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태국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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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태국 침공은 1941년 12월 8일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 개전과 함께 태국을 침략한 사건이다. 일본은 말라야와 버마 침공을 위한 기지 확보를 위해 태국을 통과해야 했고, 1941년 12월 초, 최후통첩을 통해 태국 영토 통과를 요구했다. 태국은 초기 저항에도 불구하고, 총리의 정전 명령으로 일본에 항복하고 군사 동맹을 맺었다. 이후 태국은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미국 내 태국 대사는 이를 거부하고 자유 태국 운동을 조직했다. 이 사건은 윈스턴 처칠의 대(對)태국 동맹 구상을 무산시켰으며, 일본의 말라야 침공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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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태국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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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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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일본의 태국 침공 |
시기 | 1941년 12월 8일 (5시간) |
장소 | 태국 |
결과 | 휴전 태국-일본 동맹 태국의 연합군에 대한 선전포고 |
관련 전쟁 |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태국 |
지휘관 | |
태국 | 쁠랙 피분송크람 |
일본 제국 | 이다 쇼지로 야마시타 도모유키 곤도 노부타케 |
병력 규모 | |
태국 | 62,000명 123,500명의 예비군 150대의 전투기 1척의 순양함 6척의 구축함 4척의 전함 3척의 잠수함 |
일본 제국 | 100,000명 1척의 순양함 7척의 구축함 2척의 전함 2척의 수상기 모함 18척의 수송선 |
참가 부대 | |
태국 | 태국 왕립 육군 태국 왕립 공군 태국 왕립 해군 영토 방위 학생 태국 왕립 경찰 |
일본 제국 | 제15군 (일본군) 제25군 (일본군) 제2함대 (일본 제국 해군) |
관련 명칭 | |
태국어 | (Kan Buk Khrong Thai Khong Yipun) |
2. 배경
일본은 태평양 전쟁 개전과 동시에 필리핀과 영국령 말라야 방면으로 침공하여 남방의 요지를 공략할 작전 계획을 세웠다.[39] 영국령 말라야와 버마를 침략한 일본은 태국의 항구와 철도, 비행장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태국은 말레이와 버마에 대한 작전 수행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통로였다. 또한 이후에도 일본이 두 방면에 작전을 벌이기 위한 기지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함께 미리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40]
1941년 1월 이후 일본-태국 간의 군사적 긴밀 관계 설정은 진전이 없었다. 일본은 태국 총리 쁠랙 피분송크람을 친일 성향으로 생각했지만, 당시 태국 내에는 친영 세력이 강했고, 국제 정세 하에서 태국 총리가 일본에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웠다. 일본이 영국과 전쟁을 시작하면 태국은 중립 유지가 어려워 두 세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일본은 태국을 남방작전의 기반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지만, 조기에 군사동맹을 제안하면 그 정보가 영국, 미국, 네덜란드에 알려져 목적 달성이 어려웠다. 따라서 일본은 태국과 군사적 관계 수립을 위한 교섭을 무력 발동 직전에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41]
1941년 11월 13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대 태국 시책의 개요를 결정했다.[41] 11월 23일에는 〈대 태국 조치 요령〉을 결정하고, 현지 육해군 최고 지휘관과 주 태국 대사에게 지시했다.[42]
12월 4일 새벽, 말레이 상륙 주력 부대 선단은 중일 전쟁에서 일본이 점령했던 중화민국 하이난 섬의 싼야 항을 출발하여 태국 만으로 향했다. 육로에서는 12월 6일경까지 근위 사단 주력이 인도차이나-태국 국경 부근에서 공동 진입 작전을 준비했다.[43]
태국 진주에는 태국 총리에게 진주 요구를 언제 할 것인지, 태국이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언제 육로에 진입을 시작할 것인지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태국과의 교섭 시작은 개전일 0시, 육로 침입 시작은 개전일 새벽 무렵으로 결정되었다. 평화적 진주는 정오경까지이며, 교섭 개시부터 진입 개시까지 시간적 여유가 많은 편이 좋았다. 그러나 개전일 해가 뜰 무렵에는 상륙부대가 이미 상륙해 있을 것이므로 진입 시작을 기다릴 수 없었다.[44]
12월 8일 자정, 태국 총리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새벽 1시 50분, 태국 외무장관과 재무장관에게 태국 영토 통과와 저항하지 않으면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제의했다.[45]
2. 1. 팔굉일우와 대동아공영권
다나카 지가쿠가 19세기 후반에 주창한 팔굉일우 사상은 천황의 통치 아래 전 세계를 통일해야 한다는 이념이었다.[2] 다나카는 이를 천황의 도덕적 리더십의 결과로 보았지만,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아시아를 식민지 열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일본을 아시아의 주도적 영향력으로 확립하는 데 이용했다.[3] 이 개념은 東亜新秩序|도아 신치쓰조일본어로 표현되었다.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일본, 만주국, 중국, 동남아시아 일부를 포함하는 대동아 공영권을 창설하고자 했다.[4] 이는 제국 선전에 따르면, 서방 식민주의에서 벗어나 일본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번영과 평화를 공유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공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4]
2. 2. 태국-프랑스 전쟁과 일본의 중재

1940년, 태국은 1893년 프랑스-샴 위기에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프랑스-태국 전쟁을 일으켰다.[8] 일본은 인도차이나 항구와 공군 기지를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1941년 1월 31일, 프랑스와 태국 간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협상가 역할을 했다.[8]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태국 총리 쁠랙 피분송크람과 비밀리에 협의하여 태국을 통과하는 자유 통행을 모색했다. 피분송크람은 긍정적으로 반응했지만, 1940년 6월 12일에 영국-태국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그의 이후 행동은 불확실성을 보였다.[9]
피분송크람은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고 영국이 유럽 전선에 집중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군대가 일본을 혼자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10] 1940년 태국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은 미국 정부가 피분송크람을 지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10]
1941년 1월 이후, 일본과 태국 간의 군사적 긴밀 관계 설정은 진전이 없었다. 일본은 태국 수상 쁠랙 피분송크람을 친일 성향으로 생각했지만, 태국 내 친영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일본은 군사 동맹 제안이 ABCD 포위망에 가담하고 있던 네덜란드에 알려져 남방 작전 목적 달성에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했다.[41]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무력 발동 직전에 태국과의 교섭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41]
2. 3. 태국의 외교적 고립과 친일 성향
쁠랙 피분송크람 총리는 친일 성향을 보이며 일본과의 협력을 추진했지만,[41] 당시 태국 내에는 영국 지지 세력도 강해 일본과의 협력이 쉽지 않았다.[41] 영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면 태국은 중립 유지가 어려워 양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41]1940년 프랑스-태국 전쟁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일부를 회복했으나, 이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0] 1941년 중반, 피분 총리는 영국과 미국에 일본 침공 대비 지원을 요청했으나 확답을 받지 못했다.[10]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일본에 경고를 보내는 데는 찬성했지만, 미국은 동의하지 않아 영국 단독으로 일본에 맞설 준비가 부족했다.[10]
이런 상황에서 태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피분 총리는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2. 4. 일본의 군사적 압박과 최후통첩
1941년 11월 13일, 일본은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대 태국 정책의 개요를 결정했다. 11월 23일에는 〈대 태국 조치 요령〉을 결정하고 현지 육해군 최고 지휘관과 주 태국 대사에게 지시했다.[41][42]1941년 12월 4일 새벽, 말레이 상륙 주력 부대 선단은 중일 전쟁에서 일본이 점령했던 중화민국 하이난 섬의 싼야 항을 출발하여 태국 만으로 향했다. 육로에서는 12월 6일경까지 근위 사단의 주력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의 국경 부근에서 태국 진입 작전 준비를 마쳤다.[43]
태국 진주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는 태국 총리에게 태국 진주 요구를 언제 할 것인지, 둘째는 태국이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언제 육로에 진입을 시작할 것인지였다. 태국과의 교섭 시작은 일본 시간으로 개전일 0시, 육로 침입 시작은 개전일 새벽 무렵으로 결정되었다. 평화적 진주는 정오경까지이며, 태국과의 교섭 개시부터 진입 개시까지 시간적 여유가 많은 편이 좋았다. 그러나 개전일 해가 뜰 무렵에는 상륙부대가 이미 상륙해 있을 것이므로 언제까지나 진입 시작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44]
12월 8일 자정, 태국 총리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새벽 1시 50분, 태국의 외무장관과 재무장관에게 태국 영토 통과와 저항하지 않으면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제의했다.[45] 일본은 12월 7일 오후 11시에 태국 정부에 일본군의 태국 진입을 허용하라는 최후통첩을 제시했고, 태국은 2시간 안에 응답해야 했다.[19]
3. 일본의 침공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태국 남부와 중부 지역에 기습 상륙을 감행하며 침공을 시작했다.
11월 말, 영국은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급속한 증강으로 인해 일본의 태국 공격 가능성을 인지했다.[11] 12월 1일, 일본의 도조 히데키 총리는 태국이 일본군에게 자국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불확실하지만, 충돌을 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12] 12월 2일, 일본 외교 대표와 피분 사이에 추가 협상이 이루어졌다. 피분은 일본이 크라 지협을 침공하는 것에 대해 "눈감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중부 태국인 방콕 평원을 통과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12월 3일에 추가 논의를 거친 후, 피분은 태국이 1909년 영국-샴 조약에서 양도한 영토와 버마의 샨 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태국 통과를 허용하기로 동의했다.[13]
12월 2일,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는 명령인 "닛타카 산에 올라라"를 발령했다. 말레이와 태국 침공 작전인 "E" 작전의 주력 침공 함대는 12월 4일 중국 산야에서 출항했다.[14] 추가 병력과 선박이 인도차이나 깜라인만에서 함대에 합류했다. 일본이 준비하는 동안, 영국과 미국은 일본군의 증강과 태국 침공 가능성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했다. 피분은 일본과 합의를 한 같은 날, 영국으로부터 태국이 일본의 침공을 받으려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15]
12월 6일 정오, RAAF 제1 비행대대의 록히드 허드슨 3대 중 한 대가 남중국해 상공을 정찰 비행하던 중, 서쪽으로 항해하는 일본 선박 3척을 발견했고, 약 15분 후에는 전함 1척, 순양함 5척, 구축함 7척, 수송선 22척으로 구성된 IJN 남견원정함대 호송대를 발견했다. 호송대에 포함된 상선 겸 수상기 모함 중 하나인 ''가미카와 마루''는 허드슨을 요격하기 위해 미쓰비시 F1M "피트" 수상기를 발진시켰지만, 허드슨은 구름 속에 숨어 이를 따돌렸다. 몇 분 후, 두 번째 허드슨도 호송대를 발견했다.[17]
12월 7일 오전 3시, 오자와 지사부로 부제독은 호송대와 말라야 사이의 지역에서 순찰을 명령했다. 폭우가 쏟아지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가미카와 마루''와 ''사가라 마루''는 F1M2 11대와 아이치 E13A 6대를 발진시켰다. 판장 섬에서 서북서쪽으로 약 20nmi 떨어진 08:20에 ''가미카와 마루''의 E13A1 ZI-26 (조종사: 오가타 에이이치 소위)는 제205 비행대대 RAF 컨솔리데이티드 PBY 카탈리나 정찰 비행정(W8417, 조종사: 윌리엄 E. 웹 준위)을 발견했다. 오가타는 카탈리나를 뒤에서 공격하여 손상을 입히고 무전을 파괴했다. 오가타는 25분 동안 카탈리나를 추격하다가 인도차이나의 JAAF 제1센타이에서 온 나카지마 Ki-27 "네이트" 전투기 5대가 도착하여 격추시켰다. 웹과 그의 승무원은 태평양 전쟁의 첫 번째 사상자였다. 영국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8]
12월 7일 오후 11시, 일본은 태국 정부에 일본군의 태국 진입을 허용하라는 최후통첩을 제시했다. 태국은 2시간 안에 응답해야 했다.[19]
태국은 26,500명의 잘 훈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예비군을 포함하면 육군 병력이 약 50,000명에 달했다. 태국 왕립 공군은 약 27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150대가 전투기였고, 그 중 다수는 미국산이었다. 일본은 1940년 12월에 태국에 93대의 더 현대적인 항공기를 제공했다. 태국 왕립 해군은 훈련과 장비가 부족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의 분쟁에서 상당수의 선박을 잃었다.[20] 그러나 태국 해군은 HTMS ''Matchanu''와 HTMS ''Wirun'' 두 척의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었고, 이는 일본 지휘관들에게 우려를 자아냈다.
일본군은 태국이 최후 통첩에 대한 답변이 없자 인도차이나에서 태국으로 진격했으며, 방콕 남부와 끄라 지협의 여러 지점에 상륙했다. 태국 정부가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동안, 피분은 행방불명되었고 늦은 오전까지 최후 통첩에 대해 알지 못했다.[24]
새벽에 니시무라 타쿠마 중장 휘하의 일본 근위 제2사단과 다케우치 히로시 중장 휘하의 일본 제55사단은 일본 제15군 소속으로 인도차이나에서 태국이 최근에 되찾은 프라 타봉 주의 땀본 사와이 돈케오, 아투엑 테와데지 구(Russei)를 통해 국경을 넘었다. 일본군은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고, 시소폰에서 아란야프라테트로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란야프라테트와 몽콜 부레이를 연결하는 거의 완공된 철도 연결선으로 이동했다.[25][26]
일본군은 방콕에 폭탄 공격을 가했고, 주요 우체국에 떨어진 폭탄 한 발은 불발되었다. 경찰이 일본인 거주자들을 체포하는 동안, 태국 내각은 총리의 도착을 기다리며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31] 망명 정부 수립을 포함한 지속적인 저항을 선호하는 쪽도 있었지만, 피분 총리가 도착하자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태국은 일본의 요구에 굴복했다. 이후 일본군은 방콕으로 진격하여 차이나타운(삼팽)을 점령하고 상공 회의소 건물을 지휘소로 사용했다.[32]
3. 1. 일본군 침공 경로
일본군 제15군은 인도차이나를 거쳐 태국 북부로 진입했고, 제25군은 태국 남부의 송클라, 파타니, 춤폰 등지에 상륙하여 말라야 방면으로 진격했다.[22]
곤도 노부타케 제독 휘하의 일본 제2함대 소속 함선들은 태국 및 말라야의 코타 바루 상륙 작전에 지원과 엄호를 제공했다.[23]
니시무라 타쿠마 중장 휘하의 일본 근위 제2사단과 다케우치 히로시 중장 휘하의 일본 제55사단은 일본 제15군 소속으로 인도차이나에서 태국이 최근에 되찾은 프라 타봉 주의 땀본 사와이 돈케오, 아투엑 테와데지 구(Russei)를 통해 국경을 넘었다. 일본군은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고, 시소폰에서 아란야프라테트로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란야프라테트와 몽콜 부레이를 연결하는 거의 완공된 철도 연결선으로 이동했다.[25][26]
제25군 선견 병단은 주력이 말레이시아 국경 근처의 태국령 송클라에서, 안도 지대는 파타니와 타베에서 상륙하여 말레이시아 국경을 돌파하고, 주둔 중인 영국군의 저항을 제거하여 케다 주 서부를 남진할 계획이었다.[50] 12월 8일 오전 4시 12분, 송클라의 제1차 상륙 부대의 선두 부대가 상륙에 성공했다.[51]
파타니, 타베 상륙을 실시한 안도 지대 (지휘관은 보병 제42연대장 안도 타다오 대좌)는 보병 제42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약 7200명, 차량 약 230대로 구성된 부대이며, 수송선 6척에 분승했다.[53] 8일 오전 3시, 파타니·타베 부대 모두 상륙 개시에 성공했다. 파타니에서는 태국군의 반격이 있었지만, 오전 11시 40분경, 태국군은 항복했다.[55]
우노 지대(지휘관은 보병 제143연대장 우노 세쓰 대좌)는 제15군 제55사단의 일부로, 보병 제143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각종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남부 태국 각지에 상륙하여 부근의 비행장을 점령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56] 반둥 상륙 부대의 주정대는 8일 오전 8시 40분, 씨랏 강 어귀를 발견하고 소강을 개시, 오전 10시경, 반둥시에 돌입하여, 당일 중에 비행장을 점령했다.[57] 우노 지대장의 직할 춤폰 선단은 8일 오전 3시경에 정박지에 침입하여, 상륙 후 태국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무장을 해제시키고, 비행장을 점령했다.[57]
나콘 선단의 제1회 상륙 부대는 8일 오전 4시경에 주정대를 출발시켰지만, 폭우의 영향으로 오전 5시 20분경 간신히 해안에 도착했다. 오전 10시경, 나콘역 부근에 도달하여, 약간의 태국군의 저항을 배제하고 나콘시 주변과 비행장을 점령했다.[58] 쁘라쭈압 키리칸으로 향한 상륙 부대는 오전 6시 30분경 상륙하여, 태국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비행장을 점령했다.[57]
요시다 지대(근위보병 제4연대 제3대대 기간)는 단선으로 방콕 남방 해안에 상륙[60]。12월 8일 오전 3시부터 4시 사이에 저항을 받지 않고 반푸 해안에 상륙했다.[61]
3. 2. 주요 격전지
춤폰에서는 태국 제38보병대대와 유와촌 타한(소년병 부대)이 일본 제143보병연대 제1보병대대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1941년 12월 8일 아침, 일본군은 춤폰에 상륙하여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유와촌 타한과 제38보병대대, 춤폰 지방 경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전투는 태국군이 휴전 명령을 받은 오후까지 계속되었다.[27]나콘시탐마랏에서는 태국 제39보병대대와 제15포병대대가 일본군과 교전했다. 12월 7일 밤, 일본 수송선들은 ''시무슈''의 호위를 받으며 나콘시탐마랏 해안에 제143보병연대 제3보병대대 등 1,510명의 병력과 트럭 50대를 상륙시켰다. 이들은 캠프 바지라부드 북쪽의 타 패 운하(팍 푼 운하)에서 하선을 시작했다. 송클라에서 일본의 침공 소식을 먼저 통보받은 태국군은 즉시 전투에 돌입했으나, 정오에 총리의 휴전 명령으로 전투가 중단되었다.[29]
쁘라쭈압키리칸에서는 태국 공군 제5비행단과 쁘라쭈압키리칸 주 경찰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2월 8일 새벽 3시, 일본군 제143보병연대 제2보병대대가 상륙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남쪽 비행장 근처에도 상륙하여 비행장을 포위했다. 태국 공군과 경찰은 다음 날 정오까지 저항했으나, 휴전 명령을 받으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이 전투는 쁘라쭈압 키리칸 전투로 알려져 있다.[30]
파타니 주에서는 태국 제42보병대대가 일본군에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송클라에서는 태국 제41보병대대와 제13포병대대가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랏타니에서는 태국 경찰과 시민 의용군이 일본군에 저항했다. 12월 8일 새벽, 일본군 보병 중대가 반 돈 해안 마을에 상륙하여 수랏타니로 진격했으나, 태국 경찰과 시민 의용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폭우 속에서 벌어진 교전은 태국군이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을 받은 오후에 끝났다.[33]
3. 3. 방콕 무혈 점령
1941년 12월 8일 이른 시간에 일본 제4근위보병연대 제3대대가 사뭇프라칸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방콕 점령을 임무로 받았다. 이 부대는 소규모의 태국 경찰 부대와 마주쳤으나, 긴장된 대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공식 협상이 완료될 때까지 태국 수도에 진입하지 않기로 합의했다.[25]일본군은 방콕에 폭격을 가했고, 주요 우체국에 떨어진 폭탄 한 발은 불발되었다. 경찰이 일본인 거주자들을 체포하는 동안, 태국 내각은 총리의 도착을 기다리며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31] 망명 정부 수립을 포함한 지속적인 저항을 선호하는 쪽도 있었지만, 피분 총리가 도착하자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태국은 일본의 요구에 굴복했다. 이후 일본군은 방콕으로 진격하여 차이나타운(삼팽)을 점령하고 상공 회의소 건물을 지휘소로 사용했다.[32]
일본 공군은 돈므앙 왕립 태국 공군 기지를 공격했고, 태국 공군이 이를 방어했다. 태국은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 전투기 6대를 잃었다.
4. 태국의 항복과 협력
1941년 12월 8일 새벽, 일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태국으로 진격하여 끄라 지협의 여러 지점에 상륙했다. 쁠랙 피분송크람 총리가 한동안 행방불명되어 최후통첩에 대해 늦게 알게 되면서, 태국 내각은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24] 피분 총리가 도착하자 태국은 항복을 결정하고 일본의 요구에 굴복했다.[32]
일본군은 춤폰, 나콘시탐마랏, 쁘라쭈압키리칸, 사뭇프라칸, 반 돈 등지에 상륙하여 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춤폰에서는 태국 '유와촌 타한'(청소년 병사)과 정규군 제38 보병 대대, 춤폰 지방 경찰이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태국 정부의 휴전 명령으로 전투가 종료되었다.[27] 쁘라쭈압키리칸에서는 태국 공군과 쁘라쭈압키리칸 주 경찰이 일본군에 맞서 다음 날 정오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휴전 명령을 받았다.[30] 사뭇프라칸에서는 소규모 태국 경찰 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긴장된 대치가 있었지만,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25] 수랏타니에서는 태국 왕립 경찰과 민간 의용군이 일본군에 저항했지만, 폭우 속에서 벌어진 교전 끝에 태국군이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을 받고 전투가 종료되었다.[33]
12월 8일 오전 9시경, 피분송크람 총리는 방콕으로 귀환하여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후 전군에 정전 명령을 하달했다.[62]
4. 1. 통과 협정 체결
1941년 12월 8일 정오, 태국은 일본과 통과 협정을 체결하여 일본군의 자국 영토 통과를 공식적으로 허용했다.[63] 태국 총리는 일본이 제시한 여러 요구 사항 중 단순한 군대 통과 협정을 선택했으며, "일본은 장래 말레이 방면에서 태국의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고려한다"는 문구는 삭제를 요청했다.[63] 이는 일본 측의 전황이 불리해질 경우 영국과의 국교 조정을 통해 중립을 유지하려는 의도였지만, 일본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해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64]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정전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일본군과 태국군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쁘라쭈압에서는 통신 문제로 전투가 계속되어 양측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다.[65]
4. 2. 군사 동맹 체결
1941년 12월 8일 정오경 일본과 태국은 일본군의 태국 영토 통과 협정을 체결하고, 오후 3시에 정식 조인식을 가졌다.[63] 이후 양국 간 협상을 통해 12월 10일 밤 공격 및 방어 동맹이 결정되었다.[66] 12월 11일 오전 11시에 공격 및 방어 동맹 가조인이 이루어졌고, 12월 21일 정식 조인식이 거행되면서,[66] 태국은 사실상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다.4. 3. 대영 제국 및 미국에 선전포고
1942년 1월 25일, 태국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24]5. 여파
쁠랙 피분송크람의 휴전 체결 결정으로 윈스턴 처칠이 구상한 태국과의 동맹 구축 계획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또한 그는 일본이 태국을 거점으로 영국령 말라야를 침략하는 것을 인정해주었다. 휴전 후 몇 시간 내에 일본의 중대 비행기는 인도차이나로부터 송클라 이륙장으로 날아가 단거리로 말라야와 싱가포르의 전략적 요충지 공습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휴전 즈음, 대영 제국과 미국은 태국을 일본 제국의 점령지로 여겼다.[68]
말레이 반도 국경과 가까운 파타니는 일본 제25군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목표였다. ''시라쿠모''와 ''시노노메''를 포함한 8척의 일본 해군 구축함이 5척의 수송선을 지원했다.
아사다 시게하루 소령이 이끄는 일본 제5사단의 제42보병연대가 거친 바다와 부적합한 상륙 지점에도 불구하고 상륙을 감행했다.[34] 침략군은 정오에 교전 중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태국 제42보병대대, 파타니 지방 경찰, 태국 유와촌 타한 부대(벤자마 라초팃 학교의 제66유와촌 타한 훈련 부대)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었다. 태국 대대 지휘관 쿤 잉카윳보리한은 23명의 다른 사병, 5명의 지방 경찰, 4명의 유와촌 타한 멤버, 9명의 민간인과 함께 전사했다.[35]
아사다 시게하루 소령은 대만 육군 제82부대 소속이었을 때 전쟁 발발 전에 버마, 태국, 말라야에서 정보 수집 활동에 참여했으며 파타니를 적합한 상륙 지점으로 선택했다.[36]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모래 해변 너머에 있는 진흙 투성이의 해저가 침략군에게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6. 대중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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