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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데텐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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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데텐란트는 역사적으로 보헤미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19세기 민족주의의 등장 이전까지는 보헤미아와 구분하기 어려웠다. 켈트족과 게르만족, 슬라브족 등이 거쳐 간 이 지역은 중세 시대에 독일인들이 정착하면서 독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었으나, 독일계 주민들은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와의 통합을 요구하며 분리 운동을 전개했다.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수데텐란트의 경제가 악화되면서 독일 민족주의를 내세운 수데텐 독일인당의 세력이 커졌고, 결국 히틀러의 압력으로 1938년 뮌헨 협정을 통해 독일로 병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독일인의 추방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재정착이 이루어졌으며, 1990년대 이후 체코와 독일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화해 노력을 기울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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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데텐란트
지도 정보
일반 정보
1930년 주데텐란트 지도
1930년의 주데텐란트 지도
위치체코 북부, 폴란드 남서부, 독일 동부
다른 이름주데텐
주데티(슬로바키아어)
수데티(체코어)
크라이 수데토프(폴란드어)
포흐라니치(체코어)
지명의 유래수데티산맥
역사
주요 사건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후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
1938년: 뮌헨 협정으로 나치 독일에 합병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 독일인 추방
이전 국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체코슬로바키아
나치 독일
이후 국가체코슬로바키아
체코
인구
주요 민족독일인 (1945년 이전)
체코인 (1945년 이후)
지리
주요 산맥수데티산맥
주요 도시카를로비바리
리베레츠
올로모우츠
오파바
플젠
문화
언어독일어 (1945년 이전)
체코어 (1945년 이후)
기타
관련 항목뮌헨 협정
베네슈 포고령
주데텐 독일인

2. 역사적 배경

훗날 주데텐란트로 알려지게 된 지역은 하나의 통합된 역사적 지역을 형성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19세기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주데텐란트의 역사를 보헤미아의 역사와 구분하기 어렵다.[24]

2. 1. 초기 역사

켈트족보이족 부족이 이 지역에 정착했으며, 이 지역은 2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 처음 언급되었다.[24] 후대에는 게르만 부족인 마르코만니족이 이 지역의 중심부 전체를 지배했다. 이 부족들은 이미 브르노와 같은 도시를 건설했지만, 민족 대이동 기간 동안 서쪽으로 이동했다.[24] 7세기에는 슬라브족이 이주하여 사모의 영토 아래 통일되었다.[24] 후대 고대 중세에는 독일인들이 인구가 적은 국경 지역에 정착했다.[24]

중세보헤미아 공국보헤미아 왕국(성 바츨라프 왕관)의 산악 국경에 위치한 지역들은 민족 대이동 이후로 주로 서슬라브계 체코인들이 정착해 있었다.[24] 서쪽의 보헤미아 숲을 따라 체코 영토는 게르만 슬라브 부족(게르만 소르브족) 종주 공국인 바이에른과 프랑코니아와 접해 있었고, 중세 독일 왕국의 변방도 오스트리아 영토의 남쪽 보헤미아-모라바 고지와 북쪽 마이센 지역의 오레 산맥 너머에 설립되었다.[24] ''동방 식민''(동쪽 정착) 과정에서 13세기부터 독일인 정착은 상 루사티아 지역과 실레시아 공국으로 계속 이어졌다.[24]

2. 2. 중세 시대 독일인 정착

중세 보헤미아 공국보헤미아 왕국의 산악 국경 지역에는 주로 서슬라브계 체코인들이 정착해 있었다. 13세기 후반부터 프셰미슬 왕조의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1253~1278)와 벤체슬라스 2세(1278~1305)는 독일계 사람들의 정착을 장려했다.[24] 1306년 프셰미슬 왕조가 멸망한 후, 보헤미아 귀족들은 룩셈부르크의 요한을 왕으로 지지했다. 1322년 보헤미아의 요한 왕은 서쪽의 에거란트 지역을 획득했고, 1335년 트렌친 조약으로 대부분의 피아스트 실레시아 공국들을 봉신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인 카를 4세는 1355년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여 보헤미아 왕관령루사티아를 추가했는데, 이 지역은 상당한 독일인 인구를 포함하고 있었다.

구릉지대 국경 지역에서 독일 정착민들은 산림 유리의 주요 제조업을 확립했다. 후스 전쟁(1419~1434)으로 독일인들의 상황은 악화되었지만, 후스파 반란군 중에도 일부 독일인들이 있었다.

700~1400년 독일 동부 정착의 단계


당시 독일인들은 주로 남보헤미아와 남모라비아 주의 브르노, 지흘라바, 체스케 부데요비체 그리고 서보헤미아 플젠 주에는 바이에른 출신 사람들이, 자테츠에는 프랑코니아 사람들이, 인접한 북보헤미아의 상부 작센 사람들, 클라츠코 백작령이 있는 인접한 수데텐 지역, 모라비아-실레시아 주의 스비타비와 올로모우츠에는 게르만 실레시아인들이 정착했다. 프라하는 17세기 후반부터 1860년까지 독일어 사용 인구가 다수였지만, 1910년 이후 독일어 사용자 비율은 인구의 6.7%로 감소했다.

삼십년 전쟁에서 체코인과 독일인 보헤미아인 모두 큰 고통을 겪었고, 보헤미아는 인구의 70%를 잃었다. 1620년 흰 산 전투에서 보헤미아 반란이 패배한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점차 보헤미아 왕국을 군주국에 통합했다. 그 후 반종교개혁 기간 동안 인구가 적은 지역은 오스트리아 영토 출신의 가톨릭 독일인들로 재정착되었다.

2. 3. 민족 갈등의 심화

17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체코어를 부차적인 역할로 쇠퇴시켰다. 18세기 계몽주의와 바이마르 고전주의 시대에 독일 문화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19세기 낭만주의 운동과 함께 체코 민족주의와 범독일주의가 대립하면서 민족 갈등이 고조되었다. (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 독일 문제) 19세기 후반,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헝가리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지만, 독일인과 마자르인(헝가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우스글라이히)

삼십년 전쟁으로 체코인 귀족이 패배하고 보헤미아에서 독일인의 지배권이 확립되면서 독일인과 체코인 사이에는 대립 관계가 생겨났다.[24] 아우스글라이히 이후 체코인들도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원했고,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아의 삼중 제국이 성립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독일인과 마자르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80년에는 체코인 출신의 제국 총리 에두아르트 텡케가 슈트레마이어 언어령(텡케 언어령)을 발표하여 독일어와 체코어의 언어적 평등을 규정했지만, 기득권을 침해당했다고 느낀 독일인과 체코인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1897년에는 카지미르 펠릭스 바데니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관리에게 독일어체코어를 모두 습득할 것을 의무화한 바데니 언어령을 발표하자, 제국 내 독일인들이 일제히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1899년에 바데니 언어령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이번에는 체코인의 폭동이 빈발했다.[25]

3. 제1차 세계 대전과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후 수데텐란트로 알려지게 된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른 독일어 사용 지역보다 전쟁 사망률이 높았다. 인구 1,000명당 34명이 사망하여 독일 남모라비아와 카린티아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1918년 10월 말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 영토를 기반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을 선포했다.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의 독일인 의원들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개 조항에 명시된 자결권을 근거로 독일 오스트리아 공화국과의 통합을 시도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합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구 보헤미아 왕관령의 독일어 사용 지역은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에 포함될 예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인, 독일인, 슬로바키아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루테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1918년 9월 20일, 프라하 정부는 수데텐란트에 대한 미국의 의견을 요청했고, 윌슨 대통령은 아치볼드 쿨리지 대사를 파견했다. 쿨리지는 독일인의 자결권을 존중하여 북보헤미아를 제외한 독일어 사용 지역을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에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2] 파리 강화 회의의 미국 대표단은 이 제안을 따르지 않았다. 앨런 덜레스는 체코슬로바키아 위원회의 미국 수석 외교관으로서 체코 지역 통합 유지를 강조했다.[3]

당시 설립된 네 개의 지역 정부 단위는 다음과 같다.

주(Province) 이름수도통치자(주지사, Landeshauptmann 또는 군수, Kreishauptmann)통치 기간
독일 보헤미아 주(Provinz Deutschböhmen)라이헨베르크(Liberec)* 라파엘 파허(Rafael Pacher) (1857–1936)* 1918년 10월 29일~11월 6일
수데텐란트 주(Provinz Sudetenland)트로파우(Opava)로베르트 프라이슬러(Robert Freissler) (1877–1950)1918년 10월 30일~12월 18일
보헤미아 숲 지역(Böhmerwaldgau)해당 없음프리드리히 비히틀(Friedrich Wichtl) (1872–1922)1918년 10월 30일~
독일 남모라비아(Deutschsüdmähren)해당 없음오스카어 토이펠(Oskar Teufel) (1880–1946)1918년 10월 30일~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위원회는 "체코 지역의 통합"을 지지하는 선언을 발표했다.[4] 체코인들은 독일계 보헤미아인들의 통합 요구를 거부하고,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보헤미아 왕관령의 일부였음을 강조하며 체코슬로바키아로의 편입을 주장했다. 1921년 기준으로 이 지역은 90% 이상이 독일인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체 인구의 23.4%를 차지했다.

1919년 생제르맹 조약으로 독일어 사용 지역의 체코슬로바키아 귀속이 확정되었다.

3. 1. 수데텐 독일인의 분리 운동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편에서 싸우고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을 목표로 했던 에드바르트 베네시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독립파는, 전후 국토로서 「보헤미아 왕관령(성 바츨라프의 왕관 제국)」인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지역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지역의 독일인들은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 내에 남는 것을 요구했다. 1917년 9월 16일에는 이 지역의 사회민주노동당이 분리 움직임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26]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독립파가 독립을 선언하자 다음 날인 10월 29일, 독일인 제국 의원들을 중심으로 에게란트와 북보헤미아에 독일 보헤미아 주 성립을 선언했다. 10월 30일에는 실레시아, 북모라비아, 동부 보헤미아에 수데텐란트 주가 형성되었고, 11월에는 남부 보헤미아와 남부 모라비아에서 베머발트가우와 차임(Zneim, )의 두 자치 정부가 건설되었다.[27] 이들 독일계 정부들은 지역의 공식적인 확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행정에 관한 임시 협정을 맺으려고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측은 “반역자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며 이를 거부했다.[27] 11월 20일, 체코 군단이 독일계 정부 지역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고, 12월 18일까지 독일계 정부들은 해체되거나 망명을 강요당했다. 한편 1918년 11월에 성립한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 정부는 독일계 지역을 독일 보헤미아 주, 수데텐란트 주, 오베르외스터라이히 주로 구분하여 영유권을 주장했다.

파리 강화 회의가 시작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독일인 거주 지역의 체코슬로바키아 편입에 반대하며, 만약 편입한다면 주민 투표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사실상 지배의 승인을 요구했다.[27] 미국은 민족 자결의 관점에서 독일 편입을 주장했지만, 안보의 관점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강화를 노리는 프랑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독일인 거주 지역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가 되는 것이 확정되었다.[28] 이렇게 310만에 달하는 독일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큰 소수 민족”이 되었다.[29] 그러나 생제르맹 조약과 같은 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연합국 사이에 체코슬로바키아 국내의 민족 평등을 규정한 「소수 민족 보호 조약」이 체결되어 독일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권리 보호가 요구되었다.[30]

3. 2. 파리 강화 회의와 생제르맹 조약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은 민족 자결 원칙에 따라 독일계 지역의 독일 편입을 주장했으나, 프랑스의 안보 논리에 밀려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생제르맹 조약은 수데텐란트의 체코슬로바키아 귀속을 확정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독일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의 권리 보호를 요구했다.[18]

4. 체코슬로바키아 시대 (1918-1938)

1918년 독일인 거주 지역은 공식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영토가 되었고, 북동부에는 Krkonošsko-jesenická subprovincie 등이 설치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민족 국가였으며, 독일인은 전체 인구의 23.4%를 차지하는 가장 큰 소수 민족이었다.

4. 1. 언어 문제와 민족 갈등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1920년 9월 20일 헌법의 일부로 언어법을 제정하여 '체코슬로바키아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지정했다. 독일어는 주민의 20% 이상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만 공공기관 등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되었다.[31] 또한 체코인이 거의 없는 지역에도 체코어 지명 표기가 이루어졌고, 독일인 학교는 폐쇄되었다.[31] 이러한 정책은 이중 제국 시대와 비교해도 후퇴한 것이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 등 독일인 정당들은 반대했다.[31]

높은 실업률과 더불어 학교와 모든 공공장소에서 체코어 사용이 강요되자, 파시즘, 공산주의, 독일 이레덴티즘과 같은 포퓰리즘적이고 극단적인 운동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이 시기 독일 민족주의 정당들과 급진적인 요구를 내세운 수데텐 독일당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7]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는 체코인들이 독일인을 "우리의 독일인(naši Němci)"이라고 부르는 등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23]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독일을 경계하여 강력한 요새선을 구축했다.

4. 2. 경제 불황과 수데텐 독일인당의 부상

대공황 기간 동안, 주로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독일계 소수 민족은 경제 공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수데텐란트는 수출 의존 산업(유리 제품, 섬유 산업, 제지 산업 및 장난감 산업 등)이 집중되어 있었는데[7], 비주테리 및 유리 제조업의 60%가 수데텐란트에 위치했으며, 해당 부문 종사자의 69%는 모국어가 독일어였다. 비주테리의 95%와 기타 유리 제품의 78%가 수출용으로 생산되었으나, 구매력 감소와 다른 국가의 보호 조치로 인해 많은 독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7]

높은 실업률과 학교와 모든 공공장소에서 체코어 사용 강요는 파시즘, 공산주의 및 독일 이레덴티즘과 같은 극단적인 운동을 확산시켰다. 이 시기 독일 민족주의 정당들과 수데텐 독일당(SdP)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7]

세계 대공황으로 독일인 거주 지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 지역의 산업은 광산, 유리, 도자기, 섬유 등 수출에 의존했고, 영세 기업이 많아 실업률이 다른 지역의 두 배 이상이었다. 체코인의 고용이 독일인보다 우선시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독일인들의 불만이 커졌다.[32] 이웃 국가 독일에서 히틀러 정권의 경제 회복은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수데텐 고토 전선”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들은 독일 민족의 민족 공동체를 목표로 했으며, 1935년 수데텐 독일인당으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선거에서 최다 득표를 얻어 제2당이 되었지만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37년 9월, 밀란 호자 총리와 헨라인의 회담에서 헨라인은 자치권과 “자결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10월, 수데텐 독일인 집회가 금지되고 당 간부 카를 헤르만 프랑크 등이 경찰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3] 헨라인은 긴급한 자치권 설정을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고, 독일 공사도 이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수데텐 지방의 독일인 문제는 국제 문제로 확대되었고, 헨라인은 “수데텐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 전 지역의 독일 편입”으로 목표를 전환하여 독일의 지원을 요청했다.[33]

5. 수데텐 위기와 뮌헨 협정

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직후, 아돌프 히틀러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계 주민들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수데텐 위기를 일으켰다.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수데텐 나치들은 자치를 요구하며 선동했고, 1938년 4월 24일 수데텐 독일당(SdP)은 칼스바드 강령(Karlsbader Programm)을 선포하여 수데텐 독일인과 체코인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1938년 6월 30일에 이러한 요구를 수용했다.[8]

영국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런시먼 경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파견하여 사태를 중재하려 했다. 런시먼 경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수데텐 독일인 양측을 만났으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9] 그는 영국 내각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밝혔다.[10][11] 특히 에거와 아슈 지역은 80만 명의 독일인과 소수의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일로의 이양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12]

1938년 9월 15일, 체임벌린은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나 수데텐란트의 할양에 동의했다.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는 논의에 초대받지 못했다. 이후 히틀러는 고데스베르크에서 체임벌린을 다시 만나, 단순한 수데텐란트 병합뿐 아니라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의 즉각적인 군사 점령까지 요구했다. 그는 1938년 9월 28일 오후 2시를 최후통첩 시한으로 제시하며, 이를 어길 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13][14]

베니토 무솔리니의 중재로 뮌헨에서 4개국 회담이 열렸고, 히틀러, 달라디에, 체임벌린은 무솔리니의 제안(실제로는 헤르만 괴링이 준비)에 동의하여 수데텐란트의 즉각적인 점령을 허용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에 굴복하여 9월 30일 협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다.

결국 수데텐란트는 1938년 10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 독일에 할양되었다. 1939년 3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체코 지역을 병합하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을 수립했다. 슬로바키아 지역은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나, 독일의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수데텐 독일인이 독일에 병합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병합에 반대하는 수데텐란트 사람들도 많았고,[16] 수데텐 독일 역사가 에밀 프란젤은 헨라인 당의 주류는 "독일에 병합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치를 추구했고", 호자와 베네시와 협상을 벌인 대다수의 협상가들은 자치 지지파에 속했으며 헨라인이 히틀러와 맺은 합의를 몰랐다고 주장한다.[17]

5. 1. 히틀러의 압력과 헨라인의 역할

1938년 3월, 테플리체에서 수데텐 독일 활동가들이 체코어 표지판을 지우는 모습


히틀러는 수데텐 문제 해결을 여러 차례 요구했고, 콘라트 헨라인과 카를 헨리히 프랑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하도록 지시했다.[34]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독일 제국에 앙슐루스된 직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대변자가 되었고, 이는 수데텐 위기를 촉발시켰다.

밀란 호자 총리와 헨라인은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지만, 헨라인은 매번 거부했다. 1938년 5월, 독일군이 체코 국경에 배치되었다는 오보가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군을 동원했다. 같은 시기 지방 선거에서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수데텐 독일인당은 독일인 거주 지역에서 9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35]

독일군의 진주를 맞이하는 수데텐란트 주민들. 1938년 10월 5일


8월 14일, 베네시 대통령은 자치권을 인정하며 협상에 나섰지만, 헨라인은 독일로 망명하여 협상을 결렬시켰다.[35]

5. 2. 뮌헨 협정과 수데텐란트 병합

1938년 9월, 뮌헨 협정을 통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을 용인했다. 독일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주데텐란트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13][14]

히틀러는 이 위기를 전쟁 구실로 삼고자 주데텐란트 병합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의 즉각적인 군사 점령도 요구하여 체코슬로바키아군이 새로운 국경에 방어 대책을 적응시킬 시간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한 연설에서 주데텐란트가 "유럽에서 내가 요구해야 할 마지막 영토 요구"라고 주장했다.[13]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의 제안으로 뮌헨에서 주요 강대국 회담이 열렸고, 1938년 9월 29일 히틀러, 달라디에, 체임벌린괴링이 준비한 무솔리니의 제안에 동의하여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이들은 주데텐란트의 즉각적인 점령을 받아들였다. 회담에 참여하지 않았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강압에 굴복하여 9월 30일 협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다.

주데텐란트는 1938년 10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 독일에 할양되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코 지역은 1939년 3월 독일의 침공을 받았고, 일부는 병합되었고 나머지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이 되었다. 슬로바키아 지역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여 독일에 동맹을 맺은 슬로바키아 공화국(슬로바키아 국가)이 되었다.

주데텐 지역의 체코인, 유대인, 군 관리들은 퇴거를 강요당했고, 1939년 7월 1일까지 약 22만 명의 난민(그중 1만 명은 독일계)이 병합 지역에서 체코로 피난했다.[36]

6. 독일 통치 시대 (1938-1945)

1938년 뮌헨 협정으로 수데텐란트독일에 합병된 후, 처음에는 군정 통치를 받았다. 빌헬름 카이텔 장군이 군정 장관을 맡았다. 1939년 4월 14일, 합병된 영토는 나뉘어 남부 지역은 라익스가우 니더도나우, 라익스가우 오버도나우, 가우 바이로이트에 편입되었다.

북부와 서부 지역은 라익스가우 수데텐란트(Reichsgau Sudetenland)로 재편되었고, 라이헨베르크(현재의 리베레츠)가 수도가 되었다. 콘라트 헨라인은 1939년 5월 1일까지 라익스콤미사르로, 그 후 1945년 5월 4일까지 라익스슈타트할터로 지역을 관리했다. 수데텐란트는 에거(칼스바트를 수도로), 아우지크(우스티 나트 라붐), 트로파우(오파바)의 세 개의 행정구(Regierungsbezirk)로 구성되었다.[18]

나치 독일은 수데텐란트에 대해 강제 동화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저항하는 조직들은 탄압을 받았다.

6. 1. 수데텐란트 제국 대관구

수데텐란트는 처음에 군정 통치를 받았으며, 빌헬름 카이텔 장군이 군정 장관이었다. 1939년 4월 14일, 합병된 영토는 나뉘어 남부 지역은 인근의 라익스가우 니더도나우, 라익스가우 오버도나우, 가우 바이로이트에 편입되었다.

1938년 12월, 라익스가우 수데텐란트 선거 투표용지


북부와 서부 지역은 라익스가우 수데텐란트(Reichsgau Sudetenland)로 재편되었고, 라이헨베르크(현재 리베레츠)가 수도로 정해졌다. 콘라트 헨라인(공개적으로 NSDAP 당원)은 1939년 5월 1일까지 라익스콤미사르(Reichskommissar)로, 그 후 1939년 5월 1일부터 1945년 5월 4일까지 라익스슈타트할터(Reichsstatthalter)로 지역을 관리했다. 수데텐란트는 에거(Eger)(칼스바트를 수도로), 아우지크(Aussig)(우스티 나트 라붐), 트로파우(Troppau)(오파바)의 세 개의 행정구(Regierungsbezirk)로 구성되었다.[18]

뮌헨 협정 이후 1939년 3월 25일, 북부의 에거란트(Egerland)와 수데텐은 Reichsgau Sudetenland|수데텐란트 제국 대관구de로 되었고, 헨라인이 대관구 지도자가 되었다.[37] 남부는 바이에리시-오스트마르크 대관구(1942년 바이로이트 대관구로 개칭), 상도나우 제국 대관구, 하도나우 제국 대관구에 분할 편입되었다. 수데텐란트에 대한 강제 동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독일인 사회민주당 등의 저항 조직은 탄압받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37]

라익스가우 수데텐란트의 행정 구역


수데텐란트 제국 대관구의 문장

6. 2. 강제 동화와 저항 운동



뮌헨 협정 이후 1938년 10월 1일, 하인라인이 수데텐란트 담당 총독에 임명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1939년 3월 25일, 북부의 에거란트와 수데텐은 "수데텐란트 제국 대관구"가 되었고, 하인라인이 대관구 지도자가 되었다.[37] 남부는 바이에리시-오스트마르크 대관구(1942년 바이로이트 대관구로 개칭), 상도나우 제국 대관구, 하도나우 제국 대관구에 분할 편입되었다. 나치 독일은 수데텐란트에 대한 강제 동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독일인 사회민주당 등의 저항 조직을 탄압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39년 3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가 해체되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이 되었으며, 프랑크가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가 되었다. 보호령에서 체코인에 대한 격렬한 탄압이 가해지면서, 체코인들 사이에 독일인에 대한 보복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 때문에 반나치 운동, 망명 정부, 연합국에서는 독일계 주민의 국외 추방이 중요한 정치 문제가 되었다.[37]

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5월 독일 항복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망명 정부를 모체로 하는 임시 정부를 통해 베네슈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 포고령은 독일계 주민의 자산 동결과 시민권 제한 등을 명시했다.[44] 1945년 8월 2일 포츠담 협정에서 독일인 추방이 공식적으로 결정되면서, 250만 명에 달하는 독일인의 공식적인 이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25만 명의 노인과 어린이가 사망했다는 수데텐 독일인 측의 주장이 있다.[44] 1950년까지 대부분의 체코 거주 독일인은 자발적 또는 강제적으로 동서독이나 오스트리아로 떠났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 남은 독일인은 16만 5천 명에 불과했다.[44]

7. 1. 베네슈 포고령과 독일인 추방

1945년 5월 독일 항복 후, 망명 정부를 모체로 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임시 정부는 독일계 주민의 자산 동결, 시민권 제한 등을 명시한 베네슈 포고령을 발표했다.[44] 그러나 독일의 권력이 소멸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도 충분한 지배권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보복적인 살해와 강제 노역 등이 행해졌다. 1945년 8월 2일 포츠담 협정에서 독일인 추방이 공식적으로 결정됨으로써 혼란 상태는 일단락되었고, 250만 명에 달하는 독일인의 공식적인 이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25만 명의 노인과 어린이가 사망했다는 수데텐 독일인 측의 주장이 있다.[44] 1950년까지 체코 거주 독일인 대부분은 자발적 또는 강제적으로 동서독이나 오스트리아로 떠났고, 체코슬로바키아에 남은 독일인은 16만 5천 명에 불과했다.[44]

추방된 독일인의 4할은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의 바이에른주로 이주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베네슈 포고령의 폐기와 보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수데텐 독일인 단체 중에서 가장 큰 조직은 (향당회)이며, 1990년에는 회원 수가 14만 명에 달했다.[45] 이들 단체는 협의 기관으로서 을 결성했다. 란츠만샤프트는 바이에른주의 보수 세력과 결탁하여 서독 정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46]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 총리 발터 울브리히트1950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하여 “양국 간에 미해결 문제는 없다”며 독일인 추방과 수데텐 지역의 소속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47] 한편 서독동독과 국교를 맺은 국가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했기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와의 협상은 빌리 브란트 정권의 “동방 외교” 시작 이후인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1973년 12월 11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독일 연방 공화국 간의 상호 관계 조약”()이 체결되어 뮌헨 협정의 무효와 영토 요구가 상호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지만, 독일인 추방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48]

7. 2. 독일인 추방 이후의 상황

1945년 독일 항복 후, 추방된 독일인의 4할은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 바이에른주로 이주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베네슈 포고령 폐기와 보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큰 수데텐 독일인 단체는 Sudetendeutsche Landsmannschaft|수데텐 도이체 란츠만샤프트de(향당회)였으며, 1990년에는 회원 수가 14만 명에 달했다.[45] 이들 단체는 협의 기관으로서 Sudetendeutscher Rat|수데텐 도이체 রাটde을 결성했다. 란츠만샤프트는 바이에른주의 보수 세력과 결탁하여 서독 정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46]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 총리 발터 울브리히트1950년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하여 "양국 간에 미해결 문제는 없다"며 독일인 추방과 수데텐 지역 소속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47] 한편 서독은 동독과 국교를 맺은 국가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했기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와의 협상은 빌리 브란트 정권의 "동방 외교"가 시작된 이후인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1973년 12월 11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독일 연방 공화국 간의 상호 관계 조약"(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어 뮌헨 협정의 무효와 영토 요구가 상호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지만, 독일인 추방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48]

8. 체코와 독일의 화해 노력

벨벳 혁명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독일은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은 주데텐 독일인 추방에 대해 사과했으며, 1990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 정부와 주데텐 독일인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49] 독일 재통일 이후 양국은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지만, 주데텐 독일인 단체들은 보상과 직접 협상을 요구하며 이견을 보였다.[50][51]

1997년, 독일과 체코는 '독일-체코 화해 선언'을 통해 과거사 문제 해결에 한 걸음 다가섰다. 양국은 과거의 불법 행위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완화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 구축을 약속했다. 독일은 체코의 유럽 연합(EU)·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가입을 지지했고, 체코는 독일인 추방 과정에서의 과도한 조치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또한 '체코-독일 미래 기금'을 설립하여 나치 독일의 희생자들을 지원하기로 했다.[52][53][54]

그러나 주데텐 독일인 단체들은 여전히 베네슈 포고령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체코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2002년 체코 총리의 발언과 2009년 리스본 조약 가입 반대 운동은 이러한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55][56]

8. 1. 벨벳 혁명 이후의 관계 개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바츨라프 하벨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와 서독의 관계 개선이 시작되었다. 하벨 대통령은 집단적 죄의 관점에서 전후 주데텐 독일인들을 단죄한 것은 용납될 수 없다며 독일인 추방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다.[49] 1990년부터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텐 독일인 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이 아닌 독일 정부만을 상대로 한다고 발표했다. 이 배경에는 란츠만샤프트가 베네슈 선언의 폐지와 재산 반환, 그리고 고향에 대한 완전한 권리 회복을 요구해 온 것이 있었다고 한다.[50]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베네슈 선언 폐지에는 계속 반대했으며, 이후 기본 방침이 되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지면서 관계 정상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독일인이 공식적인 절차에 따른 "이송"이 있었다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인이 "추방"되었다고 주장하는 독일의 입장은 달랐지만, 2월 27일에 체결된 독일-체코 우호협력조약에서는 "추방"이 채택되었다. 여기에는 독일 측이 체코슬로바키아 측 표현의 허점을 이용하여 뮌헨 협정의 유효성을 의제로 제기하고, 협정 문제에서 양보하는 대신 보상 문제의 존재와 "추방"이라는 표현을 관철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51] 1993년 벨벳 이혼으로 성립된 체코도 우호협력조약을 계승했지만, 란츠만샤프트를 비롯한 주데텐 독일인 단체들은 보상과 체코 정부와의 직접 협상을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8. 2. 독일-체코 화해 선언 (1997)

독일과 체코는 1995년 양국 간 공동선언을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등의 반대로 협상은 중단되었다.[52] 1996년 8월부터 비밀리에 협상이 재개되어 '독일-체코 화해 선언'이 합의되었고, 1997년 1월 21일에 정식 조인되었다.

화해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일과 체코는 평화적 우호 관계를 구축하고, 과거의 불법 행위는 되돌릴 수 없지만 완화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데 동의했다.
  • 독일은 체코의 유럽 연합(EU)·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가입을 지지한다.
  • 독일인 추방의 근본 원인은 나치 정권의 행위에 있다고 명시했다.
  • 체코는 독일인 추방 과정에서 발생한 '과도한 조치'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 양국은 미래 지향적인 관계 구축에 합의하고, '체코-독일 미래 기금'을 설립하여 나치 독일의 희생자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독일은 , 체코는 4.4억체코 코루나를 출연했다.
  • 체코-독일 간 역사 공동 연구를 지지한다.


독일은 이 화해 선언을 통해 체코에 대한 체계적인 보상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란츠만샤프트 등 수데텐 독일인 단체는 공동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53] 조인에 참여한 체코 외무장관 요제프 제레니츠는 "선언은 마침표가 아니라 콜론이다"라고 말하며, 관계 개선은 앞으로의 과제임을 시사했다.[54]

8. 3. 현재의 쟁점

독일의 란츠만샤프트 등 수데텐 독일인 단체들은 인권 문제를 이유로 베네슈 포고령의 불법성을 주장하고 있다.[55] 체코는 베네슈 포고령의 정당성을 계속 주장하고 있으며, 2002년 밀로시 제만 총리가 “수데텐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제5열(스파이)이었다”고 발언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55] 2009년에는 베네슈 포고령이 불법이 될 가능성이 있는 리스본 조약 가입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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