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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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다 씨는 일본의 성씨로, 특히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계와 관련하여 여러 계보가 존재한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미우라 씨 또는 교고쿠 씨 출신으로 추정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중용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자손들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으며, 장남 시게이에의 후손, 차남 시게나리의 후손, 딸 다쓰히메와 관련된 가문들이 존재한다. 이 외에도 일본 각지에서 발견되는 다른 이시다 씨들은 지명에서 유래되었으며, 황별, 미우라 씨, 오노 씨, 후지와라 씨 등 다양한 계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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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다씨 -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 다툼과 가신단 갈등을 배경으로 동군이 승리하여 에도 막부 성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이시다씨 - 사와 산성
사와 산성은 가마쿠라 시대에 축성되어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시가현 히코네시의 산성으로, 이시다 미쓰나리가 보수 및 천수각을 건설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함락되었고, 이후 이이 나오쓰구가 히코네성을 축성하면서 폐성되어 현재는 유적과 유원으로 남아있다. - 이세하라시의 역사 - 히비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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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대관의 성씨에서 유래한 나루세촌은 1889년 정촌제 시행으로 발족하여 쌀과 비단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나, 1954년 이세하라정에 편입되었고 1970년대 이후 수도권의 경제 상황에 영향을 받는 주택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 시가현의 역사 - 야마우치 가즈토요
야마우치 가즈토요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도사국을 얻어 다이묘가 되었고, 고치성을 축조하고 가다랑어 타다키의 유래를 만들었으며 2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자식 없이 사망했다. - 시가현의 역사 - 글리코·모리나가 사건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은 괴도 21면상을 자칭하는 범인들이 글리코 사장 유괴를 시작으로 글리코와 모리나가 제과 등 식품 회사를 협박하며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를 유통시키겠다고 위협한 미해결 기업 협박 사건이다.
이시다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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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 이름 | 이시다 씨 |
가몬 명칭 | 나라비야 |
![]() | |
본성 | 쓰케노씨 |
가조 | 이시다 다메히사 |
종별 | 무가 |
출신지 | 오미국 |
근거지 | 오미국 사와산성 |
역사적 배경 | |
본성 | 헤이시아손 (간무 헤이시) 미우라 씨 분파 아시나 씨 지족? |
주요 인물 | |
인물 | 이시다 마사쓰구 이시다 미쓰나리 이시다 마사즈미 |
지류 | 쓰가루스기야마 가문 (무가) |
2.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계
이시다 마사쓰구의 아들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가신이 되었으며,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오봉행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서 서군(西軍)을 이끌었으나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이 전투에서 아버지 마사쓰구와 형 마사즈미는 사와야마 성을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자결했으며, 미쓰나리의 장인 우다 요리타다와 그의 아들 요리시게 등도 함께 목숨을 끊었다.
미쓰나리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세키가하라 전투 후 장남 시게이에는 목숨을 건져 출가했고, 차남 시게나리는 쓰가루 가문에 등용되어 가문을 이었다. 딸 타츠히메는 쓰가루 노부히라에게 시집가 후손을 남겼으며, 다른 딸의 후손이 에도 막부 쇼군의 측실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외에도 미쓰나리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이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다. 시게이에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시다 히데오에 따르면, 후손들이 에치고 다카다의 마쓰다이라 가문에 등용되었다가 이후 촌장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하나[1], 이를 증명할 사료는 소실되었다고 한다.[2]
2. 1. 미우라 씨 계열 설
미우라 일족 출신으로 사가미 국 오스미 군 카스야 장 이시다 고(현재의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 이시다)의 거주민이었던 이시다 타메히사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이 외에도 교고쿠 씨에 속하는 장원의 대관이었던 토호 출신이라는 등, 이시다 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2. 2. 교고쿠 씨 계열 설
이시다씨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로 교고쿠 씨에 속하는 장원의 대관이었던 토호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2. 3. 가문
(다이치다이만다이키치)'''이시다 미쓰나리의 개인 기호''']]
이시다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미우라 일족 출신으로 사가미 국 오스미 군 카스야 장 이시다 고(현재의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 이시다)에 거주했던 이시다 타메히사의 후손이라는 설과, 교고쿠 씨에 속한 장원의 대관이었던 토호(土豪) 출신이라는 설 등이 존재한다.
이시다 마사쓰구의 아들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가신이 되었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한 후, 미쓰나리는 오미 사와야마에 19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그는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도요토미 정권의 오봉행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나, 가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같은 무단파(武斷派)와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 히데요시 사후인 게이초 5년(1600년), 미쓰나리는 오대로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서 거병했다. 모리 데루모토와 우키타 히데이에를 내세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西軍)을 이끌었으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쓰나리의 아버지 마사쓰구와 형 이시다 마사즈미는 사와야마 성을 지키다 동군(東軍)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자 자결했다. 미쓰나리의 장인인 우다 요리타다와 그의 아들 우다 요리시게 등도 함께 목숨을 끊었다.
미쓰나리에게는 3남 3녀 또는 2남 5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장남 이시다 시게이에는 목숨을 건져 출가했다. 차남 이시다 시게나리는 히로사키 번의 번주인 쓰가루 가문에 등용되어, 그의 자손들은 스기야마(杉山) 성을 사용하며 쓰가루 가문의 가신으로 존속했다. 딸 타츠히메(辰姫)는 히로사키 번의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에게 시집갔고, 그 아들인 쓰가루 노부요시는 3대 번주가 되었다. 쓰가루 가문 내의 혼인 관계를 고려하면, 본가 10대 번주까지, 그리고 분가인 구로이시 번의 4대부터 7대 당주까지 타츠히메의 혈통을 잇고 있다. 또한, 미쓰나리의 다른 딸 중 한 명은 가모(蒲生) 가문의 가신 오카 시게마사에게 시집갔는데, 그 손녀인 오후리(お振)가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실이 되어 치요히메(千代姫)를 낳았다는 설이 있다. 치요히메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으로 시집가, 그 혈통이 오와리 번의 3대부터 7대 번주까지 이어졌다고도 한다.
이 외에도 미쓰나리의 서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가문들이 있으며, 이렇게 "'''미쓰나리의 자손'''"을 칭하는 가문이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 각지에 존재한다.
한편, 시게이에의 직계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시다 히데오(石田秀雄)에 따르면, 3대손 나오시게(直重) 대에 에치고 다카다(高田)의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에 등용되었으나, 그 다음 대부터는 촌장(庄屋)이 되어 현재까지 남계 후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1] 하지만 이를 증명할 사료는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2]
이시다 가문의 대표적인 가몬(家紋, 정문(定紋))은 나란히 선 화살(並び矢)이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대일대만대길'''"(大一大万大吉)이라는 길한 글자를 나열한 문양을 사용했는데, 이는 야마우치 스도 씨(山内首藤氏) 고유의 가몬으로[3] 미쓰나리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그 외에 택사 문양(沢瀉), 떡갈나무(柏), 메유이 문양(目結紋) 등도 사용되었다.
2. 4. 계도
(다이치다이만다이키치)'''이시다 미쓰나리의 개인 기호''']]
미우라 일족 출신으로 사가미 국 오스미 군 카스야 장 이시다 고(현재의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 이시다)의 거주민이었던 이시다 타메히사의 후손이라는 설, 또는 교고쿠 씨에 속하는 장원의 대관이었던 토호(土豪) 출신이라는 설 등 가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이시다 마사쓰구의 아들인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가신이 되었다.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후에는 오미 사와야마에 19만 석의 소령을 받았다. 미쓰나리는 경리 및 사무 능력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도요토미 정권의 오봉행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나, 가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무단파(武断派)와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에 미쓰나리는 오대로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여 거병하였고, 모리 데루모토와 우키타 히데이에를 옹립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西軍)을 이끌고 싸웠으나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이 전투 당시 아버지 마사쓰구와 형 마사즈미는 사와야마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동군(東軍)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자 마사쓰구, 마사즈미, 미쓰나리의 장인인 우다 요리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리시게 등은 자결하였다.
미쓰나리에게는 3남 3녀 또는 2남 5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장남 시게이에는 목숨을 건져 출가하였고, 차남 시게나리는 히로사키 번의 번주인 쓰가루 가문에 등용되어 그의 자손들은 스기야마(杉山) 성을 칭하며 쓰가루 가문의 가신으로 존속했다. 딸 타츠히메는 히로사키 번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에게 시집갔으며, 그들의 아들인 노부요시는 3대 번주가 되었다. 쓰가루 본가와 분가 간의 혼인 관계를 고려하면, 본가 10대 번주까지, 그리고 쓰가루 분가인 구로이시 번의 4대부터 7대 당주까지 타츠히메의 혈통을 잇고 있다. 또한 다른 딸(모, 某)은 가모(蒲生) 가문의 가신인 오카 시게마사에게 시집갔는데, 그 손녀인 오후리(お振)가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실이 되어 치요히메(千代姫)를 낳았다는 설이 있다. 치요히메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으로 시집갔으며, 그녀의 혈통은 오와리 번 3대부터 7대 번주까지 이어졌다.
이 외에도 서자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가문들이 있으며, 이처럼 "'''미쓰나리의 자손'''"을 칭하는 가문이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에 존재한다.
한편, 시게이에의 직계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시다 히데오(石田秀雄)에 따르면, 3대째인 나오시게(直重) 대에 에치고 다카다(高田)의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에 등용되었으나, 그 다음 대부터는 촌장(庄屋)이 되었고 현재까지 남계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1] 그러나 이를 증명할 사료는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2]
3. 이시다 미쓰나리의 자손
미쓰나리에게는 3남 3녀 또는 2남 5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 장남 시게이에는 목숨을 건져 출가하였고, 차남 시게나리는 히로사키 번의 쓰가루 가문에 등용되어 그 자손이 이어졌다. 딸 타츠히메는 히로사키 번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에게 시집가 후손을 남겼으며, 쓰가루 가문을 통해 그 혈통이 이어졌다. 다른 딸은 가모 가신의 오카 시게마사에게 시집갔는데, 그 손녀 오후리가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실이 되어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과 연결된다는 설도 있다.
이 외에도 서자의 후손이나 직계 자손임을 주장하는 가문들이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에 존재한다[1][2].
3. 1. 장남 시게이에
이시다 미쓰나리의 장남인 시게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목숨을 건져 출가하였다.시게이에의 직계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시다 히데오에 따르면, 3대째인 나오시게 대에 에치고 다카다의 마쓰다이라 가문에 등용되었으나, 그 다음 대부터는 촌장이 되어 현재까지 남계 자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1]. 하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료는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2].
3. 2. 차남 시게나리
이시다 미쓰나리의 차남인 시게나리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로사키 번의 쓰가루 가문에 등용되었다. 그의 자손들은 스기야마 성을 사용하며 쓰가루 가문의 가신으로 이어졌다.3. 3. 딸 다쓰히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 중 한 명인 타츠히메(辰姫)는 히로사키 번의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에게 시집갔다. 타츠히메는 아들 노부요시를 낳았으며, 노부요시는 히로사키 번의 3대 번주가 되었다. 이후 쓰가루 가문 내 혼인 관계를 통해 타츠히메의 혈통은 쓰가루 본가의 10대 번주까지 이어졌고, 분가인 구로이시 번에서도 4대부터 7대 당주까지 그녀의 후손이다.3. 4. 기타 자손
이시다 미쓰나리의 공식적인 자손 외에도, 서자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가문들이 있다. 이러한 '''미쓰나리의 자손'''을 자처하는 가문들은 특히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 각지에 존재한다.또한 미쓰나리의 장남 시게이에의 직계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시다 히데오(石田秀雄)에 따르면, 3대손 나오시게(直重) 대에 에치고 다카다(高田)의 마쓰다이라 가문에 등용되었으나, 그 다음 대부터는 촌장이 되어 현재까지 남계 후손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1]. 그러나 이를 증명할 사료는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2].
4. 그 외의 이시다 씨(石田氏)
이시다(石田)라는 성씨는 일본 전국에서 널리 발견되며, 대부분 지명에서 유래했다. 이 지명은 땅의 지질이 돌처럼 단단한 논이라는 의미로, 이와타(岩田)와 같은 뜻이다. '이시'(石)를 석고(石高)의 '석'(石)으로 보는 설도 있다.
4. 1. 황별(皇別) 계통
석전(石田) 성씨의 기원 중 하나는 황별(皇別), 즉 천황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수인 천황의 황자인 이고다라시히코노미코토의 자손이 야마시로국 쿠세군 석전(石田) 지역에 정착하면서[4] 석전군(石田君)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그 유래로 여겨진다.4. 2. 미우라 씨(三浦氏) 계통
사가미국 오스미군 카스야장 석전향 (현재의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 석전)에서는 간무 헤이시 미우라씨 계열의 석전씨가 나왔다. 미우라 요시아키의 동생인 타메키요는 자신이 소유한 땅의 이름인 아시나(蘆名)를 따서 아시나씨를 칭했다. 그의 아들 타메카게(엔카이)를 거쳐 손자인 타메히사(타메시게)가 위의 석전향을 영지로 삼으면서 석전씨를 칭하게 되었다. 타메히사는 키소 요시나카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그 포상으로 오미국 사카타군 석전촌(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 석전정)을 하사받아 일족이 그곳으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4. 3. 오노 씨(小野氏) 계통
무사시국 타마군 석전촌에서는 오노 아손 요코야마당 계통의 이시다씨가 나왔다. 이 계통은 미우라씨 계열처럼 무사시국에서 사가미국 일대에 걸쳐 분포했다.4. 4. 후지와라 씨(藤原氏) 계통
이와시로국 다테군 석전촌(石田村)에서 유래한 후지와라 아손(藤原朝臣) 다테씨(伊達氏) 계통의 이시다씨가 있다. 다테 토모무네(伊達朝宗)의 넷째 아들인 다테 타메이에(伊達為家)가 석전(石田)을 성씨로 삼았으며, 이후 센다이 번(仙台藩)의 중신으로 섬겼다.참조
[1]
웹사이트
https://president.jp[...]
[2]
웹사이트
https://president.jp[...]
[3]
서적
戦国武将 敗者の子孫たち
洋泉社
[4]
문서
佐渡国雑太郡石田郷とする説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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