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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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반친위대는 1925년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창설된 나치 친위대의 하위 부대이다. 초기에는 히틀러의 개인 경호대였으나,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 하에 급격히 성장하며 나치 정권의 핵심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일반친위대는 지역 단위의 징집 부대와 보안 부대(게슈타포, SD 등), 강제 수용소 직원, 게르만 친위대, SS-여성군단 등으로 구성되었다. 일반친위대는 무장친위대와 구별되며, 유대인 학살 등 잔혹 행위에 관여한 기관을 포함하고 있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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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친위대 - [정부기관]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설립일 | 1934년 9월 |
| 해산일 | 1945년 5월 8일 |
| 관할 지역 | 독일 및 점령된 유럽 |
| 본부 | SS-Hauptamt, Prinz-Albrecht-Straße, 베를린 |
| 직원 수 | 1940년경 100,000명 |
| 상급 기관 | 친위대 |
| 후신 | 국가보안본부 친위대 경제 및 행정 부서 (WHVA) 친위대 법정 사무실 친위대 인종 및 정착 사무실 친위대 인사본부 친위대 교육 사무실 민족 독일인을 위한 주요 복지 사무실 (RKFDV) |
| 지도부 | |
| 지도자 | 하인리히 힘러 (1934–1945) |
| 지도자 직책 | 친위대 국가지도자 |
| 조직 | |
| 전신 | 돌격대 |
2. 역사
1925년 아돌프 히틀러는 율리우스 슈렉에게 새로운 경호대 부대인 ''Schutzkommando''("보호 사령부")의 창설을 지시했다. 히틀러는 슈렉과 같이 자신에게 충성할 강인한 전직 군인들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을 원했다. 이 부대에는 에밀 모리스와 에르하르트 하이덴과 같은 옛 ''돌격대'' 대원들이 포함되었다. 이 부대는 1925년 4월 4일에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해 ''Schutzkommando''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연이어 ''Sturmstaffel''("돌격대")로 개명되었고, 마침내 1925년 11월 9일 ''Schutzstaffel''("보호대"; SS)로 개명되었다. SS는 SA에 예속되었고, 따라서 SA와 NSDAP의 하위 부대였다. 이는 당원들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엘리트 조직으로 여겨졌다.
SS의 주요 임무는 나치당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경호였다. 1925년 SS는 단지 200명의 활동적인 대원만 있었고, 1926년에도 같은 숫자로 한 해를 마쳤다. SS는 SA의 통제 하에서 계속 어려움을 겪으면서, 1928년에는 280명의 대원이 있었다. 하인리히 힘러가 1929년 1월 SS를 인수하고, SA로부터 SS를 분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12월까지 SS 대원의 수는 1,000명으로 증가했다. 힘러는 대원에 대한 더 엄격한 요구 사항뿐만 아니라, 술꾼, 범죄자 또는 SS에서 복무하기에 부적절한 것으로 확인된 SS 대원들에 대한 일반적인 숙청을 통해 SS를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확장하기 시작했다. 힘러의 궁극적인 목표는 SS를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이자 당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분파로 만드는 것이었다. 1930년까지 힘러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SS를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하도록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SA에 예속되어 있었다.
2. 1. 초기 역사 (1925-1933)
1925년 아돌프 히틀러는 율리우스 슈렉에게 새로운 경호대 부대인 ''Schutzkommando''("보호 사령부")의 창설을 지시했다. 히틀러는 슈렉과 같이 자신에게 충성할 강인한 전직 군인들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을 원했다. 이 부대에는 에밀 모리스와 에르하르트 하이덴과 같은 옛 ''돌격대'' 대원들이 포함되었다. 이 부대는 1925년 4월 4일에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해 ''Schutzkommando''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연이어 ''Sturmstaffel''("돌격대")로 개명되었고, 마침내 1925년 11월 9일 ''Schutzstaffel''("보호대"; SS)로 개명되었다. SS는 SA에 예속되었고, 따라서 SA와 NSDAP의 하위 부대였다. 이는 당원들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엘리트 조직으로 여겨졌다.SS의 주요 임무는 나치당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경호였다. 초기에는 소규모였으나, 1928년에는 280명의 대원이 있었다. 하인리히 힘러가 1929년 1월 SS를 인수하고, SA로부터 SS를 분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힘러는 대원에 대한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부적격자를 숙청하여 SS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SS를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이자 당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분파로 만드는 것이었다. 1930년까지 힘러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SS를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하도록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SA에 예속되어 있었다.
2. 2. 발전과 확장 (1933-1939)
1933년 1월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 친위대(SS)는 급격히 팽창했다. 1932년 말 52,000명 이상이었던 회원 수는 1933년 12월까지 204,000명으로 증가했고, 하인리히 힘러는 일시적인 신규 회원 모집 중단을 명령했다.1934년 4월 20일, 헤르만 괴링과 힘러는 돌격대(SA)에 대한 상호 적대감 때문에 합의하여, 괴링은 게슈타포의 통제권을 힘러에게 넘겼다. 힘러는 또한 프로이센 외 모든 독일 경찰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틀 후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게슈타포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친위대는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장검의 밤 사건에서 게슈타포와 함께 SA 지도부를 숙청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주요 SA 지도자들을 제거했다.
1936년 6월, 힘러는 독일 경찰 총수로 임명되었고, 게슈타포는 형사경찰(크리포)과 통합되어 보안경찰(지포)의 하위 부서가 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보안경찰의 수장이 되었고, SD의 수장으로 계속 활동했다.
1934년, 힘러는 히틀러로부터 'SS 특무 부대'(SS-VT) 창설 허가를 받았다. SS-VT는 전쟁 시 국방군의 지휘를 받지만 평시에는 힘러와 히틀러의 통제를 받는 준군사 조직이었다. 1936년 3월 29일부터 SS 경비대는 SS 해골 부대(SS-TV)로 알려지게 되었다.
힘러는 인종적, 이념적 기준에 따라 친위대를 추가로 숙청하여, 1935년 12월까지 약 60,000명의 친위대원을 제거했다. 1939년까지 친위대는 다시 증가하여 약 240,000명의 회원으로 정점을 찍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무렵, 친위대는 일반친위대, SS 해골 부대, 무장친위대(1940년 7월까지 SS-VT로 알려짐)로 구성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일반 친위대원이 다수였으나, 전쟁 후반에는 무장친위대가 비독일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그 수가 증가했다. 1934년 8월,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로부터 'SS 존더코만도'와 '정치적 비레히샤펜'을 기반으로 새로운 조직인 'SS-무장부대'(SS-VT)를 창설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SS-VT는 전쟁 시에는 "국방군"의 지휘를 받지만 평시에는 힘러의 통제를 받고, 히틀러의 개인적 통제를 받는 준군사 조직이었다.1936년 6월, 힘러는 모든 독일 경찰의 수장으로 임명되었고, 게슈타포는 크리포 (형사 경찰)와 통합되어 지포의 하위 부서가 되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지포의 수장이 되었고, SD의 수장으로 계속 활동했다. 힘러가 독일 경찰 총수가 되면서, 친위대는 질서경찰(Ordnungspolizei)도 통제하게 되었다.
3. 조직 구조
일반친위대는 행정적으로 여러 주요 부서로 나뉘었다.
- 정규직 장교 및 주요 친위대 부서의 구성원
- 친위대 지역 부대의 비상근 자원 봉사자
- 보안경찰(게슈타포 및 형사경찰 Kripo) 및 보안정보국(SD)과 같은 친위대 보안 부대
- 해골 부대의 강제 수용소 직원
- 예비역, 명예직 또는 기타 비활성 친위대 구성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일반친위대와 무장친위대의 경계는 모호해졌는데, 이는 일반친위대 본부 사무실이 무장친위대의 행정 및 보급 지휘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1940년까지 모든 일반친위대는 회색 전시용 군복을 지급받았다. 하인리히 힘러는 모든 검은색 군복을 반납하도록 명령했고, 이 군복들은 동부의 보조 경찰 부대나 서부의 게르만 친위대에서 사용되었다.
일반 친위대의 약 3분의 1은 "상근"으로, 정부 공무원으로서 급여를 받으며 친위대 사무실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했다. 이들은 대부분 주요 친위대 사무실에 배치되었으며, 1942년까지 주요 사무실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 ''국가 지도자 친위대 개인 참모부''(Hauptamt Persönlicher Stab Reichsführer-SS; 하페어슈타프; HaPerStab)
- ''친위대 본부''(SS-Hauptamt; SS-HA)
- ''친위대 지도 본부''(SS-Führungshauptamt; SS-FHA)
- ''국가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
- ''친위대 경제 행정 본부''(SS-Wirtschafts- und Verwaltungshauptamt; SS-WVHA)
- ''질서경찰 본부''(Ordnungspolizei Hauptamt)
- ''친위대 법원 본부''(SS Court Main Office; HA SS-Gericht)
- ''친위대 인종 및 정착 본부''(SS Race and Settlement Main Office; 루샤; RuSHA)
- ''친위대 인사 본부''(SS Personal Main Office; SS PHA)
- ''독일계 민족 지원 센터''(Volksdeutsche Mittelstelle; 포미; VoMi)
- ''친위대 훈련부''(SS Education Office)
-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판무관''(Reich Commissioner for the Consolidation of German Nationhood; RKF 또는 RKFDV)
주요 사무실 지휘관과 직원은 군 징집에서 면제되었으나, 하이드리히처럼 많은 이들이 정규 독일군 예비군으로 복무했다. 일부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여 낮은 계급으로 전투에 참여하거나 비활성 예비군으로 등록되었다. 1944년, 독일의 패배가 임박하면서 징집 면제가 해제되고 많은 하위 구성원들이 전투에 투입, 상위 구성원들은 무장친위대 장군으로 임무를 맡았다.
1934년 친위대 내 전투 부대인 친위대 특무 부대(SS-VT, 후의 무장 친위대) 창설과 함께 비전투원 친위대원은 '''일반 친위대'''(알게마이네 SS)로 불리게 되었다. 무장 친위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급증했지만, 일반 친위대의 인원수는 항상 20만 명 이상이었다. 1939년 12월에는 일반 친위대 20만 1910명, 친위대 특무 부대 5만 6546명이었지만, 1945년 3월에는 일반 친위대 20만 48명, 무장 친위대 82만 9400명이었다.
무장 친위대 대원은 급여 지급 장부(Soldbuch)를 소지하고 전원에게 봉급이 지급되었지만, 일반 친위대는 급여 지급 장부(Soldbuch)가 없고, 봉급은 친위대 중장 이상의 계급이나, 상근 대원에게만 지급되었다. 일반 친위대의 비상근 대원은 각자 직업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나치당의 집회나 당 대회 때만 친위대 제복을 입고 참석했다. 일반 친위대 대원은 직업을 가지고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자발적으로 당 활동에 참여할 것을 기대받았다. 친위대는 원래 공무원이 아니라 나치당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 친위대원의 많은 수가 나치당 정권 하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그쪽 입장에서 봉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친위대의 검은색 제복은 원래 친위대 조직 전체의 제복이었지만, 전투 조직인 친위대 특무 부대와 강제 수용소 근무의 친위대 해골 부대는 국방군형 제복을 도입했기 때문에, 검은색 제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 친위대만이 검은색 제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1938년에는 일반 친위대 상근 대원의 일상 업무 제복으로 페일 그레이 제복이 도입되었다. 상근 대원은 검은색 제복 대신 이것을 착용하게 되었지만, 비상근 대원에게는 회색 제복이 지급되지 않아, 그들은 검은색 제복을 계속 사용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엘리트의 상징이었던 일반 친위대의 검은색 제복도 전쟁 후기에는 병역 기피의 겁쟁이의 상징으로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격하되었다고 한다.
계급은 일반 친위대, 무장 친위대 모두 돌격대(SA)의 계급을 기초로 하여 기본적으로 같았지만, 일부 명칭이 달랐다. 예를 들어 친위대 이등병의 계급은 무장 친위대에서는 "SS-Schütze", 일반 친위대는 "SS-Mann"이었다. 친위대 일등병도 무장 친위대는 "SS-Oberschütze", 일반(알게마이네) SS는 "SS-Obermann"이었다. 무장 친위대만의 계급으로 친위대 준위(SS-Sturmscharführer)가 있었다. 친위대 소장 이상은 무장 친위대에서는 국방군과 동일한 계급을 사용했다. 다만 무장 친위대원에게는 일반 친위대원의 계급도 함께 수여되는 것이 통례였다. 친위대 계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친위대 계급'''을 참조할 수 있다.
일반 친위대가 무장 친위대에 비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국가 보안 본부(게슈타포, 친위대 보안부, 형사 경찰 등)나 친위대 경제 관리 본부와 같이 유대인학살을 비롯한 잔학 행위 집행 기관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친위대에도 잔학 행위에 관여하지 않은 조직이나 사람이 있고, 무장 친위대 중에도 잔학 행위에 관여한 조직이나 사람이 있으므로, "일반 친위대 = 범죄자, 무장 친위대 = 용사"와 같은 단순한 단정은 할 수 없다. 양자는 같은 친위대 조직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 구분은 모호한 점도 많았다.

일반 친위대의 비상근 대원은 친위대 보병 연대(SS-Fuß-Standarte)의 대대, 중대, 소대에 소속되어 보병 연대 단위로 행동했다. 최초의 친위대 보병 연대는 1925년 11월 9일 요제프 디트리히 지휘하에 뮌헨에 발족한 친위대 제1연대(1. SS-Standarte)이다.
친위대 보병 연대는 처음에 나치당 대관구마다 배치된 "대관구 친위대 지도부"(Gau-SS-Leitung)에 소속되었지만, 1931년 돌격대를 모델로 "친위대 상급 지도자 관구"(SS-Oberführerbereich)가 설치되면서 이 소속이 되었다. 1932년에는 "친위대 집단"(SS-Gruppe)이 창설되었고, 1933년 11월 친위대 집단이 "친위대 상급 지구"(SS-Oberabschnitt)로, 친위대 여단(SS-Brigade)이 친위대 지구(SS-Abschnitt)로 개편되었다. 친위대 보병 연대는 그 아래에 소속되었다.
1933년 11월 이후 일반 친위대 편성:
친위대 상급 지구(SS-Oberabschnitt), 친위대 지구(SS-Abschnitt), 친위대 보병 연대(SS-Fuß-Standarte), 친위대 대대(SS-Sturmbanne), 친위대 중대(SS-Stürme), 친위대 소대(Trupps), 친위대 분대(Scharen), 친위대 조(Rotten). 1934년 10월 소대는 분대와 통합, Scharen이 소대, Rotten이 분대가 되었다.
전문 직무 부대: 친위대 기병 연대, 친위대 통신 대대, 친위대 공병 대대, 친위대 위생 중대, 친위대 수송 중대, 친위대 렌트겐 대대, 친위대 장정대.
연대 소속 일반 친위대 대원은 연대 번호가 적힌 칼라 탭을 착용했다. 커프 타이틀 테두리 색상으로 소속 대대(제1대대 녹색, 제2대대 짙은 파란색, 제3대대 빨간색, 예비 대대 밝은 파란색), 번호로 소속 중대를 표시했다.
1936년, 게슈타포와 형사경찰(크리포)이 통합되어 지퍼샤이츠폴리차이(SiPo)가 되었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휘를 받았다. 1939년 9월 27일부터 지허하이트디엔스트(SD), 게슈타포, 크리포는 하이드리히가 통제하는 국가보안본부(RSHA)에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지퍼샤이츠폴리차이(SiPo)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제복 경찰인 오르둥스폴리차이(Orpo)는 1936년 이후 SS의 통제를 받았지만, 많은 경찰 구성원이 이중 SS 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친위대에 편입된 적은 없었다.
학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은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결성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SS에 의해 운영되었다. 1939년 9월, 이들은 독일 국방군이 폴란드 침공 이후 점령한 영토에서 활동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병력은 SS, SD, 경찰에서 차출되었다. 1939년 9월 말, RSHA는 아인자츠그루펜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인수했다. 1941년 소련 침공 전에 살인 부대가 재편성되었을 때, 아인자츠그루펜의 병력은 SD, 게슈타포, 크리포, 오르포, 민간인 (SS 보조 부대) 및 무장 친위대에서 차출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는 유대인, 공산주의자, 전쟁 포로, 인질 대량 학살을 포함하여 점령된 소련에서 잔혹 행위를 저질렀으며, 홀로코스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모든 강제 수용소 직원은 원래 강제 수용소 감찰관(IKL) 산하의 일반친위대의 일원이었다. 초기에는 테오도어 아이케가 지휘했으며, 강제 수용소 인력은 1933년 SS-''Wachverbände''로 구성되었고, 이후 SS-''토텐코프(SS-TV)''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SS-TV 부서는 수용소 운영 부서와 SS-VT(무장친위대의 전신)가 통제하는 군사적 ''토텐코프'' 부대로 분할되었다.

나치 정권이 억압적으로 변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면서,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규모, 치명적인 운영, 범위가 확대되었다. 살해 작전은 1941년 말, SS가 대량 학살에 ''Einsatzgruppen''의 사용을 대체하기 위해 고정식 가스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강화되었다.
이 새로운 절멸 수용소의 희생자들은 자동차 엔진에서 나오는 일산화 탄소 가스를 사용하여 살해되었다. 라인하르트 작전 동안, 세 개의 절멸 수용소가 점령된 폴란드에 건설되었다: 벨제츠 절멸 수용소 (1942년 3월부터 운영),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 (1942년 5월부터 운영), 트레블링카 (1942년 7월부터 운영). 1942년 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는 가스실을 추가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그곳에서 희생자들은 살충제 치클론 B를 사용하여 살해되었다.
1942년 이후, 전체 수용소 운영은 무장친위대의 권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수용소 시스템의 최종 지휘 권한은 오스발트 폴 산하의 ''SS 경제행정 본부(WHVA)''에 있었다. WHVA는 수용소 운영 외에도 ''일반친위대''의 재정, 공급 시스템 및 사업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조직이었다. 1944년까지, 강제 수용소가 무장친위대에 완전히 통합되고 WVHA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인력 수요에 따라 SS 구성원들을 수용소로 출입시키는 표준 관행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인력 순환은 거의 모든 SS가 강제 수용소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안에서 어떤 행위가 저질러졌는지 알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조직 전체가 전쟁 범죄 및 반인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요 논거가 된다.
1940년 후반, 일반친위대는 여러 서유럽 국가에서 일반친위대를 본뜬 협력주의 조직인 게르만 친위대를 통제했다. 이들의 목적은 특히 반유대주의 이상을 포함한 나치 인종 교리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게슈타포, SD 및 기타 국가보안본부의 주요 부서의 독일 부대를 보강하는 지역 보안 경찰로 활동했다.
일반친위대는 또한 보조 보고 및 사무 부대인 SS-여성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여성 지원자로 구성된 SS-여성 보조군단이 포함되었다. 회원들은 행정 직원 및 보급 요원으로 배치되었으며,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와 같은 곳의 지휘부와 여성 강제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근무했다. 친위대의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유대인, 폴란드인 등을 상대로 잔혹 행위에 참여했다.
1942년, 힘러는 통신 분야에서 여성들을 훈련시켜 남성들이 전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베레나임에 SS 여성 지원자 제국 학교를 설립했다.[1] 힘러는 또한 NSDAP 이념에 따라 선발되고 훈련받은 SS 여성 지원자 회원들로 자신의 모든 여성 민간 직원을 대체하려고 했다. 이 학교는 연합군의 진격으로 인해 1944년 11월 22일에 폐쇄되었다.
3. 1. 일반 친위대 (Allgemeine-SS)
일반친위대(Allgemeine-SS)는 친위대의 "주요, 정규 또는 표준" 부대를 지칭하는 용어다. 1938년까지 일반친위대는 행정적으로 여러 주요 부서로 나뉘었다.- 정규직 장교 및 주요 친위대 부서의 구성원
- 친위대 지역 부대의 비상근 자원 봉사자
- 보안경찰(게슈타포 및 형사경찰 Kripo) 및 보안정보국(SD)과 같은 친위대 보안 부대
- 해골 부대의 강제 수용소 직원
- 예비역, 명예직 또는 기타 비활성 친위대 구성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일반친위대와 무장친위대의 경계는 모호해졌는데, 이는 일반친위대 본부 사무실이 무장친위대의 행정 및 보급 지휘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1940년까지 모든 일반친위대는 회색 전시용 군복을 지급받았다. 하인리히 힘러는 모든 검은색 군복을 반납하도록 명령했고, 이 군복들은 동부의 보조 경찰 부대나 서부의 게르만 친위대에서 사용되었다.
일반 친위대의 약 3분의 1은 "상근"으로, 정부 공무원으로서 급여를 받으며 친위대 사무실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했다. 이들은 대부분 주요 친위대 사무실에 배치되었으며, 1942년까지 주요 사무실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 ''국가 지도자 친위대 개인 참모부''(Hauptamt Persönlicher Stab Reichsführer-SS; 하페어슈타프; HaPerStab)
- ''친위대 본부''(SS-Hauptamt; SS-HA)
- ''친위대 지도 본부''(SS-Führungshauptamt; SS-FHA)
- ''국가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
- ''친위대 경제 행정 본부''(SS-Wirtschafts- und Verwaltungshauptamt; SS-WVHA)
- ''질서경찰 본부''(Ordnungspolizei Hauptamt)
- ''친위대 법원 본부''(SS Court Main Office; HA SS-Gericht)
- ''친위대 인종 및 정착 본부''(SS Race and Settlement Main Office; 루샤; RuSHA)
- ''친위대 인사 본부''(SS Personal Main Office; SS PHA)
- ''독일계 민족 지원 센터''(Volksdeutsche Mittelstelle; 포미; VoMi)
- ''친위대 훈련부''(SS Education Office)
-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판무관''(Reich Commissioner for the Consolidation of German Nationhood; RKF 또는 RKFDV)
주요 사무실 지휘관과 직원은 군 징집에서 면제되었으나, 하이드리히처럼 많은 이들이 정규 독일군 예비군으로 복무했다. 일부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여 낮은 계급으로 전투에 참여하거나 비활성 예비군으로 등록되었다. 1944년, 독일의 패배가 임박하면서 징집 면제가 해제되고 많은 하위 구성원들이 전투에 투입, 상위 구성원들은 무장친위대 장군으로 임무를 맡았다.
1934년 친위대 내 전투 부대인 친위대 특무 부대(SS-VT, 후의 무장 친위대) 창설과 함께 비전투원 친위대원은 '''일반 친위대'''(알게마이네 SS)로 불리게 되었다. 무장 친위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급증했지만, 일반 친위대의 인원수는 항상 20만 명 이상이었다. 1939년 12월에는 일반 친위대 20만 1910명, 친위대 특무 부대 5만 6546명이었지만, 1945년 3월에는 일반 친위대 20만 48명, 무장 친위대 82만 9400명이었다.
무장 친위대 대원은 급여 지급 장부(Soldbuch)를 소지하고 전원에게 봉급이 지급되었지만, 일반 친위대는 급여 지급 장부(Soldbuch)가 없고, 봉급은 친위대 중장 이상의 계급이나, 상근 대원에게만 지급되었다. 일반 친위대의 비상근 대원은 각자 직업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나치당의 집회나 당 대회 때만 친위대 제복을 입고 참석했다. 일반 친위대 대원은 직업을 가지고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자발적으로 당 활동에 참여할 것을 기대받았다. 친위대는 원래 공무원이 아니라 나치당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 친위대원의 많은 수가 나치당 정권 하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그쪽 입장에서 봉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친위대의 검은색 제복은 원래 친위대 조직 전체의 제복이었지만, 전투 조직인 친위대 특무 부대와 강제 수용소 근무의 친위대 해골 부대는 국방군형 제복을 도입했기 때문에, 검은색 제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 친위대만이 검은색 제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1938년에는 일반 친위대 상근 대원의 일상 업무 제복으로 페일 그레이 제복이 도입되었다. 상근 대원은 검은색 제복 대신 이것을 착용하게 되었지만, 비상근 대원에게는 회색 제복이 지급되지 않아, 그들은 검은색 제복을 계속 사용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엘리트의 상징이었던 일반 친위대의 검은색 제복도 전쟁 후기에는 병역 기피의 겁쟁이의 상징으로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격하되었다고 한다.
계급은 일반 친위대, 무장 친위대 모두 돌격대(SA)의 계급을 기초로 하여 기본적으로 같았지만, 일부 명칭이 달랐다. 예를 들어 친위대 이등병의 계급은 무장 친위대에서는 "SS-Schütze", 일반 친위대는 "SS-Mann"이었다. 친위대 일등병도 무장 친위대는 "SS-Oberschütze", 일반(알게마이네) SS는 "SS-Obermann"이었다. 무장 친위대만의 계급으로 친위대 준위(SS-Sturmscharführer)가 있었다. 친위대 소장 이상은 무장 친위대에서는 국방군과 동일한 계급을 사용했다. 다만 무장 친위대원에게는 일반 친위대원의 계급도 함께 수여되는 것이 통례였다. 친위대 계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친위대 계급'''을 참조할 수 있다.
일반 친위대가 무장 친위대에 비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국가 보안 본부(게슈타포, 친위대 보안부, 형사 경찰 등)나 친위대 경제 관리 본부와 같이 유대인학살을 비롯한 잔학 행위 집행 기관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친위대에도 잔학 행위에 관여하지 않은 조직이나 사람이 있고, 무장 친위대 중에도 잔학 행위에 관여한 조직이나 사람이 있으므로, "일반 친위대 = 범죄자, 무장 친위대 = 용사"와 같은 단순한 단정은 할 수 없다. 양자는 같은 친위대 조직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 구분은 모호한 점도 많았다.
일반 친위대의 비상근 대원은 친위대 보병 연대(SS-Fuß-Standarte)의 대대, 중대, 소대에 소속되어 보병 연대 단위로 행동했다. 최초의 친위대 보병 연대는 1925년 11월 9일 요제프 디트리히 지휘하에 뮌헨에 발족한 친위대 제1연대(1. SS-Standarte)이다.
친위대 보병 연대는 처음에 나치당 대관구마다 배치된 "대관구 친위대 지도부"(Gau-SS-Leitung)에 소속되었지만, 1931년 돌격대를 모델로 "친위대 상급 지도자 관구"(SS-Oberführerbereich)가 설치되면서 이 소속이 되었다. 1932년에는 "친위대 집단"(SS-Gruppe)이 창설되었고, 1933년 11월 친위대 집단이 "친위대 상급 지구"(SS-Oberabschnitt)로, 친위대 여단(SS-Brigade)이 친위대 지구(SS-Abschnitt)로 개편되었다. 친위대 보병 연대는 그 아래에 소속되었다.
1933년 11월 이후 일반 친위대 편성:
친위대 상급 지구(SS-Oberabschnitt), 친위대 지구(SS-Abschnitt), 친위대 보병 연대(SS-Fuß-Standarte), 친위대 대대(SS-Sturmbanne), 친위대 중대(SS-Stürme), 친위대 소대(Trupps), 친위대 분대(Scharen), 친위대 조(Rotten). 1934년 10월 소대는 분대와 통합, Scharen이 소대, Rotten이 분대가 되었다.
전문 직무 부대: 친위대 기병 연대, 친위대 통신 대대, 친위대 공병 대대, 친위대 위생 중대, 친위대 수송 중대, 친위대 렌트겐 대대, 친위대 장정대.
연대 소속 일반 친위대 대원은 연대 번호가 적힌 칼라 탭을 착용했다. 커프 타이틀 테두리 색상으로 소속 대대(제1대대 녹색, 제2대대 짙은 파란색, 제3대대 빨간색, 예비 대대 밝은 파란색), 번호로 소속 중대를 표시했다.
3. 2. 지역 단위 조직
일반친위대의 핵심은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시간제 징집 부대였다.[14][15]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제복을 입고 만나 훈련, 이념 교육, 퍼레이드, 나치당 집회 경호 등의 활동을 했다.지역 SS 부대는 친위대 상급 지구(SS-Oberabschnitt)로 편성되어 친위대 본부(SS-HA)에 종속되었다.[17][18] 그 아래 친위대 지구(SS-Abschnitt)가 있었고, 일반친위대의 기본 부대는 연대(Standarten)였다.[19] 1933년까지 SS 인원은 급여를 받지 않았으나, 이후 ''Oberabschnitt'' 지휘관과 참모는 전임, 일반 사병은 시간제로 근무했다. 일반 ''일반친위대'' 인원은 징집 면제를 받지 못했고, 많은 수가 국방군에 소집되었다.
1938년 이전, 부분적 SS 구성원들의 소집 부대는 일반친위대의 핵심으로, 연대 규모의 ''슈탄다르테''(Standarten)에서 사단 규모의 ''오버압슈니테''(Oberabschnitte) 사령부까지 자체 전투 서열을 유지했다. ''일반친위대'' ''슈탄다르테'' 내에는 중대 규모의 대대 ''슈룸반''(Sturmbann)이 있었다.
대부분의 ''일반친위대'' 일반 구성원에게, ''슈룸''(Sturm)은 일반 SS 구성원이 일반적으로 연관되는 최고 수준이었다. ''슈룸''은 소대 규모의 ''트루펜''(Truppen, 때로는 ''Zug'')으로, 이는 다시 분대 규모의 ''샤렌''(Scharen)으로 나뉘었다. 더 큰 ''일반친위대'' 사령부의 경우, ''샤렌''은 화력 분대와 유사한 ''로테''(Rotte)로 더 나뉘었다.
1933년 11월 이후 일반 친위대는 친위대 상급 지구(SS-Oberabschnitt), 친위대 지구(SS-Abschnitt), 친위대 보병 연대 (SS-Fuß-Standarte), 친위대 대대 (SS-Sturmbanne), 친위대 중대 (SS-Stürme), 친위대 소대 (Trupps), 친위대 분대 (Scharen), 친위대 조 (Rotten)로 편성되었다.[19] 1934년 10월에 소대는 분대와 통합되어 Scharen이 소대가 되었고, Rotten이 분대가 되었다.[20]
또한 친위대 기병 연대, 친위대 통신 대대, 친위대 공병 대대, 친위대 위생 중대, 친위대 수송 중대, 친위대 렌트겐 대대, 친위대 장정대와 같은 전문 직무 부대도 있었다. 연대 소속 일반 친위대 대원은 연대 번호가 적힌 칼라 탭, 커프 타이틀 테두리 색상으로 소속 대대, 번호로 소속 중대를 표시했다.[21]
3. 3. 보안 부대
1936년, 게슈타포와 형사경찰(크리포)이 통합되어 지퍼샤이츠폴리차이(SiPo)가 되었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휘를 받았다. 1939년 9월 27일부터 지허하이트디엔스트(SD), 게슈타포, 크리포는 하이드리히가 통제하는 국가보안본부(RSHA)에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지퍼샤이츠폴리차이(SiPo)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제복 경찰인 오르둥스폴리차이(Orpo)는 1936년 이후 SS의 통제를 받았지만, 많은 경찰 구성원이 이중 SS 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친위대에 편입된 적은 없었다.학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은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결성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SS에 의해 운영되었다. 1939년 9월, 이들은 독일 국방군이 폴란드 침공 이후 점령한 영토에서 활동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병력은 SS, SD, 경찰에서 차출되었다. 1939년 9월 말, RSHA는 아인자츠그루펜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인수했다. 1941년 소련 침공 전에 살인 부대가 재편성되었을 때, 아인자츠그루펜의 병력은 SD, 게슈타포, 크리포, 오르포, 민간인 (SS 보조 부대) 및 무장 친위대에서 차출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는 유대인, 공산주의자, 전쟁 포로, 인질 대량 학살을 포함하여 점령된 소련에서 잔혹 행위를 저질렀으며, 홀로코스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3. 4. 강제 수용소
모든 강제 수용소 직원은 원래 강제 수용소 감찰관(IKL) 산하의 일반친위대의 일원이었다. 초기에는 테오도어 아이케가 지휘했으며, 강제 수용소 인력은 1933년 SS-''Wachverbände''로 구성되었고, 이후 SS-''토텐코프(SS-TV)''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SS-TV 부서는 수용소 운영 부서와 SS-VT(무장친위대의 전신)가 통제하는 군사적 ''토텐코프'' 부대로 분할되었다.나치 정권이 억압적으로 변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면서,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규모, 치명적인 운영, 범위가 확대되었다. 살해 작전은 1941년 말, SS가 대량 학살에 ''Einsatzgruppen''의 사용을 대체하기 위해 고정식 가스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강화되었다.
이 새로운 절멸 수용소의 희생자들은 자동차 엔진에서 나오는 일산화 탄소 가스를 사용하여 살해되었다. 라인하르트 작전 동안, 세 개의 절멸 수용소가 점령된 폴란드에 건설되었다: 벨제츠 절멸 수용소 (1942년 3월부터 운영),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 (1942년 5월부터 운영), 트레블링카 (1942년 7월부터 운영). 1942년 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는 가스실을 추가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그곳에서 희생자들은 살충제 치클론 B를 사용하여 살해되었다.
1942년 이후, 전체 수용소 운영은 무장친위대의 권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수용소 시스템의 최종 지휘 권한은 오스발트 폴 산하의 ''SS 경제행정 본부(WHVA)''에 있었다. WHVA는 수용소 운영 외에도 ''일반친위대''의 재정, 공급 시스템 및 사업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조직이었다. 1944년까지, 강제 수용소가 무장친위대에 완전히 통합되고 WVHA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인력 수요에 따라 SS 구성원들을 수용소로 출입시키는 표준 관행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인력 순환은 거의 모든 SS가 강제 수용소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안에서 어떤 행위가 저질러졌는지 알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조직 전체가 전쟁 범죄 및 반인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요 논거가 된다.
3. 5. 기타 부대
1940년 후반, 일반친위대는 여러 서유럽 국가에서 일반친위대를 본뜬 협력주의 조직인 게르만 친위대를 통제했다. 이들의 목적은 특히 반유대주의 이상을 포함한 나치 인종 교리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게슈타포, SD 및 기타 국가보안본부의 주요 부서의 독일 부대를 보강하는 지역 보안 경찰로 활동했다.일반친위대는 또한 보조 보고 및 사무 부대인 SS-여성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여성 지원자로 구성된 SS-여성 보조군단이 포함되었다. 회원들은 행정 직원 및 보급 요원으로 배치되었으며,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와 같은 곳의 지휘부와 여성 강제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근무했다. 친위대의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유대인, 폴란드인 등을 상대로 잔혹 행위에 참여했다.
1942년, 힘러는 통신 분야에서 여성들을 훈련시켜 남성들이 전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베레나임에 SS 여성 지원자 제국 학교를 설립했다.[1] 힘러는 또한 NSDAP 이념에 따라 선발되고 훈련받은 SS 여성 지원자 회원들로 자신의 모든 여성 민간 직원을 대체하려고 했다. 이 학교는 연합군의 진격으로 인해 1944년 11월 22일에 폐쇄되었다.
4. 계급
일반 친위대와 무장친위대의 계급은 돌격대의 계급을 기반으로 하며 동일한 명칭을 사용했다.[2] 그러나 일반 친위대와 무장 친위대는 별개의 계층적 하위 부서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친위대원은 실제로 두 개의 별도 친위대 계급을 가질 수 있었다.[2] 예를 들어, 1940년 헤르만 페겔라인은 일반 친위대에서 슈탄다르텐퓌러 (대령) 계급을 갖고 있었지만, 무장 친위대에서는 오버슈투름반퓌러 (중령) 계급이었다. 만약 이 친위대원이 건축 공학 건축가였다면, SS-본부는 세 번째 계급인 SS-존더퓌러를 부여했을 것이다.[2]
친위대원은 정규 군대에서 예비역 장교 임명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치당 정치 계급도 가질 수 있었다.[2] 여기에 많은 고위 친위대원들이 장관, 차관 등의 자격으로 제국 정부의 직원이라는 점을 더해야 한다.[2] 1944년에는 거의 모든 친위대 장군이 이전의 군 복무와 관계없이 동등한 무장 친위대 계급을 부여받았다.[2] 이는 친위대 장군에게 군 부대와 전쟁 포로 수용소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헤이그 협약의 전쟁 규칙에 따라 잠재적인 보호를 제공하기 위해 명령되었다.[2] 따라서 연합군에 의해 체포될 경우, 친위대 장군은 체포된 경찰 관계자보다는 군 포로 신분을 받기를 희망했다.[2]
5. 인력 구성
1944년, 친위대의 총 인원은 약 8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무장친위대는 약 6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3개 연대에서 38개 이상의 사단으로 성장했다. 무장친위대는 육군과 함께 복무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그 일부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일반친위대는 전쟁 말기에 4만 명 남짓의 병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 친위대는 비상근 대원이 많았으며, 이들은 각자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나치당 행사 등에 참여했다. 일반 친위대원의 상당수는 나치 정권 하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봉급을 받았다.
1938년 친위대 장교의 사회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6]
6. 비판 및 역사적 평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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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itler's Children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9
[2]
웹사이트
Nuremberg Trial Proceedings Volume 20 day 195
http://avalon.law.ya[...]
Avalon Project, Yale Law School
200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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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rs, higher civil servants, professionals, university students, entrepreneurs, military officers
[6]
간행물
"Elite recruitment and National Socialism: the SS-Führerkorps, 1925-1939."
https://nbn-resolvin[...]
Sankt Katharinen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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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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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Purdu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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