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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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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희동은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서양화와 동양화를 넘나들며 활동한 예술가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한성법어학교에서 불어를 배우고 궁내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귀국 후 서화협회를 결성하여 민족 미술 운동을 펼쳤으며, 해방 후에는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참의원을 지냈다. 그의 작품으로는 〈정자관을 쓴 자화상〉, 〈금강산 진주담 폭포〉 등이 있으며, 종로구 원서동에 고희동 가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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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
기본 정보
1915년 고희동의 자화상
한글 이름고희동
한자 이름高羲東
로마자 표기Go Huidong
별칭춘곡
본관제주고씨
출생일1886년 3월 11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965년 10월 22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
활동 기간1903년 ~ 1965년
학력
학력값찾기
직업 및 경력
직업화가
경력민주당 고문 겸 당무위원
작품 활동
분야동양화, 서양화
사조값찾기
대표작값찾기
수상 및 영향 관계
수상값찾기
영향줌값찾기
영향받음값찾기
가족 관계
배우자값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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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고흥찬 (아들)
부모고영철 (부)
친척고진풍(친조부), 고중록(친손자)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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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고희동은 한성부에서 태어나 1899년부터 1903년까지 관립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11] 1904년 궁내부 주사, 예식관(禮式官)을 역임하며 궁내 프랑스어 통역번역을 담당했으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충격을 받고 안중식, 조석진에게서 동양화를 배웠다.[11]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 전공 화가가 되었다. 1915년 졸업 후 귀국하여 중앙고보, 휘문고등학교, 보성학교, 중동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11]

1918년 한국인 최초의 서화가 단체인 서화협회를 결성하고,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총무·회장직을 역임했다.[11]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조선 최초의 근대 미술전인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했고, 한국 최초의 미술 잡지인 『서화협회보』도 발행했다.[5][6]

해방 후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국전 심사위원장(1949년~1955년), 1953년 대한미술협회 회장,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 및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서울시 문화상, 1956년 제2회 예술원상(미술공로상)을 수상했다.[11]

한국전쟁 발발 후 승려로 변장하여 서울 시내 사찰에서 지내다 1951년 초 제3차 서울 전투 때 부산으로 피난했다.[3] 1959년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장을 거쳐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활동했다.[11][4][5][6]

일시적으로 서양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다시 수묵 산수로 돌아와 남종화의 선염법(渲染法)을 쓰지 않고 서양화의 기법을 가미하여 북종화에서 쓰던 부벽준에 가까운 음영법을 쓴 것이 특징이다. 작품으로 〈미전배석(迷顚拜石)〉 등이 있다.[11]

2. 1. 초기 생애 (1886년 ~ 1908년)

고희동은 188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제주이다. 아버지는 구한말 군수를 지낸 고영철(高永喆)이며, 보문국의 주사이자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7] 고희동은 1899년부터 1903년까지 관립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11]

1904년에는 궁내부 주사, 예식관(禮式官)을 역임하며 궁내 프랑스어 통역번역을 담당했다.[11]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떠났다.[11][5][6] 이후 안중식조석진의 문하에서 동양화를 배웠다.[11]

2. 2. 일본 유학 (1908년 ~ 1915년)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했다.[11] 당시 친구들은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그림이냐며 조소하였고, 일본인들은 유화를 본 적도 없는 한국인이 서양화를 배우러 왔다고 하니 이상하게 보았다.[5] 1914년 한국에서 발간된 잡지 《청춘》의 표지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화로 기록된다.[5][6] 5년간의 수학 끝에 1915년 졸업하였다.[5]

2. 3. 귀국 및 서화협회 활동 (1915년 ~ 1945년)

1915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보, 휘문고등학교, 보성학교, 중동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11] 미술 교사 시절 제자로는 소설가 이상, 화가 도상봉, 수집가 전형필(간송미술관 창립자) 등이 있었다.[5][6]

1918년 한국인 최초의 서화가 단체인 서화협회를 결성하고,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총무·회장직을 역임했다.[11] 서화협회의 주요 활동은 회원들의 작품전 개최였고,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조선 최초의 근대 미술전인 제1회 서화협회전이 열렸다. 또한 한국 최초의 미술 잡지인 『서화협회보』도 이 협회에서 발행했다.[5][6]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고희동은 "정원에서"를 서양화 부문에, "여름 시골"을 동양화 부문에 출품했다. 하지만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는 출품을 중단하고, 이후 서화협회 활동에만 전념했다. 서화협회전도 1936년 제15회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지만, 1939년 강제 해산될 때까지 서화협회 총무·회장으로 민족 진영 미술가들의 단결에 힘썼다.[5][6]

2. 4. 해방 이후 (1945년 ~ 1965년)

해방 후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조직, 4년간 회장으로 활동했고 국전 제1회(1949년)부터 제7회까지 계속 심사위원장을 맡았다.[11] 1949년 미국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1950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53년 대한미술협회 회장,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 및 회장을 역임했다.[11] 1956년 제2회 예술원상(미술공로상)을 수상했다.[11]

한국전쟁 발발 후 한동안 승려로 변장하여 서울 시내 사찰에서 지낸 후, 1951년 초 제3차 서울 전투 때 후퇴하면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다.[3] 1959년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장을 거쳐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활동했다.[11][4][5][6]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민주당 고문,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 위원회 발기인,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장, 공명선거 추진 전국위원회 고문을 역임했다.[4][5][6]

1962년 부인을 잃은 후, 장면대부로 삼아 가톨릭에 귀의했다. 1965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같은 해 10월 22일에 사망했다.[3][6]

3. 평가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평가받지만, 서화협회(書畫協會)를 조직하고 수묵 산수화로 돌아가는 등 민족 미술 운동의 선구자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해방 후에는 문화 단체와 예술원, 국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회 참여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

3. 1.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1899년부터 1903년까지 관립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궁내부 주사, 예식관(禮式官)을 역임하며 궁내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11] 이때 서양 화가들이 궁을 드나들면서 남긴 그림을 보고 서양화를 접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서양화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다.[11]

당시 주변에서는 나라가 망했는데 그림을 그리냐며 조소하였고, 일본인들은 유화를 본 적도 없는 한국인이 서양화를 배우러 온 것에 대해 이상하게 보았다. 이러한 조소와 편견 속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1914년 한국에서 발간된 잡지 《청춘》의 표지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화로 알려져 있다.

1915년 졸업 후 귀국하여 중앙고보, 휘문, 보성, 중동학교(中東學校) 등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며 서양화를 가르쳤다.[11]

3. 2. 민족 미술 운동의 선구자

고희동은 1918년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이자 근대적인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를 결성하고,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총무·회장직을 역임했다.[11] 그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다시 수묵 산수로 돌아왔다. 그의 화풍은 남종화의 선염법(渲染法)을 쓰지 않고 서양화의 기법을 가미하여 북종화에서 쓰던 부벽준에 가까운 음영법을 쓴 것이 특징이다.[11]

3. 3. 사회 참여적 지식인

해방 후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조직, 4년간 회장을 역임했고 국전 제1회(1949년)에서 제7회까지 계속 심사위원장을 맡았다.[11] 1949년 미국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50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53년에 대한미술협회 회장, 1954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 및 회장이 되었다. 1956년 제2회 예술원상(미술 공로상)을 수상하였고, 1959년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장을 거쳐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참의원(參議院)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기도 했다.[11]

4. 작품

고희동은 서양화와 동양화를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초기에는 서양화 기법을 탐구하는 데 집중했으나, 점차 한국화의 전통을 바탕으로 서양화 기법을 접목한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그는 일시 서양화로 전향하여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다시 수묵 산수로 돌아왔다. 그의 화풍은 남종화의 선염법(渲染法)을 쓰지 않고 서양화 기법을 가미하여 북종화에서 쓰던 부벽준에 가까운 음영법을 쓴 것이 특징이다.[11]

대표작으로는 〈정자(程子)관을 쓴 자화상〉, 〈부채를 든 자화상〉, 〈금강산 진주담 폭포〉, 〈탐승〉,[5] 〈미전배석(迷顚拜石)〉 등이 있다.[11]

5. 가계

고희동의 본관은 제주이며,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한말 군수를 지낸 고영철(高永喆)이다.[11] 큰아버지 고영희는 조선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정치가였다.[3][8]

가계는 다음과 같다.[11]

관계이름
조부낙여(樂汝) 고진풍(髙鎭豊)
윤명(允明) 고영철(髙永喆)
본인춘곡(春谷) 고희동(髙羲東)
고흥찬(髙興讚)
친손자고중청(髙重靑), 고중벽(髙重碧), 고중록(髙重綠)
친증손녀고아라(髙娥羅) (고중록(髙重綠)의 딸)


6. 고희동 가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는 고희동이 1918년 분가할 때 직접 설계한 목조 기와집이 남아 있다. 이 가옥은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9]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으며,[10] 2012년에 같은 건물에 고희동미술관이 개관하였다.[6]

참조

[1] 웹사이트 The Go Hui-dong House http://asiaenglish.v[...] 2016-07-17
[2] 웹사이트 THE GO HUI-DONG HOUSE – SEOUL Magazine http://magazine.seou[...]
[3] 웹사이트 “일제에 협조하느니 굶으리라 외쳤던 분” http://www.sisajourn[...] 2011-11-05
[4]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9-03
[5] 웹사이트 고희동(高羲東) http://encykorea.aks[...] 2022-09-03
[6] 웹사이트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 https://ncms.ncultur[...] 2022-09-03
[7] 웹사이트 고영철(高永喆) https://encykorea.ak[...] 2023-08-15
[8] 웹사이트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22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https://www.chosun.c[...] 2010-07-28
[9] 웹사이트 ウォンソドン(苑西洞)通り散策 https://japanese.vis[...] 2019-07-29
[10] 웹사이트 국가등록문화재 서울 원서동 고희동 가옥 (서울 苑西洞 高羲東 家屋)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 2022-09-03
[11] 간행물 고희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
[12]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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