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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족연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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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서 독립운동 진로를 협의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대미외교 등을 결의하고, 대한인동지회, 한국독립당, 대한인국민회 등 여러 단체가 참여했다. 초기에는 중한민중동맹단의 탈퇴, 주미외교위원부와의 갈등, 이승만과의 대립 등으로 내분을 겪었다. 1944년에는 주미외교위원부와 별도로 워싱턴 사무소를 설치하고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신진당에 참여했으나 독자적인 활동을 지속하며 미주 한인 사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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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1941년 4월
해산1945년 8월 15일 이후
유형미주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
주요 활동군자금 모집
외교 활동
선전 활동
관련 인물이승만
정한경
임정애
김호
박용만
조병옥
윤치영
최능익
이원순
서재필
안창호
김종림
황사국
이종관
한시대
장리욱
상세 정보
결성 배경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미주 지역 한족 단체의 통합 필요성 증대
주요 목표임시정부 지원
한국 독립 쟁취
활동 내용군자금 모금 및 전달
미국 정부 및 여론 대상 외교 및 홍보 활동
한국 독립 지지 기반 확대
조직 구조총회
집행위원회
각 지역 지부
주요 성과임시정부 재정 지원
미국 내 한국 독립 운동 지지 세력 확대
해체 이유1945년 광복 이후
조직의 존립 목적 소멸
역사적 의의미주 지역 한국 독립 운동의 구심점 역할 수행
임시정부 지원 및 한국 독립 쟁취에 기여

2. 역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를 계기로 미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로 결성되었다.[3][2] 초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외교 활동에 주력했으나, 설립 직후부터 내부 갈등을 겪었으며[4] 이승만이 이끌던 주미외교위원부와의 대립 과정에서 점차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해방된 조국의 정치 상황에 참여하여 좌우합작운동 지지 등 통일 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2. 1. 결성 (1941)

1941년 4월 20일부터 4월 27일까지 8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열렸다. 이 대회는 해외 한족 대표들이 모여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맞춰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되었다.[3]

대회 마지막 날인 1941년 4월 29일, 참석자들은 독립 전선의 통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및 봉대(奉戴), 군사 운동 추진, 대미 외교 기관 설치, 미국 국방 공작 후원, 독립 자금 마련, 연합 기관 설치 등 7개 항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아우르는 연합 기관으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이하 연합회)가 조직되었다.[2] 연합회에 참여한 단체와 대표는 다음과 같다.[2]

단체대표
대한인동지회안현경, 리원슌, 도진호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림셩우
북미 대한인국민회한시대, 김호, 송죵익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안원규, 김현구, 김원용
중한민중동맹단차신호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련합회권도인
대조선독립단강샹호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심영신, 민함나


2. 2. 중한민중동맹단의 연합회 탈퇴 (1941)

연합회는 설립 초기부터 내부 갈등을 겪었다. 한길수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을 중한민중동맹단,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워싱턴 대표라고 주장하며 이승만의 활동을 견제했다. 1942년 중국 충칭에 있던 김원봉한길수조선민족전선연맹의 미국 전권 대표로 임명했고, 이듬해인 1943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 지부 워싱턴 대표로도 임명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한길수는 결국 1942년 2월 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이후 중한민중동맹단은 연합회에서 탈퇴하였지만, 한길수는 중한민중동맹단을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사회에 한국 독립 운동 지원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활동을 이어갔다.[4]

2. 3. 주미외교위원부와의 갈등 (1942~1945)

1942년 연합회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에 독립금을 지원하는 만큼의 권한을 요구하며 주미외교위원부 위원 2명의 추가 임명을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5] 이승만은 정부 기관과 민간 단체의 역할 분담을 내세우며 사실상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6] 이승만은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주미외교위원부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 사회가 운영되어야 한다며 연합회를 종속시키려 했고, 연합회가 모금한 독립금까지 요구했다.[7]

이에 연합회는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이승만의 외교 활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이나 무기 대여 등 핵심적인 목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자,[8][4] 1943년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외교 실패, 권력 남용 등을 이유로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직 해임을 임정에 요청할 것을 연합회에 요구했다.[8][4] 연합회는 이승만이 독점하던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하여 연합회도 참여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승만이 거부하자, 임정에 이승만의 면직을 직접 청원하기에 이르렀다.[9]

갈등이 격화되면서 연합회는 1943년 8월 6일 워싱턴 D.C.에 독자적인 사무소 설립을 추진하고,[10] 8월 13일에는 이승만 소환을 결의했으며,[10] 10월 6일에는 이승만을 실권 없는 고문으로 추대하고 주미외교위원부의 권한을 축소할 것을 임정에 요청했다.[11] 또한 1943년 11월 9일 이승만에 대한 재정 지원 중단을 결의하고,[12] 12월 20일에는 주미외교위원부 지원금 자체를 취소했다.[1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1943년 12월 23일 연합회를 탈퇴했고, 이후 연합회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단독으로 운영되었다.[9]

대한인동지회 탈퇴 후에도 연합회는 1944년 6월 10일 워싱턴사무소를 개설하여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고,[7]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 임정 요인들에게 이승만 대신 연합회를 지지해 줄 것을 촉구했다.[13][14] 1944년 8월 3일 임시정부는 연합회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로 개조하기로 결정하고,[15] 연합회와 대한인동지회가 협력하여 대표 대회를 열어 위원을 선출하도록 지시했다.[16]

그러나 대표 선출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대한인동지회가 대표 대회에 불참하면서[19][20] 통일적인 위원 선출은 무산되었다.[21][7] 결국 1944년 11월 20일 임시정부는 대표회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직접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을 임명했는데, 위원장에는 이승만이 유임되고 연합회 측 인사들도 일부 포함되었다.[22] 임시정부는 포고문을 통해 과거의 갈등을 덮고 단결할 것을 호소했지만,[20][23] 이 결정은 오히려 미주 한인 사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연합회는 임정이 임명한 주미외무위원회에 대한 재정 지원을 거부하고 워싱턴사무소를 유지하며 독자 노선을 이어갔다.[24] 이러한 갈등은 1945년 광복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2. 3. 1. 주미외교위원부 위원 임명 요청 (1942)

1942년 7월 21일 연합회는 당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던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해외한족대회 결의안 제4조 (나)항에 의거하여 주미외교위원부 위원 2명을 추가로 임명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연합회는 이 2명이 연합회에서 추천한 인물이며, 연합회 파견 대표가 아니라 주미외교위원부의 정식 위원으로 임명되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이는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권한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5]

이에 대해 이승만1942년 11월 28일 연합회의 김호(金乎)와 전경무(田耕武)에게 답신을 보내, 정부 기관인 주미외교위원부와 민간 단체인 연합회 간의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6]

2. 3. 2. 대한인국민회의 이승만 소환 요청 (1943)

이승만은 자신이 관장하는 주미외교위원부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 단체들이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합회를 주미외교위원부에 종속시키고 연합회가 걷는 독립금을 넘겨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연합회는 전체 미주 한인의 뜻을 모아 설립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리기관인 주미외교위원부에 종속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7] 이러한 주미외교위원부와 연합회 간의 갈등은 1943년에 들어 더욱 심화되었다.

이승만과 주미외교위원부는 1941년부터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재미 한인의 군사훈련 계획을 승인받았다. 이를 통해 1942년부터 장석윤, 장기영 등 38명이 카타리나섬에서 두 차례에 걸쳐 군사훈련을 받았고, 이는 후일 미군의 납코(NAPKO) 작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추진한 독수리 작전(Engle Project), 화북 작전 등을 수행하는 데 기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이나 무기 대여 요청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북미 대한인국민회1943년 1월 14일, 이승만의 외교 실패, 권리 남용, 그리고 이로 인한 한인 사회의 분열과 혼란 등을 이유로 들어 그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직 해임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요청할 것을 연합회에 요구하는 등 이승만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8][4]

2. 3. 3. 대한인동지회의 연합회 탈퇴 (1943)

연합회이승만이 독점적으로 운영하던 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를 요구하며 연합회의 참여를 주장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연합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직에서 면직시켜 달라고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1943년 8월 6일, 전경무는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에 대응하기 위해 워싱턴 D.C.에 연합회 사무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10] 같은 해 8월 13일 연합회는 이승만 위원장을 소환하기로 결의하고,[10] 10월 6일에는 임시정부에 이승만을 명예직인 고문으로 추대하여 실권에서 배제하고, 주미외교위원부에 부여된 신임과 전권을 철회하며 임정의 비준을 받도록 개조할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10월 12일 연합회의 안원규는 이 결의안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11]

대한인동지회이승만 지지자들은 연합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이승만에게 자금을 보내는 등 독자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에 연합회는 1943년 11월 9일 이승만에 대한 재정 지원 중단을 결의하고, 12월 20일에는 주미외교위원부에 대한 지원금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1월 10일 안원규는 이 결정 사항을 이승만에게 통보했다.[12]

결국 대한인동지회이승만 지지 및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반대 등을 이유로 1943년 12월 23일 연합회에서 탈퇴하였다. 이로 인해 연합회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단독으로 운영되게 되었다.[9]

대한인동지회 탈퇴 이후에도 연합회는 독자적인 노선을 강화했다. 1944년 6월 10일 연합회는 주미외교위원부와는 별개로 워싱턴사무소를 설치하여 자체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7] 6월 13일 연합회의 한시대(韓始大)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에게 미주와 하와이의 중심 기관으로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가 아닌 연합회를 선택해 줄 것을 촉구했으며,[13] 7월 24일에는 김규식, 김원봉에게도 연합회와 이승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14]

2. 3. 4.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안 (1944)

1944년 8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연합회의 문제 제기를 수용하여 국무회의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駐美外務委員會)로 개조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규정을 통과시켰다.[15] 이어 8월 12일,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에 업무 정지를 명령하고, 연합회대한인동지회가 협력하여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의 대표 대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규정에 따라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할 것을 지시했다.[16]

그러나 1944년 9월 12일, 대한인동지회는 주미외교위원부 개조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였다.[19] 동지회가 재미한족전체대표회 참석을 거부한 이유는 대표 파견 규정 때문이었다. 준비위원회는 '구성원 60명 이상 단체는 대표 5명, 60명 이하 단체는 대표 3명 파견'을 요구했는데, 이는 참여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동지회에게 매우 불리하고 불공평한 조건이었다.[20]

결국 대한인동지회와 동지회 측 대한부인구제회가 불참한 가운데, 1944년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재미한족전체대표회가 열렸고, 미주 단체들은 주미외교위원부 개조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였다.[21][7]

1944년 11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대한인동지회의 불참을 이유로 재미한족전체대표회에서 선출한 인원을 인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임시정부는 동지회의 불참이 잘못이라 하더라도, 주요 단체인 동지회가 빠진 회의 결과는 정부의 기대와 지령대로 원만한 전체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판단했다.[22]

이에 따라 1944년 11월 20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재미 각 단체 대표회가 원만히 되지 못하였음으로 이제는 정부에서 각방 정세를 참작하고 각 방안을 망라하야 주미외무위원회 인원을 선임하기로 하고"라며 직접 위원을 임명했다. 위원장에는 이승만, 부위원장에는 김원용, 비서주임에는 정한경이 선임되었으며, 이들을 포함하여 한시대, 김호(金乎), 李蕯音, 변준호(卞俊鎬), 안원규(安元奎), 송헌주(宋憲澍) 등 총 9명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22]

1944년 11월 28일, 임시정부는 '재미동포에 대한 국무위원회 포고문'을 통해 주미외무위원회 설립을 공식 선포했다. 포고문에서 임시정부는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해 모든 유권자의 조화되고 통일된 의견에 기반한 추천을 선호했으나, 불행히도 빠져서는 안 되는 조직(대한인동지회)이 대표회의에 불참해 완전한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명하며, 이로 인해 대표회의의 추천을 승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새로운 임명은 과거의 모든 대표 임명 구조를 대체하는 것"이라며, 새로 임명된 9명의 위원들에게 신뢰를 보내줄 것을 당부했다. 임시정부는 전쟁 상황의 급박함, 임정의 신망 유지, 재미 동포의 지위 향상, 조국의 염원 실현, 동맹국의 기대 부응, 그리고 고질적인 내부 분열 극복 등을 이유로 들며 과거의 갈등을 묻고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20][23]

하지만 임시정부의 이러한 결정은 미주 한인사회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임정의 지시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워싱턴에 외교사무소를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연합회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내에서 의견이 갈렸으며, 중경의 임시정부 내에서도 새로 구성된 주미외무위원회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다.[24]

1945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장 홍진에게 1944년 8월 3일 개정했던 주미외교위원회 규정의 추인안을 제출하였다.[25] 같은 날, 임시정부는 '미주문제해결안'이라는 문서를 통해 주미외교위원부 문제의 경과와 결과를 정리하여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는 재미한족전체대표회에서 선출되었으나 인준되지 못한 위원 명단(위원장 김원용, 부위원장 한시대, 비서주임 전경무 등 15인)과 최종적으로 임시정부가 직접 임명한 위원 명단(위원장 이승만, 부위원장 김원용, 비서주임 정한경 등 9인)이 명시되었다.[26] 한편, 로스앤젤레스의 연합회는 임시정부가 임명한 주미외교위원회에 대한 재정 지원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워싱턴사무소를 계속 유지했다.[24]

2. 4. 독자활동 (1944~1945)

주미외교위원부는 논란 끝에 주미외교위원회로 개편되었으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인적 구성이나 운영 방식은 이전과 동일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연합회의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연합회로부터 재정 지원이 끊기자, 주미외교위원부는 이승만 지지 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24]

이후 연합회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한다는 초기 입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는 1944년 4월, 통일 내각을 구성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과는 배치되는 움직임이었다. 연합회의 이러한 독자 행보는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창설대회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승만 중심의 정부 대표단과는 별도로 연합회가 독자적인 한족 대표단을 조직하여 파견한 것이다.[27]

2. 5. 광복 이후

1945년 광복 이후 연합회는 해방된 조국의 정치 상황에 참여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특정 정파에 치우치기보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 국가 건설에 기여하고자 했으며,[28]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독립 정부 수립의 어려움을 인정하며 조건부 수용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29] 1946년에는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고[30] '좌우합작, 통일정부 수립, 민중생활 안정'을 3대 원칙으로 발표하는 등[31] 분열된 정치 세력의 통합과 통일 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2. 5. 1. 신탁통치 찬성 및 좌우합작운동 지지 (1945~1946)

1945년 12월 27일, 연합회 대표단 김병환(金秉煥)은 당시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한국민주당이 주관하는 국민대회에 대해 "일당 일파의 주의주장에는 추종할 수 없다"며 불참 의사를 명확히 했다. 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관하는 특별정치위원회(特別政治委員會)에 대해서는 국가 독립을 위한 협의라면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겠다며 참여 의사를 표명했다.[28] 이는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 국가 건설에 기여하려는 연합회의 입장을 보여준다.

1945년 12월 29일, 연합회 대표 전경무는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과거 미국 국무부 극동부장 존 카터 빈센트에게 신탁통치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적이 있으나, 해방 후 조선이 즉시 독립 정부를 수립하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며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최고 5개년간이라고는 했지만 그 안에 우리가 행정에 대한 모든 실권을 잘 운영해 간다면 그 이내에 신탁통치는 단축될 것"이라며, 신탁통치 기간 단축을 위한 조선인의 주체적인 노력을 강조했다.[29] 이는 당시 격렬했던 반탁 운동과는 다른 노선으로,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입장이었다.

1946년 1월 25일, 비상국민회의주비회는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할 61개 단체를 발표했는데, 연합회도 여기에 포함되어 당시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30]

1946년 8월 15일, 연합회는 '좌우합작, 통일정부 수립, 민중생활 안정'이라는 3대 원칙을 발표하며[31] 좌우 대립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46년 9월 15일, 연합회는 신한민주당, 청우당 등 7개 정당 및 무소속 인사들과 함께 신진당(新進黨) 결성에 참여했다. 신진당은 김호(金乎)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중앙위원 105명, 감찰위원 9명을 선정했으나,[32][33] 연합회는 신진당 참여 이후에도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46년 10월 2일, 연합회는 대구 10·1 사건에 대해 '자연발생적'이라고 평가했는데,[34] 이는 사건의 원인을 미군정의 실정과 민중의 불만에서 찾으려는 시각을 반영한다. 이후 1946년 10월 24일, 연합회는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南朝鮮新民黨), 조선공산당, 신진당,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 청우당(靑友黨), 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등 9개 정당과 함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의 즉시 중지를 요구하였다.[35] 이는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 노선이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독 정부 수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움직임에 반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2. 5. 2. 신진당 참여 (1946)

1946년 9월 15일 오후 1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연합회는 신한민주당, 청우당, 조선혁명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삼우구락부, 무소속 등 7개 정당 및 단체와 함께 신진당(新進黨)을 결성하였다. 이 창당 대회에서 임시집행부 의장으로 김호(金乎)가 선출되었고, 부의장으로는 김령(金嶺)과 조기엽(趙基葉)이 선출되었다. 중앙위원으로는 유동설(柳東說), 김붕준(金朋濬), 김호(金乎), 한시대(韓始大), 김충규(金忠奎), 김만수(金萬壽), 이응진, 조기엽(趙基葉), 김희섭(金喜燮), 김령(金嶺) 등 총 105명이, 감찰위원으로는 박치호(朴治鎬), 김호엽(金浩燁) 등 9명이 각각 선정되었다.[32][33] 연합회는 신진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이후에도 독자적인 활동 노선을 유지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3. 조직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조직된 미주 한인들의 연합 기관이다.[3][2] 이 조직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독립운동 노선을 구축하며, 미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연합회는 대한인동지회,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북미 및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 다양한 미주 지역의 한인 단체들이 참여하여 구성되었으며, 이들 단체의 대표들이 위원회를 이끌었다.[2] 조직 운영 과정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승만이 이끌던 주미외교위원부와의 관계 설정, 독립금 모금 및 배분, 대미 외교 노선 등을 둘러싸고 내부적인 논의와 갈등이 지속되었다. 특히 이승만과의 관계는 연합회의 활동 방향과 위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7][4]

연합회의 구체적인 참여 단체와 활동을 주도했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구성 단체

1941년 4월 20일부터 4월 27일까지 8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되었다.[3] 대회 마지막 날인 4월 29일, 독립전선 통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대미외교기관 설치, 미국 국방공작 후원, 독립금 재정, 연합기관 설치 등 7개 항을 결의하였고, 이 결의에 따라 각 단체의 연합기관으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이하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연합회에 참여한 주요 단체와 대표는 다음과 같다.[2]

단체명대표
대한인동지회안현경·리원슌·도진호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림셩우
북미 대한인국민회한시대·김호·송죵익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안원규·김현구·김원용
중한민중동맹단차신호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련합회권도인
대조선독립단강샹호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심영신·민함나


3. 2. 주요 인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이하 연합회)의 활동에는 여러 인물들이 참여하여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연합회 설립 초기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및 이승만과의 관계 속에서 주요 인물들의 역할과 입장이 두드러졌다.

연합회 설립에는 대한인동지회,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북미 및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중한민중동맹단,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련합회, 대조선독립단,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등 다양한 단체의 대표들이 참여했다.[2] 이들 중 연합회 운영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거나 갈등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이승만''':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미주 한인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그는 주미외교위원부를 중심으로 연합회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합회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금 납부를 요구하는 등 연합회와 지속적인 갈등을 빚었다.[7] 1942년부터 재미 한인의 군사 훈련을 성사시키는 등 일부 성과도 있었으나, 임정 승인 문제 등 핵심 외교 현안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1943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등으로부터 외교 실패, 권력 남용 등을 이유로 비판받고 위원장직 소환 요구에 직면하기도 했다.[8][4]

  • '''연합회 측 주요 인물''': 이승만과의 갈등 속에서 연합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 '''김호''', '''전경무''': 1942년 11월 28일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정부 기관인 주미외교위원부와 민간 기관인 연합회의 역할 정립이 필요함을 강조했다.[6] 전경무는 1943년 8월 6일 워싱턴 D.C.에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소에 대응하기 위한 연합회 자체 사무소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10]
  • '''안원규''': 1943년 10월 12일 연합회가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서 고문으로 추대하여 실권을 배제하고, 주미외교위원부를 임정의 비준을 받는 기구로 개조할 것을 요청하기로 한 결의안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11] 또한 1944년 1월 10일에는 연합회가 이승만 및 주미외교위원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기로 한 결의를 통보했다.[12]
  • '''한시대''': 1944년 6월 13일 임정의 김구 주석에게[13], 7월 24일에는 김규식, 김원봉에게[14] 서신을 보내 미주 한인 사회의 중심 기관으로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가 아닌 연합회를 인정하고 지지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 '''김원용''': 1944년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열린 재미한족전체대표회에서 주미외교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대한인동지회의 불참으로 인해 임정은 이를 인준하지 않았다.[22][26] 이후 1944년 11월 20일 임정이 직접 구성한 주미외교위원회에서는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고 김원용 자신은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22]


이처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는 다양한 배경과 노선을 가진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특히 이승만과의 대립과 협력 과정에서 연합회의 방향과 위상이 결정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합회와 임정 내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 지도자들과의 관계 역시 연합회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였다. 임정은 연합회와 이승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려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주미외교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연합회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22][24]

4. 의의와 평가

주미외교위원부는 여러 논란 끝에 주미외교위원회로 개편되었으나, 명칭이나 인적 구성 등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연합회의 관계는 큰 타격을 입었고, 주미외교위원부는 연합회의 재정 지원 없이 이승만 지지 세력에 의존하는 상황이 되었다.[24]

이후 연합회는 점차 독자적인 활동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는 1944년 4월 통일 내각을 구성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집중하고자 했던 중경 임정의 노력과는 다른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독자 노선은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창설대회에서 구체화되었는데, 이승만이 중심이 된 정부대표단과 별도로 연합회가 자체적으로 한족대표단을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연합회 단독으로 국내대표단을 구성하고 미국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아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27]

참조

[1] 웹인용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http://encykorea.aks[...]
[2] 웹인용 2) 해외한족대회 결의안 http://db.history.go[...] 1941-04-29
[3] 웹인용 1) 해외한족대회 선언 http://db.history.go[...] 1941-04-20
[4] 웹인용 재미 한인의 전시 활동 http://db.history.go[...]
[5] 웹인용 34) 공문 제108호:주미외교위원부 확장 문제 http://db.history.go[...] 1942-07-21
[6] 웹인용 54) 주미위원부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역할 정립 문제 http://db.history.go[...] 1942-11-28
[7] 웹인용 재미한족연합위원회 http://contents.hist[...]
[8] 웹인용 大韓民族國民會 第7次 代表大會(第34回 代議員會)에서 立案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http://db.history.go[...] 신한민보 1943-01-14
[9] 웹인용 재외동포사 연표 미국 >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http://db.history.go[...] 1943-12-23
[10] 웹인용 워싱턴 디씨에 재미한족연합회 사무소 설립 제안 http://db.history.go[...] 1943-08-06
[11] 웹인용 『국민보』-『태평양주보』에 실린 보고서 http://db.history.go[...] 1943-10-06
[12] 웹인용 90) 주미위원부에 대한 연합회의 지원 축소 통고 http://db.history.go[...] 1944-01-10
[13] 웹인용 93) 연합회에서 임정에 미주와 하와이의 중심 기관으로 연합회를 택하기를 요청하고 주미위원부에 대한 결단 촉구 http://db.history.go[...] 1944-06-13
[14] 웹인용 101) 연합회, 김규식과 김약산에게 연합회와 이승만 양자 가운데 택일 촉구 http://db.history.go[...] 1944-07-24
[15] 웹인용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第82號 http://db.history.go[...] 1944-09-10
[16] 웹인용 1) 임정의 외교위원부 개조책 http://db.history.go[...] 1944-08-12
[17] 웹인용 2)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제6차 예회 http://db.history.go[...] 1944-09-01
[18] 웹인용 3)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제7차 특별회 http://db.history.go[...] 1944-09-10
[19] 웹인용 113) 주미위원부 개조에 동지회 협력 거부 http://db.history.go[...] 1944-09-12
[20] 웹인용 116) 로스앤젤레스에서의 한국인의 활동에 관한 조사 http://db.history.go[...] 1945-01-18
[21] 웹인용 5) 재미한족전체대표회 회록 http://db.history.go[...]
[22] 웹인용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第83號 http://db.history.go[...]
[23] 웹인용 1) 在美同胞에 대한 國務委員會 布告文 http://db.history.go[...] 1944-11-28
[24] 웹인용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9 19권 주미외교위원부 Ⅰ > 해제 http://db.history.go[...]
[25] 웹인용 2) 주미외교위원회규정 추인안 제출 및 주미외교위원회 규정 http://db.history.go[...] 1945-04-11
[26] 웹인용 3) 美洲問題解決案 http://db.history.go[...] 1945-04-11
[27] 웹인용 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http://db.history.go[...]
[28] 웹인용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민대회불참의 뜻 표명 http://db.history.go[...] 1945-12-27
[29] 웹인용 재미한족연합위원회대표 田耕武, 탁치전망에 대해 언급 http://db.history.go[...] 1945-12-29
[30] 웹인용 비상국민회의주비회,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할 61개단체 발표 http://db.history.go[...] 1946-01-25
[31] 웹인용 재미한족연합위원회대표단, 해방1주년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1946-08-15
[32] 웹인용 8개단체 합동하여 新進黨 결당식 거행 예정 http://db.history.go[...] 1946-09-15
[33] 웹인용 신진당 결성 http://db.history.go[...] 1946-09-15
[34] 웹인용 재미한족연합회, 파업문제에 대해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1946-10-02
[35] 웹인용 각정당시국대책간담회, 입법기관 문제에 대해 공동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194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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