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카 생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일카 생굼은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활동한 케레이트 부족의 인물로, 옹 칸의 아들이자 칭기즈 칸의 경쟁자였다. 그는 칭기즈 칸과의 갈등으로 인해 케레이트 부족의 멸망을 초래했으며, 결국 타림 분지에서 카라한 왕조에 의해 처형되었다. 일카 생굼은 칭기즈 칸의 세력 확장을 방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아버지 옹 칸과의 불화, 칭기즈 칸과의 암투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몽골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 소르칵타니 베키
소르칵타니 베키는 13세기 몽골 제국의 유력한 인물로서 툴루이의 아내이자 몽케 칸, 쿠빌라이 칸, 훌라구 칸, 아리크부케의 어머니이며,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지략으로 툴루이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고 아들들을 제국 지도자로 키워냈으며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 몽골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 옹 칸
12세기 케레이트 부족의 칸인 옹 칸은 본래 토그릴이라는 이름으로, 금나라로부터 '왕' 칭호를 받아 옹 칸으로 불렸으며, 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후에 칭기즈 칸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몰락했다. - 케레이트인 - 소르칵타니 베키
소르칵타니 베키는 13세기 몽골 제국의 유력한 인물로서 툴루이의 아내이자 몽케 칸, 쿠빌라이 칸, 훌라구 칸, 아리크부케의 어머니이며,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지략으로 툴루이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고 아들들을 제국 지도자로 키워냈으며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 케레이트인 - 옹 칸
12세기 케레이트 부족의 칸인 옹 칸은 본래 토그릴이라는 이름으로, 금나라로부터 '왕' 칭호를 받아 옹 칸으로 불렸으며, 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후에 칭기즈 칸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몰락했다. - 1154년 출생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헤이안 시대 말기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한 가와치 겐지의 무장으로, 아사히 쇼군이라 불렸으나 고시라카와 법황,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대립 끝에 전사했다. - 1154년 출생 - 경대승
경대승은 1154년에 태어나 1183년에 사망한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도방을 설치했으나, 무신들의 반발과 잦은 숙청으로 정권 기반이 불안정했다.
일카 생굼 |
---|
2. 이름
『원조비사』, 『원사』 등에서는 한자로 상곤(桑昆), 당신륵중합 상곤(Nilqa Senggüm), 니르카 센군, 역랍갈 선곤(亦臈喝 鮮昆) 등으로 표기되었다. 『집사』 등에서는 페르시아어로 ايلقا سنكوم Īlqā Sankūm(일카 상쿰)으로 표기되었다. 일라카 센굼, 일루카 상군이라고도 한다. "니르카(Nilqa)"는 "유아, 아이"를 뜻하며, 『원조비사』에서는 "센군 아이"라고 불렸다. 『집사』나 『친정록』에서 "일카(Īlqā)"는 "등에"를 뜻한다고 한다. "센군(Senggüm)" 또는 "상군(Sankūm)"은 중국어에서 재상을 높여 부르는 말인 "상공(相公)"이 거란어로 차용되어 "상온(詳穏)"이 되었고, 이것이 몽골어로 와전되어 "센군"이 된 것이다. 이는 당시 귀인의 칭호나 이름으로 유목민들이 선호하여 채택한 단어이다.[1]
일카 셍굼은 옹 칸의 아들로, 케레이트 칸국의 마지막 칸(군주)이었다. 《원조비사》에는 옹 칸의 외아들로 기록되어 있지만, 《집사》에는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2]
3. 생애
아버지 토그릴 칸(옹 칸)과 테무진이 몽골의 여러 부족들과 싸우며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전했다. 1196년 토그릴 칸과 테무진은 연합하여 금나라 완안양이 주도한 타타르족 토벌에 참가했고, 토그릴 칸은 군공으로 금나라로부터 왕(王) 칭호를 받아 "옹 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셍굼은 테무진이 아버지와 함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싫어하여, 테무진과 싸워 패배한 자무카를 포섭하여 아버지와 테무진과의 동맹을 파기하려 하였다.
1202년 옹 칸과 테무진은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결혼을 약속했지만, 셍굼은 이를 이용하여 테무진을 암살하려 했다. 이 음모는 테무진이 방문을 취소하여 실패했고, 셍굼은 테무진에 대한 모략을 계속했다.
1203년 옹 칸은 셍굼의 말을 듣고 테무진의 군영을 습격했다. 테무진은 바이칼 호 부근까지 피신하여 사자를 보내 옹 칸 부자의 불신 행위를 비난했다. 옹 칸은 아들 셍굼을 질책했지만, 셍굼은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테무진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옹 칸과 셍굼 부자는 역습을 시도한 테무진의 군대에 대패하여 케레이트 부족은 멸망했다. 셍굼은 나이만으로 피신해 살해된 아버지와 별도로 행동했고, 서하를 거쳐 티베트로 망명했지만, 현지 주민에게 약탈을 하여 미움을 사고 서쪽의 타림 분지로 피했다. 그러나 셍굼은 그곳을 지배하는 카라한 왕조의 왕족에게 잡혀 살해되었다.[6][7]
3. 1. 초기 생애
옹 칸의 아들로, 케레이트 칸국의 마지막 칸(군주)이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일카 생군은 옹 칸의 외아들로 기록되어 있지만, 《집사》 "케레이트 부족지" 등에서는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2]
아버지 토오릴은 즉위 후 여러 차례 친족을 숙청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생 에르케 카라의 반란이 일어나 케레이트 칸국에서 쫓겨났다. 토오릴은 여러 나라를 방랑하다가, 과거 몽골 부락의 예수게이와 맺었던 맹우(안다) 관계를 의지하여 몽골 부락으로 도망쳤다. 《집사》에 따르면, 토오릴은 예수게이의 장남 테무진이 예수게이 사후 키야트 씨족의 유력자로 성장한 것을 듣고 몽골 부락을 의지했으며, 테무진은 토오릴을 환대하고 부자 관계와 안다 관계를 맺고 동맹했다. 이에 따라, 일카 생군과 테무진의 관계도 안다(맹우)로 취급되었다.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 토오릴과 테무진은 공동으로 몽골 고원 주변의 여러 부족과 싸워 세력을 넓혔다. 1196년, 토오릴과 테무진은 연합하여 금나라의 완안양이 주도한 타타르 부족 토벌(울자강 전투)에 참가했고, 토오릴은 군공으로 금나라로부터 "왕(왕)"(몽골어 발음으로 "옹") 칭호를 받아 "옹 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카 생군은 테무진이 아버지와 함께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싫어하여, 테무진과 싸워 패배한 몽골 부 자다란 씨족의 자무카와 내통하여 아버지에게 테무진과의 동맹을 파기하도록 참언했다.
1202년, 옹 칸과 테무진은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정략 결혼을 협의했고, 테무진은 장남 주치의 아내로 옹 칸의 막내딸 차울 베키를 요구했다. 그러나 테무진을 의붓아들로 대하는 옹 칸은 아들 일카 생군의 딸을 조치의 아내로 삼으려 하거나, 생군의 적자 토스 부카(《원조비사》에서는 토사카)에게 테무진의 딸 코진 베키를 요구하여 양자 간 반목이 일어났다. 생군은 자무카와 모의하여 케레이트 영지를 방문하는 테무진을 암살하려 했으나, 음모를 눈치챈 테무진이 방문을 중단하여 실패했다. 그럼에도 생군은 아버지에게 테무진에 대한 참언을 반복했다.[3][4]
1203년 봄, 옹 칸은 생군의 말에 넘어가 테무진의 막영을 습격하려 했지만,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테무진은 카라 칼지트 사막에서 야영했으나 케레이트군이 추격해 전투가 벌어졌다. 양군은 뒤섞였고, 생군은 뺨에 화살을 맞았다. 양군 모두 지쳐 해 질 녘 군사를 물렸다. 테무진은 발주나 호수까지 도망쳐 체제를 재정비하고 사자를 케레이트에 보내 옹 칸 부자의 불신 행위를 비난했다. 옹 칸은 일카 생군을 질책했지만, 생군은 아버지를 억누르고 테무진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다.
같은 해 겨울, 테무진 군대는 체체엘 운두르산 부근에서 술판을 벌이던 케레이트 군을 야습하여 3일 밤낮으로 포위했고, 케레이트 부는 항복했다. 옹 칸과 일카 생군은 도망쳤지만, 나이만 국경 부근의 디디크 사칼(네쿤 우순) 땅을 지키는 코리 수베치에게 옹 칸이 살해당했다. 생군은 서하의 에치나 성을 지나[5], 브리 티베트 방면으로 망명했지만, 현지 주민에게 약탈을 자행하여 원한을 사고 서쪽의 타림 분지로 도망쳤다. 생군은 쿠차의 쿠사토 차르 카슈메라는 땅에서 카라한 왕조의 카라지족 술탄인 키리시 카라에게 처자식과 함께 붙잡혀 처형당했다.[6][7]
3. 2. 칭기즈 칸과의 갈등
1196년 아버지 토그릴 칸과 테무진은 연합하여 금나라 왕족인 완안양(完顔襄)이 주도한 타타르족 토벌에 참가했고, 토그릴 칸은 군공을 세워 금나라로부터 왕(王) 칭호를 받아 옹 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카 셍굼은 테무진이 아버지와 함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싫어하여, 테무진에게 패한 자무카를 포섭하여 그를 통해 아버지와 테무진과의 동맹을 파기하려 하였다.[2]
1202년 옹 칸과 테무진은 동맹 강화를 위해 결혼을 약속하고, 이를 이용하여 테무진을 암살하려 했다. 이 음모는 테무진이 방문을 취소하여 실패했지만, 셍굼은 테무진에 대한 모략을 계속했다.[3][4]
1203년 옹 칸은 셍굼의 말을 듣고 테무진의 군영을 습격했다. 테무진은 바이칼 호 부근까지 피신하여 사자를 보내 옹 칸 부자의 불신 행위를 비난했다. 옹 칸은 아들 셍굼을 질책했지만, 셍굼은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테무진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옹 칸과 셍굼 부자는 역습을 시도한 테무진의 군대에 대패하여 케레이트 부족은 멸망했다. 일카 셍굼은 나이만으로 피신해 살해된 아버지 옹 칸과 별도로 행동했고, 서하를 거쳐 티베트로 망명했지만, 현지 주민에게 약탈을 하여 미움을 사고 서쪽의 타림 분지로 피했다. 그러나 셍굼은 그곳을 지배하는 카라한 왕조의 왕족에게 잡혀 살해되었다.[5][6][7]
3. 3. 케레이트의 멸망
1202년 옹 칸과 테무진은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결혼을 하기로 하였으나, 셍굼은 이를 이용하여 테무진을 암살하려 했다. 이 음모는 테무진이 눈치채고 방문을 취소하여 실패했고, 셍굼은 테무진에 대한 모략을 반복했다.[3][4]
1203년 옹 칸은 셍굼의 말을 듣고 테무진의 군영을 기습했다. 테무진은 바이칼 호 부근까지 피신했고, 케레이트에 사자를 보내 옹 칸 부자의 불신 행위를 비난했다. 옹 칸은 아들 셍굼을 질책했지만, 셍굼은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테무진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옹 칸과 셍굼 부자는 테무진 군대의 역습에 대패하고, 케레이트 부족은 멸망했다. 일카 셍굼은 나이만으로 피신해 살해된 아버지 옹 칸과 별도로 행동했고, 서하를 거쳐 티베트로 망명했지만, 현지 주민에게 약탈을 하여 미움을 받고 타림 분지로 도망쳤다. 그러나 셍굼은 그곳을 지배하는 카라한 왕조의 왕족에게 잡혀 살해되었다.[6][7]
3. 4. 죽음
1203년 겨울, 옹 칸과 셍굼 부자는 남하하여 역습을 시도한 테무진의 군대에 대패를 당하고, 케레이트는 멸망했다. 일카 셍굼은 나이만으로 피신, 아버지 옹 칸이 살해된 뒤 별도로 행동하여 서하를 거쳐 티베트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현지 주민에게 약탈을 하여 미움을 사고, 서쪽의 타림 분지로 피했다. 셍굼은 그곳을 지배하는 카라한 왕조의 왕족에게 잡혀 살해되었다.[6][7]
4. 가족
일카의 아버지는 토사카이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