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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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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해랑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연극계와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배우, 연출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경성부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 대학교에서 예술학을 전공했다. 극예술연구회, 극연좌, 고협, 현대극장에서 활동했으며, 극단 전선을 창립하고 극예술회 창립에 참여하며 우익 연극인들을 이끌었다. 국립극장 극장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이었다.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89년 만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연극 《햄릿》, 《황금연못》 등을 연출하고, 저서로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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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해랑
출생일1916년 7월 22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경성부
사망일1989년 4월 8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연극인
영화배우
정치인
대학 교수
활동 기간1938년~1989년
학력일본 니혼 대학교 예술학과 학사
부모이근용(부)
배우자김천혜
자녀3남 2녀
친척이재영(친조부)
이종응(증조부)
이필(고조부)
이곡현(현조부)

2. 생애

경성부 출신으로, 왕족의 후예이자 외과 의사인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공업고등학교와 니혼 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했다. 니혼 대학 재학 중 도쿄학생예술좌 활동을 통해 연극계에 입문하였다.

귀국 후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 고협, 현대극장 등에서 활동했으나, 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부친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유치진의 활동이 주춤한 사이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하고,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의 전신인 극예술회를 창립하며 우익 연극계를 이끄는 인물로 부상했다. 배우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1950년 국립극장 개관과 함께 전속 극단 신협의 창립과 대표를 맡으며 연출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1954), 국립극장 극장장(1957),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1967) 등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연극 및 문화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1970년대에는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8대, 제9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9년 4월 8일 만성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연출작으로는 〈천사여 고향을 보라〉, 〈햄릿〉, 〈들오리〉, 〈황금연못〉,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등 100여 편이 있으며, 저서로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1985), 《이해랑 연출교정》(1986), 《허상과 진실》(1991) 등을 남겼다.

2. 1. 가계 배경과 초기 생애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이종응(李宗應)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의 양손자 풍계군에게 입양되었다가 파양된 이세보(경평군 이호)의 친가 사촌 동생이었다. 따라서 조선 철종과는 같은 항렬의 왕족 관계였다. 할아버지 이재영(李載榮)은 왕실 의전실장을 지냈고, 아버지 이근용(李瑾鎔)은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외과 의사였다. 덕분에 비교적 넉넉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가와 현립 가나가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중화민국 상하이의 후장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다시 일본으로 가 니혼 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했다. 니혼 대학교 재학 시절 도쿄학생예술좌에 가입하여 학생 연극으로 연극계에 발을 들였다.

귀국 후에는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와 고협, 현대극장 등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좋은 학벌을 가진 아들이 연극배우가 되는 것을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하여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며 어려움을 겪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2. 2. 학창 시절과 연극 입문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이종응(李宗應)은 풍계군 이당의 양자로 갔다가 파양된 이세보(경평군 이호)의 친가 사촌 동생으로, 철종 임금과 먼 친척 관계였다. 할아버지 이재영(李載榮)은 왕실 의전실장을 지냈고, 아버지 이근용(李瑾鎔)은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외과 의사여서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가나가와 현립 가나가와 공업고등학교를 나왔다. 이후 중화민국 상하이 후장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하고, 일본 니혼 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했다. 니혼 대학교 재학 시절 도쿄학생예술좌에 가입하여 학생 연극으로 연극계에 발을 들였다.

귀국 후에는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와 고협, 현대극장 등에서 활동했다. 당시 좋은 학벌을 가진 아들이 연극배우가 되는 것을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하여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고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광복 후, 현대극장 대표였던 유치진이 친일 행적 의혹으로 활동이 주춤한 사이, 1945년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했다. 1946년에는 김동원(金東園)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의 전신인 극예술회를 창립하는 데 참여하며 우익 성향 연극인들을 이끄는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배우로서는 목소리가 무대 연기에 적합하지 않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1950년 국립극장이 개관하자 극예술협회를 기반으로 창단된 국립극장 전속 극단 신협의 창립 멤버이자 대표를 맡으며 연출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2. 3. 귀국 후 연극 활동과 시련

니혼 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와 고협, 현대극장 등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좋은 학벌을 갖춘 아들이 연극배우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던 아버지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현대극장 대표였던 유치진이 친일 의혹으로 활동이 주춤한 사이, 1945년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했다. 1946년에는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의 전신인 극예술회를 창립하는 데 참여하며 우익 연극계를 이끄는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배우로서는 목소리가 무대 연기에 적합하지 않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1950년 국립극장이 문을 열면서 그의 활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극예술협회를 바탕으로 창단된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의 창립 멤버이자 대표를 맡게 되었고, 이때부터 연출을 겸하면서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2. 4. 해방 후 활동과 우익 연극계 지도

광복 후, 현대극장 대표였던 유치진이 친일 의혹으로 활동이 주춤한 사이, 이해랑은 1945년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의 전신인 극예술회 창립에 참여하며 우익 연극계를 이끄는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배우로서는 무대 연기에 적합하지 않은 목소리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연출과 행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0년 국립극장이 문을 열자, 그는 극예술협회를 바탕으로 창단된 국립극장 전속 극단 신협의 창립 멤버이자 대표를 맡았다. 이때부터 연출을 겸업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정되었고, 1957년에는 국립극장 극장장, 1967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연극계와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2. 5. 국립극장과 신협 활동

광복 후, 현대극장 대표였던 유치진이 친일 의혹으로 활동이 주춤한 사이, 이해랑은 1945년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했다. 1946년에는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의 전신인 극예술회를 창립하는 데 참여하며 우익 연극계를 이끄는 인물로 떠올랐다. 배우로서는 목소리가 무대 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1950년 국립극장이 문을 열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그는 극예술협회를 모태로 창단된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의 창립인이자 대표를 맡았고, 이때부터 연출을 겸하며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이해랑은 대한민국 연극계와 문화계를 대표하는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고, 1957년에는 국립극장 극장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1967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맡으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2. 6. 문화계 주요 경력

니혼 대학 예술학과 재학 중 도쿄학생예술좌에 가입하여 학생 연극으로 연극계에 데뷔하였다. 귀국한 뒤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와 고협, 현대극장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연극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하던 부친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하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광복 후, 현대극장 대표였던 유치진이 친일 의혹으로 활동이 뜸해진 사이, 1945년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하였다. 1946년에는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의 전신인 극예술회 창립에 참가하며 우익 연극인들을 이끄는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배우로서는 목소리가 무대 연기에 적합하지 않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으나, 1950년 국립극장 개관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모태로 창단된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의 창립 멤버이자 대표를 맡으면서 연출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대한민국 연극계와 문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다음과 같은 경력을 쌓았다.

연도주요 경력비고
1945극단 전선(全線) 창립
1946극예술협회 전신 극예술회 창립 참가김동원 등과 함께
1950신협 창립 및 대표국립중앙극장 전속 극단
1954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57국립극장 극장장
1967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1984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연출작으로는 〈천사여 고향을 보라〉, 〈햄릿〉, 〈들오리〉, 〈황금연못〉,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등 외국 희곡을 포함하여 100여 편의 작품이 있다.

저서로는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1985), 《이해랑 연출교정》(1986), 《허상과 진실》(1991) 등이 있다.

2. 7. 정치 활동

1970년대에는 국회로 진출하여 정치 활동을 하였다. 제8대 국회에서는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이어 제9대 국회에서는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2. 8. 사망

198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 되었다. 1989년 4월 8일 만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3. 주요 작품

이해랑은 배우연출가로서 연극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 그의 대표적인 출연작과 연출작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출연작

이해랑은 연극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배우로 활동하였다. 주요 출연 작품은 다음과 같다.

3. 1. 1. 연극


  • 1942년 《추월색》

3. 1. 2. 영화

3. 2. 연출

(내용 없음)

3. 2. 1. 연극

3. 2. 2. 영화

4. 저서


  •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1985)
  • 《이해랑 연출교정》(1986)
  • 《허상과 진실》(1991) - 유작

5. 학력

(1958년 5월 31일 서울 휘문중·고등학교 명예 졸업장 각각 수여)일본 가나가와 현립 가나가와 공업중학교졸업중화민국 상하이 후장 대학교 법학과중퇴일본 니혼 대학 예술학과학사


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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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李載榮|이재영한국어
아버지李瑾鎔|이근용한국어
본인이해랑
부인김천혜
자녀3남 2녀장남 이방주, 차남 이민주


7. 인간 관계

8.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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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선거 종류대수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71총선8대국회의원전국구민주공화당6,254,921표 (48.8%) (정당 득표)14번당선초선
1973총선9대국회의원통일주체국민회의유신정우회없음지명당선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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