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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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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훈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무사도와 함께 널리 읽힌 훈계로, 메이지 시대에는 군인칙유와 함께 군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1941년 중일 전쟁의 군 기강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육군에서 제정되었으며,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구절은 일본군의 옥쇄와 자결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전진훈은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해군에서는 무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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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훈
개요
군인칙유
'[[파일:Imperial Rescript to Soldiers and Sailors.jpg|220px]]'
이름전진훈
원어戦陣訓 (せんじんくん)
종류군대 행동 강령
제정1941년
배경
시기태평양 전쟁 중기
목적군인의 정신 교육 강화
전투력 향상
내용
주요 내용군인칙유의 정신 강조
명예로운 죽음 강조 (옥쇄)
포로로 잡히는 것을 수치로 여김
항복 거부
솔선수범
책임 완수
사생관 고취
영향일본군의 전투 방식에 큰 영향
가미카제 특공대 등 극단적인 전술의 배경
비판
주요 비판비인간적인 사상 강요
전쟁 범죄 정당화
개인의 존엄성 경시
같이 보기
관련 항목군인칙유
옥쇄
가미카제
일본 제국군

2. 역사적 배경

무로마치 시대나 센고쿠 시대에 많이 발표되었던 전진훈은 전장(전진)에서의 훈계로, 무사도의 역사에서 가훈 등과 함께 자주 읽혔다.[7]

2. 1. 군인칙유와 메이지 시대

1882년 메이지 천황이 하사한 군인칙유는 일본 군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41] 청일전쟁 당시 제1군 사령관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포로가 될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훈령을 내렸는데, 이는 훗날 전진훈의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구절의 원형이 되었다.[8]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평양에서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다.

> 적국 측의 포로 취급은 극히 잔인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결코 적에게 생포되는 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깨끗하게 죽음을 맞이하여, 일본 남자의 기상을 나타내고, 일본 남자의 명예를 완수하라.

러일전쟁 당시 포로가 된 병사가 적군에게 아군의 정보를 쉽게 누설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후 "포로가 되어도 적군의 심문에 답할 의무는 없다"는 점을 철저히 교육했다.[7] 또한, 메이지 20년대부터 국가주의와 일본주의가 유행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황도적 무사도"가 등장하였다.[7] 1905년 이노우에 테츠지로는 《무사도총서》를 발표하여, 센고쿠 시대의 전진훈과 하가쿠레 등을 모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가 일본 고유의 무사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천황에 대한 충성과 멸사봉공을 강조하며, 나라를 위해 죽음을 아끼지 않는 것을 무사도라고 주장했다.[7]

2. 2. 러일전쟁과 무사도 정신의 강화

메이지 20년대부터 국가주의·일본주의가 유행했으며,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의 영향으로 "황도적 무사도"가 등장한다.[41] 1905년(메이지 38년) 이노우에 데쓰지로는 《무사도총서》를 발표,[43] 센고쿠 시대의 전진훈과 하가쿠레 따위를 한데 그러모은 후 청일·러일전쟁 승리는 일본 고래의 무사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천황에 유일무이한 충성을 맹세하고 충의와 멸사봉공,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아끼지 않는 것이 무사도라고 해석했다.[41] 이것은 훗날 1942년(쇼와 17년) 《무사도 전서》로 계승되어 태평양 전쟁에 있어 "황도적 무사도"에 영향을 미친다.[41]

2. 3. 제네바 협약과 일본의 입장

일본은 1929년 제네바 협약(포로 대우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지만 비준하지 않았다. 군부는 "일본군은 결코 항복하지 않기에 이 조약은 편무(片務)적인 것이 된다"고 반발했다.[44] 이는 일본군이 포로가 되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일로 여기는 반면, 외국 군인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부의 반대는 일본군이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인식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쇼와 육군의 전진훈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본 육군군인칙유를 보충할 새로운 훈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교육총감부 주도로 전진훈 작성이 시작되었다.[45]

이와쿠라 히데오는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이 저지르는 약탈, 강간,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을 막고자 "훔치지 말라", "죽이지 말라", "범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은 간결한 훈령을 제안했다. 그러나 완성된 전진훈은 이와쿠라의 초기 의도와 달리 고전적 정신주의를 강조하는 내용이 되었다.[46]

전진훈 작성 과정에는 여러 인물이 참여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의견을 수렴하면서 초점이 흐려졌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마무라 히토시 교육총감부 본부장은 훗날 전진훈이 너무 장황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회고하며, 간결하고 명확한 표현을 썼어야 했다고 반성했다.[13] 시마자키 도손도 전진훈 초안에 대해 "전쟁터의 특성상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걱정해서 만든 훈"이라고 평가했다.[13]

3. 1. 제정 과정

중일전쟁에서 군기문란에 대한 대책으로 교육총감부가 군인칙유를 보충하기 위해 전진훈 작성을 시작했다.[45] 발안은 이와쿠라 히데오가 한 것으로 전해진다.[14][17] 이와쿠라는 중국 전선에서 약탈, 강간, 일반 시민 학살 등이 횡행하는 상황을 우려하여, "훔치지 말라", "죽이지 말라", "범하지 말라"를 평이한 언어로 표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완성된 전진훈은 고전적 정신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것으로, 당초 이와쿠라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46]

전진훈 작성은 교육총감부가 주도했다. 야마다 오토조 교육총감, 이마무라 히토시 본부장, 우자와 나오노부 교육총감부 제1과장,[47] 우라베 아키라 교육총감부 제1과 도덕교육 담당, 시라네 다카유키 육군 중위[47] 등이 중심이었다. 국체관·사생관은 이노우에 데쓰지로, 야마다 요시오, 와쓰지 데쓰로, 기히라 다다요시[48] 등이, 문체는 시마자키 도손,[47][48] 사토 소노스케, 도이 반스이,[48] 고바야시 이치로[48] 등이 교열에 참여했다.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이 전진훈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나, 이와쿠라 히데오에 따르면 전진훈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전임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차관 시절에 이미 작성이 시작되었으며, 기초 작업이 오래 걸려 도조가 대신일 무렵 완성되었다고 한다.[49]

3. 2. 전진훈의 공표와 내용

육군성이 제정하여, 1941년(쇼와 16년) 1월 7일에 상주(上奏)하고, 다음 8일 육군 시(陸軍始)의 관병식에서 육훈 제1호로 전군에 시달했다. 같은 날 신문 등 미디어는 이를 크게 보도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쇼와의 군인 정신 앙양 '전진훈'을 제정하다 ― 오늘 전 장병에게 배포 ―"라는 제목의 기사로 "세계 동란에 대응하여 최정강의 황군 연성을 목표로 하는 육군에서는 황군 병사가 좌우에 두고 실천 복행하는 이른바 쇼와 무인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진훈'을 새롭게 제정, 7일 오후 상주 어재가를 거쳐 8일 육군 시 관병식의 길일을 정하여 도조 육상의 이름으로 전군에 시달, 각 병사에게 한 장씩 배포(후략)"라고 보도하며, '전진훈'의 전문도 게재했다. 또한, 15일자 주보(내각정보국)에서는 "국민의 마음가짐으로 삼아야 한다"며 민간인에게도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46]

군인에게 침투시키기 위해 육군성은 '군대수첩'과 같은 크기의 '전진훈'을 제작했다. 다음 1942년 판부터는 군대 수첩에 인쇄하기로 했다. 또한 별도로 '전진훈 해석'(1942년)도 발행하고 있다.

당시에는 군인이나 관료가 서적을 출판하고 인세라는 형식으로 뇌물을 보내(또는 아첨을 하며), 다른 출판물의 출판 허가를 얻는 풍조가 있었지만[50], '전진훈'의 인세 수령은 불분명하다.

「전진훈」은 「서」와 「본훈」, 「결」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훈」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뉜다.

  • '''서'''
  • '''본훈(그 1)'''
  • * 제1 「황국」皇国|황국일본어
  • * 제2 「황군」皇軍|황군일본어
  • * 제3 「황기」皇紀|황기일본어
  • * 제4 「단결」団結|단결일본어
  • * 제5 「협동」協同|협동일본어
  • * 제6 「공격 정신」攻撃精神|공격 정신일본어
  • * 제7 「필승의 정신」必勝の精神|필승의 정신일본어
  • '''본훈(그 2)'''
  • * 제1 「경신」敬神|경신일본어
  • * 제2 「효도」孝道|효도일본어
  • * 제3 「경례 거소」敬礼挙措|경례 거소일본어
  • * 제4 「전우도」戦友道|전우도일본어
  • * 제5 「솔선궁행」率先躬行|솔선궁행일본어
  • * 제6 「책임」責任|책임일본어
  • * 제7 「생사관」生死観|생사관일본어
  • * 제8 「이름을 아낌」名を惜しむ|이름을 아낌일본어
  • * 제9 「질실강건」質実剛健|질실강건일본어
  • * 제10 「청렴결백」清廉潔白|청렴결백일본어
  • '''본훈(그 3)'''
  • '''결'''


특히,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구절은 일본군의 옥쇄와 자결을 정당화하는 핵심 논리로 작용했다.[5]

3. 3. 전진훈의 유포와 영향

군대 내에서는 전진훈 봉독이 일상화되었고, 특히 야포병 제22연대에서는 기상 후 봉독이 습관이었다.[51] 육군성은 군대수첩과 동일한 크기의 전진훈을 제작하여 배포하였고, 1942년판부터는 군대수첩에 아예 인쇄하였다. 별도로 《전진훈 해석》(1942년)도 발행되었다.

일반 국민에게도 전진훈은 널리 보급되었다. 1941년 한 해에만 최소 12종의 해설서(《전진훈술의》, 《전진훈화》 등)와 5종의 교재(《마음을 단련하는 소국민의 전진훈》, 《소년애국전진훈이야기》 등)가 출판되었고, 이후 패전까지 다양한 관련 서적이 출판되었다.[54] 전진훈 카루타[55] 등이 제작되었고, 학교 교육에도 편입되어 암기가 장려되었다.[56]

전진훈은 가요로도 만들어져 1941년 4월에 빅터, 폴리도르, 킹 레코드사에서 경쟁적으로 발표하였다. 노래 제목은 모두 '전진훈의 노래'로 동일했다.

레코드사작사작곡가창
빅터우메키 사부로스마 요사쿠도쿠야마 다마키
폴리도르후지타 마사토에구치 요시오쿠다 료조, 세키 다테코, 보컬포합창단
킹 레코드요시카와 에이시나가타 겐지로나가타 겐지로



이 중 빅터 레코드사의 노래가 가장 널리 보급되어 불렸다. 1972년 필리핀 루방섬에서 발견된 오노다 히로 전 육군 소위는 기자회견에서 빅터 레코드사의 〈전진훈의 노래〉 3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육상자위대에서는 행진곡 〈전진훈〉을 연주하기도 한다.

4. 전진훈과 옥쇄

戦陣訓일본어은 여러 전장에서 옥쇄 명령문 중에 인용되었다. "옥쇄"란 『북제서』 원경안전에 나오는 "대장부, 차라리 옥으로 부서질지언정 어찌 기와로 완전함을 취하겠는가(大丈夫寧可玉砕、何能瓦全)" (훌륭한 사나이는 깨끗하게 죽어야 하며, 기와처럼 무사히 살아남는 것보다 부서져도 옥이 낫다)라는 표현에 따른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음 사용된 것은 1943년 5월 29일 아투 섬의 일본군 수비대 약 2,600명의 전멸 발표 때였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일본군 장병에 의한 오키나와현민에 대한 집단 자결 강요가 행해졌고, 그 결과 자마미 섬에서는 적어도 섬 주민 130명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전해지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이와나미 서점 오키나와 전투 재판도 참조).

4. 1. 애투 섬 전투

1943년 5월 29일 애투 섬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전멸했을 때, 전진훈의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구절이 처음으로 옥쇄 명령에 인용되었다.[29] 야마자키 야스요 대좌는 군속까지 포함하여 "살아 포로의 치욕을 받지 않도록 각오하라"고 명령했다. 아사히 신문은 이를 "전진훈을 실천"한 사례로 보도했다.[29]

4. 2. 사이판 전투

1944년 7월 3일 사이판섬 수비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사이판 전투에서 총돌격 행동 개시 시각을 결정하며 "사이판섬 수비대에 전하는 훈시"를 발표했다. "단호히 나아가 미군에 일격을 가해 태평양의 방파제로서 사이판섬에 뼈를 묻으라. 전진훈에 이르되 '살아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아니하며' 하였다. 용약히 전력을 다하고 종용(従容, 차분)히 유구한 대의에 삶을 기쁨으로 알라"라고 하였다.[58] 그 결과, 일본군 전사 약 21,000명, 자결 약 8,000명, 포로 921명이 발생했다. 나구모 자신도 자결한 것으로 보인다.[31]

5. 전진훈에 대한 비판과 평가

쇼와 육군의 《전진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태평양 전쟁 중에 발생한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 옥쇄(전멸), 민간인의 자결을 권장하고 항복을 금지하는 원인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1941년 기쿠치 칸은 "이것은 아마도 군인에게 하사하신 칙유의 석의로서, 또한 그 시행 세칙으로서 발표된 것일 것이다."라고 말했다.[60]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구절은 전후 태평양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일본군의 인명 경시 행동(반자이 돌격)을 부정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 다만 이 구절은 "본훈 그 2"의 "제8 명예를 아낀다"의 일부이며, 전문은 "생사를 초월하여 오직 임무 완수에 매진해야 한다"는 "제7 생사관"에 이어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전진훈》에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지 말라"는 구절 외에도 다음과 같은 훈시가 있었다.


  • 적산, 적자 보호에 유의해야 한다. 징발, 압수, 물자의 소각 등은 규정에 따라 반드시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 황군의 본의에 비추어, 인자한 마음으로 무고한 주민을 사랑해야 한다.
  • 전진에서 술과 여자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욕정에 휩싸여 본심을 잃고 황군의 위신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 분노를 억제하고 불만을 제어해야 한다. "분노는 적으로 생각하라"고 옛사람도 가르쳤다.

5. 1. 이시와라 간지의 비판

도조 히데키와 대립했던 이시와라 간지 육군 중장은 1941년 9월 저서 《최종전쟁론·전쟁사대관》에서 전진훈에 대하여 "장제스 저항의 근저에는, 일부 일본인의 비도덕성에 힘입어 지나 대중의 적개심을 부채질한 점에 있다. 《파견군장병에 고함》, 《전진훈》의 중대의의도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라고 썼다.[59] 더구나 "군인칙유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라며 부하에게는 전혀 읽게 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5. 2. 이토 케이이치의 비판

쇼와 18년(1943년), 중국 전선에서 《전진훈》을 받아본 이토 케이이치 육군 상등병(훗날의 전기 작가)은 한번 읽고 나서 "열불이 나 그것을 조각조각 찢어버리고 발로 짓뭉갰다"고 한다. 그는 《전진훈》을 "말하는 게 바보스러워지는 독전(督戦, 싸움을 독려함)문서"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평했다.[62]

이토 케이이치는 《전진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62]

  • 내용: 한없이 공허하고 개념적이며, 악문(惡文)이다.
  • 태도: 자신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면서, 싸우고 있는 자에게 이 이상 싸우게 하고자 하는 의식만이 근간에 있다.
  • 병사에 대한 인식: 십 년 이상 신산과 출혈을 거듭해온 군인에 대한 올바른 평가도 동정도 전혀 없다. 동정은 집어치우더라도 이해가 없다.
  • 표현: 호들갑스러운 표현은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는 자라면 부끄러워 땀을 흘릴 지경이다.


이토는 자신이 전장에서 《전진훈》을 내던진 이유에 대해 "실로 격렬한 수치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소책자를 득의양양히 병원(兵員)에 배포한, 그 따위 지도자의 명령에 싸우고 있는 건가, 하는 구원 없는 암담한 심정을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62]

또한, 군인칙유는 수미일관한 명문으로 높이 평가하는 한편, 《전진훈》은 "세계 전사 가운데 최악의 문장"으로 혹평하며 "'살아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아니하며' 따위 입 밖에 꺼내지 않아도 전선 병사는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문장 전체에 넘쳐흐르는 독선적인 냄새가 싫"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도조 히데키가 《전진훈》을 만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63] 다만, 실제로는 도조 히데키가 직접 제작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훈》이 도조 히데키 시절에 제정되어 그의 이름으로 시달되었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도조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사실이다.

5. 3. 해군의 전진훈 무시

전진훈은 어디까지나 도조 육군대신의 훈시였기 때문에 법적 구속력이 모호했고, 해군에서는 이를 무시했다는 증언도 있다.[61]

6. 전진훈과 한국

(빈 문서)

참조

[1] 서적 The Oxford Companion to World War II
[2] 서적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3] 서적 War Without Mercy: Race and Power in the Pacific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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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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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서적 BC級戦犯を読む 日本経済新聞出版社
[62] 서적 兵隊たちの陸軍史 新潮文庫 2008
[63] 서적 昭和の戦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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