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령 몬테네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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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령 몬테네그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가 점령한 몬테네그로 지역을 의미한다. 1918년 세르비아에 통합되어 독립을 잃었던 몬테네그로는 1941년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이탈리아의 점령하에 놓였다. 이탈리아는 몬테네그로를 독립국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지만, 1941년 7월 13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주도로 봉기가 일어나면서 실패했다. 이후 몬테네그로에서는 체트니크와 파르티잔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한 후에는 독일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탈리아령 몬테네그로는 행정 구역이 축소되었으며, 종교적으로는 동방 정교회가 우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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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령 몬테네그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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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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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이탈리아어) | Governatorato del Montenegro |
공식 명칭 (세르비아어) | Гувернаторат за Црну Гору (Guvernatorat za Crnu Goru) |
통칭 | 몬테네그로 총독부 |
존속 기간 | 1941년 – 1943년 |
정치 체제 | 총독부 |
국가 지위 | 점령지 |
수도 | 체티네 |
공용어 | 이탈리아어, 세르보크로아티아어 |
종교 |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 수니 이슬람 |
통화 |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이탈리아 리라 |
역사 | |
이전 | 유고슬라비아 왕국 |
시작 | 이탈리아 점령 (1941년 4월 18일) |
사건 1 | 독립 선언 (1941년 7월 12일) |
사건 2 | 대 이탈리아 봉기 (1941년 7월 13일) |
사건 3 | 독립 취소 (1941년 7월 24일) |
사건 4 | 총독부 설립 (1941년 10월 3일) |
이후 | 독일 점령 (1943년 9월 12일) |
인구 | |
1941년 | 411,000명 |
정치 | |
총독 | 세라피노 마촐리니(고등 판무관) 알레산드로 피르치오 비롤리 쿠리오 바르바세티 디 프룬 |
재임 기간 | 1941년, 1941년–1943년, 1943년 |
총리 | 세쿨라 드를례비치 (1941년 7월) |
국가 위원회 의장 | 블라조 주카노비치 (1942년–1943년) |
현재 | |
국가 |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
국기 | |
2. 역사적 배경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KSCS, 후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명)이 수립되기 전, 몬테네그로는 40년 동안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1918년 12월 KSCS가 수립되기 직전, 몬테네그로 왕국은 세르비아 왕국과 통합되어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1922년부터 KSCS와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 하에서 몬테네그로는 별도의 행정 구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의 토지 개혁 기간 동안 몬테네그로 산악 지대의 일부 인구가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 특히 마케도니아와 코소보[1]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인구 이동은 코소보의 유고슬라비아 식민화를 통해 해당 지역의 세르비아 인구를 증가시키는 정치적 목표도 달성했다.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생략)
1929년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제타 바노비나는 오늘날의 몬테네그로 전체와 오늘날의 세르비아, 코소보,[1] 크로아티아,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인접 지역을 포함했다. 제타 바노비나의 수도는 체티녜였다. 1939년 8월, 코토르 만에서 펠리에샤츠까지의 제타 바노비나의 크로아티아계 지역(두브로브니크 포함)은 새로운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와 합병되었다. 마지막 제타 바노비나의 반(Ban)은 왕립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전 준장이었던 블라조 쥬카노비치였다. 1940년 5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Komunistička partija Jugoslavije|코무니스티치카 파르티야 유고슬라비예sh, KPJ)의 몬테네그로 지부는 정부에 반대하는 수단으로 왕립 유고슬라비아 군대 예비군의 제대, 군 기율 거부, 심지어 탈영을 옹호했다. 그 해 10월, KPJ 전국 회의는 당의 몬테네그로 지부의 이러한 행동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KPJ를 "제국주의 침략자"에 대항하여 국가를 방어하는 방향으로 재편했다.
3. 이탈리아의 점령 (1941년-1943년)
3. 1.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초기 점령
1941년 4월, 독일이 주도한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과정에서, 몬테네그로 지역에 해당하는 제타 바노비나(Zeta Banovina)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진격해 온 독일군과 알바니아에서 온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탈리아군은 4월 16일 달마티아를 향해 진격했으며, 이후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이탈리아군이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다. 초기 점령군은 알바니아에 본부를 둔 제9군 소속 제17군단 예하의 메시나 제18보병사단이었다. 제9군은 알바니아에 병합된 코소보[1] 및 마케도니아 서부 지역도 관할했다.
4월 17일, 제17군단 사령관 주세페 파푼디(Giuseppe Pafundi) 중장은 알바니아의 이탈리아 총독 프란체스코 야코모니(Francesco Jacomoni)로부터 체티녜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음 날에는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서 "몬테네그로 해방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것이 몬테네그로 임시 정부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추가 통보를 받았다. 4월 28일, 세라피노 마졸리니(Serafino Mazzolini) 백작이 몬테네그로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그는 알바니아 주둔 이탈리아군 최고사령부(Superalba)의 지휘를 받았다. 이탈리아 점령지에서 민정장관 설치는 일반적으로 합병의 전 단계로 여겨졌으며, 이탈리아가 시행한 일부 법률들은 몬테네그로가 이탈리아의 일부가 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탈리아 국기가 게양되었고, 공공기관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누엘레 3세의 사진이 걸렸으며, 로마식 경례가 의무화되었다. 또한 파시스트 정당 조직 설립 준비와 함께 엄격한 검열이 시행되었다. 이탈리아 관료들은 공공 단체, 보험 회사, 은행 등의 재정을 감독하도록 파견되었고, 모든 학교는 1941년 말까지 폐쇄 명령을 받았다.
체티녜에 도착한 이탈리아군은 스스로를 "몬테네그로 해방 위원회"라고 칭하는 분리주의자 그룹, 일명 녹색당(Zelenaši)과 접촉했다. 이탈리아는 이 그룹을 이용하여 점령 당국에 자문할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고, 5월 18일 마졸리니에 의해 "임시 자문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명목상 민정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실제 결정권은 이탈리아 군부에 있었다. 위원회는 여러 도시에 대한 위원 임명과 기존 관료제 재활성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녹색당의 지지만을 받았으며, 녹색당 측은 이탈리아가 협력의 대가로 제공할 지원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5월 22일 "임시 자문 위원회"는 해산되었고, 기존 유고슬라비아 공무원들은 이탈리아에 충성을 맹세한 후 자리를 유지했다. 6월 19일, 마졸리니는 점령지의 민정 행정 문제를 이탈리아 외무부에 직접 보고하는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는 몬테네그로인들에게 초기에는 "친절하고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탈리아의 초기 구상은 몬테네그로를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독립"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는 이탈리아 왕비 엘레나가 몬테네그로의 마지막 군주 니콜라 1세의 딸이라는 점을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엘레나 왕비는 체티녜 출신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데니스 맥스미스(Denis Mack Smith)는 엘레나 왕비가 남편인 빅토르 에마누엘레 3세를 설득하여, 몬테네그로 영토 확장을 노리던 파시스트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가 독립 몬테네그로를 수립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엘레나 왕비의 조카인 몬테네그로의 미하일 왕자는 유고슬라비아의 페타르 2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이탈리아가 제안한 왕위를 거절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소수의 달마티아 이탈리아인들이 거주한다는 명분으로 코토르(이탈리아어: ''Cattaro'') 지역을 이탈리아 왕국에 직접 합병하여, 달마티아 총독부 산하의 카타로 주를 신설했다.[2]
이탈리아는 1918년 세르비아 왕국과의 통합 이전 몬테네그로를 통치했던 페트로비치-네고시 가문의 망명 충성파들이 제공한 정보에 크게 의존했다. 또한 1918년 통합에 반대했던 녹색당 구성원 모두가 연방 유고슬라비아 내 자치보다는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고 잘못 판단했다. 실제 녹색당은 크르스토 포포비치(Krsto Popović)가 이끄는 파벌과 세쿨라 드를예비치(Sekula Drljević)가 이끄는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포포비치는 완전 독립을 추구했지만 전쟁 결과에 따라 연방 유고슬라비아 내 별도 단위 창설도 고려할 의향이 있었고, 그의 그룹에는 몬테네그로 연방당 일부 구성원도 포함되었다. 반면 드를예비치는 전후 유고슬라비아 재건을 거부하고, 독립을 위해 이탈리아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려 했다.
초기 군사 점령 이후 이탈리아는 몬테네그로를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괴뢰 독립국으로 만들려 했고, 마졸리니를 민정 담당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독립 선언 시도가 실패하고 이후 봉기가 진압되면서 군정이 강화되었다. 알레산드로 비롤리(Alessandro Biroli) 장군이 총독으로 임명되어 몬테네그로 총독부(Governatorato del Montenegro)로 알려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비롤리와 그의 후임자인 쿠리오 바르바세티 디 프룬(Curio Barbasetti di Prun) 백작은 군사 및 민정 문제에 대한 모든 권한을 장악했다. 민정 행정을 위해서는 "행정 혼란을 막기 위해" 기존 유고슬라비아 시기의 지역 및 지방 자치 단체 구조가 유지되었고, 이탈리아인들이 이전의 바노비나(Banovina) 수준의 권한을 대체했다.
3. 2. 몬테네그로인들의 불만과 저항
몬테네그로인들은 이탈리아 점령군에 대한 불만을 빠르게 키워나갔다. 이러한 불만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되었는데, 주로 코소보 지역에서 몬테네그로인들이 추방당하고, 바치카와 바라냐 지역이 헝가리에 점령된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다른 지역에서 온 난민들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우스타샤의 테러를 피해 온 난민들이 몬테네그로로 유입된 것도 불만을 가중시켰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다. 이탈리아는 코소보의 중요한 식량 생산 지역과 울치니의 소금 생산 시설을 자신들이 통치하는 알바니아에 할양했다. 더불어 500디나르 이상의 유고슬라비아 지폐 유통을 중단시켜 많은 몬테네그로인들에게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불만 외에도 이탈리아가 몬테네그로 상황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세 가지가 더 있었다. 첫째, 유고슬라비아군 붕괴 이후 많은 양의 무기가 회수되지 않은 채 민간에 남아 있었다. 둘째, 상당수의 전 유고슬라비아군 장교들이 몬테네그로에 있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침략 이후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었다. 약 400명의 전 유고슬라비아군 장교들이 많은 부사관, 민간 관리, 그리고 공산당원들과 함께 몬테네그로로 돌아왔다. 침략 당시, 주로 몬테네그로인들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제타 사단은 알바니아로 잠시 반격을 가했지만, 유고슬라비아 항복 후 대부분 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귀환했다. 셋째, 점령 지역 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의 세력이 강했다.
1941년 7월 초,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Politburo)의 고위 간부이자 몬테네그로 출신인 밀로반 질라스가 베오그라드에서 몬테네그로에 도착하여 점령군에 대한 공산주의 투쟁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3. 3. 독립 선언과 1941년 7월 13일 봉기
몬테네그로인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 점령에 대한 불만이 빠르게 커져갔다. 이러한 불만은 주로 코소보 지역에서의 몬테네그로인 추방[1], 바치카와 바라냐 지역의 헝가리 점령,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다른 지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우스타샤의 테러를 피해 온 난민들의 유입과 관련이 깊었다. 또한, 이탈리아가 코소보의 중요한 식량 생산 지역[1]을 병합하고 울치니의 소금 생산 시설을 알바니아에 넘겨준 것, 그리고 500디나르 이상의 유고슬라비아 지폐 유통을 중단시켜 많은 몬테네그로인들에게 경제적 피해를 입힌 것도 주요 불만 요인이었다. 이탈리아가 몬테네그로인들의 불만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유고슬라비아군 붕괴 후 많은 양의 무기가 회수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둘째, 상당수의 전 유고슬라비아군 장교들이 있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침략 이후 억류되었다가 본국으로 돌아왔다. 셋째, 점령 지역 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의 세력이 강했다. 약 400명의 전 유고슬라비아군 장교들이 많은 부사관, 민간 관리, 그리고 공산당원들과 함께 몬테네그로로 돌아왔다. 침략 당시, 주로 몬테네그로인들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제타 사단은 알바니아로 잠시 반격을 가했으나, 유고슬라비아 항복 후 대부분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가지고 귀환했다. 1941년 7월 초,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고위 간부이자 몬테네그로 출신인 밀로반 질라스가 베오그라드에서 몬테네그로에 도착하여 점령군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저항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한편, 세쿨라 드를예비치와 그의 동료들은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독립 몬테네그로를 세우면 별다른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라고 이탈리아 당국을 설득했다. 1941년 6월 초, 이탈리아 총독 알레산드로 피르치오 비롤리(Alessandro Pirzio Biroli)의 민사 담당관 세라피노 마촐리니(Serafino Mazzolini)는 이탈리아 당국과 협력할 의사가 있는 65명의 친이탈리아 인사들로 구성된 자문회의를 만들었다. 7월 초, 각 도시와 마을의 위원회는 체티녜에서 열릴 '국민의회'(Narodna Skupštinash)에 대표들을 파견하여 "몬테네그로의 복고를 선포"하도록 했다. 이 선언은 1918년 11월 세르비아와의 합병,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와의 관계, 그리고 1931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을 무효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몬테네그로가 헌법에 따른 군주제로 통치되는 주권 독립 국가임을 선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민의회 의원들은 이 선언이 실제로는 이탈리아 왕국과 몬테네그로의 합병으로 이어질 것이며, 새로운 국가에 실질적인 독립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의 모든 대표들이 회의장을 떠나 자신들의 도시와 마을로 돌아갔다.
페트로비치-네고시 왕조의 어떤 구성원도 왕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국민의회는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누엘레 3세의 명목상 통치 아래 "섭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3] 1941년 7월 12일, 이 선언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처음에는 몬테네그로의 주요 도시들에서 지지하는 모습이 나타났지만, 내륙 지역에서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3. 4. 체트니크의 부상과 이탈리아와의 협력
1941년 11월 초,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에서 체트니크와 파르티잔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 이 지역 체트니크의 지도자는 망명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Draža Mihailović)였다.[1][2] 이러한 분열 소식은 몬테네그로의 민족주의자들이 이탈리아 점령군과 협력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3]
1941년 12월 20일, 미하일로비치는 파블레 듀리시치(Pavle Đurišić)를 중부와 동부 몬테네그로 및 산자크 일부 지역의 모든 정규군과 예비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듀리시치는 1941년 말에서 1942년 초 사이에 세르비아로 가 미하일로비치를 만났고, 그의 서명이 담긴 상세한 지시 사항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알려졌다. 이 지시에는 "산자크의 무슬림 인구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인구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루시앵 카르흐마르, 스테반 K. 파블로비치, 노엘 말콤 등)은 당시 독일군이 미하일로비치를 겨냥한 미하일로비치 작전을 개시하여 그가 라브나 고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듀리시치가 미하일로비치를 만나지 못하고 문서를 위조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반면, 다른 역사가들(마테오 J. 밀라조, 요조 토마세비치, 사브리나 P. 라멧 등)은 이 문서가 실제 미하일로비치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지시 사항에도 불구하고, 듀리시치는 몬테네그로로 돌아온 초기 몇 달 동안 저항 세력 내 비공산주의 그룹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이탈리아군이나 파르티잔에 대한 효과적인 전략을 즉시 개발하지 못했다. 1942년 초, 그의 체트니크 부대는 동부 몬테네그로와 산자크 지역의 무슬림을 상대로 활동을 강화했다.
한편, 파르티잔은 1942년 1월과 2월 콜라신을 점령했을 때,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반대 세력으로 간주된 약 300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시신을 "개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구덩이에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테러 행위는 "좌익의 오류"로 불리며, 많은 몬테네그로 주민들이 파르티잔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듀리시치는 곧 콜라신을 탈환하여 1943년 5월까지 체트니크의 거점으로 삼았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당시 콜라신에서 살해된 인원은 16명에서 38명 사이였다고도 한다.
파르티잔 세력이 약화되고 민심이 이반하는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1941년 가을부터 이탈리아 점령군에게 파르티잔과의 전투에서 협력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3] 1942년 2월 초, 바요 스타니시치(Bajo Stanišić)는 다닐로브그라드 주변에서 자신의 부대를 철수시켜 포위된 이탈리아군이 파르티잔을 격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곧이어 스타니시치는 이탈리아군이 니크시치를 탈환하는 것을 지원했다.
1942년 2월 중순부터 개별 체트니크 부대와 이탈리아군 간의 공식적인 협력 협정이 체결되기 시작했다. 첫 협정은 2월 17일, 스타니시치와 48보병사단 타로 사령관 사이에 맺어졌다. 이후 듀리시치도 19보병사단 베네치아 작전 지역에서 이탈리아군과의 협력 협정을 비롤리 총독과 체결했다. 3월 6일에는 스타니시치와 비롤리 간의 협정이 공식화되었다. 이 협정들은 체트니크가 파르티잔에 대항해 싸우는 대가로 이탈리아로부터 무기와 보급품을 지원받는 것을 골자로 했다.[3] 이탈리아 측의 주된 목적은 자국 군대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스타니시치는 처음에 자신의 부대를 "몬테네그로 국민군"이라 칭하며 몬테네그로와 헤르체고비나 전체 체트니크 사령관임을 주장했으나, 2월 말 또는 3월 초 미하일로비치가 보낸 정보원을 통해 다른 체트니크 지도자들과 활동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3월 9일, 체티네에서 다수의 구 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장교들이 모여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ć)를 몬테네그로 모든 민족주의 세력의 사령관으로 선출했는데, 이는 미하일로비치의 승인 혹은 제안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3]
1942년 3월부터 6월 사이, 몬테네그로에서 체트니크의 세력은 여러 요인이 결합되어 크게 강화되었다. 이탈리아와의 협정을 통해 무기와 보급품을 확보한 것이 첫 번째 요인이었고, "좌익의 오류"로 인한 파르티잔의 약화가 또 다른 주요 요인이었다. 이 기간 동안 스타니시치의 체트니크는 이탈리아군과 함께 니크시치 지역에서, 듀리시치의 체트니크는 콜라신 지역에서 파르티잔과 싸웠다. 5월에는 듀리시치 부대가 몬테네그로 내 마지막 대규모 파르티잔 부대였던 두르미토르 파르티잔 부대를 격파했다.
1942년 7월 24일, 주카노비치와 비롤리 총독 사이에 포괄적인 협정이 체결되면서 체트니크와 이탈리아의 협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협정으로 몬테네그로 체트니크는 파르티잔과의 전투에서 사실상의 주력 부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주카노비치-비롤리 협정은 "체트니크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법과 질서 회복 및 유지를 위해 이탈리아 당국과 협력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듀리시치, 스타니시치, 그리고 분리주의 지도자 크르스토 포포비치(Krsto Popović)가 각각 지휘하는 1,500명 규모의 "기동 부대" 3개를 창설하고, 이들의 급여, 식량, 무기 및 가족 지원을 이탈리아 측이 보장하기로 했다. 이 부대들은 이미 존재했으며 6월 파르티잔 소탕 작전에서 이탈리아군과 함께 활동했다. 협정은 주카노비치가 이끄는 기존의 몬테네그로 민족주의자 위원회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의 목표가 공산주의와의 투쟁, 질서 유지, 주민 복지 외에는 다른 정치적 의제가 없음을 명시했다. 이 협정 체결로 주카노비치의 위원회는 질서 유지와 이탈리아 점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의 전투에 전념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토마세비치는 협정 체결 당시 미하일로비치가 두 달간 몬테네그로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가 이 협정을 인지하고 만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밀라조 역시 이탈리아와의 협력이 미하일로비치의 개인적인 승인 하에 추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협력은 점령군에 대항할 수 있는 "대기 중인 군대"를 유지하다가 서방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미하일로비치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는 독일 점령 하 세르비아에서 활동했던 "합법화된 체트니크"와 유사한 전략이었다.
체트니크는 이탈리아 점령군에게 중요했는데, 그들은 내륙 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이탈리아군이 주요 도시와 교통로의 질서 유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1942년 6월부터 1943년 4월까지 체트니크는 점령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공식적으로 "기동 부대" 소속인 3,000명 외에도, 이탈리아에 의해 "합법화"되지는 않았지만 파르티잔과의 전투에 참여한 체트니크 병력은 훨씬 더 많았다. 분리주의 지도자이자 세 번째 "기동 부대" 사령관인 포포비치는 침공 초기부터 이탈리아와 협력해 왔으며, 1942년 상반기 체트니크와 불안정한 합의를 맺은 후에도 협력을 지속했다. 체트니크와 분리주의자 모두 이탈리아로부터 최대한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며, 여기에는 지지 세력을 위한 식량 수입도 포함되었다.
3. 5. Šahovići 회의 (1942년 11월-12월)
1942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몬테네그로와 산자크 지역 체트니크들은 비엘로 폴레 근처 샤호비치(Šahovići) 마을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파블레 듀리시치가 주도했으며, 자하리예 오스토이치(Zaharije Ostojić), 죠르지예 라시치(Đorđije Lašić), 그리고 듀리시치 자신이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회의록에는 공식적인 도장이 찍혔다.
회의에서 채택된 결의는 극단주의와 불관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전쟁 이전의 유고슬라비아를 복원하되 초기에는 체트니크 독재 체제를 수립한다는 의제를 제시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주변 국가들의 영토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 회의는 1941년 말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에서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의 분열 이후, 듀리시치가 미하일로비치로부터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소수 민족 제거 지시를 받았다는 논란 속에서 열린 것이다.
4. 이탈리아의 항복과 독일의 점령 (1943년-1944년)
1943년 9월 3일, 이탈리아는 연합국과 휴전을 맺었으나, 이 사실은 9월 8일에야 공표되었다. 이로 인해 유고슬라비아에 주둔하던 이탈리아군 17개 사단은 고립되었다. 모든 사단장들은 독일군에 합류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고립된 이탈리아군 중 일부는 저항 세력에 가담했다. 2개의 이탈리아 보병 사단은 몬테네그로 파르티잔에 완전한 부대 형태로 합류했으며, 또 다른 1개 사단은 알바니아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했다. 반면, 다른 부대들은 독일군에게 항복하여 독일에서 투옥되거나 즉결처형을 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일부 부대는 크로아티아군이나 파르티잔에게 무기, 탄약, 장비와 함께 항복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단순히 해체되거나 트리에스테를 통해 육로로, 또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배를 이용해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이전에 이탈리아가 통치하던 몬테네그로 총독부 영토는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5. 행정 구역
이탈리아 점령 하의 몬테네그로 영토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보다 상당히 축소되었다. 중심 지역은 베라네에서 산자크 남쪽으로 이어지는 작은 영역으로, 프리예폴리에, 비옐로 폴리에, 세니차 등의 도시와 투틴, 로자예 주변 일부 마을을 포함했다. 이 지역에는 약 8만 명의 무슬림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코토르 만은 이탈리아의 달마티아 총독령에 합병되었다. 독립국 크로아티아와의 국경은 드리나 지역에서 림 강을 따라 훔까지, 그리고 도브리체보를 거쳐 아드리아 해까지 설정되었다. 해안선과 남동쪽 국경 지역에서는 알바니아에 메토히야 지역을 할양했는데, 이는 바르, 스카다르 호수 북쪽 일부, 울치니, 포드고리차 북동쪽 지역, 안드리예비차 지역 상당 부분과 플라브, 구시네까지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다.
코소보 서부와 중부 지역[1] 역시 프리즈렌, 드라가시, 프리스티나 등의 도시를 포함하여 알바니아에 합병되었다.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와 이바르 강 유역은 쿠카비차, 포두예보, 메드베자 도시와 트렙차 광산을 포함하여 독일이 점령한 세르비아 영토에 편입되었다. 독일 점령 세르비아 영토에는 노비 파자르를 포함한 산자크 동부도 포함되었다. 서쪽 국경 변경 외에도, 서부 산자크 일부 지역인 포차와 차이니체는 독립국 크로아티아에 편입되었다.
초기에는 군사 점령 상태였으나, 이탈리아는 몬테네그로를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명목상의 독립국으로 만들려 했고, 알레산드로 마촐리니(Alessandro Mazzolini)를 민정 담당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독립 선언 시도가 실패하고 봉기가 발생하자, 알레산드로 피르치오 비롤리(Alessandro Pirzio Biroli)가 몬테네그로 총독부(Governatorato del Montenegroit)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지역을 통치했다. 비롤리와 그의 후임자인 쿠리오 바르바세티 디 프룬(Curio Barbasetti di Prun) 백작은 몬테네그로의 모든 군사 및 민정 문제를 완전히 통제했다. 민정 행정에서는 행정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기존 유고슬라비아 시기의 지역 및 지방 자치 단체 구조가 유지되었으며, 이탈리아인들이 바노비나 수준의 권한을 대체했다.
이탈리아령 몬테네그로의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았으며, 기존 유고슬라비아의 공무원들이 계속 근무했다.
행정 구역명 (이탈리아어 표기) | 비고 |
---|---|
안티바리 (Antivari) | 구 유고슬라비아 행정 구역의 일부만 포함 |
안드리예비차 | 구 유고슬라비아 행정 구역의 일부만 포함 |
베라네 | 구 유고슬라비아 행정 구역의 일부만 포함 |
비옐로폴예 | |
카타로 (Cattaro) | 구 유고슬라비아 행정 구역의 일부만 포함 |
체티녜 | |
다닐로그라드 | |
콜라신 | |
밀레셰바 (Mileševa) | |
니크시치 | |
노바바로시 | |
플레브예 (Plevje) | |
포드고리자 (Podgorizza) | |
프리보이 | |
샤브니크 | |
세니차 | 구 유고슬라비아 행정 구역의 일부만 포함 |
슈타비차 (Štavica) | 구 유고슬라비아 행정 구역의 일부만 포함 |
6. 점령군
1941년 7월 13일부터 8월 12일까지 이어진 봉기는 루이지 멘타스티가 지휘하는 제14군단에 의해 진압되었다. 당시 제14군단은 제19 보병사단 "베네치아", 제18 보병사단 "메시나", 제5 알프스 사단 "푸스테리아", 제48 보병사단 "타로", 제22 보병사단 "카차토리 델레 알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카차토리 델레 알피" 사단은 1941년 9월 독립국 크로아티아로 재배치되었지만, 나머지 부대는 1941년 12월까지 강화된 점령군으로 남아 현지 저항 세력의 공격을 막아냈다.
1941년 12월 1일부터 1943년 5월 15일까지 제14군단은 몬테네그로 사령부로 지정되었으며, 본부는 포드고리차에 두었다. 1942년 10월 기준으로 몬테네그로 사령부는 7만 5천 명 이상의 병력을 통솔했다. 여기에는 코토르 만의 수비대도 포함되었는데, 이 수비대는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제2군의 일부였으나 작전상으로는 몬테네그로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1943년 5월 15일, 몬테네그로 사령부는 제9군 및 제2군 소속 제6군단과 통합되어 동부군집단을 형성했지만, 이탈리아 점령 기간 동안 점령군의 배치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봉기와 이후의 저항 활동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주요 도시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점령 지역 | 사단 | 기간 | 비고 |
---|---|---|---|
북부 지역 | 제48 보병사단 "타로" | 1941년 12월 – 1942년 8월 | 남부 지역의 체티녜와 바르 포함 |
제151 보병사단 페루자 | 1942년 8월 – 1943년 9월 | 남부 지역의 체티녜와 바르 포함 | |
동부 지역 | 제19 보병사단 "베네치아" | 1941년 12월 – 1943년 9월 | 본부: 베라네 |
남부 지역 | 제5 알프스 사단 "푸스테리아" | 1941년 12월 – 1942년 8월 | 본부: 플레블랴, 노바바로시, 프리보이 주둔, 독립국 크로아티아의 포차, 고라주데, 비셰그라드 주둔 |
제1 알프스 사단 타우리넨세 | 1942년 8월 – 1943년 9월 | 위와 같음, 비셰그라드 주둔지는 1942년 12월 독일군으로 교체됨 | |
코토르 지역 | 제18 보병사단 "메시나" | 1941년 12월 – 1942년 2월 | 본부: 카스텔누오보 |
제155 보병사단 에밀리아 | 1942년 2월 – 1943년 5월 | — | |
제23 보병사단 페라라 | 1943년 5월 – 1943년 9월 | — | |
북서부 지역 | 제6 알프스 사단 알피 그라예 | 1942년 3월 – 11월 | 다닐로브그라드, 닉시치, 샤브니크 사이 |
몬테네그로 점령은 이탈리아에게 상당한 경제적 부담이었다. 코토르 만이 해군 기지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몬테네그로가 중앙 발칸반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식량이 부족하여 매달 1200ton에서 1500ton에 달하는 식량을 외부에서 수입해야 했다.
7. 종교
몬테네그로의 주요 종교는 동방 정교회였으며, 상당수 수니파 이슬람 신자와 소수의 로마 가톨릭 신자도 존재했다. 1920년 몬테네그로 대주교구가 세르비아 정교회와 통합된 이후, 세르비아 정교회는 몬테네그로인들 사이에서 가장 우세한 교회가 되었다. 이는 몬테네그로 및 리토라리아 대주교구와 부디믈례-니크시치 주교구로 나뉘었으며, 두 주교구 모두 요아니키예 리포바츠(Joanikije Lipovac)의 지도를 받았다. 리포바츠는 1945년 유고슬라비아 탈출을 시도하다가 파르티잔에게 살해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바르 로마 가톨릭 대교구와 스코페 로마 가톨릭 교구 두 교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참조
[1]
문서
Pars pro toto
[2]
서적
Il nuovo ordine mediterraneo
Bollati Boringhieri
[3]
웹사이트
Photos of the "Reggenza" creation, showing Italian and Montenegrin authorities under the King of Italy and the King of Montenegro paintings
http://senato.archiv[...]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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