영하였으며, 이스마일은 이곳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부하라에서 거둬들인 세금 분배에 대한 의견 대립이 형제 사이에 일어났다. 결국 이 싸움에서 이스마일이 승리했지만,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에게 인정받은 나스르를 공식적으로 타도하지는 못하고 부하라에 머물렀다. 시스탄 지역의 사파르 왕조가 트란스옥시아나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스마일이 나스르를 폐위시키려는 것은 침략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기에 892년 나스르가 사망할 때까지 이스마일도 나스르를 공식적인 지배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스마일은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에게 지속적으로 선물을 보냈지만, 세금이나 조공을 바치지는 않았다. 사실상 이스마일은 아미르보다 높은 호칭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이미 독립적인 지배자였다.

3. 1. 권력 강화

나스르가 사망하자 이스마일은 케르만, 시스탄, 카불[24] 등 여러 지역을 통제하며 사만 왕조의 지배력을 북쪽과 동쪽으로 넓혔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상업 발전과 경제 기틀을 다졌다.[25] 이스마일은 부하라를 수도로 삼았는데,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부하라는 이슬람 세력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고,[26] 많은 학자, 예술가, 법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27] 페르시아어로 번역된 최초의 꾸란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수니파 이론도 발전했으며, 많은 모스크마드라사가 세워졌다.[28]

893년, 이스마일은 투르크 카를록의 수도 타라즈를 점령하고, 3만 명이 넘는 투르크족에게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그는 동쪽의 넓은 지역을 예속시키고, 다른 지배자들을 봉신으로 삼아 영토를 직접 편입했다. 호라즘 남부는 아프리기드 왕조가, 북부는 사만 왕조가 다스렸다. 903년 원정으로 사만 왕조의 국경은 더욱 확장되었다. 영토 확장은 투르크족의 습격으로부터 수도를 안정시켰고, 무슬림 선교사들의 활동 영역을 넓혔다.

호라산과 그 주변 지역 지도


나스르가 죽은 후에도 부하라에서 이스마일의 통치는 칼리프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파르 왕조의 암르 이 라이스는 칼리프에게 트란스옥시아나 임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칼리프 알 무타디드는 이스마일에게 암르 이 라이스와 사파르 왕조에 맞서 싸우라는 편지를 보냈다. 칼리프는 편지에서 호라산의 정당한 통치자인 이스마일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11] 이 편지는 이스마일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는 사파르 왕조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900년 봄, 두 세력은 발흐(북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스마일은 2만 명, 암르는 7만 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나와 수적으로 열세였다.[12] 이스마일의 기병대는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암르의 기병대는 무기와 갑옷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암르가 포로로 잡혔고, 그의 군대 일부가 이스마일 편으로 돌아섰다.[13] 이스마일은 암르를 사파르 왕조에 몸값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거절당했고, 암르를 칼리프에게 보냈다. 칼리프는 암르의 행동을 비난한 후[14] 이스마일에게 호라산, 타바리스탄, 레이, 이스파한을 임명했다.

3. 2. 정복 전쟁

나스르 1세는 호라즘에 의해 약탈되고 황폐화된 부하라를 점령하기 위해 그의 형제 이스마일을 파견하였다. 부하라 주민들은 이스마일을 환영했고, 이스마일은 이곳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부하라에서 거둬들인 세금 분배에 대한 의견 대립이 형제 사이에 일어났다. 결국 이 싸움에서 이스마일이 승리했지만,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에게 인정받은 나스르를 공식적으로 타도하지는 못하고 단지 부하라에 머물렀다.[24] 시스탄 지역의 사파르 왕조가 트란스옥시아나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스마일이 나스르를 폐위시키려는 것은 침략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892년에 나스르가 사망할 때까지 이스마일도 나스르를 공식적인 지배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나스르가 사망한 후, 이스마일은 케르만, 시스탄, 카불 등의 지역을 통제하여 사만 왕조의 지배력을 북쪽과 동쪽으로 확산시켰다. 또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상업 발전과 경제의 기틀을 다졌다.[25]

이스마일은 집권한 이듬해인 893년에 튀르크족 카를록의 수도인 타라즈를 점령했다. 이스마일과 그 이후의 사만 왕조 지배자들은 3만 명이 넘는 튀르크족 가구에 이슬람교를 전파하였다. 이스마일은 집권 중에 동쪽의 넓은 지역을 예속시켰으며, 그 지역의 다른 지배자를 봉신으로 삼아 국경 내의 영토를 직접 편입하였다. 호라즘의 남부를 아프리기드 왕조가 자주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때, 호라즘의 북부는 사만 왕조가 다스렸다. 903년의 원정은 사만 왕조의 국경을 더욱 확장시켰다. 영토 확장은 인근 튀르크족의 습격으로부터 수도를 안정시켰으며, 많은 무슬림 선교사들이 활동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사만 왕조의 독립을 승인받은 형 나스르 1세가 사망하자, 이스마일은 칼리파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부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 결과, 사파르 왕조의 라이스(:en:Amr-i Laith Saffari)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권리를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무타디드()에게 요청했다. 한편 알무타디드는 이스마일에게 편지를 보내 칼리파의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여겨지는 라이스와 싸울 것을 강요했다. 편지에 의하면, 칼리파는 호라산 제국(:en:Greater Khorasan)의 정당한 지배자로서 이스마일이 군림하기를 원했다.[29] 이 편지는 이스마일에게 사파르 왕조에 맞서 싸우는 결심을 하게 하였다.

900년 봄,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 지역에서 첫 충돌이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이스마일의 2만 기병은 사파르의 7만 기병에 압도되었다.[30] 이스마일의 기병은 다수가 나무로 만든 등자를 착용하고 일부는 방패나 창을 장비하지 못한 상태였던 반면, 라이스의 기병들은 충분히 잘 무장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라이스는 그의 병사들 몇 명과 함께 사로잡혀 이스마일 앞으로 끌려갔다.[31] 이스마일은 라이스의 몸값을 사파르 왕조에게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리하여 이스마일은 라이스의 행위를 탐탁치 않게 여긴 칼리파에게 그를 인도했으며,[32] 이 사건 이후 이스마일은 이스파한과 레이, 타바리스탄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 후 이스마일은 칼리파의 승인을 얻고 아라비드 왕조가 다스리는 타바리스탄에 군대를 보내기로 했다. 이스마일의 군대는 아라비드 왕조를 물리쳤으나, 그곳에서 부하 장군인 무함마드 이븐 하룬(Muhammad ibn Harun)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스마일은 901년에 타바리스탄에 군대를 보내 무함마드를 다이람(Dailam) 지역으로 쫓아냈다.

이스마일이 칼리파에게 선물을 지속적으로 보낸 것은 관습적인 것으로, 세금이나 조공을 바치지는 않았다. 사실상 이스마일은 아미르보다 높은 호칭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이미 독립적인 지배자였다.

이스마일은 북쪽과 동쪽에서 활동하며 케르만, 시스탄, 카불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 대한 그의 지배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사만 왕조의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했다.[4]

893년 이스마일은 탈라스, 즉 카를루크 튀르크의 수도를 점령하여 많은 노예와 가축을 얻었다. 또한 네스토리우스교 교회가 모스크로 개조되었다.[9] 그는 또한 우슈루사나 공국을 멸망시키고 사만 왕조의 지배를 시르다리야 강까지 확장했다.[10] 이스마일과 다른 사만 왕조 통치자들은 주민들 사이에서 이슬람을 전파했고, 3만 개에 달하는 튀르크의 텐트가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동쪽의 수많은 지역 국가를 정복하여 일부는 직접 자신의 경계 내로 편입시키고 다른 지역의 지역 통치자들을 봉신으로 유지했다. 북쪽의 호라즘은 분할되었는데, 남쪽은 아프리그 왕조 통치하에 자치 지역으로 남았고 북쪽은 사만 왕조 관리가 통치했다. 903년의 또 다른 원정은 사만 왕조의 경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러한 원정을 통해 그의 국가의 핵심 지역은 튀르크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었고, 무슬림 선교사들은 이 지역에서 활동을 확장할 수 있었다.

형 나스르가 죽은 후에도 부하라에서 이스마일의 통치는 그 당시 칼리프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 결과, 사파르 왕조의 통치자 암르 이 라이스는 스스로 칼리프에게 트란스옥시아나에 대한 임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칼리프 알 무타디드는 이스마일에게 암르 이 라이스와 칼리프가 찬탈자로 간주한 사파르 왕조와 싸우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 따르면 칼리프는 호라산의 정당한 통치자로 간주한 이스마일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11] 이 편지는 이스마일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는 사파르 왕조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두 세력은 900년 봄에 발흐, 북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이스마일은 7만 명의 암르의 기병대에 맞서 2만 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나와 수적으로 열세였다.[12] 이스마일의 기병대는 대부분 나무 등자를 착용하고 있었고 일부는 방패나 창이 없었기 때문에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반면에 암르 이 라이스의 기병대는 무기와 갑옷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암르가 포로로 잡혔고, 그의 군대 중 일부가 이스마일 편으로 돌아섰다.[13] 이스마일은 그를 사파르 왕조에 몸값으로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들은 거절했고, 그래서 그는 암르를 칼리프에게 보냈고, 칼리프는 그 문제에 대한 암르의 행동을 비난한 후[14] 이스마일에게 호라산, 타바리스탄, 레이, 이스파한을 임명했다.

북부 이란 지도


이스마일은 칼리프의 지원을 이용하여 군대를 타바리스탄으로 보냈는데, 당시 타바리스탄은 자이디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자이드가 통치하고 있었다. 무함마드와 그의 군대는 구르간에서 무함마드 이븐 하룬 알-사라크시 휘하의 사만 왕조 군대와 만났고, 이어진 전투에서 사만 왕조가 승리하여 치명상을 입은 무함마드는 포로로 잡혔다. 그는 다음 날인 900년 10월 3일(또는 아불 파라지 알-이스파하니에 따르면 8월)에 사망했다.[15][16][17] 그의 시신은 참수되었고, 그의 머리는 부하라에 있는 사만 왕조 궁정에 있는 이스마일에게 보내졌다.

무함마드의 아들이자 지정된 후계자인 자이드 역시 포로로 잡혀 부하라로 보내지자 자이디드 지도자들은 자이드의 갓난 아들 알-마흐디를 그들의 통치자로 임명하는 데 동의했지만, 그들의 계급 내에서 불화가 발생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대신 아바스 왕조를 지지한다고 선포했고, 그의 군대는 자이디드 지지자들을 공격하여 학살했다. 대신 사만 왕조가 그 지역을 점령했다.[16]

그러나 이스마일의 장군 무함마드 이븐 하룬이 곧 반란을 일으키자, 이스마일은 901년에 아들 아흐마드 사마니와 사촌 아불-아바스 압둘라를 포함한 군대를 북부 페르시아로 보내 타바리스탄을 점령하게 하여 무함마드가 데이람으로 도망가게 했다. 사만 왕조 군대는 또한 레이와 카즈빈을 포함한 여러 도시를 정복했지만, 이후 통치자들은 그 영토를 데이람인과 쿠르드족에게 잃었다.[10] 이스마일은 이후 사촌 아불-아바스 압둘라를 타바리스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4. 죽음과 유산

이스마일은 오랜 투병 끝에 907년 11월 24일에 사망했으며,[18] 그의 아들 아흐마드 사마니가 뒤를 이었다. 이스마일은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19] 그의 유해는 부하라에 건설된 이스마일 사마니 묘에 매장되었다.

이스마일의 매장지인 사마니 영묘 사진


이스마일은 유능한 장군이자 강력한 통치자로 역사에 알려져 있으며,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북방에서의 그의 원정으로 인해 그의 제국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으며, 부하라사마르칸트의 방어 시설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결과를 초래했다. 왕조 말기에, 이전에는 강력했지만 이제는 무너져가는 성벽은 카라한 왕조와 다른 적들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던 사마니 왕조에게 매우 아쉬운 존재였다.

943년에 글을 쓴 부하라 역사가는 이스마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정말로 파디샤가 될 만하고 자격이 있었다. 그는 지적이고, 공정하며, 자비로운 사람이었고, 이성과 선견지명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와 훌륭한 윤리로 업무를 수행했다.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는 누구든 처벌했고... 국사에 있어서 그는 항상 공정했다.[19]

유명한 학자 니잠 알-물크는 그의 저서 시아사트나마에서 이스마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는 매우 공정했고, 그의 훌륭한 자질은 많았다. 그는 신(그에게 권능과 영광이 있으라)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가졌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 그의 두드러진 미덕 중 하나만 꼽자면.[20]

소비에트 연방에서 타지키스탄의 통치가 끝나자, 이스마일의 유산은 새로운 타지크 국가에 의해 부활하고 재건되었다. 타지키스탄의 통화는 그의 이름을 따서 소모니로 명명되었으며, 그는 100 SM 지폐에 묘사되어 있다.

100 소모니 지폐


또한, 타지키스탄(그리고 구 소비에트 연방)에서 가장 높은 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따서 이스모일 소모니 봉으로 개명되었다. 이전에는 "스탈린 봉"과 "공산주의 봉"으로 알려졌었다.

참조

[1] 서적 The book of government, or, Rules for kings: the Siyar al-Muluk, or, Siyasat-nama of Nizam al-Mulk
[2] 서적 A Textbook of Medieval Indian History Primus Books
[3] 서적 Encyclopaedic Survey of Islamic Culture
[4] 서적 Tabaḳāt-i-nāsiri: a general history of the Muhammadan dynastics of Asia
[5] 서적 The historical, social and economic setting
[6] 서적 Atlas of the year 1000
[7] 서적 A history of Persia, Volume 2
[8] 서적 Muslim reformist political thought: revivalists, modernists and free will
[9] 간행물 The Samani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 웹사이트 ESMĀʿĪL, b. Aḥmad b. Asad SĀMĀNĪ, ABŪ EBRĀHĪM http://www.iranicaon[...]
[11] 서적 The book of government, or, Rules for kings: the Siyar al-Muluk, or, Siyasat-nama of Nizam al-Mulk
[12] 서적 History of Islam (Vol 3)
[13] 서적 Ibn Khallikan's biographical dictionary
[14] 서적 Ibn Khallikan's biographical dictionary
[15] 간행물 The Encyclopedia of Islam, New Edition, Volume VII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Tabaqat-i Nasiri Lahore Sangmil Publications
[19] 서적 The modern Uzbeks: from the fourteenth century to the present : a cultural history
[20] 서적 The book of government, or, Rules for kings: the Siyar al-Muluk, or, Siyasat-nama of Nizam al-Mulk
[21] 서적 Encyclopaedic Survey of Islamic Culture
[22] 서적 Atlas of the year 1000
[23] 서적 A history of Persia, Volume 2
[24] 서적 Tabaḳāt-i-nāsiri: a general history of the Muhammadan dynastics of Asia
[25] 서적 The historical, social and economic setting
[26] 서적 Atlas of the year 1000
[27] 서적 A history of Persia
[28] 서적 Muslim reformist political thought: revivalists, modernists and free will
[29] 서적 The book of government, or, Rules for kings: the Siyar al-Muluk, or, Siyasat-nama of Nizam al-Mulk
[30] 서적 History of Islam
[31] 서적 Ibn Khallikan's biographical dictionary
[32] 서적 Ibn Khallikan's biographical dictionary
[33] 서적 The modern Uzbeks: from the fourteenth century to the present : a cultura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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