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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D 포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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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BCD 포위망은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가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시행한 경제 제재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1930년대 일본의 만주사변 이후 팽창주의 정책과 중일전쟁, 난징 대학살 등 전쟁 범죄로 인해 국제 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이 일본에 대한 군수 물자 수출을 제한했다. 특히 1941년 미국의 대일 자산 동결 및 석유 금수 조치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ABCD 포위망은 일본의 자원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는 결국 태평양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와, 일본의 전쟁 도발을 유도했다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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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D 포위망
개요
명칭ABCD 라인
다른 명칭ABCD 포위망
ABCD 에워쌈
관련 국가미국 (America)
영국 (Britain)
중국 (China)
네덜란드 (Dutch)
정의1940년부터 일본에 대한 일련의 경제 제재 조치
배경
주요 사건만주사변 (1931년 9월 이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7월)
제2차 상하이 사변 (1937년 8월)
중일 전쟁 (지나사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북부 진주: 1940년 9월, 남부 진주: 1941년 7월)
일본의 인식쇼와 16년(1941년) 개전 직전에 정부와 군부가 선전적으로 내세운 것
상세 내용
구성 국가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
목적일본에 대한 경제 봉쇄 및 압박 강화
당시 상황영국은 무력 행동 위협
마닐라에서 영, 미, 네덜란드 3국 회담 개최
남태평양 및 남중국해에 대한 공동 작전 논의
주요 내용대일 포위망 강화
대일 공세 강화
관련 출판물1941년 9월 '일본을 포위하는 ABCD 라인' 출판
관련 자료
일본 정부 자료영미 양 수뇌, ABCD 진영 강화 결의 (민주 UP 8월 22일)
ABCD 진영, 대일전 불사 (정언보 8월 31일)
참고 자료
경제 봉쇄경제 봉쇄에서 본 태평양 전쟁 개전의 경위
일본의 시각일본의 전쟁 - 영토 확장주의의 역사

2. 명칭

ABCD 포위망이라는 명칭은 1930년대 후반 일본 제국의 선전과 교과서를 통해 퍼져나간 일본어 표현이다.[2] 이는 대동아공영권처럼 일본을 아시아의 보호자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2] 일본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는 대동아공영권 선전의 중요한 목적이 "아시아인들을 미국과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고 기록했다.[3]

ABCD 포위망은 사실상 대일 경제제재에 대한 일본 측의 다른 명칭이다.[14]

3. 정치적 배경

1930년대 초, 일본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팽창주의적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3] 1937년에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4] 난징 대학살 등 일본군의 잔혹 행위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5]

1941년 7월 26일, 미국은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수출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3]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도 동참한 사실상의 대일 경제 제재였다.[14] 경제 제재와 경제 봉쇄는 사략선 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온 강제 외교 수단이었다. 전시국제법중립국권리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교전 대상국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기 위해 중립국에 협력을 요청하는 것은 중립 의무 위반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우드로 윌슨의 14개 조항에 기초하여 집단 안보 체제가 구축되었고, 국제연맹이 설립되었다. 국제연맹 규약 제16조는 평화 구축을 위한 강제 수단으로서 경제 제재를 규정했다. 개별 국가에 의한 경제 제재는 외교적 적대 행위로 간주될 수 있지만,[15][16] 국제연맹의 틀 안에서는 합법성이 보장되었다.[14]

1932년 10월, 일본은 만주국의 독립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은 릿튼 조사단의 보고서를 받아,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4년에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폐기를 통고했다.

1941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인해 미국은 대일 자산 동결과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했고, 이로써 ABCD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러일 전쟁 이후, 미국은 만주와 러시아 시베리아 권익을 두고 일본과 갈등했다. 일본은 여러 조약을 근거로 "선전포고 없이 교전하는 기술"을 발전시킨 반면, 미국은 "선전포고 없이 경제 제재를 하는 기술"을 채택했다.

1940년 미일 통상항해조약 실효 이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수출입 제한을 강화했다. 당시 금본위제 하에서 일본 정부의 외환 결제용 해외 자산은 뉴욕과 런던에 있었고, 미국의 자산 동결은 일본에게 큰 타격이었다.

1920년대 후반, 장제스 정권은 일제 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했고, 1928년에는 상해 반일군 폭행 위원회가 조직되어 대일 경제 단절을 선언했다. 1930년대 중반, 세계는 추축국, 자유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의 3개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1939년, 미국은 일미 통상 항해 조약을 파기했고, 1940년에는 고철, 항공기용 연료 등의 수출을 제한했다.

1940년 9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주하고,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미국은 이를 일본의 팽창 정책으로 간주하고 고철과 강철의 대일 수출을 금지했다.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석유 매입 협상을 진행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항공기용 연료 공급량이 제한되었다.

1941년 7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했고, 미국은 대일 자산 동결과 석유 수출 전면 금지 조치를 취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도 이에 동참하여 일본을 압박했다. 미국의 석유 수출 금지는 일본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내 석유 비축량이 부족했기에, 일본 제국 육군을 중심으로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1941년 9월, 일본은 어전 회의에서 전쟁 준비와 협상을 병행하기로 결정하고, 11월에 갑안과 을안을 제시하여 경제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헐 노트를 통해 일본군의 중국 대륙 철수,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 파기 등을 요구했고, 이는 일본에게 협상 결렬을 의미했다.

3. 1. 중일 전쟁과 국제 관계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4] 난징 대학살을 포함한 이 사건들은 국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 특히 미국에서는 일본군의 중국 도시 폭격에 대한 보도가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했다.[5] 1939년 6월, 미국 일반 대중의 73%가 일본으로의 군수품 수출에 반대했다.[5]

국제연맹은 중화민국의 제소를 받아들여 1933년 2월 24일 총회에서 "중일 분쟁에 관한 국제연맹 특별총회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 보고서는 찬성 42표, 반대 1표(일본), 기권 1표(타이), 투표 불참 1개국(칠레)으로 가결되었다. 중화민국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규약 16조에 따른 경제 제재 적용을 요구했지만, 미국1931년 11월 11일에 이미 국제연맹의 제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 중화민국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국제연맹 총회는 1938년 9월 28일에 중국 도시에 대한 폭격을 비난하는 23개국 자문위원회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1938년 9월 30일 이사회에서는 가맹국의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규약 제16조를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어, 국제연맹 가맹국들에 의한 대일 경제 제재가 시작되었다.

고립주의 입장이었던 미국은 초기에는 국제연맹의 대일 경제 제재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러나 불전 조약과 구국 조약의 원칙에 따라 만주국주권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국제연맹과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된 후, 미국은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1937년 10월 5일 고립 연설을 통해 추축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그러나 미국 내 고립주의 여론 때문에 일본에 대한 경제적 압력은 장기적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4. 경제적 영향

ABCD 포위망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 확보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석유는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략 물자였다. 일본은 석유의 약 80%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석유 수출 전면 금지는 일본 경제에 치명적이었다.[33]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을 통해 석유 자원을 확보하려 했다. 동남아시아의 석유 생산 지역을 점령하고, 석유 노동자의 70% 이상을 투입하여 시설 복구에 힘썼다.[5] 그 결과, 1943년 1분기에는 1940년 "ABCD" 국가로부터 수입한 석유의 80% 수준까지 생산량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전쟁 이전의 석유 생산량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5]

일본은 면화 수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932년 영국령 인도가 면화 수출 관세와 면사포 수입 관세를 인상하자, 일본 방적업 단체는 면화 수입처를 미국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하며 반발했다.[18] 1933년에는 영국령 인도에서 덤핑 금지법이 시행되고, 일인 통상 조약이 파기되면서 일본은 최혜국 대우를 상실했다. 이에 일본은 인도 면화 불매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의 통상 협상이 결렬되었다.[19] 1941년에는 일본의 영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식민지 홍콩, 싱가포르, 인도에서도 유사한 조치가 취해졌다.

일본은 민간 상사를 통해 브라질,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유전 및 광산 확보를 추진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실패했다. 당시 일본 내 석유 비축량은 평시 3년 미만, 전시 1년 반 정도였기 때문에, 육군을 중심으로 조기 개전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33] 일본은 생사낙하산이나 포탄의 약낭(藥囊)으로 사용되는 전략 물자임을 들어 미국의 제재 해제를 낙관했지만, 미국은 이미 나일론을 실용화한 상태였다.

4. 1. 미국의 대일 경제 제재

미국은 1939년 일미 통상 항해 조약 파기를 통고하고, 단계적으로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14] 1940년에는 고철, 항공 연료 등의 수출을 제한했고,[21] 1941년에는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3] 이러한 조치는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팽창 정책과 인도차이나 진주 등에 대한 제재로,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유지했지만,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세계 대공황 극복을 위해 블록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대일 무역 제한 법령을 제정했다.[17]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적 압력을 점차 강화했다.[5] 1940년 미일 통상항해조약이 실효되면서, 미국은 수출입 제한을 통해 일본을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14]

미국의 경제 제재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39년 12월, 미국은 도덕적 금수 조치(모럴 엠바고)를 통해 항공 연료 제조 설비 및 기술 수출을 중단했다.[30] 1940년에는 특수 공작 기계, 철, 고철, 항공 가솔린 등의 수출을 허가제로 전환하고, 항공기용 연료는 서반구 외 지역에 전면 금수 조치했다.[21] 1941년에는 석유 수출을 허가제로 전환하고, 일본의 미국 자산을 동결한 후, 8월에는 석유의 대일 전면 금수를 단행했다.

미국의 대일 경제 제재 연표
연도사건
1939년 7월일미 통상 항해 조약 파기 통고
1939년 12월도덕적 금수 조치 (항공 연료 제조 설비 및 기술 수출 중단)
1940년 1월미일 통상항해조약 실효
1940년 6월특수 공작 기계 등의 대일 수출 허가제
1940년 7월철과 일본 철강 수출 절삭유 수출 관리법 성립
1940년 7월~8월석유 제품(주로 옥탄가 87 이상의 항공 연료), 항공 가솔린 첨가용 사에틸납, 철·고철 수출 허가제, 항공기용 연료 서반구 외 전면 금수
1940년 9월고철 전면 금수
1940년 12월항공기 윤활유 제조 장치 등 15품목의 수출 허가제
1941년 6월석유 수출 허가제
1941년 7월일본의 미국 자산 동결령
1941년 8월석유의 대일 전면 금수


4. 2. 영국, 네덜란드, 소련의 대일 경제 제재

1941년 7월 일본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자, 영국은 미국과 함께 일본의 영국 내 자산을 동결했고, 식민지 홍콩, 싱가포르, 인도에서도 유사한 조치가 취해졌다.[19]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네덜란드중립국 입장이었다. 그러나 1940년 5월 나치 독일이 서부 공세를 감행하여 본국이 점령당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네덜란드에게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일본은 1940년 5월, 일란회상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석유 200만 톤의 공급량에 합의했다.[31] 이 양은 당초 희망량의 2배였다.[31]

1941년 6월 17일, 일란회상의 방택(芳澤) 단장은 네덜란드 측에 협상 중단을 통고했다.[31] 같은 해 7월 하순, 일본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仏印)에 진주하자, 네덜란드는 미국과 영국에 접근했다.[32]

소비에트 연방은 1941년 오하 유전의 북사할린 석유 채굴권 갱신을 거부했고, 1944년에 채굴권을 상실했다.

5. ABCD 포위망의 실체와 평가

ABCD 포위망이 당시 일본에게 상당한 압박을 가한 것은 사실이나, 그 실체와 의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국 지도자들은 ABCD 포위망이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데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33][39] 당시 주일 미국 대사 조셉 그루는 헐 노트 전달에 대해 "일본이 군사력으로 주도권을 추구하면 ABCD 열강[36]과 전쟁을 하게 되고 패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37]

반면, 하타 이쿠히코 등 일부 연구자들은 ABCD 포위망이 일본의 전쟁 도발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31] 스도 마사시 등은 ABCD 포위망의 의도적 존재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47]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은 중국 침략을 계속하기 위해 이에 반대하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하게 되었다”[45]고 평가했다.

5. 1. 한국의 관점

ABCD 포위망은 1930년대 후반 일본 정부의 선전과 교과서에 의해 퍼져 나간 일본어 이름이다. 이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 점령지 명칭에서처럼, 일본을 아시아의 보호자로 묘사하려는 의도였다.[2] 일본 역사가 이에나가 사부로는 대동아공영권 선전의 중요한 측면은 "아시아인들을 미국과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썼다.[3]

1930년대 초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팽창주의적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3] 1937년, 루거우차오 사변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4] 난징 대학살을 포함한 사건들은 국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 미국에서는 일본군의 중국 도시 폭격에 대한 보도가 특히 부정적이었다. 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위협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1939년 6월 미국 일반 대중의 73%가 일본으로의 군수품 수출에 반대했다.[5] 이는 1941년 7월 26일 미국이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고, 영국과 네덜란드도 이에 동참하여 일본으로의 원자재와 석유 수출을 사실상 중단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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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간행물 写真週報181号 国立公文書館
[8] 웹사이트 英國の武力行動威嚇 恐るる必要無し ABCD對日包圍陣の展開を冷靜に見守れと都紙論ず https://hojishinbun.[...] Nippu Jiji 2024-10-06
[9] 웹사이트 對日攻勢的包圍陣強化のため マニラで英、米、蘭三國會談 https://hojishinbun.[...] Nichibei Jihō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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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制限戦争指導論 原書房 2009-05-08
[43] 서적 The Two-Ocean War Naval Institute Press
[44] 서적 国際紛争 理論と歴史 有斐閣
[45] 서적 アジア・太平洋戦争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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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학술지 国際関係史のなかの日米経済関係 : 鮎川義介の日米経済提携構想とフランクリン・ローズヴェルト政権の実力者モーゲンソー財務長官 https://doi.org/10.1[...] 東京大学大学院総合文化研究科附属グローバル地域研究機構アメリカ太平洋地域研究センター 2013-03-01
[50] 서적 逆転の大戦争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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