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정토진종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토진종은 13세기 일본에서 신란에 의해 창시된 불교 종파이다. 아미타불에게 의지하여 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을 추구하는 타력신앙을 강조하며, 특히 '악인정기' 사상을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설파한다. 렌뇨 시대를 거치며 혼간지파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나,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를 거치며 분열을 겪었다. 현재는 여러 종파로 나뉘어 일본 불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한국과의 관계 및 주요 의례와 행사, 현대의 주요 인물 등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정토진종 - 신란
    신란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이자 정토진종의 개창자로,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강조하는 절대 타력의 사상을 설파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교행신증》 등이 있다.
  • 불교의 종파 - 경종 (불교)
  • 불교의 종파 - 명진
    명진은 1975년 해인사에서 출가한 조계종 승려이자, 불교계 민주화 운동과 사회 비판적 활동을 펼쳐온 사회 운동가이다.
정토진종
지도
개요
명칭정토진종
일본어 명칭浄土真宗 (じょうどしんしゅう)
로마자 표기Jōdo Shinshū
종파정토종
창시자신란
주요 경전정토삼부경
본존아미타불
중심 사찰혼간지 (교토)
특징염불 수행, 타력 신앙
역사
창종 연도1224년 (겐닌 원년)
창시자신란
배경가마쿠라 시대의 사회적 불안과 말법사상
발전에도시대,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
교리
핵심 사상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믿고 염불을 통해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함
주요 수행염불 (나무아미타불)
특징타력 신앙 강조
선악의 구분을 초월한 절대적인 아미타불의 자비 강조
염불 외 다른 수행 방법 배제
계율의 엄격함 완화
종파
주요 종파혼간지파
오타니파
고쇼지파
부쿄지파
고쿠라쿠지파
센주지파
야마모토파
특징각 종파마다 해석과 의례에 약간의 차이가 존재
영향
일본 불교일본 불교의 대중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
사회일본 사회와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음
현대현대 일본에서도 가장 신도가 많은 종파 중 하나

2. 역사

규슈로의 전파 경로에 관한 자료는 적지만, 초기의 전파에서는 신란의 제자, 아라키 겐카이의 계통을 잇는 아라키 문도 계열의 붓코지파 문도나 시모쓰케국(토치기) 타카다 문도·타카다파에 의해 정토진종이 전해진 듯하다. 문도들이 동규슈 연안부의 항구나 세토 내해의 항구를 이용하여 규슈를 방문하거나 이주하는 과정에서 사찰도 건립되었다.[27]

렌뇨의 시대에, 쿄고(렌교)가 붓코지파에서 혼간지파로 옮겨가면서 쿄고를 따르는 문도들도 옮겨가 규슈에 혼간지파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또한 규슈에서 오사카의 렌뇨를 찾아가 렌뇨에게 귀의한 승려들이 규슈에 정토진종을 전했다는 사찰 전승도 다수 보인다.

2. 1. 신란(親鸞)과 정토진종의 성립

신란(1173–1263)은 헤이안 시대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걸쳐 살았으며, 이 시기는 천황이 쇼군에게 정치적 권력을 빼앗긴 격동의 시대였다.[4] 신란의 가족은 교토의 황실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지만, 당시 많은 귀족 가문들이 자녀들을 비구승려로 출가시키고 있었다. 신란은 1181년 아홉 살의 나이로 히에이 산으로 보내져 덴다이 종에서 사미의 계를 받았다. 그러나 불교가 실천되는 방식에 환멸을 느껴 롯카쿠도에서 100일간의 수행에 들어갔고, 95일째 되는 날 쇼토쿠 태자의 계시를 받았다.[4] 수행을 마친 신란은 1201년에 히에이 산을 떠나 호넨 아래에서 6년 동안 공부했다. 호넨은 1175년에 정토종을 창시한 또 다른 전 덴다이 종 승려였다. 이후 신란은 망명 생활 중에도 자신을 호넨의 제자로 여겼다.[4]

이 기간 동안 호넨은 염불 수행만을 가르쳤고 많은 추종자를 모았지만, 불교계의 비판도 받았다. 1207년, 고토바 천황은 호넨과 그의 가르침을 금지했고, 신란을 포함한 추종자들은 망명을 강요받았다. 신란은 에치고 지방으로 이주했다.[3][4]

이 망명 기간 동안 신란은 1210년에 에신니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의 장남 젠란은 이단적인 정토교 종파를 시작했다고 알려졌으나, 신란은 1256년에 그를 의절했다.

1211년에 염불 금지가 해제되었고 신란은 사면되었지만, 1212년에는 호넨이 사망했다. 신란은 간토 지방으로 가서 추종자를 확보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1224년에는 ''교행신장''을 저술했다.[4]

1234년, 신란은 교토로 돌아와 남은 생애를 글쓰기에 헌신했다. 카쿠신니는 신란의 말년을 돌보았고, 그의 묘는 나중에 혼간지가 되었다. 카쿠신니는 신란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 신란은 1263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2. 2. 렌뇨(蓮如)와 혼간지(本願寺)의 발전

신란의 사후, 재가 신도인 '몬토'는 간토 지방과 북동부 해안을 따라 천천히 확산되었다. 신란의 후손들은 덴다이 종에서 계속 승려 서품을 받으면서, 신란의 묘소를 관리하고 신 불교의 스승 역할을 했다. 신란의 제자 중 일부는 교토에 붓코지(佛光寺)와 고쇼지(興正寺)와 같은 자신만의 신 불교 종파를 설립했다. 초기 신 불교는 렌뇨 (1415–1499)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번성했는데, 그는 신란의 8대손이었다.

이 무렵의 정토진종은 불광사나 전수사에서 활발한 포교 활동이 이루어져 많은 신자를 얻었지만, 혼간지(本願寺)는 8세 렌뇨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천태종의 말사로서 존속했을 뿐이었다. 가쿠뇨(1270년-1351년)는 삼대전지 등을 근거로 친란의 조묘 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본원사(별명 "오타니 본원사")를 세워 본원사 3세라고 칭했다. 불광사 7세의 료겐(1295년-1336년) 등 다른 법맥은 불광사나 전수사 등을 근거지로 하여, 차츰 본원사에 대항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렌뇨는 그의 카리스마와 포교를 통해 신 불교가 더 많은 신도를 모으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렌뇨는 조도신슈 의식과 전례의 많은 부분을 공식화하고, 혼간지 절의 쇠퇴하는 공동체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정치적 권력을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관행을 종식시켰다. 렌뇨는 또한 다른 정토 종파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포교 활동을 벌였고, 더 작은 신 종파들을 통합했다.

16세기 센고쿠 시대 동안 혼간지(本願寺)의 정치적 권력은 무장 오다 노부나가와의 여러 갈등을 초래했는데, 이는 노부나가가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탐냈던 이시야마 혼간지를 둘러싼 10년간의 분쟁으로 절정에 달했다. 종파가 너무 강해지자, 1602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칙령에 따라, 교토의 주요 사찰인 혼간지는 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두 종파로 나뉘었다. 이 두 종파, 즉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는 오늘날까지 분리되어 존재한다.

렌뇨는 일반적으로 초기 조도신슈 공동체의 정체를 되돌린 인물로 신 불교도들에게 칭송받으며, 조도신슈의 "제2대 개조"로 여겨진다. 그의 초상화는 신란의 초상화와 함께 대부분의 조도신슈 사찰의 '온아이지'(불단)에 걸려 있다. 그러나 렌뇨는 중세 정치에 관여하고 신란의 원래 사상에서 벗어났다는 혐의로 일부 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

2. 3. 센고쿠 시대(戰國時代)와 잇코 잇키(一向一揆)

무로마치 시대 후기, 렌뇨(1415년-1499년)는 강(講)이라는 조직과 어문(御文)을 통해 신란의 가르침을 전파하여 혼간지를 크게 발전시켰다. 혼간지는 잇코슈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 강의 신자들의 단결력은 잇코 잇키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오닌의 난(1467년-1477년) 무렵, 가가국에서는 도카시 마사치카를 옹호하는 혼간지 문도와 도카시 유키치요를 옹호하는 센슈지 파 문도 간의 대립이 있었다. 결국 혼간지 문도가 승리하여 초쿄 2년(1488년) 마사치카를 자결로 몰아넣고 자치를 확립했다.

기나이에서는 야마시나 혼간지가 본거지였으나, 덴분 원년(1532년)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닛켄슈의 공격으로 불타 없어지고, 이시야마 혼간지로 본거지를 옮겼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의 대립에서, 혼간지 11세 겐뇨(1543년-1592년)는 요시아키를 옹호하여 겐키 원년(1570년) 노부나가를 공격했다(이시야마 전투). 각지에서 잇코 잇키가 봉기했지만, 노부나가에 의해 진압되었다. 덴쇼 8년(1580년), 고요제이 천황의 중재로 화의가 성립되어 겐뇨는 이시야마에서 퇴거했다.

잇코 잇키는 센고쿠 다이묘에 필적하는 세력이었지만, 모든 진종 문도가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2. 4. 에도 시대(江戶時代)와 혼간지의 분열

신란의 사후, 그의 가르침은 몬토(재가 신도)를 통해 간토 지방과 북동부 해안을 따라 확산되었다. 신란의 후손들은 덴다이 종에서 승려 서품을 받으며 묘소를 관리하고 신 불교의 스승 역할을 했다. 일부 제자들은 붓코지(佛光寺)와 코쇼지(興正寺) 등 독자적인 신 불교 종파를 설립했다. 초기 신 불교는 렌뇨 (1415–1499) 시대에 이르러 번성했는데, 그는 카리스마와 포교를 통해 신 불교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16세기 센고쿠 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이시야마 혼간지를 둘러싼 10년간의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파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1602년 칙령을 통해 교토의 혼간지를 니시(서) 혼간지(西本願寺)와 히가시(동) 혼간지(東本願寺)로 분열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인 1591년, 겐뇨는 교토 중앙부(교토 시치조 호리카와)에 토지를 하사받아 혼간지를 재흥했다. 그러나 1602년, 이시야마 퇴거 시의 견해 차이와 교단 내부 대립,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종교 정책으로 인해 겐뇨의 장남 쿄뇨가 혼간지 동쪽 토지(교토 시치조 가라스마)를 하사받아 혼간지(동)를 분립했다. 이로써 혼간지 교단은 겐뇨의 삼남 준뇨를 12세 종주로 하는 혼간지(서)와 장남 쿄뇨를 12대 종주로 하는 혼간지(동)로 분열되었다.

신란 시대에는 신도들이 '도장'(道場)이라는 비공식적인 모임 장소에 모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도신슈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묘에와 진언종에 의해 대중화된 광명진언이나, 잇펜과 지종(時宗)의 신도들이 행했던 염불 오도리(念仏踊り)와 같은 다른 불교 수행을 혼합하기 시작했다. 렌뇨는 이러한 관행을 종식시키고 조도신슈 의식과 전례의 많은 부분을 공식화하여 혼간지 절의 공동체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정치적 권력을 주장했다. 렌뇨는 또한 다른 정토 종파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포교 활동을 벌였고, 더 작은 신 종파들을 통합했다. 렌뇨는 조도신슈의 "제2대 개조"로 여겨지지만, 중세 정치에 관여하고 신란의 원래 사상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렌뇨 이후에도 신 불교는 일부 지역에서 박해를 받았으며, '카쿠레 넨부츠'라는 비밀 신 불교 신도들은 산속 동굴에서 만나 의식을 거행했다.

에도 시대에 일본이 통일된 후, 조도신슈 불교는 단가 제도 하에서 기념 및 장례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적응했다. 혼간지는 인상적인 학문적 전통을 창출하여 교토에 류코쿠 대학을 설립하고, 많은 조도신슈 전통을 공식화했다. 메이지 유신 후 종교 재편 시, 정토진종 혼간지파만이 "정토진종"으로 신청했고, 나머지는 "진종"으로 신청하여 현재의 명칭에 영향을 미쳤다. 오랜 역사 속에서 토속 신앙 등과 결합된 민간 신앙, 정토진종 계열의 신종교도 존재한다.

2. 5.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이후의 변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인 덴쇼 19년(1591년)에 겐뇨는 교토 중앙부(교토 시치조 호리카와)에 토지를 하사받아 혼간지를 재흥했다. 1602년, 이시야마 퇴거 시의 견해 차이 등을 둘러싼 교단 내부 대립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종교 정책으로 인해, 겐뇨의 장남인 쿄뇨(1558년-1614년)가 이에야스로부터 혼간지 바로 동쪽 토지(교토 시치조 가라스마)를 하사받아 혼간지(동)를 분립했다. 이로 인해 당시 최대 종교 세력이었던 혼간지 교단은 겐뇨의 삼남 준뇨(1577년-1630년)를 12세 종주로 하는 혼간지(서)와 장남 쿄뇨를 12대 종주로 하는 혼간지(동)로 분열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종교 재편 시, 다이쿄인에 대해 종교 단체로서 공적인 명칭을 등록할 때, 현재의 정토진종 혼간지파만이 "정토진종"으로 신청했고, 나머지는 "진종"으로 신청한 것이 현재 명칭에 영향을 주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토속 신앙 등과 결합된 민간 신앙, 정토진종 계열의 신종교도 존재하고 있다.

3. 교의(敎義)

메이지 유신 때인 메이지(明治) 5년(1872년)의 '육식·대처·축발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법령 반포 이전에는 정토진종만이 드러내놓고 결혼과 육식을 했다.[32]

다른 정토 불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아미타불은 불교 수행의 중심이며, 정토진종은 염불, 즉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암송 수행을 통해 이러한 헌신을 표현한다. 정토진종이 염불을 수행하는 최초의 불교 종파는 아니지만, 신란에 따르면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된다. 염불은 아미타불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행위로 이해되며, 더욱이 아미타불의 막힘없는 자비의 힘을 통해 수행자에게서 일어난다. 따라서 신불교에서는 염불을 수행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업보를 생성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염불이 곧 명호이므로, 명호를 외는 것은 아미타불이 신도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는 명호의 본질이다.[7]

이는 아미타불에 대한 헌신과 염불 암송을 결합하여 그의 극락정토인 수승정토에 태어나는 수단으로 장려하는 관련 종파인 정토종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염불 암송이 더 정교한 의식의 일부였던 중국과 일본의 다른 불교 종파와도 대조적이다.

신란이 저술한 정토진종의 근본 성전인 『교행신증』의 서두에서 석존의 출세 본회인 경전인 『대무량수경』를 "진실한 가르침"이라고 칭하고, 아미타여래 (이하 "여래")의 본원 (사십팔원)과, 본원에 의해 주어지는 명호 "나무아미타불"을 정토문의 진실한 가르침 "정토진종"이라고 제시하고 있다.[23]

신란은 명호를 "나무(나에게 일체를 맡기라) 아미타불(반드시 구원하리)"이라는 아미타불로부터의 부름 (본원 초환의 칙명)으로 이해하고, 이 부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타력신심이 일어나는 일념의 때 왕생이 결정된다'''고 설했다.

신란은 『정상말화찬』 "우독비탄술회"에서, "정토진종에 귀의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은 얻기 어렵네, 허가불실의 우리 몸으로 청정한 마음은 더욱 없네", "무참무괴한 이 몸으로 진실한 마음은 없지만, 미타의 회향의 어명이니 공덕은 시방에 가득하네", "사갈간사한 마음으로 자력수선은 불가능하네, 여래의 회향을 믿기 전에는 무참무괴한 채로 끝나리라"라고 "진실한 마음"은 허가불실의 몸인 범부에게는 없다고 언급하며, 여래의 본원력 회향에 의한 명호의 공덕으로 참괴하는 몸이 될 수 있다고 한다.[24]

본존은 아미타여래 일불이다. 다만, 다카다파 및 일부 문도는 젠코지식 아미타 삼존 형식인 아미타여래・관음보살・세지보살을 본존으로 한다.

3. 1. 타력본원(他力本願)과 염불(念佛)

메이지 유신 때인 메이지(明治) 5년(1872년)의 '육식·대처·축발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법령 반포 이전에는 정토진종만이 드러내놓고 결혼과 육식을 했다.[32]

다른 정토 불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아미타불은 불교 수행의 중심이며, 정토진종은 염불, 즉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암송 수행을 통해 이러한 헌신을 표현한다. 정토진종이 염불을 수행하는 최초의 불교 종파는 아니지만, 신란에 따르면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된다. 염불은 아미타불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행위로 이해되며, 더욱이 아미타불의 막힘없는 자비의 힘을 통해 수행자에게서 일어난다. 따라서 신불교에서는 염불을 수행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업보를 생성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염불이 곧 명호이므로, 명호를 외는 것은 아미타불이 신도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는 명호의 본질이다.[7]

이는 아미타불에 대한 헌신과 염불 암송을 결합하여 그의 극락정토인 수승정토에 태어나는 수단으로 장려하는 관련 종파인 정토종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염불 암송이 더 정교한 의식의 일부였던 중국과 일본의 다른 불교 종파와도 대조적이다.

신란이 저술한 정토진종의 근본 성전인 『교행신증』의 서두에서 석존의 출세 본회인 경전인 『대무량수경』를 "진실한 가르침"이라고 칭하고, 아미타여래 (이하 "여래")의 본원 (사십팔원)과, 본원에 의해 주어지는 명호 "나무아미타불"을 정토문의 진실한 가르침 "정토진종"이라고 제시하고 있다.[23]

신란은 명호를 "나무(나에게 일체를 맡기라) 아미타불(반드시 구원하리)"이라는 아미타불로부터의 부름 (본원 초환의 칙명)으로 이해하고, 이 부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타력신심이 일어나는 일념의 때 왕생이 결정된다'''고 설했다.

신란은 『정상말화찬』 "우독비탄술회"에서, "정토진종에 귀의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은 얻기 어렵네, 허가불실의 우리 몸으로 청정한 마음은 더욱 없네", "무참무괴한 이 몸으로 진실한 마음은 없지만, 미타의 회향의 어명이니 공덕은 시방에 가득하네", "사갈간사한 마음으로 자력수선은 불가능하네, 여래의 회향을 믿기 전에는 무참무괴한 채로 끝나리라"라고 "진실한 마음"은 허가불실의 몸인 범부에게는 없다고 언급하며, 여래의 본원력 회향에 의한 명호의 공덕으로 참괴하는 몸이 될 수 있다고 한다.[24]

본존은 아미타여래 일불이다. 다만, 다카다파 및 일부 문도는 젠코지식 아미타 삼존 형식인 아미타여래・관음보살・세지보살을 본존으로 한다.

3. 2. 정토(淨土)와 신진(信心)

정토진종은 좀 더 전통적인 정토교와는 달리,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아미타불에게 자신을 맡기는 순간, "진실로 결정된 단계"에 들어서는데, 이는 보살의 길에서 불퇴전의 단계에 해당한다.[32]

신란 시대의 많은 정토교 불교 종파들은 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죽음 이후에만 일어나는 문자 그대로의 환생으로 여겼다. 정토진종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의식들은 아미타불의 '타력'이 아닌 '자력'에 의존하는 것이며, 이를 수행할 시간과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신란은 담란의 사상을 따라 정토를 열반과 동의어로 보았다.[8]

신란은 명호를 "나무(나에게 일체를 맡기라) 아미타불(반드시 구원하리)"이라는 아미타불로부터의 부름으로 이해하고, 이 부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타력신심이 일어나는 일념의 때 왕생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신의 길의 목표는 아미타의 타력에 의해 신진(信心)을 얻는 것이다. 신진은 '타력'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기 노력의 포기를 통해 이루어지며, '자연'(jinen, 서원의 자연스러움, 자발적인 작용)에서 생겨난다. 정토진종 수행자들에게 신진은 아미타불의 염불 소리를 "깊이 듣는 것"(monpo일본어)을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한다. 신란에 따르면, "듣는 것"은 "중생들이 부처의 서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 그 기원과 성취 - 를 듣고 의심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9] '자연'은 아미타불의 무한한 빛이 무수한 윤회의 깊이 뿌리박힌 업보를 좋은 업보로 비추고 변환시키는 자연스러움을 묘사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아미타불과 하나가 되고 신진을 통해 수행자에게 부여된 불성을 얻으면, 수행자는 불퇴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며, 죽음 이후에는 즉각적이고 노력 없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그는 모든 중생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기 위해 보살로 세상에 돌아올 것이다.

『교행신증』의 서두에서 석존의 출세 본회인 경전인 『대무량수경[23]를 "진실한 가르침"이라고 칭하고, 아미타여래의 본원 (사십팔원)과, 본원에 의해 주어지는 명호 "나무아미타불"을 정토문의 진실한 가르침 "정토진종"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정상말화찬』 "우독비탄술회"에는 "정토진종에 귀의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은 얻기 어렵네, 허가불실의 우리 몸으로 청정한 마음은 더욱 없네"라고 언급하며, 여래의 본원력 회향에 의한 명호의 공덕으로 참괴하는 몸이 될 수 있다고 한다.[24]

본존은 아미타여래 일불이다. 다만, 다카다파 및 일부 문도는 젠코지식 아미타 삼존 형식인 아미타여래・관음보살・세지보살을 본존으로 한다.

3. 3. 악인정기(惡人正機)

신란은 명호를 "나무(나에게 일체를 맡기라) 아미타불(반드시 구원하리)"이라는 아미타불로부터의 부름 (본원 초환의 칙명)으로 이해하고, 이 부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타력신심이 일어나는 일념의 때 왕생이 결정된다'''고 설했다.[24]

『정상말화찬』 "우독비탄술회"에 따르면, "정토진종에 귀의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은 얻기 어렵네, 허가불실의 우리 몸으로 청정한 마음은 더욱 없네", "무참무괴한 이 몸으로 진실한 마음은 없지만, 미타의 회향의 어명이니 공덕은 시방에 가득하네", "사갈간사한 마음으로 자력수선은 불가능하네, 여래의 회향을 믿기 전에는 무참무괴한 채로 끝나리라"라고 하여, "진실한 마음"은 허가불실의 몸인 범부에게는 없다고 언급하며, 여래의 본원력 회향에 의한 명호의 공덕으로 참괴하는 몸이 될 수 있다고 한다.[24]

정토진종메이지 유신 때인 메이지(明治) 5년(1872년)의 '육식·대처·축발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법령 반포 이전에는 드러내놓고 결혼과 육식을 했다.[32]

4. 종파(宗派)

정토진종은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으며, 그 중 주된 종파는 진종10파(真宗十派)이다. 진종10파 외에도 여러 종파들이 존재한다.

진종10파에는 정토진종 혼간지파(니시혼간지), 진종 오타니파(히가시혼간지), 진종 다카다파, 진종 붓코지파, 진종 고쇼지파, 진종 기베파, 진종 이즈모지파, 진종 조쇼지파, 진종 산몬토파, 진종 야마모토파가 있다. 각 종파는 본산, 통칭, 본산 소재지, 소속 사원 수에서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정토진종 혼간지파는 본원사를 본산으로 하며 약 10,500개의 사찰을, 진종 오타니파는 진종 본묘를 본산으로 하며 약 8,900개의 사찰을 거느리고 있다.[29]

1923년(다이쇼 12년), 친란 성인의 탄생 750주년과 입교개종 700주년을 기념하여 정토진종 각 파의 협조와 연계를 도모하기 위해 진종 각 파 협화회가 결성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진종교단연합이며, 가맹 단체는 위에서 언급된 10개 종파이다.

진종10파 외에도 정토진종동본원사파, 정토진종 오타니 본원사파, 종교법인 본원사 등 여러 종파 및 단체들이 존재한다. 또한, 메이지 이후 분파한 종파 및 단체들도 다수 존재한다.

정토진종은 일본 불교 여러 종파 중 가장 많은 사찰(약 22,000개)과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종파명본산통칭본산 소재지소속 사원 수
정토진종 혼간지파본원사니시혼간지교토시 시모교구약 10,500
진종 오타니파진종 본묘히가시혼간지교토시 시모교구약 8,900[29]
진종 다카다파센슈지다카다 본산미에현 쓰시약 640
진종 붓코지파붓코지교토시 시모교구약 390
진종 고쇼파고쇼지교토시 시모교구약 500
진종 키베파킨쇼지시가현 야스시약 200
진종 이즈모지파고세쓰지고분이치 본산후쿠이현 에치젠시약 60
진종 세이쇼지파세이쇼지사바에 본산후쿠이현 사바에시약 70
진종 산몬토파센쇼지나카노 본산후쿠이현 후쿠이시36
진종 야마모토파쇼조지요코고시 본산후쿠이현 사바에시21


5. 한국과의 관계

6. 주요 의례 및 행사

정토진종 사찰에서 일반적으로 지켜지는 주요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17]

공휴일일본어 명칭날짜
신년 예배간탄에(Gantan'e)1월 1일
신란의 추도 예배호온코(Hōonkō)11월 28일 또는 1월 9일–16일
춘분히간(Higan)3월 17일–23일
부처님 오신 날하나마쓰리(Hanamatsuri)4월 8일
신란 탄생일고탄에(Gotan'e)5월 20일–21일
본 축제우라본에(Urabon'e)양력 8월 15일경
추분히간(Higan)9월 20일–26일
성도절로하쓰(Rohatsu)12월 8일
섣달 그믐 예배조야에(Joyae)12월 31일



정토진종은 아미타여래의 작용에 맡기고 모든 사람은 왕생할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많은 종교 의식이나 습속에 얽매이지 않고, 보은사덕의 염불과 문법을 중요하게 여긴다. 가지기토를 행하지 않는 것도 큰 특징이다.

정토진종은 합리성을 중시하고, 작법이나 가르침도 간결했기 때문에 근세에는 서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다른 종파로부터 오히려 반발을 사서 "문도물지라즈" 등으로 조롱받기도 했다.

진종은 본존("나무아미타불"의 명호, 그림, 목상)의 각 가정 안치를 장려했다. 이를 안치하는 불단의 장엄에 관해서 "규칙"이 다른 종파에 비해 엄격하다. 장엄은 각 종파의 본산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종파마다 형태·불구가 다르다.

진종의 본산에는 그 어느 곳에도 기본적으로 본존 아미타여래를 안치하는 본당(아미타당)과는 별도로 종조 신란의 진영을 안치하는 어영당이 있다. 진종의 사찰 건축에는 내진에 비해 외진이 넓다는 등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또한 각 파 모두 종조 신란 성인의 상월명일에 "'''보은강'''"이라고 불리는 법회를 엄수한다. 그 취지는 구도, 홍교의 은덕과 그것을 통해 신지하게 된 아미타여래의 은덕에 보답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믿는 법회이다. 또한 이 법회를 연간 최대의 행사로 한다.

7. 현대의 주요 인물


  • 난조 분유(1848–1927)
  • 아사하라 사이치(1850-1932)
  • 가사하라 겐주(1852–1883)
  • 기요자와 만시(1863–1903)
  • 지카즈미 조칸(1870–1941)
  • 이케야마 에이키치(1873–1938)
  • 소가 료진(1875–1971)
  • 오타니 고즈이(1876–1948)
  • 아케가라스 하야(1877–1954)
  • 가네코 다이에이(1881–1976)
  • 이나가키 주이켄 사이조(1885–1981)
  • 구조 다케코(1887–1928)
  • 윌리엄 몽고메리 맥거번(1897–1964)
  • 야스다 리진(1900–1982)
  • 구보세 교마이(1905–2000)
  • 마이다 슈이치(1906–1967)
  • 해럴드 스튜어트(1916–1995)
  • 쓰지 겐류 다카시(1919-2004)
  • 알프레드 블룸(1926–2017)
  • 이나가키 히사오 주이오(1929–현재)
  • 반도 쇼준(1932–2004)
  • 운노 타이테츠(1935–2014)
  • 고바이 에이켄(1941–현재)
  • 데니스 히로타(1946–현재)
  • 다나카 겐네스 K.(1947–현재)
  • 마빈 하라다(1953–현재)

참조

[1] 웹사이트 The Essentials of Jodo Shinshu from the Nishi Honganji website http://www.hongwanji[...] 2016-02-25
[2] 서적 Mourning the Unborn Dead: A Buddhist Ritual Comes to America Ox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JODO SHU English http://www.jodo.org/[...] Jodo.org 2013-09-27
[4] 서적 Popular Buddhism In Japan: Shin Buddhist Religion & Culture University of Hawaii Press
[5] 간행물 Nembutsu Odori https://web.archive.[...]
[6] 서적 Zen at War Rowman and Littlefield
[7] 서적 Deep Religious Pluralism https://books.goog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8] 웹페이지 ”Questions and Answers on Shinjin” https://web.archive.[...]
[9] 서적 Collected Works of Shinran Jodo Shinshu Hongwanji-ha
[10] 서적 The Prince and the Monk: Shotoku Worship in Shinran's Buddhism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1] 서적 Jodo Shinshu: Shin Buddhism in Medieval Japan Indiana University Press
[12] 웹사이트 Front page http://www.threewhee[...] 2015-05-02
[13] 서적 Traversing the Pure Land Path Jodo Shu Press
[14] 서적 The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5] 웹사이트 Buddhas, bodhisattvas, and teachers https://web.archive.[...] 2015-05-26
[16] 웹사이트 The Pure Land Lineage http://jsri.jp/Engli[...] 2015-05-26
[17] 웹사이트 Calendar of Observances, Nishi Hongwanji https://web.archive.[...] 2015-05-29
[18] 웹페이지 https://enpark.net/w[...] 2022-10
[19] 서적 岩波仏教辞典
[20] 웹사이트 Jodo Shinshu hongwanji-ha (Nishihongwanji) > Teachings http://www.hongwanji[...]
[21] 웹사이트 Higashi Honganji(official website) > Shin Buddhism http://www.higashiho[...]
[22] 웹사이트 Bukkoji Buddhist Temple > EnglishGuide http://www.bukkoji.o[...]
[23] 서적 浄土三部経(下)
[24] 서적 親鸞和讃集
[25] 서적 大辞林 三省堂
[26] 서적 法令全書 明治5年 https://dl.ndl.go.jp[...]
[27] 서적 九州真宗の源流と水脈
[28] 문서 ここでいう通称は本山の通称であり、宗派の通称ではない。
[29] 뉴스 中外日報 中外日報 2007-09-01
[30] 백과사전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31] 백과사전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32] 뉴스 세계의불교석학 46 - 日 야마가타대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교수 : 일본 계율의 부흥 꿈꾸는 율종 연구의 대가 http://www.beopbo.co[...] 법보신문 2006-11-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