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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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란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로, 정토진종의 개창자이다. 1173년 교토에서 태어나, 9세에 출가하여 지엔(慈円)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세에 호넨(法然)을 만나 전수염불을 배우고, 1207년 호넨과 함께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간토 지방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262년 89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신란은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강조하는 절대 타력의 사상을 설파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교행신증》, 《정토화찬》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도 많은 신봉자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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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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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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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쓰와카마로 |
이명 | 해당 정보 없음 |
법명 | 해당 정보 없음 |
출생일 | 1173년 5월 21일 |
출생지 | 헤이안쿄, 야마시로 국 (현재의 교토시, 일본) |
사망일 | 1263년 1월 16일 |
사망지 | 헤이안쿄, 야마시로 국 |
국적 | 해당 정보 없음 |
종교 | 불교 |
종파 | 정토진종 불교 |
혈통 | 해당 정보 없음 |
칭호 | 정토진종 불교의 창시자 |
위치 | 해당 정보 없음 |
교육 | 해당 정보 없음 |
직업 | 해당 정보 없음 |
스승 | 호넨 |
환생 | 해당 정보 없음 |
계승자 | 해당 정보 없음 |
제자 | 해당 정보 없음 |
배우자 | 에신니 |
동반자 | 해당 정보 없음 |
자녀 | 가쿠신니, 젠란, 기타 |
웹사이트 | 해당 정보 없음 |
일본어 정보 | |
이름 | 신란 (親鸞) |
생몰년 | 1173년 5월 14일 - 1262년 1월 9일 (율리우스력) |
아명 | 마쓰와카마로, 마쓰와카마루, 주하치공마로 |
속명 (유배 시) | 후지이 요시자네 |
법명 (출가 후) | 범연 (엔잔 수행 시), 작공 ⇒ 선신 / 신란 (요시미즈 입문 후), (우독) 석신란 (에치고 유배 후) |
호 | 선신보 (방호) |
시호 | 겐신대사 (1876년 추증) |
존칭 | 신란 성인, 종조 성인, 개산 성인 |
출생지 | 교토, 호카이지 부근 |
사망지 | 교토, 젠보인 |
종지 | 비승비속 (정토진종) |
종파 | 해당 정보 없음 |
사원 | 해당 정보 없음 |
스승 | 호넨 |
제자 | 여신, 가와와다의 유이엔, 24배 성신, 진불, 순신, 승연, 신라쿠, 성연, 서념, 증성, 선성, 시진, 무위신, 선념, 신원, 정신, 입서 (도엔), 아나자와의 입신, 염신, 핫타의 입신, 묘호 (변엔), 자선, 유불, 도모리의 유신, 하타가야 (하타야)의 유신, 도하미의 유이엔, 기타 |
저서 | 현정토진실교행증문류, 삼첩화찬, 기타 |
묘소 | 오타니 본묘 (본원사파), 오타니 조묘 (오타니파), 어묘배당 (고다파), 불광사 본묘 (불광사파), 기타 |
2. 생애
신란의 본명은 마쓰와카마로였다. 일본 관습에 따라 한넨, 샤쿠, 젠신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최종적으로는 세신과 돈란의 이름을 따서 신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사후 시호는 켄신 대사였다.[3] 한동안 후지이 요시자네라는 이름도 사용했다.[4] 삭발 후에는 "중도 속인도 아닌"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카락이 텁수룩한 어리석은 자"를 의미하는 구토쿠 신란이라고 자칭했다.
전통적인 전기 자료에 따르면, 신란은 1173년 5월 21일 후지와라씨의 분파인 아리노리 영주와 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마쓰와카마로라는 이름을 받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1181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알고 싶어 9세의 나이로 마루야마 공원 근처의 쇼렌인 사찰에 입문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신란 부모의 신원과 사망 날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겐페이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출가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5]
승려가 된 그는 "벚꽃처럼, 내일을 계획하는 마음은 참으로 덧없으니—한밤중에 어떤 갑작스러운 폭풍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시를 썼다. 자신의 덧없음을 절실히 깨달은 그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이후 20년 동안 히에이 산에서 수행했다. 그의 아내와 딸 사이에 오간 편지에서 그가 덴다이의 ''dōsō''(堂僧, "사찰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6]
그의 아내 에신니(그녀의 편지는 혼간지에 보존되어 있다)의 기록에 따르면, 승려로서의 실패와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에 좌절하여 롯카쿠도 사찰에서 은둔했다. 거기서 강렬한 수행을 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쇼토쿠 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신란에게 또 다른 실망한 덴다이 승려인 호넨을 찾아가라고 지시하는 환영을 경험했다.[7]
1201년, 신란은 호넨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호넨의 지도 아래 처음 1년 동안, 29세의 신란은 아미타의 서원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 둘은 몇 년 동안만 서로를 알았지만, 호넨은 신란에게 그의 비밀 저서인 선착집의 사본을 맡겼다. 그러나 호넨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그의 정확한 지위는 불분명하다. 호넨의 추종자들이 1204년에 서명한 7개 조항의 서약에서 신란의 서명은 덜 친밀한 제자들 가운데 중간쯤에 나타난다.[8]
호넨의 제자였던 시절 신란은 공개적으로 결혼하고 고기를 먹음으로써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두 행위 모두 승려에게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신란은 아미타의 구원이 승려와 스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1207년, 교토의 불교계는 호넨의 가장 저명한 두 추종자가 염불 수행을 성적인 유착을 은폐하는 데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은 사건 이후, 군부에 ''염불'' 금지를 부과하도록 설득했다.[9] 이 두 승려는 그 후 처형되었다. 호넨과 신란은 유배되었고, 신란은 승적을 박탈당하고 에치고 지방(현대 니가타현)으로 보내졌다.[10] 그들은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호넨은 1212년 교토에서 사망했다.[1]
신란은 유배로 이어진 동기와 호넨의 수행 공동체의 붕괴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유배 자체가 신란의 종교적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승려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스스로를 ''구토쿠''(愚禿, "어리석고 대머리인 자")라고 개명하여 자신을 승려도 속인도 아닌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유배 생활 동안 신란은 아미타 부처의 자비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호넨의 가르침을 계속 이어가고 전파하고자 했으며, 이는 ''염불'' 수행을 통해 표현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가르침은 호넨과 충분히 달라져 정토진종 또는 "정토의 참된 본질 종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신란은 아내 에신니와 결혼하여 그녀와 일곱 자녀를 두었다.
에치고로 유배된 지 5년 후인 1211년, ''염불'' 금지가 해제되었고 신란은 사면되었지만 교토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신란은 간토 지방에 있는 이나다라는 작은 지역으로 갔다. 1224년 신란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교행신증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새로운 정토 불교 운동을 지지하는 불교 경전의 선별된 구절과 해설 모음집으로, 인도와 중국의 불교 사상가들과의 교리적 계통을 확립했다. 1234년 신란은 간토 지방을 떠나 딸 가쿠신니와 함께 교토로 돌아왔다. 교토로 돌아온 신란은 히타치와 시모쓰케 지방에 남아 있던 장남 젠란이 신란으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7] 신란은 젠란에게 그의 활동을 중단하라고 엄중한 편지를 썼지만, 젠란이 거부하자 신란은 그를 의절했다.[12]
신란은 1263년 교토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가쿠신니는 묘소를 유지하고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녀의 후손은 궁극적으로 묘소를 중심으로 세워진 혼간지 사찰의 몬슈(주지)가 되었다.
연도 | 사건 |
---|---|
1173년 | 신란 출생 |
1175년 | 호넨이 정토종 창시 |
1181년 | 신란 출가 |
1201년 | 신란이 호넨의 제자가 되어 히에이 산을 떠남 |
1207년 | 염불 금지령과 신란의 유배 |
1211년 | 신란 사면 |
1212년 | 호넨이 교토에서 사망, 신란이 간토 지방으로 감 |
1224년 | 신란이 《교행신증》 저술 |
1234년 | 신란이 교토로 돌아옴 |
1256년 | 신란이 아들 젠란을 의절 |
1263년 | 신란이 교토에서 사망 |
2. 1. 탄생과 출가
쇼안(承安) 3년(1173년) 4월 1일[114][115](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1173년 5월 21일이다) 홋케지(法界寺), 히노 탄생원(日野誕生院) 부근(지금의 교토시 후시미구 히노)에서 황태후궁대진(皇太后宮大進) 관직에 있던 히노 아리노리(日野有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16][117] 어머니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의 1차 자료가 없고,[118] 에도 시대 중기에 저술된 『신란 성인 정명전』(親鸞聖人正明伝)에는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영웅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郎義家)의 손녀딸인 「기코메」(貴光女)라는 여인이었다고 되어 있다.[119] 「기코뇨」(吉光女)라고도 한다.[120][121] 어린 시절의 이름은 「마쓰와카마루(松若磨)」,[122] 「마쓰와카마루(松若丸)」,[123] 「주하치코마루(十八公麿)」[124] 등으로 불렸다.헤이안 시대 말기인 에이쇼(永承) 7년(1052년) 이후 일본에는 종말론적인 말법사상(末法思想)이 널리 퍼져나갔다. 호겐(保元) 원년(1156년)의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헤이지(平治) 원년(1159년)의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으로 일본은 귀족이 통치를 주도하던 시대는 변모해 무사의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에서 극적인 구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신란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지쇼(治承) 4년(1180년)부터 겐랴쿠(元暦) 2년(1185년)에 걸쳐 일본은 지쇼-주에이의 난(治承・寿永の乱), 통칭 겐페이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벌어졌다. 지쇼 5년/요와(養和) 원년(1181년)에는 요와의 기근(養和の飢饉)이라 불리는 대기근이 발생해 교토 안에서만 42,300명이 굶어 죽었다.[125] 전란과 기근은 교토를 황폐화시켰다.

지쇼 5년(1181년) 아홉 살의 마쓰와카마루는 숙부인 히노 노리쓰나(日野範綱)를 따라 교토 세이렌인(青蓮院)으로 들어갔고, 훗날 천태좌주(天台座主)가 될 지엔(慈円, 자진화상慈鎮和尚)의 문하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법명을 「한넨」(範宴)이라 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지엔이 그의 출가를 다음날로 연기하려고 했을 때 아홉 살의 한넨은 '''"내일이 있다 생각하는 마음 속 벚꽃이여, 네 밤중에 거센 바람 불 줄은 모르느냐"'''('''明日ありと思う心の仇桜、夜半に嵐の吹かぬものかは''')라고 읊었다고 한다(이는 무상(無常)이라는 감정을 비상한 문자로 표현한 노래로 평가받고 있다).
출가한 뒤 한넨은 히에이 산(叡山)[126]으로 올라가서 지엔을 겐교(検校)로 섬기고 요코가와(横川) 슈료곤인(首楞厳院) 상행당(常行堂)에서 천태종(天台宗) 당승(堂僧)으로써 불단염불(不断念仏) 수행을 이어나갔다. 에이잔에서 20년 넘게 수행하였으나 자력수행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2. 2. 히에이잔 수행과 롯카쿠도 참롱
지쇼 5년(1181년) 아홉 살의 마쓰와카마루는 숙부인 히노 노리쓰나를 따라 교토 세이렌인으로 들어가, 훗날 천태좌주가 될 지엔의 문하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법명을 「한넨」(範宴)이라 하였다.전승에 따르면 지엔이 그의 출가를 다음날로 연기하려고 했을 때 아홉 살의 한넨은 '''"내일이 있다 생각하는 마음 속 벚꽃이여, 네 밤중에 거센 바람 불 줄은 모르느냐"'''라고 읊었다고 한다(이는 무상(無常)이라는 감정을 비상한 문자로 표현한 노래로 평가받고 있다).
출가한 뒤 한넨은 히에이 산으로 올라가서 지엔을 겐교(検校)로 섬기고 요코가와(横川) 슈료곤인(首楞厳院) 상행당(常行堂)에서 천태종 당승(堂僧)으로써 불단염불(不断念仏) 수행을 이어나갔다.[126] 히에이 산에서 20년 넘게 수행하였으나 자력수행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겐닌 원년(1201년) 봄, 29세의 나이로 한넨은 히에이 산을 내려왔다.[127] 후세의 기념을 위해 쇼토쿠 태자가 지었다고 전하는 롯카쿠도에서 백일참롱(百日参籠)을 행하였는데,[128][129] 95일째 되던 4월 5일 새벽 한넨의 꿈에 쇼토쿠 태자가 나타나(일본에서 쇼토쿠 태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수행자가 전세의 과보로 여성을 범해야 한다면/내가 그 여성이 되어 그와 함께 해 주리라/그리고 한 평생 공덕장엄을 보전하고/목숨 다하는 날에 극락으로 이끌리라"(行者宿報設女犯[130] 我成玉女身被犯 一生之間能荘厳 臨終引導生極楽)라는 게(偈)를 읊고(「여범계」女犯偈), "이는 곧 나의 서원이니 젠신(善信) 그대는 이 서원의 취지를 베풀어 설법해 일체 군생(群生)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선몽에 따라 날이 밝자 히가시야마 요시미즈(東山吉水)에 위치한 호넨이 머무르고 있던 요시미즈 암자를 찾았다(이때 호넨의 나이는 예순아홉이었다). 그리고 오카자키(岡崎) 땅에 초당을 짓고 백일에 걸쳐 호넨에게서 설법을 들었다.[132][133][134]
2. 3. 호넨과의 만남과 정토진종 개창
겐닌(建仁) 원년(1201년) 봄, 29세의 신란은 히에이 산을 내려와, 쇼토쿠 태자(聖徳太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롯카쿠도(六角堂)에서 백일 동안 참배 기도를 올렸다.[129] 95일째 되던 새벽, 신란의 꿈에 쇼토쿠 태자가 나타나 다음과 같은 게(偈)를 읊었다.[130]> 수행자가 전생의 과보로 여성을 범해야 한다면, 내가 그 여성이 되어 그와 함께 해 주리라. 그리고 한 평생 공덕장엄을 보전하고, 목숨 다하는 날에 극락으로 이끌리라.
이러한 꿈을 꾼 신란은 날이 밝자 히가시야마 요시미즈(東山吉水)에 있는 호넨(法然)의 요시미즈 암자를 찾아갔다.[131] 그리고 오카자키(岡崎) 땅에 초당을 짓고 백일 동안 호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134]
호넨의 가르침에 따라 신란은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호넨으로부터 「샥쿠」(綽空)라는 이름을 받았다.[135] 이후 신란은 학문에 정진하여 호넨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겐큐(元久) 원년(1204년) 11월 7일, 호넨은 「칠개조제계」(七箇条制誡)를 작성하고 190명의 제자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중 86번째에 「승려 슛코」(僧綽空)의 이름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신란은 요시미즈 교단의 평범한 제자 중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141]
겐큐 2년(1205년) 4월 14일, 신란은 호넨으로부터 『선택본원염불집(選択本願念仏集)』(선택집)의 필사와 호넨의 초상화 제작을 허락받았다.[143] 호넨은 『선택집』의 필사를 벤초(弁長) ・ 류칸(隆寛) 등 극히 일부 제자들에게만 허락했기에, 이 무렵 신란은 호넨에게 매우 촉망받는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42]
같은 해 윤7월 29일, 신란은 자신의 꿈을 계기로 이름을 고쳐 줄 것을 청했고, 호넨은 완성된 자신의 초상화에 새로 고친 이름을 직접 써넣었다.[144] 다만, 신란은 고친 이름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142] 이시다(石田)는 「젠신」(善信)이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신란의 개명에 대해서는 「젠신」(善信)이 실제 이름이라는 설과[146] 「젠신」은 승려의 거처를 가리키는 방호(房号)라는 설이 있다.[145] 후자는 일본의 종교학자 마키 유카코(真木由香子)가 『신란과 바오로』(親鸞とパウロ)에서 주장한 것으로, 진종학자(真宗学者)인 혼다 히로유키(本多弘之) 등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149] 이 설에 따르면, 「젠신」은 법명이 아니라 방호이며, 호넨에 의해 「(젠신보善信房) 슛코」에서 「(젠신보) 신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150]
「슛코」에서 「신란」으로 바로 개명했다는 설도 있는데, 법명은 스스로 칭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란」이라는 법명도 호넨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란은 만년의 저작에도 「젠신」과 「신란」 두 이름을 모두 사용하였다. 또한 에치고에서 스승 호넨에게서 받은 「젠신」이라는 법명을 버리고 「신란」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2. 4. 유배와 도고쿠 포교
신란이 어떤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는지, 그리고 그 시기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자료가 없어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의 딸 타마히와 교토에서 결혼했다는 설: 타마히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학자 마쓰오 고지(松尾剛次), 진종대곡파(真宗大谷派) 사사키 마사시(佐々木正), 정토종서산심초파(浄土宗西山深草派)의 기라 준(吉良潤),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는 『신란 성인 어인록』(親鸞聖人御因縁), 손카쿠(存覚)가 쓴 것이라 전해지는 『신란 성인 정명전』(親鸞聖人正明伝), 고텐 료코(五天良空)의 『신란 성인 정통전』(親鸞聖人正統伝)의 기술을 근거로 실존을 주장한다. 반면 일본 사학자 히라 마사유키는 『신란 성인 어인록』, 『신란 성인 정명록』, 『신란 성인 정통전』이 당시 천황이 누구인지도 오인하고 있고, 당시 조정의 관습, 중세 엔랴쿠지(延暦寺)의 실태 등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이가 쓴 것으로 타마히와의 결혼은 전승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마쓰오는 신란에 대한 사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비판적 검토를 거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며, 히라의 방법론은 최근 역사학적 성과에 역행한다고 비판한다. 더불어 타마히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묘소가 있고 에도 시대 후기에 개장되었다는 점 등 고고학적 견지에서도 타마히는 실존했다고 반박한다.
- 에신니와 교토에서 결혼했다는 설: 에신니는 비교적 근대인 1921년(다이쇼 10년)에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보물창고에서 발견된 에신니의 편지(에신니 소식)를 통해 실존이 증명되었다. 이에 교토에 머물 때 타마히와 결혼한 뒤 에치고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에신니와 재혼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타마히와 에신니는 동일 인물이 아니며 재혼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호넨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당시 장남 젠란(善鸞)의 생모와 결혼했다가 유배를 계기로 헤어지고, 에치고의 재청관인(在庁官人)의 딸이었던 에신니와 재혼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을 주장한 히라 마사유키는 에신니의 일족이 교토에서 생활 기반을 잃은 이유나 에치고에 가지고 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에, 교토에 거주하던 호족 미요시 다메노리의 딸이라는 설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덴분(天文) 10년(1541년) 성립된 『히노 이치류 계도』(日野一流系図)의 내용은 의문점이 많아 사료로서 가치가 낮다고 한다. 당시 고귀한 신분으로 죄를 받은 이가 유배될 때는 신변 시중을 위해 아내를 데리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최근에는 유배 전에 교토에서 아내를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란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4남 3녀를[163] 두었다. 다만 이들 모두가 에신니의 소생은 아니라는 설[164], 젠란(善鸞)을 장남으로 보는 설도 존재한다. 젠란(善鸞)의 생모에 대해서는 에신니가 친어머니라는 설과 계모라는 설이 있다.
겐큐(元久) 2년(1205년), 나라의 고후쿠지(興福寺)는 아홉 가지 조항의 과실(「興福寺奏状」)을 들어 조정에 전수염불(専修念仏)을 중단할 것을 호소하였다.
겐에이(建永) 2년(1207년) 2월,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의 분노를 사 전수염불이 금지되고, 사이이 젠샤쿠보(西意善綽房), 쇼간보(性願房), 주렌보(住蓮房), 안라쿠보 존사이(安楽房遵西) 네 명이 처형되었으며, 호넨 및 신란을 포함한 그의 제자 일곱 명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호넨과 신란 등은 승적(僧籍)을 박탈당하고 각각 속세의 이름으로 「후지이 모토히코」(藤井元彦), 「후지이 요시자네」(藤井善信)라 칭해져 도사(土佐)의 반다(番田)[165][166], 에치고(越後)의 고쿠후(国府)[167]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신란은 「젠신」이라는 이름을 속명으로 사용했던 적도 있었기에, 이때 처음으로 「구토쿠샤쿠 신란」(愚禿釋親鸞)[168]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비승비속(非僧非俗), 즉 승려나 속인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생활을 시작하였다(「젠신」에서 「신란」으로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서는 「개명에 대해서」도 참조). 이 해 10월 연호가 조겐(承元)으로 바뀌었는데, 이 바뀐 연호를 따서 '조겐의 법난(承元の法難)'이라 부른다.
조겐(承元) 5년(1211년) 3월 3일, (구리사와노 신렌보栗澤信蓮房) 묘신(明信)이 태어났다.
겐랴쿠(建暦) 원년(1211년) 11월 17일, 오카자키 주나곤 노리미쓰(岡崎中納言範光, 후지와라노 노리미쓰)를 통해[169] 조칙으로 그를 사면한다는 선지가 준토쿠 천황(順徳天皇)으로부터 내려졌다. 유배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같은 달 호넨이 교토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신란은 스승과의 재회를 바랐지만 사면 조칙이 전해졌을 당시 그가 있던 에치고 지역은 눈이 많이 올 시기였기에 교토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겐랴쿠(建暦) 2년(1212년) 1월 25일, 호넨은 교토에서 80세로 입적하였다.
사면 이후 신란의 행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에치고에 머물렀다는 설로, 스승과의 재회가 더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나 아이가 어렸던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일단 교토로 온 뒤 다시 간토로 돌아갔다는 설이다. 이는 진종불광사파(真宗佛光寺派) ・ 진종흥정파(真宗興正派)의 중흥조인 료겐(了源)이 쓴 『산두록』(算頭録)에 「親鸞聖人ハ配所ニ五年ノ居緒ヲヘタマヘテノチ 帰洛マシ〜テ 破邪顕正ノシルシニ一宇ヲ建立シテ 興正寺トナツケタマヘリ」라는 기록에 기반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진종흥정파는 전승일 뿐, 사실로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170][171][172][173]
겐포(建保) 2년(1214년), 신란은 도고쿠(간토)에서의 포교 활동을 위해 가족이나 쇼신(性信) 등의 문하 제자들과 함께 에치고를 출발해 시나노국(信濃国)의 젠코지(善光寺)에서 고즈케국(上野国) 사누키 장(佐貫庄)을 거쳐 히타치국(常陸国)으로 향하였다. 유배에서 사면되고 3년이 지난 때였다.
사전(寺伝) 등에 따르면 체재 시기나 기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겐포(建保) 2년에 「고지마 암자」(小島の草庵)[174], 겐포(建保) 4년(1216년)에 「오야마 암자」(大山の草庵)[175]를 지었다는 전승이 있다. 그리고 가사마 군(笠間郡)의 이나다 향(稲田郷)[176]의 영주였던 이나다 요리시게(稲田頼重)에게 불려가 그곳의 후부키노타니(吹雪谷)라는 땅에 「이나다 암자(稲田の草庵)」[177]를 짓고 이 땅을 거점으로 정력적인 포교 활동을 펼쳤다. 또한 신란의 주요 저서인 『교행신증(教行信証)』은 이곳 「이나다 암자(稲田の草庵)」에서 4년의 세월을 거쳐 겐닌(元仁) 원년(1224년)에 초고본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2. 5. 교토 귀환과 저술 활동
덴푸쿠(天福) 2년(1234년)에 신란은 교토로 돌아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였다. 신란이 교토로 돌아온 이유는 확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여러 가지 추론만 있을 뿐이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専修念仏|전수염불일본어을 금지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교토에서도 탄압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부적당하다는 반론이 있다.주요 저작인 『교행신증』을 경전 및 논석과 맞춰 교정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는데, 가시마 신궁(鹿島神宮)에도 경장이 있어 그곳에서 참조 및 교합 작업이 가능했다는 지적이 있다. 다만 에도 시대 이전 기록에는 신란이 가시마 신궁에 왔었다는 기록이 없고, 최신 경론석을 얻기 위해서는 교토로 돌아왔어야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도고쿠에서 집필한 『교행신증』 등의 저작물이 당시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교토[178]의 추세를 확인함으로써 후세에 검증, 조합, 수정하기 위해서라는 주장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에는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지역 간 시차가 컸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고 수정하기 위해 교토로 돌아왔어야 했다는 것이다.[179]
고향을 그리워해서였다는 설도 있지만, 신란이 교토에서 생활한 시간은 짧고 만년에 정력적인 저술 활동을 한 것을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있다. 저술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는 설에는 당시 62~3세라는 고령이었던 신란에게는 위험 부담이 크다는 반론이 있다.
신란의 아내 에신니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추론이 있다. 사이넨지(西念寺) 전승에는 에신니가 그곳에 머무르다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신란이 교토로 갈 때 동행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설, 교토로 동행했거나 신란이 생활 거점을 정한 뒤에 교토로 왔다는 설 등이 있다. 에신니는 약 20년간 신란과 함께 교토에서 생활하다 겐초(建長) 6년(1254년) 막내딸 가쿠신니에게 신란의 신변 시중을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귀향 이유는 친족을 보살피거나 친정의 토지 관리 등으로 추정된다. 신란은 도고쿠 문도의 지원으로 생활하여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가쿠신니를 남기고 에신니와 나머지 가족들은 친정의 비호에 의지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설도 있다.
이후 신란은 저술에 매달렸다. 간겐(寛元) 5년(1247년) 75세에 『교행신증』을 완성하고 尊蓮|손렌일본어에게 서사를 허락했다. 호지(宝治) 2년(1248년) 『정토화찬(浄土和讃)』과 『고승화찬(高僧和讃)』을 저술했고, 겐초(建長) 2년(1250년) 『유신초문의(唯信鈔文意)』[180]를 찬술했다. 겐초 3년(1251년)에는 히타치의 '有念無念|유념무념일본어의 논쟁'을 써 보내 제지했다.
겐초 4년(1252년) 『정토문류취초(浄土文類聚鈔)』를 썼고, 겐초 7년(1255년) 『존호진상명문(尊号真像銘文, 약본)』[181], 『정토삼경왕생문류(浄土三経往生文類, 약본)』[182], 『우독초(愚禿鈔)』, 『황태자성덕봉찬(皇太子聖徳奉讃) 75수』[183]를 찬술했다. 겐초 8년(1256년) 『입출이문게송문(入出二門偈頌文)』[184]을 찬술했다.
겐초 5년(1253년) 무렵 신란은 아들 젠란과 그 아들 如信|뇨신일본어(신란의 손자)을 도고쿠로 파견했다. 그러나 젠란은 삿된 교의인 '専修賢善|전수현선일본어'에 기울어 혼란을 초래했다. 뇨신은 무쓰국(陸奥国) 大網|오아미일본어[185]에서 포교하여 '大網門徒|오아미 문도일본어'라는 대규모 문도 집단을 형성했다. 겐초 8년 5월 29일, 신란은 도고쿠에서 이단의 교의를 설파하던 아들 젠란과 의절했다. 그 편지는 '善鸞義絶状|선란의절장일본어' 또는 '慈信房義絶状|자신방의절장일본어'이라고 불린다. 『탄이초』 제2조에 상기된 도고쿠 문도의 방문은 이후의 일로 추정된다.
고겐(康元) 원년(1256년) 『여래이종회향문(如来二種回向文, 往相回向還相回向文類|왕상회향환상회향문류일본어)』을 찬술했다. 고겐 2년(1257년) 『일념다념문의(一念多念文意)』, 『대일본국율산왕 쇼토쿠 태자 봉찬(大日本国粟散王聖徳太子奉讃)』을 찬술하고 『정토삼경왕생문류(광본)』[186]을 전사했다. 쇼카(正嘉) 2년(1258년) 『존호진상명문(광본)』, 『정상말화찬(正像末和讃)』을 찬술했다. 『정상말화찬』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에는 『정토화찬』, 『고승화찬』과 함께 '삼첩화찬(三帖和讃)'으로 통칭된다.[187] 신란의 서간은 훗날 『말등초(末燈抄)』[188], 『신란 성인 어소식집(親鸞聖人御消息集)』[189] 등으로 편찬되었다.
2. 6. 입적
고초(弘長) 2년(1262년) 11월 28일(그레고리력 환산 1263년 1월 16일)에 오시코지미나미(押小路南) 마데노코지히가시(万里小路東)에 있던 친동생 진우(尋有)가 원주(院主)로 있던 젠호인(善法院)에서 향년 90세(만 89세)로 열반에 들었다.[190][191] 그의 임종은 신란의 동생이었던 진우나 막내딸인 가쿠신니 등이 지켜보았다. 유해는 도리베노(鳥部野) 북쪽 변두리의 오타니(大谷)에 안치되었고, 신란을 다비(화장)한 곳은 신란의 증손자인 혼간지 제3세(世) 가쿠뇨(覚如)의 『어전초』에는 도리베노 남쪽 변두리의 엔닌지(延仁寺)에서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192] 신란의 정골(頂骨)과 유품은 대부분 제자 젠쇼(善性) 등에 의해 도고쿠로 옮겨졌고 도고쿠 포교의 성지였던 이나바 암자에 봉납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3. 사상
신란은 자신을 평생 호넨의 제자로 여겼다. 그의 아내 에신니가 작성한 편지에 따르면, 사람들은 호넨이 악한 윤회(악도)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신란은 "저는 그와 함께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세상으로, 윤회에서 윤회로 저는 이미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13]
호넨의 제자들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한 번 외우는 것(염불)과 여러 번 외우는 것 사이의 필요성, 즉 믿음과 수행 사이의 강조점을 두고 크게 나뉘었다. 신란은 수행보다는 믿음에 더 기울었지만, 단일 염불을 가르치지는 않았다.[14]
신란은 말법 시대에는 전통적인 수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느꼈으며, 따라서 아미타불의 서원, 특히 제18원("본원")에 의존하여 정토에 다시 태어나는 것만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행신상』에서 "머리 깎은 어리석은 신란은 여러 수행과 선행의 방편적 길을 영원히 버리고,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염원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제 나는 참된 길의 방편을 완전히 버리고 [아미타불에 의해] 선택된 바다와 같은 서원으로 귀의했다."라고 하였다.[14] 즉, 정토 왕생에 집중하기 위해 전통적 수행뿐 아니라 정토 왕생 관련 수행마저 포기하고 오직 아미타불의 서원에 대한 믿음에만 의존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신란은 아미타불과 정토의 본질을 파고들어, 정토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임시적 피난처이며, 깨달음을 얻은 후 보살로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가르치기 위해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고 보았다. 그는 歎異抄|탄이초|어긋남에 대한 슬픔일본어에서 "정토의 자비는 염불을 외우고, 속히 부처가 되어, 대자대비심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중생을 완전히 구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6][17]
아미타불의 본질에 대해 신란은, 부처와 정토는 모두 이해를 초월하지만, 사람들의 무지와 집착 때문에 경전에 묘사된 아미타불의 물리적 형태와 정토의 배치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14] 진정한 믿음을 얻으면 정토에서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인식할 수 있지만, 믿음이 불완전하거나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면 정토 외곽에서 물리적 형태로 아미타불을 계속 인식할 것이다.
신란의 말법 시대 해석은 다른 불교 사상가들과 일치했다. 그는 중국 승려 도작에게서 영감을 받았는데, 도작은 수세기 전에 말법 시대에는 정토교가 사람들의 능력에 가장 적합하다고 가르쳤다.[13]
신란은 불교 전통 밖의 일본 종교 관습(신토 가미, 정령, 점술, 점성술 등)을 인정했지만, 아미타불의 힘에 비하면 무의미하다고 믿었다.[14] 그는 다른 종교 수행을 악마 숭배와 동일시하는 일본 불교 이단론을 발전시켰고, 그의 추종자들은 다치카와류 같은 불교 "이단" 종파를 비판했다.[18] 오늘날 정토진종 사찰에서는 오마모리, 오후다 등을 찾아볼 수 없다.
신란은 『교행신증』에서 석존의 경전인 『대무량수경』을 '진실한 가르침'이라 하고, 아미타여래의 본원(사십팔원)과 명호 "나무아미타불"을 정토문의 진실한 가르침 '정토진종'이라고 했다.[72]
그는 명호를 "의심 없이 나를 믿고 내 나라에 태어나기를 생각하라"는 아미타불의 부름(본원 초환의 칙명)으로 이해하고, 이 부름을 듣고 믿고 따르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왕생이 정해진다고 했다. 왕생이 정해진 후의 염불은 아미타불과 여러 부처의 소원에 보답하는 "보은의 행"(신심정인 칭명보은)이며, 극락왕생을 위한 수행으로 보지 않는다.
'나무아미타불'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임종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정토 왕생이 결정되고, 이후 보은 감사하는 염불 생활을 영위한다. 이는 "여래의 본원력"(타력)에 의한 것이며, 범부의 헤아림(자력)이 아니라고 하여 절대 타력을 강조한다.[72][73]
3. 1. 절대타력과 신심
신란은 호넨의 제자 고사이처럼 수행보다는 믿음에 더 기울었지만, 단일 염불을 가르치지는 않았다.[14]신란의 가르침과 신념은 당시 정토불교 운동과 일반적으로 일치했지만, 특이한 점도 있었다.
신란은 말법 시대에는 전통적인 수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서원, 특히 제18원(본원)에 의존하여 정토에 다시 태어나는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서 『교행신상』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4]
위 구절에서 신란은 정토 왕생에 집중하기 위해 전통적인 수도 수행뿐만 아니라 정토 왕생 관련 수행마저 포기하고, 오직 아미타불의 서원에 대한 믿음에만 의존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교행신상』 3권에서 신란은 真実の信心|진실의 신심|참된 믿음일본어의 본질을 아미타불로부터 받는 것으로 묘사한다.[13] 이를 통해 믿음이 깨어나고, 念佛 암송이 찬양이나 감사의 표현이 된다. 그러나 신자가 아미타불에게 완전히 자신을 맡기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이 믿음의 상태가 되면 정토 왕생과 깨달음이 보장된다. 신란은 다음과 같이 주의를 준다.[13]
신도가 깊은 믿음을 깨달으면 감사의 표현으로 살아가고, 도덕적 행위를 따르며,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14]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면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영적 이점을 얻는다고 보았다.
-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에 의해 보호받음 (묘슈 고지)
- 최고의 덕을 소유함 (시토쿠 구소쿠)
- 악이 선으로 변함 (테나쿠 조젠)
- 모든 부처에 의해 보호받음 (쇼부츠 고넨)
- 모든 부처에 의해 칭찬받음 (쇼부츠 샤오산)
- 부처의 영적인 빛에 의해 보호받음 (신코 조고)
-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짐 (신타 강기)
- 그의 은혜를 깨닫고 갚음 (치온 호토쿠)
- 항상 대자비를 실천함 (조교 다이히)
- 정립된 무리에 들어감 (쇼조주 니 이루)[15]
3. 2. 악인정기설
신란은 말법 시대에는 전통적인 수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미타불의 서원, 특히 제18원 또는 "본원"에 의존하여 정토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교행신상』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4]이 구절에서 신란은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전통적인 수도 수행뿐만 아니라, 정토와 관련된 수행마저 포기하고 오직 아미타불의 서원에 대한 믿음에만 의존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신란은 호넨의 전수염불 가르침을 기초로, 아미타불의 부름을 믿고 따르는 마음이 일어난 시점에서 염불조차 필요 없이 극락 왕생이 정해진다고 보았다. (그 후의 염불은 자연스러운 보은)[76][77] 그는 수행이나 선행과 같은 자력으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자칭 선인의 오만함과 헤아림을 경계하고, 오히려 만인이 평등하게 범부·악인으로서 구제되는 것이야말로 아미타의 본원이라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가졌다.[76][77]
신란은 명호를 "의심 없이 나를 믿고 내 나라에 태어나기를 생각하라"는 아미타불의 부름(본원 초환의 칙명)으로 이해했다. 이 부름을 듣고 믿고 따르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왕생이 정해진다고 가르쳤다. 왕생이 정해진 후의 염불은 "내 이름을 칭하라"는 아미타불의 소원(제18원), "아미타불의 이름을 칭하여 왕생하라"는 여러 부처의 소원(제17원)에 응하여 소원에 보답하는 "보은의 행"이라고 하였다. 이를 "신심정인 칭명보은"이라고 한다. 염불을 극락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수행이나 선행으로 보지 않는다.
아미타여래의 본원에 의해 주어진 명호 '나무아미타불'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임종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결정된다. 그 후에는 감사하는 염불 생활을 영위하는 것으로 한다. 이는 명호가 되어 작용하는 "여래의 본원력"(타력)에 의한 것이며, 범부의 헤아림(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절대 타력을 강조한다.[72][73]
3. 3. 말법사상
신란은 말법 시대에는 전통적인 수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아미타불의 서원, 특히 제18원 또는 "본원"에 의존하여 정토에 다시 태어나는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4] 그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교행신상』에서, 정토 왕생에 집중하기 위해 전통적인 수도 수행뿐만 아니라 정토 왕생과 관련된 수행마저 포기하고 오직 아미타불의 서원에 대한 믿음에만 의존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14]『교행신상』 제3권에서 신란은 真実の信心|진실의 신심|참된 믿음일본어의 본질을 탐구하며, 이를 신자가 아닌 아미타불로부터 받는 것으로 묘사한다.[13] 이를 통해 신자에게 믿음이 생겨나고, 念佛 암송이 찬양이나 감사의 표현이 된다. 일단 이러한 믿음의 상태가 주어지면 정토 왕생과 궁극적인 깨달음이 보장된다. 그러나 신란은 참된 믿음은 반드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동반하지만,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따르는 것은 아니며, 믿음은 아미타불의 서원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13]
신란은 신자가 이러한 깊은 믿음을 깨달으면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도덕적 행위를 따르고,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보았다.[14]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이 깊어짐에 따라 얻게 되는 열 가지 영적인 이점은 다음과 같다.[15]
이점 | 설명 |
---|---|
묘슈 고지 (冥衆護持) |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보호 |
시토쿠 구소쿠 (至徳具足) | 최고의 덕을 갖춤 |
테나쿠 조젠 (転悪成善) | 악이 선으로 바뀜 |
쇼부츠 고넨 (諸仏護念) | 모든 부처의 보호 |
쇼부츠 샤오산 (諸仏称讃) | 모든 부처의 칭찬 |
신코 조고 (心光常護) | 부처의 영적인 빛에 의한 보호 |
신타 강기 (心多歓喜) | 마음에 큰 기쁨을 느낌 |
치온 호토쿠 (知恩報徳) | 은혜를 알고 갚음 |
조교 다이히 (常行大悲) | 항상 대자비를 실천함 |
쇼조주 니 이루 (入正定聚) | 바르게 결정된 무리에 들어감 |
신란의 말법 시대에 대한 관점은 당시 다른 불교 사상가들과 일치했다. 그는 수세기 전에 말법 시대에는 정토교가 사람들의 능력에 가장 적합하다고 가르친 중국 승려 도작에게서 영감을 받았다.[13] 신란은 이러한 시대적 쇠퇴가 불가피하며, 일본은 이미 말법 시대에 들어선 지 600년이나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불교 수행을 유지할 능력이 없으므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아미타불의 서원에만 의존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란은 불교 전통 밖의 일본 종교 관습(예: 신토의 가미, 정령, 점술, 점성술)을 인정했지만, 이러한 것들은 아미타불의 힘에 비하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14]
4. 저서
- 『현정토진실교행증문류』(약칭 『교행신증』)
:* 「정신념불게」는 『교행신증』의 「행권」 말미에 있는, 7언 120구로 이루어진 게문이다.
- 『정토문류취초』 - 『교행신증』의 요점을 서술한 서적.
- 『우독초』
- 『출입이문게』
- 『오회법사찬약초』
- 『삼첩화찬』
:* 『정토화찬』
:* 『고승화찬』
:* 『정상말화찬』
::* 『정토화찬』, 『고승화찬』, 『정상말화찬』을 통틀어 「삼첩화찬」이라고 한다. 국보[82]。
- 『삼경왕생문류』
- 『존호진상명문』
- 『일념다념증문』
- 『유신초문의』 - 호넨의 제자이자 형제 제자인 쇼가쿠가 저술한 『유신초』에서 인용된 경석의 요문의 주석
- 『여래이종회향문』
- 『미타여래명호덕』
- 『신란성인어소식』
5. 평가와 영향
신란 쇼닌의 동상은 미국 뉴욕 시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105번가와 106번가 사이, 뉴욕 불교 사원 앞에 세워져 있다. 이 동상은 신란이 농부 모자와 샌들을 신고 나무 지팡이를 든 채 인도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정토진종 사찰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러한 종류의 동상 중 이 동상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에서 살아남아 지상에서 약 1.61km 조금 넘는 거리에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55년 뉴욕으로 옮겨진 이 동상의 동판에는 "원자 폭탄 피해에 대한 증언이자 세계 평화를 위한 영원한 희망의 상징"이라고 적혀 있다.[19]
신란의 삶은 1987년 미쿠니 렌타로가 감독하고(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연출 데뷔작) 신란 역에 모리야마 준큐가 출연한 영화 ''신란: 청정으로 가는 길''의 주제가 되었다.[20] 이 영화는 1987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21]
2008년 3월 14일, 교토 시모교구에 있는 조라쿠지 사찰의 작은 나무 조각상에서 신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 사찰은 신란의 증손자인 가쿠뇨(1270–1351)의 아들 존카쿠(1290–1373)에 의해 세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존카쿠는 신란의 유해를 가쿠뇨로부터 물려받았다. 24.2cm의 나무 조각상은 에도 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유해는 종이에 싸여 있었다.[22]
2011년 3월, 만화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교토 혼간지 동본원사에 전시된 12개의 병풍에 대형 먹 그림을 그렸다. 패널의 삽화에는 헤이안 시대 평민들을 이끄는 신란과 호넨이 한 세트에, 새와 함께 앉아 있는 신란이 다른 세트에 그려져 있다.[23] 작가 이츠키 히로유키는 신란의 삶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으며, 야마구치 아키라의 삽화와 함께 연재되어 2010년 제64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24]
메이지 9년(1876년) 11월 28일,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견진대사(시호)를 추증받았다. 서본원사, 동본원사, 전수사의 어영당에 있는 신란의 목상 앞에 있는 액자의 "견진"(見眞)은 이 시호에 근거한다.
정토진종 본원사파는 2007년 11월 28일 "본원사파 종제"[61]를 개정하여 신란 성인의 앞에 붙어 있던 "견진대사"의 대사호를 삭제했고[62], 2008년 4월 15일에는 "정토진종의 교장"(1967년 제정)도 개정되어 대사호가 삭제되었다.[63][64] 진종대곡파는 1981년에 "종헌"을 개정하여 "견진대사"라는 말을 삭제하고, 어영당에 사용되던 "대사당"이라는 별칭을 본래의 "어영당"으로 복원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는 과거 신란이 호넨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또는 "발전"시켰다는 기술이 많았지만, 우열을 가리지 않는 표현으로 수정되고 있다.[65]
1896년(메이지 29년) 무라타 츠토무는 『사적 비평·신란 진전』에서 신란의 존재를 의문시하고 가공의 인물로 보는 설을 제창했다.[66] 이어서 도쿄 제국대학 교수 다나카 요시나리와 고쿠가쿠인 대학 교수 야시로 쿠니하루가 "신란 말살론" 담화를 발표했다.[67] 그러나 다이쇼 10년(1921년) 와시오 쿄도의 조사로 니시혼간지의 보물고에서 에신니가 카쿠신니에게 보낸 서한(「에신니 쇼소쿠」) 10통이 발견되었고[68], 그 내용과 신란의 동향이 일치했기 때문에 신란이 실존했던 것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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