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맹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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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본주의 맹아론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백남운 등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사관에 입각, 조선 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연구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서구 사회 발전 모델을 동아시아에 적용하여,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존재했음을 주장한다. 해방 이후 북한과 한국 사학계에 영향을 미쳤으나, 한국사 해석을 서양식 역사 발전 도식에 맞추는 것에 대한 비판과 소농사회론 등 반론도 제기된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혜론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하며, 내재적 발전론과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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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맹아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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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탄생 배경
일제강점기 조선은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등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 의한 역사 왜곡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들은 조선 사회가 정체되어 발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외부의 충격 없이는 영원히 정체될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사편수회는 이러한 식민사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5]
이러한 상황에서 백남운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사관에 기초하여 조선 사회가 이미 봉건사회 단계에 진입했으며, 자본주의적 요소가 싹트고 있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는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반박하는 강력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백남운의 학설은 불온하게 여겨지기도 했다.[6]
2. 1. 식민사관의 정체성론 비판
일제강점기 조선은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등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여러 역사 왜곡에 노출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 사회를 정체된 사회라고 평가했으며, 외부의 충격 없이는 영원히 정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제공하였다.[5]당시 사학자 백남운은 1933년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사관에 근거한 역사경제학 서적인 『조선사회경제사』를 펴냈다. 1937년에는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통해 조선이 이미 봉건사회단계에 진입했음을 주장하였다. 식민사학자들의 정체성론은 백남운의 이론에 의해 거센 비판을 받았고, 학문적 타당성에 큰 훼손을 입었으나, 식민지 상황으로 인해 백남운의 학설은 불온한 사관으로 인식됐다.[6]
2. 2. 백남운의 역할
일제강점기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등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조선 역사를 왜곡하고 조선 사회가 정체되었다고 주장했다. 조선사 편찬 위원회(후에 조선사편수회)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공했다.[5]백남운은 1933년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사관에 기반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고, 1937년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통해 조선이 이미 봉건사회 단계에 진입했음을 주장했다. 백남운의 이론은 식민사학자들의 정체성론을 비판하고 학문적 타당성을 훼손했지만, 당시 식민지 상황 때문에 불온한 사관으로 인식되었다.[6]
백남운은 해방 후 북한 사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김용섭의 경영형 부농론이 자본주의 맹아론의 추가적인 근거로 확산되며 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7]
2. 3. 대한민국 사학계의 수용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은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등의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여러 역사 왜곡 환경에 노출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 사회를 정체된 사회라고 평가했으며, 조선사 편찬 위원회(후에 조선사편수회로 개칭)는 이러한 주장의 기반이 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5]동시대 사학자인 백남운은 1933년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사관에 근거한 역사경제학 서적인 『조선사회경제사』를 펴냈다. 1937년에는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통해 조선은 이미 봉건사회단계에 진입한 사회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식민사학자 집단이 주장하는 정체성론은 백남운의 역사 이론에 의해 거센 비판과 반박을 받았고, 곧 식민사학은 학문적 타당성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훼손을 입었으나, 식민지라는 특수한 당시 상황에 의해 백남운의 학설은 불온한 사관으로 인식됐다.[6]
백남운은 해방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대한민국 내에서는 김용섭을 주도로 자본주의 맹아론의 추가적인 근거가 될 수 있는 경영형 부농론이 확산되었으며, 압도적인 근거로 대한민국 사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7]
3. 이론의 기원과 발전
자본주의 맹아론은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 도식을 동양사에 적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서구 사회가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로 이행한다고 보았으나, 동양 사회는 정체된 것으로 진단하였다.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양 사회를 봉건사회의 일반적 형태로 규정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을 수정하였다.
3. 1. 카를 마르크스의 초기 이론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서구 사회가 원시공산사회, 고대노예사회, 중세봉건사회를 거쳐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발달하면서 근대자본주의사회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봉건사회에서 인쇄술 및 상업 발달이 일반 대중의 의식 수준을 향상시키고, 경제 생산 관계에서는 소규모 소생산에서 대규모 대량생산 체계로 변화하여 봉건적 소유 관계가 소멸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봉건사회에서 상업 활동을 했던 선진계급이 자본 투자를 통해 봉건사회의 후진성을 파괴하고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를 확립한다고 보았다.그러나 마르크스는 동양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 진단하였다.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de)에 따르면,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는 서양의 봉건제와 다른 정체된 사회였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유물사관에 따라 당시 아시아 사회를 노예제와 봉건제가 혼재된 정체적 사회로 진단하였다. 그는 동양 사회의 화폐 관계가 미발달 상태이고, 왕권을 통해 토지 생산물 수취가 이루어지기에 봉건사회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봉건제와 다르며, 모든 경제 요소에 대한 소유 권리가 전제군주에게 전유된 전제주의 체제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오늘날 노예제와 봉건제가 혼재된 것으로 이해된다.[8][9]
3. 2. 이오시프 스탈린의 수정
이오시프 스탈린은 1931년 레닌그라드 회의에서 동양 사회가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봉건사회의 일반적 형태라고 규정하였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코민테른 극동서기처를 통해 중국 혁명을 지도하고 있었으며, 중국 사회를 면밀히 연구하고 있었다. 특히, 소비에트 연방 사회과학원은 전근대 중국 왕조의 토지제도를 연구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토지제도가 왕전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광범위한 소유권을 인정한 토지사유제라고 평가하였다. 이어서 이들은 중국에서 농민의 성격은 일반적인 지주-소작 관계이며, 전근대 중국 왕조의 관료들은 일반적인 지주, 영주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8][9] 따라서 자본주의 맹아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 사관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사관에 가깝다.3. 3.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사관과의 관계
이오시프 스탈린은 1931년 레닌그라드 회의에서 동양 사회가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봉건사회의 일반적 형태라고 규정하였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코민테른 극동서기처를 통해 중국 혁명을 지도하고 있었으며, 중국 사회를 면밀히 연구하고 있었다. 특히, 소비에트 연방 사회과학원은 전근대 중국 왕조의 토지제도를 연구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토지제도가 왕전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광범위한 소유권을 인정한 토지사유제라고 평가하였다. 이어서 이들은 중국에서 농민의 성격은 일반적인 지주-소작 관계이며, 전근대 중국 왕조의 관료들은 일반적인 지주, 영주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8][9] 따라서 자본주의 맹아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 사관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사관에 가깝다.4. 조선 봉건사회의 발전 단계
백남운은 자신의 연구에서 한반도 봉건사회의 발전 단계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했다.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는 초기 봉건사회가 형성되는 시기였고, 고려 중기부터 조선 시대까지는 중앙집권적 봉건국가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조선 중기 이후는 농촌에서 지주전호제가 성립되고 발전하는 시기였다.
각 시기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초기 봉건국가 형성 (신라 말 ~ 고려 초): 향·소·부곡(鄕·所·部曲)으로 대표되는, 자유민과 농노의 성격이 혼재된 농민층이 등장했다.
- 중앙집권적 봉건국가 (고려 중기 ~ 조선): 개정전시과(고려), 과전법(조선) 등 토지 제도를 통해 중앙집권화가 강화되었다. 지주전호제(地主田戶制)가 형성되었다.
- 농촌 지주전호제 관계 성립 (조선 중기): 이모작과 수도작(水稻作)법 도입으로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를 기반으로 한 지주전호제가 확산되었다. 도지권(賭地權), 도장권(導掌權) 등 소작농의 권리가 보장되는 독특한 소작 제도가 발전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농업생산력 발달과 조세의 변화는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이끌었다. 인구 증가와 농민 계층 분화 속에서 비농업 인구의 도시 유입이 늘면서 상업이 발달했다. 관청과 결탁한 어용상인 공인이 시전과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독점적 도매상인 도고로 성장했다. 도고는 상권을 독점하고 수공업자들과 선대제를 이루어 상업 자본으로 발전해 갔다. 지방 장시의 객주, 여각들이 도고로 발전하여 전국적인 상업망을 개척하였으며 경강상인, 송상등이 전국에 상권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내재적 발전은 강화도 조약 이후 외래 자본주의의 충격과 맞물려 조선 사회의 모순을 심화시켰고, 신분제 붕괴와 몰락 양반 속출로 이어졌다.
4. 1. 초기 봉건국가 형성 (신라 말 ~ 고려 초)
백남운은 자신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에서 한반도의 초기 봉건국가가 신라 말기에 형성되어 고려 초기에 확립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삼국시대 이전은 고대 노예사회였다고 분석했다. 백남운은 향·소·부곡(鄕·所·部曲)의 존재와 그 성격 변화에 주목했다. 신라 시대의 부곡은 일반적인 국유 노예로 기능했지만, 고려 시대 이후부터는 자유민과 농노의 성격이 혼재된 형태로 기능했다. 특히 고려 시대의 향과 부곡은 완전한 천민은 아니었지만, 토지 관계에 종속된 소생산자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봉건 사회 형성의 초기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1]4. 2. 중앙집권적 봉건국가 (고려 중기 ~ 조선)
백남운은 자신의 저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에서 고려 중기 이후와 조선을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로 정의하였다.[10]백남운은 고려가 중앙집권적 봉건국가의 성격을 보이기 시작한 시점을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가 시행된 998년 무렵으로 보았다. 이 시기 고려는 성립 초기 불안정했던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 봉건적 수탈의 기초가 되는 관료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새롭게 요구된 토지 제도가 바로 개정전시과였다.[11]
조선은 이전의 봉건사회에 비해 중앙집권적 성격이 한층 강화된 왕조였다. 조선은 성립 과정에서 과전법을 시행하여 고려 토지 귀족의 경제적 권한을 일부 회수하고, 대신 중앙집권적 성격 강화에 협력한 혁명파 사대부에게 경제적 권한을 보장하였다. 이후 조선 태종은 6조직계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백남운은 이를 통해, 노예제적 성격이 혼재되었던 고려 사회와 달리 조선 사회에서는 봉건적 소유 관계가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보았다.
이 시기 토지는 기본적으로 소유권이 보장된 상태였으며, 혁명파 사대부는 고려 시기 권문세족의 경제적 계보와 큰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상부 구조 내의 지엽적인 변화에 불과했다. 성종 이후 관수관급제 시행으로 녹봉제가 일반화되었으나, 동시에 양반 계층은 경제적 기득권을 추구하였고 그 결과 농촌에서는 광범위한 지주전호제(地主田戶制)가 형성되었다.
4. 3. 농촌 지주전호제 관계 성립 (조선 중기)
양란 이후 재지양반(在地兩班)이 간척지와 황무지 개간을 주도하여 조선식 장원이 형성되었다. 양반의 농장은 주로 전호인 노비나 양인들이 경작하였는데, 그중 노비가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는데, 양반지주의 농장을 경작하는 외거노비가 가장 일반적이었다.[1]17세기 중엽까지 농장은 크게 흥했으나, 이모작과 물을 대어 논을 만드는 수도작(水稻作)법이 도입되면서 큰 변화를 맞는다. 이모작으로 전호는 더 이상 밭을 묵혀둘 필요가 없어졌고, 수도작법에서는 모를 심거나 모 주변 잡초 제거가 중요했는데 농지가 작을수록 유리하였다. 이 때문에 영세경작이 유행하자 농장경영은 점차 쇠퇴하였고, 농장 농민이 종자를 빼돌려 자기 논밭에 심는 등 양반농장보다 자기 논밭에 힘을 쓰는 경우가 많아 농장 생산량은 감소하였다.[1]
이에 양반지주는 농장을 포기하고 전호에게 소작을 내주고 수확의 절반을 소작료로 받는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를 시행하였다. 병작제(竝作制)는 조정에서 수취를 금지하고 규제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도리어 관청인 아문과 왕실인 궁방이 소작지를 형성하여 궁방전(宮房田), 아문둔전(衙門屯田), 역둔토(驛屯土) 등이 생겼다.[1]
노비조차 자기 땅이 있는 경우가 많아 자작과 소작을 겸하는 자소작농이 대부분이었다. 노비 중에서는 소작으로 부를 쌓고 속인제도를 통해 양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소작권은 관습으로 보호받았는데, 아문둔전과 궁방전을 경작하는 소작농민에게는 도지권(賭地權)이 있어 농토를 다른 용도로 처분할 수는 없지만, 경작권은 매매, 증여, 상속, 저당까지 가능하였다. 도지권이 설정된 땅을 지주가 팔아도 도지권은 제외된 채 팔리는 등 지주가 임의로 소작농민의 도지권을 처분할 수 없었다.[1]
조선 후기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소작료를 현물이 아닌 일정 액수의 돈으로 지불하는 방식도 잠시 도입되었으나, 물가 급등과 화폐 가치 하락으로 직물이나 쌀을 거래 수단으로 삼는 현물 소작료로 다시 돌아갔다.[1]
궁방전과 아문둔전에는 도장권(導掌權)이 있었는데, 궁방에게 조세 수취를 위임받아 일정액만 상납하고 땅에 지세를 걷는 권리였다. 땅을 매각하거나 처분할 수는 없지만 궁방 상납액보다 많은 지조를 거둬 이익을 보는 자가 많았다. 단, 이 권리는 궁방이 토지를 매각하면 소멸하였다.[1]
이처럼 한국의 소작제도는 민유지와 국유지가 혼재된 상황에서 다양한 중간 권리와 소유권이 중첩되어 얽힌 형태로 발전했다. 특히 도지권을 비롯한 소작인의 권리는 지주의 토지처분권과 공존하며 지주 횡포에 농민 경작권이 함부로 훼손되지 못하게 하는 방어기제였다.[1]
또한 지주 상당수가 소작농과 함께 소작지 인근에서 생활하는 재지지주였던 것도 소작인이 보호받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들은 재산과 소작인과의 관계를 통해 향촌 사회에서 기득권을 얻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소작농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1]
4. 4. 조선 후기의 농업 양상과 상업 발전
17세기 후반, 도지권과 지주전호제가 완전히 일반화되었다. 이 시기 이앙법 발달과 저수지 확산, 시비법 등의 발달로 이모작이 가능해져 농지 이용도가 증가했고, 그 결과 소작 관계에 있는 농민의 소득이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서민 지주가 등장했고, 양반이 아닌 사람들에 의한 지주-소작 관계가 폭넓게 형성되었다. 그 결과 소작농은 더욱 증가했으며, 소작쟁의가 발생하게 된다.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 최윤규는 『근현대 조선경제사』를 통해 조선 후기의 농업 구조를 분석했다. 조선 후기의 농업생산력 발달과 조세의 전세화 및 금납화는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인구가 증가하고 농민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어 가는 속에서 비농업 인구의 도시 유입이 현저해짐으로써 상업은 더욱 발달하였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의 중심이 된 것은 관청과 결탁하고 대동법으로 나타난 어용상인 공인이 서울 시전과 지방의 장시(보부상)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이에 특정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까닭에 독점적 도매상인 도고로 성장하였다. 도고는 물종에 따라 공동 출자를 해서 조직하고 상권을 독점하고 수공업자들과 선대제를 이루어 점차 상업 자본으로 발전해 갔다. 이러한 농산물 및 수공업 제품(안성의 유기 그릇, 통영의 나전칠기 등)의 활발한 유통을 배경으로 한 공인의 성장에 자극받아 역시 도고 상인으로 성장하였다. 지방 장시의 객주, 여각들이 도고로 발전하여 전국적인 상업망을 개척하였으며 서울 한강 연안의 경강상인들은 경기, 호서 일대에서 미곡, 어물, 소금 등의 판매에 종사하였고 개성의 송상은 인삼 유통으로 경기 중심, 북으로는 황해, 평안도까지, 남으로는 충청, 경상도까지 상권을 확대하여 전국에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였다.[12]
강화도 조약 이후에는 외래의 자본주의 충격까지 더해져서 조선의 내재적 모순성은 극대화되었다. 이 시기 신분제가 사실상 붕괴하였고, 몰락 양반이 속출하였다.[13]
5.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과 영향력
자본주의 맹아론은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이론으로 인식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부 수립 이후부터, 대한민국은 1970년대 이후부터 이 이론을 주류적 관점으로 삼았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한반도 남북 모두에 영향을 주었으며, 상당한 학설로 인정받고 있다.[1] 그러나 한국사를 서양식 역사 발전 도식에 맞춰 해석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맹아론은 조선사 해석에 있어서 현재까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5. 1.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혜론의 비판
자본주의 맹아론은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이론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생겨났으며, 1970년대 이후부터 대한민국에서 주류적 관점이 되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혜론의 주요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혜론은 사학자가 아닌 경제학자 및 정치학자에 의해 제기된 비판이며, 논문의 다수가 자체적으로 결성한 학회에서만 통과되고 있다는 한계점이 있다. 추가적으로, 이러한 연구는 일본 자료에 대한 부분적인 편취와 기초 역사학에 관한 몰이해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다.5. 2. 소농사회론의 비판
자본주의 맹아론은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이론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생겨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부 수립 이후부터 이러한 역사관을 기초로 나아갔으나, 대한민국은 1970년대 이후부터 이러한 이론이 주류적 관점이 되었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영향은 한반도 남북을 가리지 않으며, 상당한 학설로 인정받고 있다.[1]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영향력만큼 비판도 상당히 많다. 특히, 한국사를 서양식 역사 발전 도식에 맞춰서 해석할 수 없다는 비판과, 조선 후기는 부농이 등장했어도 극소수였으며 소농사회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는 소농사회론이 대두되었다.[1]5. 3. 탈근대 담론의 비판
근대 이후 성립된 발전 도식 사관을 인정하지 않는 탈근대 담론에 의한 비판이 제기된다.6. 내재적 발전론과의 관계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발전 양상을 내재적 요인을 중심으로 분석하지만, 자본주의 맹아론은 내재적 요인과 외재적 요인을 모두 변수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단, 둘 다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기반한다는 점에서는 같다.[1]
참조
[1]
뉴스
지구촌류 시대, 서구 콤플렉스가 낳은 실학과 결별할 때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0-07-30
[2]
뉴스
"국민국가 인식에 갇힌 채 일본 비판하는 건 에너지 낭비"
http://m.hani.co.kr/[...]
한겨레
2020-07-30
[3]
논문
조선 후기 자본주의맹아론과 그 대안
[4]
뉴스
‘내재적 발전론’ 둘러싼 ‘도전과 응전’ 불붙나
http://www.hani.co.k[...]
한겨레
2020-07-30
[5]
서적
제국 일본의 역사학과 `조선`
소명출판
[6]
뉴스
'[강만길의 내 인생의 책](2) 조선봉건사회경제사 - 식민사학 극복의 디딤돌'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20-06-12
[7]
뉴스
'[김영민 연재] 한국학의 신은 숨어 있지 않다'
https://www.hankooki[...]
한국일보
2020-06-12
[8]
서적
Black Earth, Red Star: A History of Soviet Security Policy, 1917-1991
https://web.archive.[...]
Cornell University Press
2014-12-19
[9]
간행물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еволюция
БСЭ
[10]
서적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이론과실천
[11]
서적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이론과실천
[12]
서적
근현대 조선경제사
갈무지
[13]
서적
근현대 조선경제사
갈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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