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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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당은 1928년 김구에 의해 상하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보수파를 통합한 정당이다. 1930년 결성 당시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후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여당 형태로 변모했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참여했다. 1940년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과 통합하여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되었다.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과 함께 우익 정당으로 활동했으나, 김구 암살 이후 쇠퇴하여 1970년에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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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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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한국독립당 |
로마자 표기 | Hanguk Dongnipdang |
한자 표기 | 韓國獨立黨 |
영문 표기 | The Korea Independent party |
가타카나 표기 | ハングクトンニプタン |
약칭 | 한독당 (비공식), KIP (영문) |
창당일 | 1928년, 중화민국 상하이 (1930년 1월 25일) |
해산일 | 1970년 1월 25일 |
통합 정당 | 신민당 |
중앙당사 |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시 (~ 1945),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1945 ~) |
국가 | 대한민국 |
이념 및 성향 | |
이념 | 보수주의 한국 민족주의 삼균주의 홍익인간 공화주의 반공주의 한국의 독립운동 (~1945) |
분파 | 사회민주주의 |
정치적 위치 | 중도우파 ~ 우익 |
조직 | |
창립자 | 조소앙 |
군사 조직 | 한국독립군 |
기타 | |
관련 인물 | 조시원 |
2. 역사
1928년 상하이에서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보수파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설립하였다.[5] 1945년 김구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국내 활동을 시작했으나, 1948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는 불참하였다. 1948년 7월 간접 대통령 선거에 김구가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에게 패배했다.
1949년 김구 암살 이후 당은 급격히 쇠퇴했다. 1950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와 1960년 선거에서 모두 0.3%의 득표율로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1967년 5월 대통령 선거에 전진한을 후보로 지명했으나 5위에 그쳤고(2.1%), 1967년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2.2% 득표에 그쳐 의석을 얻지 못했다.
2. 1. 결성 (1930)
1929년 10월 26일 좌익진영은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을 조직하고 기관지 《앞으로》를 발행했다. 이들은 상해한인청년동맹과 통합해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이 되었다. 민족진영은 공산진영에 대응하고자 임시 정부를 강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한국독립당 조직을 계획하였다.[9]이동녕을 비롯한 임시 정부의 핵심세력과 흥사단의 안창호가 한국독립당 결성의 주역이었다. 임정 핵심세력은 임정의 기능 강화와 이에 따른 독립 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했고, 안창호는 임정을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임정을 어렵게 고수해 온 이동녕, 김철을 비롯한 임정의 간부들은 과거 10여 년이란 역사를 가진 정부를 해산함은 불가하며, 설령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보다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가 좌파 세력에 대응한다는 대의 하에 조정되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게 되었다.[9]
1930년 1월 25일 이동녕, 안창호 등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종래의 지방적 파벌 투쟁을 청산하고 민족주의 운동 전선을 통일하여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을 조직하고자 조완구, 윤기섭, 김구, 엄항섭, 김홍서, 이시영, 옥성빈, 김철, 안공근, 한진교, 김갑, 김두봉, 박찬익, 선우혁, 송병조, 조상섭, 이유필, 차리석, 김붕준, 조소앙, 백기준, 박창세, 최석순, 장덕로, 이탁, 강창제 등 26명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 조계 브르니에 드 몽모랑 거리(Rue Brenier de Montmorand프랑스어) 푸징리() 4호 임시정부 판공처(辦公處) 내에서 한국독립당 결당식을 올렸다. 이동녕, 안창호, 이유필, 김두봉, 안공근, 조완구, 조소앙의 7명이 기초위원이 되어 당의와 당강을 기초하여 가결하였다.[10]
한국독립당과 임시 정부는 1930년 출범 초기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처럼 이당치국의 체제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한국독립당이 곧 임시 정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점차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임정의 여당 형태로 변하였다.[9]
2. 2.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통폐합과 재건 (1935)
1935년 5월, 한국독립당은 해체를 선언하고 신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다.[1]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과 의열단계에 의해 주도되자, 조소앙 등은 1935년 9월 하순에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1]한편, 김구는 조선민족혁명당 참여에 반대하며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1] 지청천 역시 1937년 3월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혁명당을 창당했다.[1]
2. 3.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참여 (1937)
한국독립당은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과 합당을 논의하여 1937년 8월 1일에 우익 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1] 1939년 9월에는 한국독립당을 포함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산하 단체들과 좌익 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단체들 간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어 좌우익을 아우르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전국연합진선협회가 결성되었다.[1]2. 4. 민족진영 3당 통합 (1940)
1940년 5월 중일전쟁 중에 충칭에서 우익 3개 정당(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통합하여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으로 재창당되었다.[11] 이 통합으로 한국독립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었다.1942년 10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좌익 계열과도 협력하였다.[11]
하와이에도 한국독립당 지부가 설치되어 이승만, 서재필 등이 입당했다.[11] 그러나 1945년 10월 이승만은 정파 정치에 반대하며 탈당했고,[11] 1948년 1월 임병직 등도 탈당했다.[11]
2. 5. 광복 후 (1945)
한국민주당과 함께 양대 우익정당으로 알려져 활동하였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 문제로 한국민주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12]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아, 기본강령에는 계획경제, 민주공화국, 국비교육이 명시되었고, 행동강령에는 토지 국유, 극빈 농민 우선권, 적산 국유 등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강령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우익정당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1946년 4월 18일 한국독립당·국민당·신한민족당 등 3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었다.[12]
1947년 6월 초 김규식 및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하던 안재홍, 박용희 등 구 국민당 세력은 김구 등의 반탁 노선에 반발하고 미소공위에 지지를 보내며 한독당을 탈당하였다.[13][14] 이들은 신한국민당과 민주독립당을 결성하였다.
5·10총선거 당시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은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불참하였다. 제헌국회에서는 이승만 계열 및 한국민주당이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1949년 신익희 등이 탈당하여 민주국민당으로 갔고, 조소앙이 탈당하여 사회당을 창당하였으며, 이시영, 이범석 등은 이승만 진영으로 가면서 와해되었다.
2. 6.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
5·10 총선거 당시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은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불참했다.[15] 제헌국회는 이승만 계열과 한국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1949년 신익희 등이 탈당하여 민주국민당으로 가고, 조소앙은 사회당|社會黨한국어을 창당했으며, 이시영, 이범석 등은 이승만 진영으로 가면서 와해되었다.[15]김구 암살 이후 조완구가 당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당은 급격히 쇠퇴했다.[8][15]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더불어, 김구 사망 이후 구심점 부재와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쇠퇴의 원인이었다.[8][15]
1962년 김홍일을 중심으로 재건되었으나,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15] 1965년 보궐선거에서 김두한이 당선되어 원내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다.[15] 1967년 대선에 전진한을 후보로 지명했으나 낙선했다.[15] 1970년 신민당, 민주국민당 등에 흡수되면서 해산되었다.[15]
3. 이념 및 정책
1930년 1월 25일 창당 당시 이동녕, 안창호 등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 정당을 조직하고자 했다.[10] 초기 한국독립당과 임시 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처럼 이당치국 체제를 표방했으나, 점차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임시정부의 여당 형태로 변화하였다.[9]
1945년 한국독립당의 강령을 보면, 사회민주주의자였던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아 기본 강령에는 계획경제, 민주공화국, 국비교육이 명시되었다. 행동 강령에는 토지 국유, 극빈 농민 우선권, 적산 국유 등이 명시되어 있어, 현대적 관점에서는 우익 정당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1947년 6월에는 김규식 및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하던 안재홍 등 구 국민당 세력이 김구 등의 반탁 노선에 반발하며 미소공위 성사를 위해 탈당하기도 했다.[13][14]
4. 평가 및 유산
한국독립당은 일제강점기 민족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했다.[5]
해방 이후, 한국독립당은 국내 정치에 참여했지만, 이승만과의 갈등,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불참 등으로 인해 점차 쇠퇴했다.[5] 김구가 194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이승만에게 패배했고, 1949년 김구가 암살되면서 당은 급격히 쇠퇴했다.[5] 이후 1950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60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1967년 대통령 선거, 1967년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5]
더불어민주당은 김구를 비롯한 한국독립당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정당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이 해방 이후 정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쇠퇴한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5. 역대 선거 결과
한국독립당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역대 선거 결과아래는 하위 섹션 내용을 참고하여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이다.
- 대통령 선거: 1948년 대선에서 김구 후보가 출마하여 6.67%를 득표했으나 낙선했고, 1967년 대선에서는 전진한 후보가 2.10%를 득표하고 낙선했다.
- 국회의원 선거: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부터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꾸준히 참여했으나,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득표율은 대체로 0%대에서 2%대에 머물렀다.
5. 1. 대통령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