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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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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쟁의 참화》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제작한 판화 연작으로,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반도 전쟁)과 그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묘사한다. 이 연작은 전쟁의 참혹함, 기근, 정치적 억압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고야는 에칭과 아콰틴트 기법을 사용하여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강조했다. 《전쟁의 참화》는 인간의 폭력성과 부조리함을 비판하며, 19세기와 20세기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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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
일반 정보
전쟁의 참화 표지
전쟁의 참화 표지
원제Los desastres de la guerra (스페인어)
Fatales consequencias de la sangrienta guerra en España con Buonaparte, Y otros caprichos enfáticos (스페인어)
다른 제목Grande hazaña! Con muertos! (스페인어)
The Disasters of War (영어)
종류판화 연작
연도1810년 ~ 1820년 (출판: 1863년)
기법에칭, 아쿼틴트
운동낭만주의
크기각 판마다 크기가 다양함
소장주요 미술관 및 개인 소장
내용
주제스페인 독립 전쟁의 참상
설명프란시스코 고야가 스페인 독립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82점의 판화 연작

2. 역사적 배경

나폴레옹 1세는 1799년 프랑스 공화국의 제1 집정관이 되었고, 1804년에는 황제 자리에 올랐다. 당시 스페인은 지중해로 가는 길목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카를로스 4세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는 친영국적인 성향으로 왕위를 위협받고 있었다.[9]

나폴레옹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스페인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포르투갈을 함께 정복하자고 제안했고, 고도이는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는 나폴레옹의 계략이었다. 1807년 프랑스군은 스페인에 진입했고, 1808년 민중 봉기가 일어나 카를로스 4세는 퇴위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세우려 했다.[9]

프란시스코 고야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지지했지만, 프랑스의 침략과 이후 스페인의 상황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점령군에 의한 스페인 민중의 고통을 직접 목격했고,[16][17] 이를 ''전쟁의 참화'' 연작에 담아내고자 했다. 고야는 마드리드 주변의 전투 현장을 방문하며, "el desmembramiento d'Españaes" (스페인의 해체)라고 묘사한 참상을 기록했다.[19]


2. 1.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나폴레옹 1세는 1799년 2월 18일 스스로를 프랑스 공화국의 제1 집정관으로 선언했으며, 1804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스페인은 지중해로 가는 길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나폴레옹에게 정치적,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4세는 국제적으로 무능한 인물로 여겨졌으며,[9] 그의 입지는 친영국적인 후계자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의 약점을 이용하여 프랑스, 스페인, 스페인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가 포르투갈을 정복하자는 제안을 했다. 전리품은 프랑스, 스페인, 고도이에게 똑같이 분배될 것이며, 고도이는 "알가르브 공작"이라는 칭호를 얻게 될 것이었다. 프랑스의 제안에 매료된 고도이는 나폴레옹과 페르난도 7세의 진정한 동기를 간파하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침략을 계략으로 삼아 스페인에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9]

배경에 도시가 있는 밤의 처형 장면. 왼쪽에는 절망적인 상태의 시민들이 모여 있다. 초점은 랜턴에 비춰진 흰 셔츠를 입은 남자이다. 그는 팔을 공중에 던지고 사격대를 노려본다. 시체들이 피로 물든 땅에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군인들이 조준을 하고 있다.


1807년 11월, 25,000명의 프랑스군은 스페인 군대를 증강한다는 명목으로 저항 없이 스페인에 진입했다.[11] 이듬해 2월, 프랑스군의 진정한 의도가 명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점령군은 고립된 지역에서 산발적인 행동 외에는 거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9] 1808년, 페르난도 7세의 지지자들이 선동한 대중 봉기로 인해 고도이는 체포되었고, 카를로스 4세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1808년 3월 19일, 카를로스 4세는 퇴위했고,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올랐다. 페르난도 7세는 프랑스의 후원을 구하고 있었지만,[12] 나폴레옹과 그의 최고 사령관인 조아생 뮈라 원수는 스페인이 부르봉 왕가보다 더 진보적이고 유능한 통치자들의 통치를 받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다. 그들은 나폴레옹의 형제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삼기로 결정했다.[13] 나폴레옹은 중재를 구실로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 바욘으로 소환하여, 그들이 조제프에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2. 2. 스페인 민중의 저항과 고야의 입장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 공화국의 제1 집정관을 거쳐 황제가 된 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약점을 이용하여 스페인을 침략했다. 1808년, 페르난도 7세의 지지자들이 선동한 대중 봉기로 인해 카를로스 4세는 퇴위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폴레옹은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9]

프란시스코 고야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지지했지만, 프랑스의 침략과 스페인 왕정 복고에 모두 비판적이었다.[15] 그의 친구들 중에는 후안 멜렌데스 발데스와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처럼 친프랑스파인 아프랑세사도es도 있었지만,[2] 고야는 권위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을 가지고 프랑스 군대에 의한 스페인 민중의 굴복을 직접 목격했다.[16][17]

이 시기에 고야는 웰링턴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렸고,[18] ''전쟁의 참화''의 기초가 될 그림 작업을 하면서 마드리드 주변의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스페인 저항을 목격했다. 최종 판화는 그가 "el desmembramiento d'Españaes" (스페인의 해체)라고 묘사한 것에 대한 증언이다.[19]

3. 판화의 구성

예술 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전쟁의 참화》가 전쟁, 기근, 정치적·문화적 알레고리라는 세 가지 주제 군으로 나뉜다는 데 동의한다. 이 순서는 판화가 제작된 순서를 대략적으로 반영하며, 판화나 드로잉에 날짜가 표시된 것은 거의 없지만, 판화가 언급하는 특정 사건을 식별하고 순차적인 그룹을 구분할 수 있는 다양한 판화 배치를 통해 연대기를 확립했다.[20] 대부분 고야의 번호 매기기는 이러한 방법과 일치하지만,[21] 판 1번과 같이 예외도 존재한다.[22]

초기 판화에서 고야는 스페인 수비대에 동정심을 보였으며, 덩치 크고 익명의 침략자들에 맞서는 애국자들을 묘사했다. 그러나 연재가 진행되면서 스페인과 제국주의자 사이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어느 진영의 시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나타났다. ''Con razon ó sin ella''와 같은 제목은 두 진영의 의도를 문제 삼기도 한다. 필립 쇼는 마지막 판화 그룹에서도 "조국의 영웅적 수비대와 구체제의 야만적 지지자" 사이의 구별이 없다고 지적한다.[15] 한편, 판화 제목의 다양한 영어 번역 과정에서 고야 특유의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모호함과 스페인 속담에 대한 말장난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3. 1. 전쟁

프랑스와 스페인 민중 간의 전투를 묘사한 판화들은 전쟁의 잔혹함과 폭력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민간인,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겪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야의 판화 1번부터 47번까지는 프랑스에 대항한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전투의 여파로 잘려나간 몸통과 사지가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은 마치 "대리석 조각의 파편"과 같다.[7]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은 모두 포로를 고문하고 훼손했으며, 이러한 참혹한 행위는 고야의 여러 판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24]

특히 스페인 여성들은 공격과 성폭행의 대상이 되었다. 민간인들은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타났다가, 아군이 패배하면 강간이나 살해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25] -- ''No quieren|그들은 원치 않는다es''에서는 나이든 여성이 군인에게 공격당하는 젊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24]

폐허가 된 찢어진 옷을 입은 남자가 절망에 찬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Plate 1: .
]이 연작은 팔을 뻗은 채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그린 ''''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판화들은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묘사하는데, 미술 평론가 비비안 레이너는 프랑스군이 "코사크족처럼 민간인을 총검으로 찌르는" 모습으로, 스페인 민간인은 "프랑스군을 도끼로 찍는" 모습으로 묘사된다고 평가했다.[26] 판화 31~39는 잔혹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기근을 다룬 판화들과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다.[27]

고야는 이전의 스페인 예술과는 달리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하지 않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주인공들을 알려진 애국자가 아닌 익명의 희생자로 묘사한다.[29] 예외는 -- ''Que valor!|얼마나 용감한가!es''인데, 사라고사 포위전에서 54,000명이 사망한 1차와 2차 포위전 동안 도시 방어벽에서 대포병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1786–1857)을 묘사하고 있다.[30] 모든 대포병이 죽었을 때, 아구스티나는 직접 대포를 조작하고 발사했다.[31]

3. 2. 기근

Los Desastres de la Guerraes 연작 중 두 번째 그룹은 판화 48번부터 64번까지로, 1811년 8월부터 웰링턴의 군대가 1812년 8월 마드리드를 해방할 때까지 이 도시를 휩쓴 기근의 참상을 자세히 묘사한다. 그해 마드리드에서는 기아로 2만 명이 사망했다.[33]

이 판화들에서 고야는 익명의, 특정 세력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름 없는 스페인 지역에서 학살되는 일반적인 장면에서 벗어나, 마드리드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참상에 집중한다. 기근은 프랑스 침략군과 스페인 게릴라, 산적들이 도시로 들어가는 길과 도로를 막아 식량 공급을 방해하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고야는 식량 부족의 이유에 집중하지 않으며, 어떤 세력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근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만 관심을 둔다.[34] 이 그룹의 이미지는 마드리드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지만, 특정 사건을 묘사하는 장면은 없으며, 장면의 배경이 되는 식별 가능한 건물도 없다. 고야는 죽거나 거의 죽어가는 어두운 덩어리의 시체, 여성의 시신을 운반하는 남성, 부모를 잃은 슬픈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춘다.[35] 휴즈는 판화 50, Madre infeliz!es (''불행한 어머니!'')를 이 그룹에서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평가하며, 흐느끼는 어린 소녀와 어머니의 시신 사이의 공간이 "상실과 고아의 본질인 어둠"을 나타낸다고 말한다.[36] 이 판화 그룹은 아마도 1814년 초에 완성되었을 것이다.[37]

3. 3. 부르봉 왕가와 성직자 (Caprichos enfáticos)

1813년에서 1820년 사이에 완성된 판화 65번부터 82번까지는 "강조된 카프리치오"라고 불리며, 페르난도 7세의 복귀 전후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적으로 비판한다.[38] 이 판화들은 종교 재판과 고문 등 당시 억압적인 정치 환경을 묘사하며, 고야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을 짓밟은 새로운 정권을 비판한다.[39][40]

1820년 라파엘 델 리에고가 1812년 헌법 복원을 위한 군사 반란을 일으켰으나, 불안정한 시기를 거쳐 프랑스의 침공으로 입헌 정부가 무너졌다.[41] 이러한 급변하는 사건들 속에서 고야의 판화들은 낙관과 냉소를 오가며, 특정 시점과 연결 짓기 어렵게 만든다.[41]

판 75 ''Farándula de charlatanes'' (''사기꾼의 극단'')와 같이 많은 이미지들이 ''카프리초스''의 야만적인 풍자 스타일을 따른다.[26] 판 77의 줄타기하는 교황은 1863년 판화에서 추기경이나 주교로 축소되었다.[42] 일부 판화는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티의 풍자적인 우화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판 74에서 늑대는 카스티의 구절을 인용하며 통치자들의 야만성에 대한 책임을 희생자들에게 돌린다.[43]

  • - ''Esta no lo es menos'' (''이것은 덜 흥미롭지 않다'')를 비롯한 여러 판은 종교적 이미지에 대한 우상 숭배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고야는 교회가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고 복원하려는 시도가 "빈 껍데기 숭배"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44]


마지막 두 판은 화환을 쓴 여성, 즉 스페인, 진실, 또는 1812년 헌법을 의인화한 인물을 묘사한다.[42] -- ''Murió la Verdad'' (''진실이 죽었다'')에서 그녀는 죽어 있고, -- ''Si resucitará?'' (''그녀가 다시 살아날까?'')에서는 "수도승과 괴물" 앞에서 가슴을 드러낸 채 누워 있다.[26][45] -- ''Esto es lo verdadero'' (''이것이 진실된 길이다'')에서는 평화와 풍요를 상징하며 농부 앞에 누워 있다.[46][47]

4. 제작 기법 및 양식

고야는 붉은 분필로 많은 준비 그림을 그렸는데, 출판된 판화와는 다른 번호가 매겨져 보존되었다.[48] 그는 많은 개별적인 증명 인쇄본 중에서 두 개의 증명 앨범을 제작했는데, 그중 완전한 것은 하나뿐이다.[49] 전체 앨범은 85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연작에 포함되지 않은 1811년에 제작된 세 개의 작은 ''Prisioneros'' ("죄수")가 포함되어 있다. 고야는 현재 대영 박물관에 있는 전체 앨범 사본을 그의 친구 후안 아구스틴 세안 베르무데스에게 주었는데, 여기에는 고야의 손으로 쓴 표지 비문, 페이지 가장자리에 서명, 고야가 쓴 판화 번호와 제목이 있었다. 이들은 1863년에 출판본을 준비할 때 판에 복사되었다.[50]

세안의 증명 세트와 새겨진 캡션을 비교하면 철자, 구두점, 어구 등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수정은 때때로 장면의 의미나 영향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판 36은 모든 인쇄된 판본에서 제목이 'Tampoco'('이 경우에도 아님')이지만, 증명 연작에서는 'Tan poco'('매우 적음')로 쓰여 있다.[50] 연작의 81번과 82번은 1870년에 아카데미에 다시 합류했고, 1957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51] 세안 앨범에서 고야가 연작에 붙인 제목은 ''보나파르트와의 스페인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치명적인 결과''였으며,[52] 이후 ''전쟁의 참화''로 축약된 것은 자크 칼로의 연작 ''전쟁의 비참함''에 대한 암시였을 것이다.

연작이 진행됨에 따라 고야는 양질의 종이와 구리판이 부족해져 두 개의 에칭 및 아쿼틴트 풍경화를 파괴해야 했다.[54] 재료 부족으로 판의 크기와 모양이 142 × 168 mm (5.6 × 6.6 in)에서 163 × 260 mm (6.4 × 10.2 in)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56]

고야는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56개의 판화를 완성했으며, 이들은 종종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여겨진다. 마지막 배치는 전쟁이 끝난 후 재료가 더 풍부해졌을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각 판 밑에 쓰여진 몇몇 판의 제목은 그의 현존을 나타낸다: ''나는 이것을 보았다'' (판 44)와 ''볼 수 없다'' (판 26).[57] 고야가 분쟁의 어느 정도를 목격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처음 두 그룹에 기록된 많은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른 여러 장면들은 그에게 간접적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그는 전투 현장을 방문할 때 스케치북을 사용했고, 스케치에서 의미를 흡수하고 동화시킨 후 구리판 작업에 착수했다.[7] 모든 그림은 동일한 종이에서 나왔고, 모든 구리판은 균일하다.[58]

몇몇 장면의 제목은 장면 자체가 관련이 없더라도 쌍 또는 더 큰 그룹을 연결한다. 예를 들어 판 2와 3 ('이유가 있든 없든'과 '똑같음'), 4와 5 ('여성들은 용감하다'와 '그리고 그들은 사납다'), 9, 10 및 11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이것들도 아니고'와 '또 이것들도 아님')가 있다. 다른 판에서는 같은 이야기나 사건의 장면을 보여준다.[59]

베르무데스 세트는 "고야가 의도했던 방식으로 연작을 출판하고, 그가 판화를 인쇄하고자 했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하다."[55] 1863년 출판된 80개의 판화와 82개의 판화가 포함된 앨범의 전체 연작(세 개의 작은 ''Prisioneros'' 제외)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고야의 철자 오류까지 포함하여 원본 제목이나 캡션이 판에 새겨졌다. 한 제목이 변경되었고,[60] 한 판에 작업이 추가되었다.[61]

''전쟁의 참화''는 고야가 살아있는 동안 출판되지 않았다. 그는 페르난도 7세의 억압적인 정권으로부터 정치적 반향을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있다.[64][65]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그가 정치적 동기를 위한 이미지 사용에 회의적이었고, 대신 개인적인 명상과 해방으로 여겼기 때문에 출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예술가가 검열 없이 공개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선호했다고 믿는다.[66][67] 추가로 네 개의 판본이 출판되었는데, 마지막은 1937년이었으며, 총 1,000개 이상의 각 판화가 인쇄되었지만 모두 같은 품질은 아니다. 다른 연작과 마찬가지로, 후기 인쇄본은 아쿼틴트에 마모를 보인다. 1863년 판에는 500개의 인쇄본이 있었고, 1892년(100), 1903년(100), 1906년(275), 1937년의 판본이 이어졌는데, 그 전에 판을 더 이상 마모되지 않도록 강철로 처리했을 것이다. 많은 세트가 흩어졌고, 대부분의 프린트 룸 컬렉션에는 적어도 세트의 일부가 있을 것이다.[68]

삶의 추악함을 상세히 묘사하고 비판하는 것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난쟁이부터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미술의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주제이다. 고야는 진실이 "보여지고 ...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보여지기를" 요청했다.[7] 이 연작은 전쟁 미술과 군사적 갈등이 민간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라는 더 넓은 유럽의 전통을 따르며, 특히 스페인과의

4. 1. 에칭과 아쿼틴트 기법

고야는 주로 아쿼틴트의 색조 기법을 사용했는데, 극적인 대비를 만들어내는 데 매우 능숙했다.[62] 그는 이를 통해 색조 효과에 대한 자신의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켰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는 "풍부한 전반적인 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1863년 판은 고야 자신이 만든 초기 인쇄물에서는 보이지 않는 표면 톤을 상당 부분 사용하는 "재앙적인" 결정을 내렸다. 줄리엣 윌슨 베로는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후기 판본은 "광채와 섬세함"을 잃고 "예술가의 의도를 흐리고 왜곡된 반영을 제공한다"고 평가했다.[63]

멀리 마을이 보이고, 사람들은 말과 도보로 도망치고 있다. 팔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땅에 떨어진 다른 아이에게 손을 뻗고 있고, 군대가 다가오고 있다.


고야는 빛, 그림자, 명암이 진실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고 믿어 이 연작에서 색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미술에는 색이 필요 없다. 나에게 크레용을 주면 당신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썼다.[1] 미술사가 앤 홀란더에 따르면, 고야는 선을 형태 묘사뿐만 아니라 "시선을 가늘게 뜨고 반쯤 눈먼 눈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형태를 만들어내고 부수기 위해, 고통스러운 급박함 속에서 보이는 것들의 가장자리에 맴도는 왜곡된 시각적 잔해를 만들기 위해" 사용했다. 홀란더는 이러한 "그래픽적인 명료함"이 매우 날카로울 수 있다고 평가했다.[75] 이러한 접근 방식의 즉각성은 인간 본성의 원초적인 면을 전달하려는 고야의 욕구와 부합했다. 렘브란트 또한 이와 비슷한 직접성을 추구했지만, 아쿼틴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 고야의 동시대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헨리 퓨젤리도 비슷한 환상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을 제작했지만, 홀란더가 묘사한 것처럼 그들은 "정교하게 적용된 선형성 ... 그것을 아름다움과 리듬이라는 안전한 요새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함"으로써 그 충격적인 영향을 약화시켰다.[76]

5. 해석 및 영향

《전쟁의 참화》는 1863년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의해 출판되기 전까지는 스페인 내 소규모 서클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94] 출판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며 후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반전 예술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각 시대의 해석은 그 시대의 감성을 반영했다. 19세기 초반에 고야는 원시적인 낭만주의 화가로 여겨졌으며, 이 연작의 생생하게 묘사된 훼손된 시체들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8–19)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95] 루이스 부뉴엘은 고야의 부조리 감각에 공감하여, 살바도르 달리와 협업한 《황금시대》(1930), 《파멸의 천사》(1962) 등에서 그의 작품을 참조했다.[95]

1936년 스페인 내전 직전, 살바도르 달리는 《삶은 콩을 곁들인 부드러운 구조 (내전의 예감)》을 통해 《전쟁의 참화》, 특히 판화 39의 영향을 받은 왜곡된 사지와 잔혹한 억압을 묘사했다.[96]

1993년, 영국 젊은 예술가 운동의 제이크 앤 디노스 채프먼은 《전쟁의 참화》를 모델로 한 82개의 소형 장난감 조각품을 제작해 테이트 갤러리에 전시했다.[97] 2003년에는 판화 위에 광대와 강아지 머리를 덧그린 수정된 버전을 전시하며, 나폴레옹의 계몽주의 이상 도입과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민주주의 도입 시도를 연결했다.[1][98][99][100]

5. 1. 전쟁의 보편성과 반전 메시지

고야는 《전쟁의 참화》에서 무차별적인 살육에 대해 어떤 목적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판화에는 신성한 질서나 인간 정의의 섭리 같은 위안이 전혀 없다.[86] 이는 바로크 순교에서 발견되는 멜로드라마나 의도적인 예술적 표현이 없어서, 관람자가 대상의 잔혹함으로부터 거리를 두지 못하게 한 결과이다. 또한 고야는 전통적인 서사의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그의 구도는 각 작품의 가장 충격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87]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의 1633년 연작 《전쟁의 참상》의 판화인 《사형》. 무질서한 군대의 칼로의 에칭이 고야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판화는 경계가 없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혼란은 그림 평면의 프레임을 모든 방향으로 벗어난다.[87] 따라서 이것들은 폭력의 무작위성을 표현하며, 그 즉각성과 잔혹함 때문에 19세기와 20세기의 사진 저널리즘과 유사하다고 묘사되었다.[88] 로버트 휴즈에 따르면, 고야의 이전 연작 《카프리초스》처럼 《전쟁의 참화》는 당시 나폴레옹 치하의 스페인, 그리고 나중에는 종교 재판의 "히스테리, 악, 잔혹성, 비합리성, 지혜의 부재"에 대한 "사회적 발언"으로 의도되었을 것이다.[89] 고야가 스페인 전쟁을 환멸감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주변의 폭력과 그가 믿기에 새로운 호전적 비이성으로 대체되고 있던 자유주의적 이상을 잃은 것에 대해 절망했음이 분명하다. 휴즈는 고야가 이미지를 에칭을 통해 표현하기로 결정한 것은, 색채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극도의 절망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었다.[89]

그의 만년의 메시지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나 쉽게 부패한다는 인간주의적 관점과는 상반된다. 그는 폭력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는 "프로이트 이후 우리가 원초아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휴즈는 결국,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받아들이는 무너진 공허함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마치 고야의 그림 《고야의 개》처럼, "주인이 그에게서 사라진 것처럼, 신도 고야에게서 사라졌다."[90]

《전쟁의 참화》 판화는 낭비된 시체, 분화되지 않은 신체 부위, 거세, 여성 혐오에 사로잡혀 있다. 다수의 작품에는 어두운 에로틱한 암시가 있다. 코넬은 판화 7번에서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이 긴 대포에 불을 붙이는 이미지의 내재된 성적 매력을 언급한다.[31] 미술사학자 레너드 데이비스는 고야가 "해체의 에로티시즘"에 매료되었다고 시사하며,[91] 휴즈는 《로스 디스파라테스》의 판화 10번을 언급하는데, 이는 말의 입에 물린 여성을 보여준다. 휴즈에게, 그 여성의 황홀경은 다른 가능한 의미들 중, 오르가즘을 암시한다.[89]

에로틱한 긴장감이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미술사학자 존 J. 치오팔로는, 1793년 예술가의 질병과 그로 인한 청각 장애가 그 이후 그의 예술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1808-14년 "스페인 독립 전쟁"은 - "무정부, 기아, 살육의 격렬한 경련" - 그의 예술에 새로운 심리적 감성을 주입했는데, 이는 "게릴라" 전쟁에 의해 이 기반들이 파괴될 때 생기는 문화와 인간 정신의 기초, 빛 없는 균열과 틈새를 깊이 파고들었다.[92] 고야는 이러한 현대적인 전쟁 방식을 묘사하고자 했으며,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여기에는 파괴된 건물 벽과 밝은 대낮에서의 강간에 대한 충격적인 이미지가 포함된다. 에로틱한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며, 명백히 폭력적이고 혐오스럽다.[93]

5. 2. 예술사적 영향

《전쟁의 참화》는 1863년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의해 출판되기 전까지 스페인 내 소규모 서클 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 2세대 동안 유럽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94]

이후 각 시대의 예술가들은 이 작품을 자신들의 시대적 감성에 맞게 해석하였다. 19세기 초, 고야는 원시적인 낭만주의 화가로 여겨졌으며, 이 연작에 생생하게 묘사된 훼손된 시체들은 테오도르 제리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리코는 정치적으로 충격적인 《메두사호의 뗏목》(1818–19)으로 유명하다.[95] 루이스 부뉴엘은 고야의 부조리한 감각에 공감하여, 1930년 살바도르 달리와 협업한 《황금시대》, 1962년 《파멸의 천사》와 같은 영화에서 그의 작품을 참조했다.[95]

달리가 《전쟁의 참화》에서 받은 영향은 1936년 스페인 내전 직전의 사건들에 대한 반응으로 그려진 《삶은 콩을 곁들인 부드러운 구조 (내전의 예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왜곡된 사지, 잔혹한 억압, 고통스러운 표정, 불길한 구름은 훼손된 시신이 황량한 배경을 배경으로 묘사된 판화 39, ''Grande hazaña! Con muertos!'' (''죽은 자들과 함께한 영웅적 위업!'')를 연상시킨다.[96]

1993년, 영국 젊은 예술가 운동의 제이크 앤 디노스 채프먼은 《전쟁의 참화》를 모델로 한 82개의 소형 장난감 조각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들은 널리 호평을 받았으며 그 해 테이트 갤러리에서 구입했다.[97] 고야의 판화 연작은 수십 년 동안 채프먼 형제에게 끊임없는 참고 자료가 되었고, 특히 그들은 판화 ''Grande hazaña! Con muertos!''를 기반으로 여러 변형 작품을 제작했다.

2003년 채프먼 형제는 《전쟁의 참화》의 수정된 버전을 전시했다. 그들은 전체 판화 세트를 구입하여[1][98] 그 위에 악마적인 광대와 강아지 머리를 그리고 붙였다.[99] 채프먼 형제는 그들의 "수정된" 이미지가 나폴레옹이 19세기 초 스페인에 계몽주의 이상을 도입한 것과 토니 블레어조지 W. 부시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오려 한 것을 연결한다고 설명했다.[100]

참조

[1] 문서 80 prints in the first published edition (1863), for which the last two plates were not available. See "[[#Execution|Execution]]".
[2] 문서 Wilson-Bareau, 45
[3] 문서 Sayre, 129
[4] 서적 Tomlinson (1989), 25.
[5] 뉴스 Look what we did https://www.theguard[...] 2003-03-31
[6] 문서 Wilson-Bareau, 48–49. This is the title of the album given to [[Juan Agustín Ceán Bermúdez]], written by Goya himself (illustrated Wilson-Bareau, 44), although the series is always referred to by the title given to the published set.
[7] 문서 Connell, 175
[8] 서적 Handbook of death & dying, Volumes 1–2 Sage Publications 2003
[9] 문서 Connell, 145–146
[10] 서적 What Great Paintings Say Taschen 2003
[11] 서적 History of the Wars of the French Revolution McCarty and Davis 1835
[12] 서적 War and peace in an age of upheaval: 1793–183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5
[13] 문서 Licht, 109
[14] 웹사이트 The Duke of Wellington, 1812–1814 http://www.nationalg[...] National Gallery, London 2018-01-27
[15] 문서 Shaw, 482
[16] 문서 Clark, 129
[17] 문서 That Goya had first-hand knowledge of events depicted in ''The Disasters of War'' is implied by the title of the print ''I saw it''.
[18] 문서 Both the Bonaparte allegory and Wellington's medals and orders required updating soon after to reflect the changing situation—Wilson-Bareau, 45, and, for Wellington, Neil MacLaren, revised Allan Braham, ''The Spanish School, National Gallery Catalogues''. National Gallery London, 1970. 16–20.
[19] 논문 The Disasters of War https://www.ncbi.nlm[...] 2006-01
[20] 서적 Hughes (2004), 273
[21] 문서 Wilson-Bareau, 49–51, 57–99
[22] 문서 Wilson-Bareau, 49–59, discusses the sequences of subjects and dates of creation in detail. For plate 1, see 51–52.
[23] 문서 Wilson-Bareau, 48–50
[24] 뉴스 Review of Francisco Goya's Disasters of War Associated Press 2006
[25] 문서 Connell, 174
[26] 뉴스 Goya's 'Disasters of War': Grisly Indictment of Humanity https://www.nytimes.[...] 1990-02-25
[27] 문서 Wilson-Bareau, 50–51
[28] 문서 Stoichita and Coderch, 88–89
[29] 문서 Stoichita and Coderch, 95
[30] 서적 Liberty Or Death! Trafford Publishing 2008
[31] 문서 Connell, 162
[32] 서적 Hughes (2004), 287–288
[33] 서적 Hughes (2004), 297–299; Wilson-Bareau, 50–51
[34] 서적 Hughes (2004), 297
[35] 서적 Hughes (2004), 297–298
[36] 서적 Hughes (2004), 299
[37] 서적 Wilson-Bareau, 51
[38] 서적 "Caprichos enfáticos" is difficult to translate; in the 18th century language of [[rhetoric]], "emphatic" suggests that these prints "make a point or give a warning by insinuation rather than by direct statement"—Wilson-Bareau, 59, quoting from an undisclosed source. Wilson-Bareau adds that "enfáticos" is also often translated as "striking". In talking about art, "Caprice", usually found today as the original Italian [[Capriccio (painting)|capriccio]], normally suggests light-hearted fantasy, which does not characterise these prints or ''[[Los Caprichos]]''
[39] 서적 Wilson-Bareau, 57–60
[40] 웹사이트 Goya: The Disasters of War http://www.bampfa.be[...] 2009-09-22
[41] 서적 Wilson-Bareau, 57–8
[42] 서적 Wilson-Bareau, 59
[43] 서적 Wilson-Bareau, 59. See also plate 77 in the gallery at bottom.
[44] 서적 Stoichita and Coderch, 90–92
[45] 서적 Wilson-Bareau, 59 (quotation)
[46] 서적 Wilson-Bareau, 59–60
[47] 서적 Of the last two prints, Licht writes, "[Goya's] otherwise authoritative hand begins to hesitate, and he creates the two weakest plates in the entire series. Therein, perhaps, lies ''his'' strength: He cannot delude himself." Licht, 158
[48] 서적 Wilson-Bareau, 49–50
[49] 서적 The most important collection of individual proofs was acquired in Spain by [[Sir William Stirling-Maxwell, 9th Baronet]] from [[Valentín Carderera]], who probably got them from Goya's grandson. In 1951, they were sold to the [[Boston Museum of Fine Arts]]. Wilson-Bareau, 99. This collection includes a unique unfinished and unpublished print from the first group: ''Infame provecho (Vile Advantage)'', Boston MFA Accession number: 51.1697
[50] 간행물 On Goya's 'Disasters of War', Plates 69 and 36' 2019-06
[51] 웹사이트 web page on the series http://servicios.bne[...] 2009-06-14
[52] 간행물 On Goya's 'Disasters of War', Plates 69 and 36' 2019-06
[53] 서적 Wilson-Bareau, 47
[54] 서적 McDonald, 23.
[55] 서적 Wilson-Bareau, 50
[56] 문서 Plates [[commons:File:Prado - Los Desastres de la Guerra - No. 14 - Duro es el paso!.jpg|14]] and [[commons:File:Prado - Los Desastres de la Guerra - No. 24 - Aun podrán servir.jpg|24]], respectively. See the Spanish National Library website for measurements.
[57] 서적 Art in an Age of Bonapartism, 1800–1815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58] 서적 Wilson-Bareau, 57
[59] 서적 The Napoleonic wars: the Peninsular War 1807–1814 Oxford: Osprey Publishing 2002
[60] 문서 The title of [[commons:File:Prado - Los Desastres de la Guerra - No. 69 - Nada. Ello dirá.jpg|plate 69]] was altered as "apparently ... too nihilistic" from Goya's ''Nada. Ello lo dice'' to ''Nada. Ello dirá'' (Wilson-Bareau, 57).
[61] 서적 Wilson-Bareau, 46–49
[62] 서적 Wilson Bareau, 12, 32
[63] 서적 Wilson Bareau, 49
[64] 서적 Hughes (2004), 303
[65] 문서 It has been suggested that Goya numbered the initial set of 56 plates in 1814, during a few months of national optimism following the end of the war, with the intent of publishing them then. However, on 11 May 1814, Fernando VII declared that the war would be forgotten and nullified the constitution, making publication impossible (Sayre, 128–129).
[66] 서적 Stoichita and Coderch, 91
[67] 문서 Licht speculates, "These plates obviously had to be created by the artist without any further thought about their ultimate purpose. Goya never intended them for publication during his lifetime." (Licht, 128). Wilson-Bareau and Hughes disagree, see Wilson-Bareau p. 59 and ''passim'' in chapter 4.
[68] 웹사이트 Spaightwood Galleries http://www.spaightwo[...] 2016-09-09
[69] 문서 "As midnight approached, my master said, 'Isidro, take your gun and come with me.' I obeyed him and where do you think we went?—To that hill where the bodies of those poor people still lay .... My master opened his portfolio, put it on his lap and waited for the moon to come out from behind the large cloud that was hiding it .... At last the moon shone so brightly that it seemed like daylight. Amidst the pools of blood, we could make out some of the corpses—some lying on their backs, others on their bellies; this one in a kneeling position, that one with his arms raised toward heaven, begging for vengeance or mercy .... While I stared at the terrible scene, filled with dread, my master drew it. We returned home and the next morning my master showed me his first print of ''La Guerra'', which I looked at in horror. 'Sir,' I asked him, 'Why do you draw these barbarities which men commit?' He replied, 'To warn men not to be barbarians ever again.' "Ferrari, Enrique Lafuente; Licht et al, 82–83
[70] 문서 In a BBC television documentary, Glendinning said: "Trueba is clearly romanticising the artist, making the artist fearless and heroic, I mean not to just observe through the spyglass these terrible things that are happening, but actually going to see them ... None of this corresponds at all to the reality of the shootings. Because we know the shootings took place at four or five o'clock in the morning. Some modern experts point out it was also raining, and so the idea that Goya is going out at midnight, he's not going to see anything. None of this fits with historical information we have." Glendinning also pointed out that Trueba places Goya in his house known as ''Quinta del Sordo''. Goya moved into this house in 1819, after the war, casting further doubt on Trueba's version. See ''The Private Life of a Masterpiece: The Third of May, 1808'', Tx BBC2, 26 January 2004; released on DVD by 2 Entertain Video, 2007.
[71] 서적 Six Centuries of Master Prints Cincinnati Art Museum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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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서적 The Self-Portraits of Francisco Goya https://www.worldca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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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문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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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웹사이트 Disasters of War 1993 http://www.tate.org.[...] 2012-01-12
[98] 문서 Spanish Civil War#Atrocities
[99] 웹사이트 Insult to Injury http://www.artnet.co[...] 2016-03-03
[100] 뉴스 Chapman brothers 'rectify' Disasters of War. Art's enfants terribles pay tribute to Goya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20-06-16
[10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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