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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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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진보 이씨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1920년대 초반 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을 시작했으며,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대구형무소 수감 당시 받은 수인 번호 '264'를 필명 '육사'로 사용하였으며, '육사(戮史)'는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로 일본에 대한 저항 의지를 담고 있다. 시 〈광야〉, 〈청포도〉, 〈절정〉 등을 발표하며 저항 정신을 표현했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이듬해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고향 안동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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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기본 정보
한국어 이름
일본어 이름
주요 작품
대표 작품광야
청포도

2. 생애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9]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20대 초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이원록의 필명은 여러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베이징에 있던 공립 중궈 대학(中國大學, 베이징 대학이 아님)에 들어가 문과 수업 등을 청강하기도 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는데, 1932년 6월 상하이에서 들렀던 한 중국 국민당 인사(양싱포(楊杏佛) : 중국국민당 정권 특무에 의해 피살)의 장례식 자리에서 루쉰을 우연히 인사를 나누었다는 본인의 회고가 있으며, 관련된 내용이 이육사의 「루쉰추도문(魯迅追悼文)」에 기록되어 있다. 이육사는 루쉰이 1936년 10월 19일 세상을 떠난 후 4일만인 10월 23일부터 10월 27일까지 이육사가 당시 「조선일보」에 「루쉰추도문(魯迅追悼文)」을 연재하며 루쉰을 만난 사실은 언급하며, 루쉰의 생애를 요약하고 루쉰 문학의 전개 과정과 특징을 분석한 후 마지막에 그에 대한 애틋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도문'에서 이육사는 루쉰 문학의 성숙한 깊이에 주목하면서 당시 혼란한 중국 사회 현실에 맞서 명확하고 진실한 묘사로 감동 깊은 문학작품을 창작한 측면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당한 평가로 설명하고 있다. 「루쉰추도문」을 연재한 후 이육사는 루쉰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인 「고향故鄕」을 우리말로 처음 번역하여 1936년 『조광朝光』 12월호에 발표했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계

이육사(李陸史)는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9] 1919년 15세의 나이로 안동에서 기본 교육을 마쳤다.[1]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보문의숙과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1920년 가족이 대구로 이사하면서, 1921년 영천의 백학학교에서 수학하고 교편을 잡기도 했다.[2] 같은 해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했다. 192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2] 1925년 귀국, 대구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의열단에 가입하였다.[3]

이육사의 필명은 수감 번호 '264'를 한국어 발음으로 읽은 '이육사'에서 비롯되었다.[4] '李活', '戮史', '肉瀉' 등 여러 필명을 사용했으며, '戮史'는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로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고 있다.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 시절에는 '肉瀉'라는 필명으로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2. 2. 청년기와 독립운동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9] 1919년 15세의 나이로 안동에서 기본 교육을 마쳤다.[1] 1920년,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1925년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3]

이육사는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큰형, 동생과 함께 투옥되었다.[3] 이 때, 대구형무소에서 수감 번호 '264'를 받았는데, 이를 필명 '육사(陸史)'로 사용하였다.[4] '육사'라는 필명 외에도 '이활(李活)', '대구264(大邱二六四)', '육사(戮史)', '육사(肉瀉)'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특히 '육사(戮史)'는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로,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부정하고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1929년 출옥 후, 1930년 조선일보에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1931년에는 대구 격문 사건으로 다시 체포, 구금되기도 했다.

1932년 9월, 이육사는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3년 4월 졸업 후 상하이를 거쳐 귀국하였다. 1934년에는 서대문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3. 문학 활동

이육사는 생전에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으나, 순국 후 동생 이원조가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을 출간하였다.[8] 이원조는 이육사의 시작 활동에 대해 "혁명가적 정열과 의욕으로 시에 빙자해 꿈도 그려보고 불평도 폭백한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이육사는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의열단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시작(詩作)을 하였기에, 남겨진 시는 30여 편에 불과하다. "계절의 오행"에서 이육사는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라고 하여, 자신의 시작(詩作)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드러냈다.

이육사는 약 40편의 시를 남겼지만, 그의 작품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으며 한국에서 널리 알려졌다. 1939년에 발표된 〈광야〉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이육사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노력했으며,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던 한글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일본의 검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상징과 은유를 사용해야 했고, 일제 식민주의나 관련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한국인들에게 명확한 의미를 전달했고, 이러한 점과 서정성으로 인해 한국의 교과서에 계속해서 실리고 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첫 시 〈말〉을 발표(이활(李活) 명의)했다. 193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16일에 사망한 후, 동생에 의해 그의 시 20여 편이 출판되었다. 1956년에 두 번째 판이 나왔고, 1974년에는 권위 있는 판본이 출판되었다.

대표적인 시로는 〈청포도〉, 〈절정〉, 〈꽃〉, 〈광야〉 등이 있다.

'''청포도'''

{{인용문2|'''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절정'''

{{인용문2|'''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인용문2|''''''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광야'''

{{인용문2|'''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문학관의 동상

2. 4. 최후

이육사는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1943년 4월, 베이징으로 건너가 한국으로 무기를 밀반입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5] 같은 해, 어머니의 1주기를 맞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이송되었고, 1944년 1월 16일 3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사망했다.[5] 이육사의 죽음 이후 논란이 계속되었고, 목격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일본 감옥에서 흔했던 생체 실험의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5] 감옥 병원에서 이육사의 혈관에 식염수가 주입되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있다.[5] 그는 화장되어 서울 미아리에 안장되었다.[3]

1960년 이육사의 유해는 그의 출생지 근처로 이장되었고, 1968년 안동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6] 안동 외곽에는 그의 문학과 항일 투쟁을 기리는 이육사문학관이 있다.[6]

1943년(39세) 1월 친우에게 베이징행을 알렸다.[8] 한글 사용 규제를 받자 한때 한시만 발표하였다. 4월 베이징으로 갔다.[8] 중칭과 연안 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수립하였고, 7월 어머니와 형의 1주기 참석차 귀국하였다가 늦가을에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이송되었다.[8] 주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40세) 1월 16일 새벽,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8]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李秉熙)에 의해 유해가 인수되어 장례 치러졌다.

3. 주요 독립 운동 활동

이육사는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장진홍 의사와 함께 체포되었다. 1931년 1월에는 1929년 11월에 터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대구격문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은 1930년 1월 중순과 6월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대구에서도 10월에 대구농림학교, 1931년 1월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간 사건이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이육사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졸업하였으며, 김원봉, 윤세주와 함께 활동했다. 1934년 3월 22일,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전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1932년 4월부터 이육사를 요주의 인물로 수배 중이었으며,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보고 내용에 따르면, 이육사는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음"과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3년 7월, 이육사는 모친과 형의 소상(小喪)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둥창후퉁(東廠胡同, 일제시기에는 東昌胡同) 1호에서 순국하였다. 이곳은 당시 일제의 문화특무공작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있던 곳이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가 시신을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이원창에게 유골을 인계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4. 주요 시작(詩作)

이육사는 생전에 시집을 출간하지 못하였고, 순국 후 둘째 동생이자 당대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인 이원조가 형의 시를 모아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을 출간하였다. 이원조는 이육사의 시작 활동에 대해 "혁명가적 정열과 의욕으로 시에 빙자해 꿈도 그려보고 불평도 폭백한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이육사는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의열단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시작(詩作)을 하였기에, 남겨진 시는 30여 편에 불과하다.

이육사는 자신의 시작 활동에 대한 생각을 "계절의 오행"이라는 글에서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라고 표현하였다. 이육사는 약 40편의 시만을 남겼지만, 그의 작품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으며 한국에서 널리 알려졌다.[7] 1939년에는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인 〈광야〉를 발표하였다.[7]

이육사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특히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던 한글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7] 일본의 검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상징과 은유를 사용해야 했고, 일제 식민주의나 관련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담긴 의미는 한국인들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었으며, 이러한 점과 그의 서정성 덕분에 그의 작품은 한국의 교과서에 계속해서 실리고 있다.[7]

대표적인 시로는 〈청포도〉, 〈절정〉, 〈꽃〉, 〈광야〉 등이 있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이육사가 서정성과 반식민주의 정서를 결합하는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7]

이육사는 1946년 1월 16일에 사망하였고, 그의 동생은 그의 시 20여 편을 출판하였다.[7] 1956년에 두 번째 판이 나왔고, 1974년에는 권위 있는 판본이 출판되었다.[7]

4. 1. 대표작

이육사는 생전에 시집을 출간하지 못하였고, 순국 후 둘째 동생이자 당대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인 이원조가 형의 시를 모아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을 출간하였다. 이원조는 이육사의 시작 활동에 대해 "혁명가적 정열과 의욕으로 시에 빙자해 꿈도 그려보고 불평도 폭백한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이육사는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의열단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시작(詩作)을 하였기에, 남겨진 시는 30여 편에 불과하다.

이육사는 자신의 시작 활동에 대한 생각을 "계절의 오행"이라는 글에서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라고 표현하였다. 이육사는 약 40편의 시만을 남겼지만, 그의 작품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으며 한국에서 널리 알려졌다.[7] 1939년에는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인 〈광야〉를 발표하였다.[7]

이육사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특히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던 한글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7] 일본의 검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상징과 은유를 사용해야 했고, 일제 식민주의나 관련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담긴 의미는 한국인들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었으며, 이러한 점과 그의 서정성 덕분에 그의 작품은 한국의 교과서에 계속해서 실리고 있다.[7]

대표적인 시로는 〈청포도〉, 〈절정〉, 〈꽃〉, 〈광야〉 등이 있다.

'''청포도'''

{{인용문2|

내 고장 칠월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절정'''

{{인용문2|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인용문2|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광야'''

{{인용문2|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이육사가 서정성과 반식민주의 정서를 결합하는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7]

이육사는 1946년 1월 16일에 사망하였고, 그의 동생은 그의 시 20여 편을 출판하였다.[7] 1956년에 두 번째 판이 나왔고, 1974년에는 권위 있는 판본이 출판되었다.[7]

5. 사후

셋째 동생 이원창이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광복 후 1960년 안동시에 이장했다. 2023년 4월 5일 선생의 묘소를 고향인 원촌 뒷산(도보 40분/편도)에서 이육사 문학관 옆(도보 5분/편도)으로 이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하의 그의 항일 투쟁 활동과 시 창작활동을 기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1990)',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탄신 100주년과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는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안동시는 안동 강변도로를 '육사로'로 명칭하였다.

2018년 5월 8일 이육사 친필원고 '편복(蝙蝠)'이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13호로, 2018년 12월 10일 이육사 친필원고 '바다의 마음'이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38호로 지정되었다.

6. 가족 관계

이육사의 조부는 이중직(李中稙, 1847~1916)이며, 조모는 오종(吳鐘, 1849~1918)이다.[10][11] 아버지는 이가호(李家鎬, 1878~1941)이고, 어머니는 허형(許蘅)의 딸 허길(許佶, 1876~1942)이다. 형제로는 형 이원기(李源祺, 1899~1942)와 동생 이원일(李源一, 1906 ~ ?), 이원조(李源朝, 1909~1955), 이원창(李源昌, 1914~?), 이원홍(李源洪, ?~?)이 있었다.

이육사의 안경. 이육사문학관 소장.


부인 안일양(安一陽, 1905~1983)과의 사이에 장남 이동윤(李東胤, 1930~1932), 장녀 이경영(李京英, ?~?), 차녀 이옥비(李沃非, 1941~)를 두었다. 사위는 양진호(梁振鎬)이며 외손자로 양우영(梁佑榮), 양우석(梁佑錫)이 있다. 동생 이원창의 아들 이동박(李東博, 1942~2013)을 양자로 들였으며, 며느리는 영양 남씨(1945~) 남정기(南正基)의 딸이다. 손자로는 이승엽(李承燁, 1975~), 이상엽(李相燁, 1976~)이 있다.

7. 이육사를 연기한 배우들

참조

[1] 웹사이트 Yi Yuk-sa: One hundred years http://hompi.sogang.[...] 2015-03-18
[2] 웹사이트 Yeungnam Observer http://observer.yu.a[...]
[3] 웹사이트 Yi Yuk-sa: One hundred years. http://hompi.sogang.[...] 2015-03-18
[4] 웹사이트 이육사 https://terms.naver.[...] 2021-05-09
[5] 웹사이트 이육사문학관 http://www.264.or.kr[...]
[6] 간행물 Guidebook of Andong City http://www.tourandon[...]
[7] 서적 A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2003
[8] 웹사이트
[9] 기타
[10] 기타
[11] 웹인용 다음 족보의 한문을 해석해 주세요. https://kin.naver.co[...] 202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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