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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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토만 사건은 1883년 설립된 섬유 상사 이토만이 스미토모 은행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지만, 부실 경영과 반사회 세력과의 유착으로 붕괴된 사건이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스미토모 은행의 지원을 받으며 다각화를 시도했으나, 석유, 부동산 투자 실패와 부정 융자, 그림 거래 등 각종 비리로 인해 1990년대 초반 몰락했다. 이 사건으로 스미토모 은행은 대규모 부실 채권을 처리하고, 결국 사쿠라 은행과 합병하여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으로 재탄생하는 등 일본 금융 산업의 재편에 영향을 미쳤다. 이토만 사건은 기업의 부실 경영, 금융기관의 유착, 반사회 세력과의 관계가 초래하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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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만 사건 | |
---|---|
사건 개요 | |
명칭 | 이토만 사건 |
발생 시기 | 1980년대 후반 ~ 1991년 |
관련 기업 | 이토만, 스미토모 은행 |
사건 유형 | 경제 범죄, 기업 금융 스캔들 |
주요 인물 | |
관련자 | 가와무라 요시오 이토만 경영진 스미토모 은행 경영진 |
배경 | |
시대적 배경 | 일본 버블 경제 시기 |
원인 | 기업의 무리한 투자 및 부동산 투기 금융 기관의 부실 감사 및 감독 소홀 |
경과 | |
사건 발단 | 이토만의 무리한 투자 및 부동산 투기 실패 |
자금 지원 | 스미토모 은행의 부실한 자금 지원 |
손실 발생 | 거액의 손실 발생 및 은폐 시도 |
사건 발각 | 내부 고발 및 언론 보도 |
결과 | |
법적 처벌 | 관련자들의 형사 처벌 |
기업 영향 | 이토만의 경영 위기 및 해체 스미토모 은행의 이미지 실추 및 경영 책임 문제 발생 |
경제적 영향 | 일본 버블 경제 붕괴의 한 요인으로 작용 |
영향 및 의의 | |
사회적 영향 | 기업 윤리 및 금융 감독 강화의 필요성 부각 |
교훈 | 무리한 투자와 부실 금융 감독의 위험성 경고 |
관련 정보 | |
관련 사건 | 다른 일본 버블 경제 시기의 경제 범죄 사건들과 연관 |
참고 자료 | 관련 서적, 다큐멘터리, 뉴스 기사 등 |
2. 배경
1883년(메이지 16년) 이토만은 섬유 상사로 시작하여 도쿄 증권 거래소와 오사카 증권 거래소 1부에 상장되었다. 1973년 오일 쇼크로 경영이 악화되자, 스미토모 은행(현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이소다 이치로 부행장의 주도로, 가와무라 요시히코가 이토만 사장으로 취임했다.[4][5] 가와무라는 섬유 부문을 축소하고 다각화를 추진, 1978년 수지를 흑자로 전환했으나,[6] 1980년대 중반 석유 업자 전 사건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
석유 업전은 잉여 석유나 가솔린을 매입, 전매하는 사업으로, 이토만은 1984년부터 참여했으나 거래 상대 기업 도산으로 외상 매출금을 회수하지 못했다.[6][7] 석유 원매 회사들로부터 총 1000억엔 소송을 당해 패소,[9][10] 업무 제휴 회사 도산까지 겹쳐 3000억엔 이상 손실을 보았다.[11]
이토만은 미나미아오야마 부동산 개발에도 참여했으나, 게이야 그룹과 분쟁으로 사업이 중단되고 부채만 늘었다.[13][14][15] 쓰보하치 탈취 사건, 통일교 관련 해피월드 거액 융자, 파친코 및 성풍속 산업 융자 등 논란이 되는 사업도 벌였다.[11][12]
이 과정에서 이토만은 1986년 헤이와 상호 은행 사건에서 스미토모 은행 뒷처리 담당 역할을 하며 "스미긴의 별동대", "스미긴의 가래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8][19]
2. 1. 이토만과 스미토모 은행의 관계
1883년 창업한 이토만은 섬유 상사로 시작하여 오사카 증권 거래소 1부에 상장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1973년 오일 쇼크 이후 경영난에 직면하면서 스미토모 은행 (현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4][5] 이 과정에서 스미토모 은행 출신 가와무라 요시히코가 이토만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양사 간의 관계가 밀접해졌다.[4][5][6]1986년 헤이와 상호 은행 사건에서는, 부정 융자 자금이 이토만의 자회사 이토만 파이낸스에서 융자되었고, 사건으로 입수한 동 은행의 주식은 이토만을 경유하여 스미토모 은행에 양도되어, 스미토모 은행이 헤이와 상호 은행을 인수하는데 기여하는 등, 이토만은 "스미긴의 별동대", "스미긴의 가래통"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스미토모 은행의 뒷처리 담당 기업이 되었다.[18][19]
2. 2. 경영 악화와 다각화 시도
1973년 오일 쇼크로 경영 환경이 악화되자, 스미토모 은행(현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의 주도로 가와무라 요시히코가 이토만 사장으로 취임했다.[4][5] 가와무라는 섬유 부문을 축소하고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으나,[6] 1980년대 중반에는 석유 거래와 부동산 투자 등에서 큰 손실을 보면서 경영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석유 업전은 잉여 석유나 가솔린을 매입하여 전매하는 사업으로, 이토만은 1984년부터 참여했으나, 거래 상대 기업의 도산으로 외상 매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큰 손실을 입었다.[6][7] 석유 원매 회사들로부터 총 1000억엔의 소송을 당해 패소하고,[9][10] 업무 제휴했던 회사들의 도산까지 겹쳐 3000억엔 이상의 손실을 기록했다.[11]
이토만은 미나미아오야마의 부동산 개발 사업에도 참여했으나, 게이야 그룹과의 분쟁으로 사업이 중단되고 부채만 늘어났다.[13][14][15]
2. 3. 이토 스에미쓰와 허영중의 등장
경영난에 빠진 가와무라 요시히코 이토만 사장은 이토 스에미쓰와 허영중 등과 손을 잡게 된다[25][27]. 이토 스에미쓰는 주식회사 교와 종합 개발 연구소 사장이자 경영 컨설턴트였으며, 허영중은 가쇼엔 관광의 채권자 중 한 명이었다[27]. 이들은 야마구치구미와 같은 반사회 세력과 연결된 인물들이었다[27].이토는 1990년 2월 1일 이토만에 기획 관리 본부장으로 입사했고, 같은 해 6월 28일 상무로 승진했다[27]. 가와무라가 이토와 허영중과 관계를 깊게 맺은 것은 가쇼엔 관광 주식의 제3자 증자 할당을 이토만이 인수하면서부터였다[25].
이토와 허영중은 이토만에 대해 지上げ(지가게: 부동산 투기) 경영이나, 건설 구체성이 보이지 않는 골프장 개발에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게 했다. 그 결과, 이토만 본체에서 360억 엔, 전체적으로는 3조엔 이상의 자금이 스미토모 은행에서 이토만을 통해 폭력단 관계자 등에게 흘러 들어갔다.
3. 부정 융자 및 거래의 실제
이토만은 이토 스에미쓰와 허영중 등에게 거액의 자금을 불법적으로 융자해주고, 이들과 함께 부동산 개발, 주식 거래, 미술품 거래 등에서 다양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토만에 의한 부정 융자 및 거래는 크게 주식 거래, 골프장 등의 대규모 토지 개발, 회화 거래로 나눌 수 있으며, 사건화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28]
- 허영중 관련 기업과의 회화 거래 - 이토·허에 대한 상법상 특별 배임죄 혐의
- 미즈호 골프장(기후현)에 대한 융자 - 가와무라 요시히코·이토에 대한 상법상 특별 배임죄 혐의
- 사쓰마 관광(가고시마현)에 대한 융자 - 가와무라·이토·허에 대한 상법상 특별 배임죄 혐의
- 자사주 취득 - 가와무라 등에 대한 상법상 자사주 취득 금지 위반 혐의
- 다테카와 주식 매입 사건과 관련된 10억엔 - 가와무라에 대한 업무상 횡령죄 혐의
- 하코네시의 묘지 개발 - 가와무라·이토·고바야카와 시게루에 대한 상법상 특별 배임죄 혐의
- 오사카부민 신용조합에서 가조엔 관광에 대한 무담보 융자 - 이토·미나미노 히로시에 대한 배임죄 혐의
- 주권 등의 위조 - 이토에 대한 유가 증권 위조죄·유인 사문서 위조죄·동 행사죄 혐의
이토만 사건에서는 약 3조원이 암흑가로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30][31] 그러나 사건의 전모는 재판에서 밝혀지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31]
3. 1. 부동산 개발 관련
이토 스에미쓰는 이토만에 '이토 프로젝트'라는 다양한 개발 기획을 제안했다.[32] 이 프로젝트에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지만, 대부분은 실제로 개발에 사용되지 않고 이토나 허영중의 관련 회사 빚을 갚거나, 아조엔 관광의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채무를 처리하는 데 사용되었다.[33]이토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34] 1990년 11월 말 기준으로 이토만에서 흘러나온 자금의 총액은 1929억원에 달한다.[35]
프로젝트명 | 자금 규모 |
---|---|
후쿠시마 공항 공원 컨트리 클럽 개발 | 10억원 |
노지리 호수 리조트 개발 (나가노현 시나노마치) | 106억원 |
아조엔 관광의 주식 취득 | 47억원 |
도쿄도 긴자 1초메의 지가 상승 | 664억원 |
소부 컨트리 클럽 (도쿄도 하치오지시) | 110억원 |
히가시이즈의 리조트 맨션 개발 | 48억원 |
결혼식장 임페리얼 윙 도야마 게빈칸 건설 | 7억원 |
임페리얼 윙 골프 클럽 (기후현 세키시) | 640억원 |
윙 란센 컨트리 클럽 (기후현 미즈나미시) | 234억원 |
고쿠라 미나미 컨트리 클럽 (후쿠오카현 가쓰야마정) | 70억원 |
사쓰마 컨트리 클럽 (가고시마현 마쓰모토정) | 200억원 |
이 중 사쓰마 컨트리 클럽에 대한 융자만 허영중의 관련 회사인 "사쓰마 관광"에 대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이토에 대한 융자였다.[28]
이토 프로젝트 중 가장 먼저 실행된 것은 골프장 개발 2건(소부 컨트리 클럽, 세키시의 임페리얼 윙)에 대한 융자였다. 이토와 가와무라 요시히코가 처음 만난 지 한 달 뒤인 1989년 9월에 총 164억원이 융자되었고, 이 중 35.5억원이 이토로부터 이토만에 기획료 명목으로 되돌아왔다.[39] 이는 이토만의 실적이 좋아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속임수였다.
소부 컨트리 클럽 융자 과정에서 이토 등은 골프장 주권을 위조하여 담보로 제공하고 이토만으로부터 110억원을 빌렸다.[40][41] 1989년 10월에는 신히로시마 컨트리 클럽(히로시마현)과 고쿠라 미나미 컨트리 클럽(후쿠오카현) 주식 취득을 위해 220억원을 융자받으면서, 일본 드림 관광이 이 주식들을 250억원에 매입할 것이라는 가짜 증명서를 제출하기도 했다.[42]
기후현 미즈나미시의 윙 란센 컨트리 클럽에는 충분한 담보도 없이, 개발 허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골프장 개발 명목으로 234억원이 융자되었다.[43] 가고시마현 사쓰마 컨트리 클럽 개발 건에서는 허영중의 관련 회사 "사쓰마 관광"에 200억원을 융자하여 이토만에 146억원의 손실을 입혔다.[43]
3. 2. 주식 거래 관련
1988년 6월, 아이치의 오너 모리시타 야스미치가 이토만 계열의 섬유 상사였던 다치카와의 주식 매입을 시작하여 최대 주주로 떠올랐고, 1989년 8월에는 과반수의 주식을 취득했다.[44] 1989년 10월, 가와무라는 증자를 통해 이토만의 지분율을 높여 과반수를 되찾았다.[44] 그러나 이면에서 이토를 중개하여 2년 후 이토만이 소유한 주식을 아이치에 양도하는 밀약을 맺고, 아이치와 이토로부터 각각 5억 엔씩 총 10억엔을 받았다.[44][36] 이 다치카와 주식 매입 사건으로 모리시타와 접점을 갖게 된 가와무라는 1989년 10월, 모리시타로부터 그림 거래가 돈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허영중과의 그림 거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44]3. 3. 그림 거래
허영중은 이토만에 그림을 팔아 큰돈을 벌었다. 이때 판매한 그림의 가격은 시세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이토만은 큰 손해를 보았다. 이 과정에서 이소다 스미토모 은행 회장의 딸도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1]3. 4. 언론 보도 경쟁
1990년 5월 24일자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신문) 조간에 이토만의 경영 위기가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58] 이 기사는 이토만에 1조 2천억 엔에 달하는 차입금이 있다고 보도했지만,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59] 기사 내용이 완화되어, 오히려 스미토모 은행의 지원으로 이토만의 경영 상태가 개선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59]그러나 이토만은 이 기사에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닛케이 내부 정보를 몰래 탐지하려 했다.[60] 이후 이토만 사건 공판에서 검찰 측은 이토만이 닛케이의 사내 협력자에게 1,000만 엔을 지불했다고 폭로하여 큰 문제가 되었다.[61] 이는 이토만의 경영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쓴 신초샤와 니혼게이자이신문사에 대한 언론 공작 명목으로 유출된 자금이었다(실제로 언론 공작이 행해졌는지는 재판에서 밝혀지지 않았다).
닛케이 신문의 보도 이후, 이토만은 언론 대책을 본격화했다. 1990년 6월에는 허영중 관련 기업인 간사이 신문 사장 이케지리 가즈히로가 기획 관리 본부 부본부장으로, 간사이 커뮤니티 사장 사토 마사미쓰와 허영중의 비서가 홍보 부원으로 입사했다.[62] 이는 이토 스에미쓰에 의한 언론 대책 조치였다.[62] 다쿠미구미 조장의 비서가 백주 대낮에 이토 스에미쓰의 방에 드나들면서, 이토만의 홍보부는 마치 야쿠자가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62]
세상이 이토만의 경영 위기를 의식하게 된 것은 1990년 9월 16일자 닛케이 신문 조간 보도 이후였다.[63] 8월 말부터 9월 초에 걸쳐 주간신초에서 이토만과 토지 브로커의 관계를 폭로하는 기사가 나오면서 경영 위기 문제가 조금씩 언론에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이토만도 언론 대책 기사를 쓰게 했던 시기였다.[64]
이후 언론들은 이토만의 경영 위기, 부정 융자 의혹, 폭력단과의 연관성 등을 잇따라 보도하며 경쟁을 벌였다. 1991년 설날, 아사히 신문은 "세이부 백화점→간사이 신문→이토만 전매로 25억 엔 급등", "회화 거래 12점의 실태 판명, 차액은 어디로 흘러갔나?"라는 큰 제목으로 회화 거래의 부정 의혹을 특종 보도했다.
3. 5. 검찰 수사와 체포
1991년 1월 25일, 이토만 이사회에서 가와무라 사장이 해임된 후, 오사카 지방 검찰청 특수부는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같은 해 2월부터 관련자들에 대한 사정 청취를 시작했고, 4월 24일에는 이토만의 고발을 바탕으로 오사카 지방 검찰청 특수부와 오사카부 경찰이 강제 수사에 돌입했다.[65][66] 이들은 간사이 신문사, 윙, 골프 클럽, 가쇼엔 관광, 후코쿠 산업 등 이토와 허영중의 관련 기업을 포함한 전국 57개소를 일제히 수색했다.[65][66]수사는 일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991년 6월 4일 오사카 지방 검찰청 특수부가 "KBS 비와코 교육 센터"와 허영중의 관련 기업인 "트러스트 서비스"를 가택 수색하며 재개되었다.[65][66] 이후 후지 인터내셔널 아트, 아이치 본사, 마루마스 산업, 교토 파이낸스 등에 대한 가택 수색(6월 5일)이 이어졌고, 이토만 관련 기업과 허영중의 거래 기업에 대한 수사도 계속되었다.[65][66]
1991년 7월 23일, 오사카 지방 검찰청 특수부는 상법 위반의 특별 배임 혐의로 가와무라 요시히코, 이토 스에미쓰, 허영중, 이토만 전 부사장 다카가키 사다타케, 간사이 커뮤니티 사장 사토 마사미츠 및 허영중의 비서를 체포했다.[65][66]
9월 9일에는 오사카부 경찰이 부동산 회사 아르카디아 코퍼레이션 사장 코바야카와 시게루를 상법상 특별 배임 혐의로 체포했다.[67] 9월 17일에는 오사카부민 신용조합의 과잉 융자 의혹과 관련하여 이토 스에미쓰를 상법상 특별 배임 혐의로 재체포하고, 같은 신용조합 이사장 미나미노 히로시를 같은 혐의로 체포하면서 이토만 사건 수사는 거의 마무리되었다.[67] 이 사건으로 총 18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7명이 기소되었다.[68]
3. 6. 재판과 판결
1991년 12월 19일, 가와무라 요시히코, 이토 스에미쓰, 허영중 세 명에 대한 공판이 오사카 지방 법원에서 시작되었다.[69] 세 피고인은 모두 기소 사실을 부인하고 무죄를 주장했다.[61]1999년 9월 9일, 오사카 지방 법원은 가와무라에게 징역 7년, 이토에게 징역 10년의 실형을 선고했다.[70] 허영중은 1997년 10월 6일 보석 중 대한민국으로 도주했다가 1999년 11월 일본 경시청에 체포되었고, 2001년 3월 29일 1심에서 징역 7년 6개월, 벌금 5억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71][70] 보석금 6억엔은 몰수되었다.[71]
가와무라와 이토는 2002년 4월 23일, 허영중은 같은 해 10월 31일에 오사카 고등 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고, 2005년 10월 7일 일본 최고 재판소의 상고 기각 결정으로 형이 확정되었다.[72]
3. 7. 이토만의 몰락과 스미토모 은행의 위기
1991년(헤이세이 3년) 1월 1일, 이토만은 CI를 도입하여 가타카나 표기인 "イトマン(이토만)"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1993년(헤이세이 5년) 스미토모 금속 공업(현: 일본제철)의 자회사인 스미킨물산(현: 닛테츠물산)에 흡수 합병되어, 총 110년의 역사를 마감했다.[31][79] 이토만은 자사 빌딩 매각 등으로 약 1조엔의 손실을 처리했지만, 나머지 약 5조엔의 부실 채권은 스미토모 은행이 부담했다.[80][31]이토만 사건 등 잇따른 부정 사건 발각으로 이소다 이치로는 스미토모 은행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1993년(헤이세이 5년) 봄부터 스미토모 그룹 간부 자택을 노린 습격 사건이 10건 이상 발생했고, 스미토모 은행 요코하마역 앞 지점에는 총탄 1발이 발사되었다. 1994년 (헤이세이 6년) 9월 14일에는 스미토모 은행 나고야 지점장 피살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토만에 이토 스에미쓰를 소개한 곳이 나고야 지점이었기 때문에 이토만 사건과 관련된 사건이 아닌가 하는 보도가 나왔다. 버블 붕괴로 인해 스미토모 은행은 부실 채권 처리에 쫓기게 되었고, 2001년 (헤이세이 13년)에는 사쿠라 은행을 합병하여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이 되었으며, 이토만 사건은 메가 뱅크 재편의 도화선이 되었다.
3. 8. 메가뱅크 재편의 도화선
198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스미토모 은행은 부실 채권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토만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부실 채권은 스미토모 은행에 큰 부담이 되었고, 결국 2001년(헤이세이 13년) 사쿠라 은행과의 합병을 통해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으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80][31] 이는 일본 금융 산업에서 메가 뱅크 재편을 촉발하는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 9. 관련 단체 및 인물의 몰락
허영중이 소유했던 간사이 신문은 1991년(헤이세이 3년) 4월에 부도 수표로 도산하여 폐간되었다[81]。허영중이 관여했던 긴키 방송(KBS 교토)은 1989년 관련 회사 임원이었던 허영중 등이 중심이 되어 논뱅크에서 토지 개발 회사에 1460억엔을 융자받았는데, 이때 긴키 방송 본사 사옥 및 방송 장비 등이 근저당에 설정되었다. 한때 채권자인 논뱅크가 압류하여 사옥 등의 경매를 신청, 방송국 존속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1994년(헤이세이 6년) 노동 조합원이 미지급 임금인 조합원의 노동 채권을 근거로 회사 갱생법을 신청하여 폐국 사태는 면했다. 이후 100% 감자 증자를 통해 이토만 사건 관계자를 포함한 구 경영진 및 주주를 배제하고, 교토 방송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재건의 길을 걸었으며, 2007년(헤이세이 19년) 10월 회사 갱생법 해제 신청이 수리되었다.4. 한국의 관점과 교훈
이토만 사건은 일본에서 발생한 대규모 경제 범죄 사건이지만, 한국인 허영중과 고바야카와 시게루(일본명) 등이 연루되어 한국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사건의 핵심 인물로, 이토만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고, 반사회 세력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을 통해 기업 투명성 강화와 정경유착 근절, 반사회 세력과의 유착 방지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더불어민주당은 유사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토만 사건은 스미토모 은행 (현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의 부실 경영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스미긴의 별동대", "스미긴의 가래통"이라고 조롱받으며, 은행의 뒷처리 담당 기업 역할을 해온[18][19] 과정에서 거액의 자금이 암흑 사회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은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11]
4. 1.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이 사건은 당시 한국 경제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 경제의 불안정성이 한국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4. 2. 교훈과 시사점
이토만 사건은 기업 경영의 투명성,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 그리고 정·재계 유착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기업이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손을 대는 행태, 지上げ와 같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업, 그리고 반사회 세력과의 연결 등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었다.[11]이 사건은 스미토모 은행 (현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의 부실 경영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토만은 "스미긴의 별동대", "스미긴의 가래통"이라고 조롱받으며, 은행의 뒷처리 담당 기업 역할을 해왔다.[18][19] 이러한 과정에서 거액의 자금이 암흑 사회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은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사건을 통해 기업 투명성 강화와 정경유착 근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사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반사회 세력과의 유착은 기업 윤리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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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併により伊藤萬の株式は[[上場廃止]]となったが、吸収した住金物産がその後[[大阪証券取引所]]に上場、2006年12月26日には[[東京証券取引所]]1部にも上場を果た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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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許永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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