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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SS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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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7SS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에 소속된 벨기에 플란데르 출신의 의용병으로 구성된 사단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서유럽 파시스트들이 독일을 지지하면서 외국인 의용병 모집이 시작되었고, 1941년 플라망인 의용병으로 SS 의용 부대 "플란데른"이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레닌그라드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치렀고, 1943년 SS 의용 돌격 여단 "랑게마르크"로 재편성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전선, 나르바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1944년 제27SS 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로 확대되었다. 1945년 포메라니아와 오데르 방어선에서 전투를 치르다 소련군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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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SS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
개요
명칭제27SS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 (제1플랑드르)
원어 명칭27. SS-Freiwilligen-Grenadier-Division „Langemarck“ (flämische Nr. 1)
약칭랑게마르크
제27SS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 (플랑드르 제1)의 사단장
제27SS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 (플랑드르 제1)의 사단장
27SS 의용사단 흉장
흉장
플랑드르 군단 방패장
국적 방패장
표어나의 명예는 충성 (Meine Ehre heißt Treue)
활동 기간
창설1944년 10월 18일
해체1945년 5월 8일
소속
국가나치 독일
군종무장친위대
병과척탄병
종류보병
규모
병력명목상 사단급, 실제로는 여단급 이하
구성원플랑드르인, 독일인
지휘관
주요 지휘관콘라트 셸롱, 토마스 뮐러
주요 전역
참전독소 전쟁
레닌그라드 포위전 (1941년-1943년)
지토미르 전투
탄넨베르크 선 전투
"존넨벤데" 작전
포메라니아 전투
알트담 교두보 방어전

2. 의용부대 설립의 배경

1939년, 독일 국방군전격전에 의한 폴란드 침공이 성공하자 서유럽의 여러 파시스트 정당 및 친독 단체들은 독일을 볼셰비키 문제 해결의 주체로 인식했다.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친위대에 게르만 민족 출신 외국인 병사들을 통합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1940년 독일 국방군이 북유럽 침공과 서방 작전을 완수하자,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허가를 받아 SS본부장 고틀로프 베르거와 함께 이 계획을 실행, 북유럽과 서유럽 출신 게르만계 병사들을 무장친위대에 모집하기 시작했다. 북유럽, 서유럽 각국의 파시스트 정당 및 친독 단체들은 의용병 모집 운동을 주도했고, 1940년 말까지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무장친위대에 지원했다. 초기 덴마크, 노르웨이 출신 의용병은 SS연대 '노르트란트'에, 네덜란드, 벨기에 (플랑드르) 출신은 SS연대 '베스트란트'에 배속되어 '비킹' 사단의 기간을 형성했다.

1941년 4월 3일, '노르트란트' 및 '베스트란트' 연대와 별도로 새로운 SS 의용 연대 '노르트베스트'(SS-Freiwilligen-Standarte Nordwest)가 창설되었다. 이 연대는 주로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출신 의용병으로 구성되었다.

3. 의용부대 "플란데른" 탄생

1939년, 독일 국방군전격전에 의한 폴란드 침공이 성공하자 당시 서유럽 제국에서의 각종 파시스트 정당, 친독 단체의 유력자들은 독일이야말로 볼셰비키 문제를 해결할 존재라고 여겼다.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의 지배 조직인 친위대에, 이른바 게르만 민족에 해당하는 외국 국적의 병사를 입대시키는 것을 계획했다. 1940년 독일 국방군이 북유럽 침공과 서방 작전을 완수하자 힘러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허가를 얻어, SS본부장 고틀로프 베르거와 함께 계획을 실행, 북유럽, 서유럽 출신의 게르만계 병사를 무장친위대에 입대시키기 시작했다.

SS「베스트란트」연대와 SS의용부대「플란데른」에의 입대를 호소하는 포스터, 흰색 글자는 「일어나라 플라망인」


북유럽, 서유럽 각국의 파시스트 정당, 친독 단체의 유력자들은 각국에서 의용병 모집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40년 말까지 일정 수의 외국인이 무장친위대에 지원했다. 모집 초기에 모인 덴마크, 노르웨이 출신 의용병은 주로 SS연대 「노르트란트」에, 네덜란드, 벨기에 (플랑드르) 출신 의용병은 주로 SS연대 「베스트란트」에 배속되었다. 이 2개 연대는 「비킹」사단의 기간이 되었다.

1941년 4월 3일, 「노르트란트」 및 「베스트란트」 연대와는 별도로 새로운 SS 의용 연대 「노르트베스트」(SS-Freiwilligen-Standarte Nordwest)의 창설 명령이 내려졌다. 이 연대는 주로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출신 의용병으로 구성되었으며, 5월 21일 시점에서 약 600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플라망인 의용병은 「노르트베스트」 연대의 제1, 제6, 제8 중대에 배정되어 독일함부르크에서 기본 훈련을 받은 후, 추가 훈련을 위해 폴란드의 라돔과 데비차(Dębica)로 이동했다.

1941년 7월, SS 의용 연대 "노르트베스트"가 해산되면서 플라망인 의용병들은 SS 의용 부대 "플란데른"(SS-Freiwilligen-Verband Flandern, 1941년 9월 24일에 SS-Freiwilligen Legion Flandern으로 개칭)에 배속되었다.

3. 1. 훈련 기간

1941년 7월, SS 의용 연대 "노르트베스트"가 해산되면서 플라망인 의용병들은 '''SS 의용 부대 "플란데른"'''(SS-Freiwilligen-Verband Flandern, 1941년 9월 24일에 '''SS-Freiwilligen Legion Flandern'''으로 개칭)에 배속되었다. 약 1,000명의 장병(90%가 플라망인 의용병)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하급 장교의 절반은 플라망인이었지만, 부사관의 대부분은 독일인이었다.

1941년 10월 당시 부대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다.[1]

직책이름비고
부대 지휘관미하엘 리페르트 SS 소령독일인
본부 및 본부 중대
제1 보병 중대페터 누스바움 SS 중위독일인
제2 보병 중대헬무트 브라이만 SS 소위오스트리아인
제3 보병 중대한스 모옌 SS 소위독일인
제4(중) 박격포 중대카를 노이호이저 SS 소위오스트리아인
제5(전차 사냥꾼) 중대카를 바인게르트너 SS 소위오스트리아인



무장친위대 훈련과 함께, 부대 내 플라망인 장교들(전원 전 벨기에군 장교)은 독일 국방군 장교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몇몇 플라망인 의용병은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부사관 교육을 받았다.[1]

훈련 기간 중, 독일인 교관이 플라망인 의용병에게 모욕과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문제가 발생했다. 벨기에·북 프랑스 친위대 및 경찰 고급 지도자와 플란데르의 파시스트 정당 VNV(Vlaamsch Nationaal Verbond)에서 특사를 파견하여 실태를 확인하고, 친위대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에게 항의했다. 힘러는 "플란데른" 부대 독일인 장병에게 플란데르 문화 학습을 명령하고, 플라망인에 대한 편견과 고압적인 태도를 금지했다.[1]

1941년 10월, 동프로이센 Arys(현 폴란드령 Orzysz)에서 "플란데른" 부대와 함께 훈련받던 의용 부대 "니더란데"(SS-Freiwilligen-Legion "Niederlande") 지휘관 오토 라이히 SS 대령이 "플란데른" 부대의 전투 준비 완료를 판단했다.[1]

1941년 11월 10일, 의용 부대 "플란데른"은 빌헬름 폰 레프 원수의 독일 북방군 집단에 배속되어 노브고로드 근교 전선에 투입되었다.[1]

4. 레닌그라드 전선

1941년 11월, 의용 부대 "플란데른"은 러시아에 도착하여 제2SS 보병 여단에 배속되었고, 곧 전투 준비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12월 초까지 큰 전투는 없었고, 부대는 라트비아로 일시 귀환했다.[1] 이 기간 동안 부대원들은 깃장식에 대해 논의했는데, 플랑드르의 세 다리 형 만자(Trifos)를 본뜬 깃장식과 SS 룬 깃장식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SS 룬으로 결정되었다.[1]

1941년 12월, 스탈린은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결정했고,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은 노브고로드에서 출진하여 볼호프 강을 넘어 발트 해까지 진격하여 독일 북부 집단군의 퇴로를 끊는 작전을 맡았다.[1]

1942년 1월, 소련 적군의 겨울 반격 작전이 시작되면서 "플란데른" 부대는 콥치 마을에서 첫 본격적인 전투를 경험했다. -40°C의 혹한 속에서 백병전을 벌여 마을을 탈환했다. 1월 21일, VNV의 "검은 여단" 지도자이자 "플란데른" 부대 제2중대 소대장 레이몬드 톨레나레(Reimond Tollenaere|레이몬드 톨레나레nl) SS 소위가 아군 포격으로 전사했다.

국방군 군보는 동부 전선에서 용감하게 활약한 부대로 "플란데른" 부대를 언급했다. 2월 4일, 부대는 콥치 마을에서 철수하여 재편성에 들어갔고, 2월 14일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2월 말, 소련 적군의 공격이 잦아들자 독일군은 공격으로 전환하여 소련 적군 포위를 시도했고, "플란데른" 부대도 이 임무에 참여하여 5월 21일 포위가 완성되었다. 부대는 6월 27일까지 포위 축소 작전에 참여한 후 휴식과 재편성을 위해 철수했다.

4. 1. 1941년 말

1941년 11월 13일, 의용 부대 "플란데른"의 장병들은 러시아에 발을 들여놓았다. 현지에서 "플란데른" 부대는 제2SS 보병 여단(자동차화)에 배속되어, 23일에는 전투 준비를 명령받았다. 다음 날, "플란데른" 부대의 소대가 전선에 배치되었지만, 전투는 미미했다. 12월 3일에는 신병이 도착했지만, "플란데른" 부대의 담당 전구에서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고, 12월 6일, "플란데른" 부대는 육군 부대와 교대하여 라트비아로 일시 귀환했다.[1]

이 짧은 휴식 기간 동안, 의용 부대 "플란데른"의 장병들은 자신들의 깃장식에 대해 논의했다. SS 의용 연대 "노르트베스트" 출신의 몇몇 베테랑 병사들은 플랑드르의 세 다리 형 만자(Trifos)를 본뜬 깃장식을 희망했고, 신병들은 SS 룬 깃장식을 희망했다. 전자가 희망한 깃장식은 플라망인 부대의 상징이었고, 플라망인의 민족주의 고양에 효과적이었다. 한편, 후자가 희망한 SS 룬은 독일 엘리트 부대의 상징이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부대 장병이 착용할 깃장식은 SS 룬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부대의 전체 장병(플라망인, 독일인 및 오스트리아인) 사이에서 논쟁거리로 남았다.[1]

1941년 12월,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완전히 멈추자, 스탈린은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결정했다. 러시아 북부에서의 반격 작전은, 독일군이 소련 적군에게 했던 것처럼, 소련 적군이 독일군의 퇴로를 끊고, 그 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을 맡은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과 그의 군대는, 노브고로드에서 출진하여 볼호프 강과 그 주변의 늪지를 넘어, 발트 해까지 진격하여 독일 북부 집단군의 퇴로를 끊을 예정이었다.[1]

4. 2. 1942년 초

1942년 1월, 소련 적군은 독일군에 대한 겨울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1월 9일에는 의용 부대 "플란데른"에 대한 전선 복귀 명령이 내려졌고, 전선으로 돌아온 "플란데른" 부대는 콥치 마을에서 첫 번째 본격적인 전투를 경험했다. -40°C에 달하는 혹한의 기온 속에서 그들은 강력한 소련 적군 부대와 백병전을 벌여 마을 탈환에 성공했다.

1월 21일, VNV의 준군사 조직 "검은 여단"(Zwarte Brigade)의 지도자이자, 의용 부대 "플란데른" 제2중대 소대장 레이몬드 톨레나레(Reimond Tollenaere|레이몬드 톨레나레nl) SS 소위는 최전선의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아군인 푸른 사단의 포병 부대가 소련 적군을 향해 발사한 포탄이 그의 주변에 쏟아졌다. 톨레나레 SS 소위는 이 아군의 포격을 살아남지 못하고, 그는 동부 전선에서 전사한 최초의 플라망인 장교가 되었다.

이 무렵, 국방군 군보는 동부 전선에서 용감하게 활약한 부대의 칭찬에 시간을 할애했는데, 그 많은 부대 중에는 의용 부대 "플란데른"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2년 2월 4일, 의용 부대 "플란데른"은 콥치 마을에서 철수하여 휴식과 재편성에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전투로 인한 부대의 인적 손실은 200명에 달했지만, 그와 동시에 제2중대와 제4중대는 총 700명 정도의 적 병사 시체를 확인했다. 2월 14일, "플란데른" 부대는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다.

2월 말에 이르러 소련 적군에 의한 공격이 단계적으로 잦아들자, 독일군은 공격으로 전환하여, 돌출한 소련 적군의 포위를 시도했다. 의용 부대 "플란데른"도 수개월에 걸쳐 소련 적군 포위 임무에 참여했으며, 5월 21일에는 독일군에 의한 소련 적군의 포위가 완성되었다. 부대는 다음 달까지 포위 축소 행동에 참여했지만, 1942년 6월 27일, 휴식과 재편성을 위해 전선에서 철수했다.

5. SS 의용돌격여단 "랑게마르크" 탄생

1943년 3월 31일, 부대 "플란데른"은 SS 의용 돌격 여단 "랑게마르크"(SS-Freiwilligen-Sturmbrigade "Langemarck")로 재편성되었다. "랑게마르크"라는 명칭은 제1차 세계 대전벨기에의 랑게마르크 마을에서 독일군 학도병들이 돌격 끝에 전멸한 사건에서 유래했다. 독일인은 이 명칭을 애국적 미담 혹은 독일과 플란데르의 관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지만, 플라망인에게는 자국을 침략한 자들에 관한 명칭일 뿐이었다.

1943년 5월 31일, 여단의 지휘관으로 콘라트 쉘롱크Konrad Schellong|콘라트 쉘롱크de SS 소령이 부임했고, 10월 22일에 여단은 '''제6SS 의용 돌격 여단 "랑게마르크"''' (6. SS-Freiwilligen-Sturmbrigade "Langemarck")로 개칭되었다.

1943년 10월 당시, 제6SS 의용 돌격 여단 "랑게마르크"의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비고
지휘관콘라트 쉘롱크Konrad Schellong|콘라트 쉘롱크de SS 소령독일인
여단 본부, 본부 부속 중대
제1 경보병 중대쿠르트 마렌홀츠Kurt Mahrenholz|쿠르트 마렌홀츠de SS 소위독일인
제2 경보병 중대스벤 마르텐손Sven Martenson|스벤 마르텐손de SS 소위독일인
제3 경보병 중대포겔Vogel|포겔de SS 소위독일인
제4 중보병 중대레오 판 데어 웨엔Leo Van der Weeën|레오 판 데어 웨엔nl SS 소위플라망인
제5 보병포 중대빌리 쾨른Willi Köhn|빌리 쾨른de SS 소위독일인
제6 대전차 중대아우구스트 크노르August Knorr|아우구스트 크노르de SS 대위독일인
제7 돌격포 중대카를 바인가르트너Karl Weingärtner|카를 바인가르트너de SS 대위오스트리아인
제8 경대공포 중대오토 위터스프로트Otto Uytersprot|오토 위터스프로트nl SS 소위플라망인
제9 중대공포대빌리 데티어Willi Dethier|빌리 데티어de SS 대위독일인
제10 행군 중대빌헬름 샤우만Wilhelm Schaumann|빌헬름 샤우만de SS 소위독일인



이 무렵, 여단은 의용 부대 "플란데른"의 참전 용사 및 새롭게 모인 플라망인 의용병, 독일인 장교·하사관·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943년 12월 31일 시점에서 여단에 소속된 장병은 2,022명이었다.

6. 우크라이나 전선

1943년 12월 26일, 제6SS의용돌격여단 "랑게마르크"는 독일 남방군집단 소속으로 우크라이나 전선에 파견되어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와 함께 키예프와 지토미르에서 격렬한 방어전을 펼쳤다.

1944년 1월, "랑게마르크" 여단은 지토미르에서 "다스 라이히" 전투단과 함께 소련 붉은 군대에 포위되었다. 이들은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지만, 격전으로 병력, 중장비, 차량 대부분을 잃었다. 3월 초 "랑게마르크" 여단의 전투 가능 병력은 약 400명뿐이었으며, 4월 말 재편성을 위해 보헤미아로 이동했다.

7. 나르바 전투

1944년 7월, '랑게마르크' 여단의 플라망인 의용병들은 나르바 전투에서 소련군과 격전을 벌였다. '랑게마르크' 여단의 제1대대는 '레만' 전투단(Kampfgruppe Rehmann)으로 증강되어 참전했다.

7월 26일, 전투 첫날부터 '레만' 전투단은 중대장 1명과 대전차포 1문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의 포격으로 지휘관 빌헬름 레만 SS 대위가 부상당하고, 제2중대장과 후임 중대장이 전사했다. 제3중대장 게오르크 도하제 SS 소위가 전투단을 지휘하게 되면서, 이후 전투단은 '''도하제 전투단'''(Kampfgruppe D'Haese)으로 불리게 되었다.[1]

7월 27일, '도하제' 전투단은 '고아원의 언덕', 제20SS무장척탄병사단과 제11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각각 '척탄병의 언덕'과 고지 69.9를 방어했다. '도하제' 전투단은 대전차포 1문을 추가로 잃었지만, 레미 슈라이넨 SS 일등병이 대전차포 포수로 활약했다.

7월 28일,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공격에 맞서 '도하제' 전투단은 백병전을 벌이며 저항했지만, '척탄병의 언덕'까지 후퇴했다. 레미 슈라이넨은 혼자서 대전차포를 운용하며 적 전차를 다수 격파했지만,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1]

7월 29일, 소련군의 공세는 절정에 달했다. '도하제' 전투단과 다른 독일군 부대들은 제11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소속 전차와 돌격포의 지원을 받으며 저항했다. 레미 슈라이넨은 독일군 전차병에게 발견되어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소련군은 후퇴했다.

7. 1. "레만" 전투단 편성

1944년 4월, 보헤미아에서 "랑게마르크" 여단은 재편성에 들어갔다. 새로 합류한 의용병과 부상에서 회복한 장병들이 모여 여단의 병력은 약 1,700명으로 늘어났다.

여단 재편성 중, 여단장 셸롱크 SS 소령에게 1개 증강 대대를 나르바로 파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셸롱크 SS 소령은 우크라이나에서 입은 부상 회복 및 여단 재편성 감독으로 인해 직접 대대를 이끌 수 없었다. 이에 셸롱크는 빌헬름 레만 SS 대위의 제1대대를 전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944년 7월 19일, "레만" 전투단(Kampfgruppe Rehmann)으로 증강된 "랑게마르크" 여단 제1대대는 체코슬로바키아 베네쇼프에서 열차로 출발, 7월 24일 에스토니아 토일라에 위치한 제IIISS 기갑군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레만" 전투단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

직책이름비고
지휘관빌헬름 레만 SS 대위 (SS-Hauptsturmführer Wilhelm Rehmann)독일인
부관발터 판 렘푸텐 SS 소위 (SS-Untersturmführer Walter Van Leemputten)플라망인
군의관헤르트겐스 공군 소위 (Leutnant Dr. Hertgens)루프트바페 출신 독일인
제1중대프랑스 스위넨 SS 소위 (SS-Untersturmführer Frans Swinnen)플라망인
제2중대헨리 판 몰 SS 소위 (SS-Untersturmführer Henri Van Mol)플라망인
제3중대게오르크 도하제 SS 소위 (SS-Untersturmführer Georg D'Haese)플라망인
대전차포 소대마르셀 라페르 SS 소위 (SS-Untersturmführer Marcel Laperre)플라망인


7. 2. 1944년 7월 26일 전투 첫날

1944년 7월 26일, "레만" 전투단의 플라망인 의용병들은 나르바 전투에서 처음으로 소련 적군과 교전했지만, 시작은 좋지 않았다. 적의 첫 공격으로 제1중대장 스윈넨 SS 소위가 전사했고, 또한 적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1대전차포를 폭파하려던 포반장 베르트 도홀란더 SS 상사(''SS-Unterscharführer'' Bert D'Hollander)는 폭약의 기폭 조작을 실수하여 대전차포와 함께 폭발했다.[1]

"레만" 전투단이 중대장 1명과 대전차포 1문을 잃은 후, 소련 적군은 "고아원의 언덕"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이 포격 와중에 전투단의 지휘 참호에 포탄이 직격하여 많은 전령과 위생병이 사상했으며, 지휘관 레만 SS 대위도 부상하여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게다가 "고아원의 언덕" 기슭의 참호에서는 제2중대장 판 몰 SS 소위와 그 후임인 판 보켈 SS 소위가 전사했다. 제3중대장 게오르크 도하제 SS 소위도 경상을 입었지만, 그는 전선에 남았다. 이후, 레만 SS 대위로부터 전달된 명령에 의해 21세의 도하제 SS 소위가 전투단의 지휘를 인계받았다. 이때부터 탄넨베르크 선의 플라망인 의용병 전투단은 "레만" 전투단에서 '''"도하제" 전투단(Kampfgruppe D'Haes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

7. 3. 1944년 7월 27일 전투 2일째

전투 2일째, 각지에서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탄넨베르크선의 "고아원의 언덕"은 "도하제" 전투단이, "척탄병의 언덕"과 고지 69.9는 제20SS무장척탄병사단과 제11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제11SS공병대대 2개 중대가, 남부 숲의 가장자리는 제23SS장갑척탄병연대 "노르게"가 확보하고 있었다.

이날, 에두아르트 레브 SS-Unterscharführerde (Eduard Reeb)가 포반장을 맡은 제2대전차포는 수리를 위해 후방으로 견인되었지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도하제" 전투단은 또한 대전차포 1문을 잃었고, 대전차포병은 보병으로 각 중대에 편입되었다. 전투단에 남아있는 대전차포는 예프 흐로터르스 SS-Unterscharführerde (Jef Grootaers)가 포반장을 맡고, 레미 슈라이넨 SS-Sturmmannde (Remy Schrijnen)가 일등 포수를 맡은 제3대전차포뿐이었다.

같은 날 종반, 소비에트 적군은 새로운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도하제" 전투단의 플라망인 의용병들은 전선 진지를 계속 지켰지만, 백병전 끝에 "척탄병의 언덕"까지 후퇴를 강요받았다. 이 시점에서 전투단의 장병들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7. 4. 1944년 7월 28일 전투 3일째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 레오니트 고보로프 장군은 11개 보병 사단과 6개 전차 여단으로 탄넨베르크 선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오전 10시, 소비에트 적군은 "도하제" 전투단이 있는 "척탄병 언덕"을 공격했다. 전투단 유일의 대전차포 포수 플로터스 SS 상사는 진지 사수를 외쳤고, 그의 1번 포수 레미 슈라이넨 SS 일등병은 적 전차 4대를 격파했다. 플로터스의 대전차포는 계속해서 적 보병의 내습을 경계했고, 슈라이넨은 T-34 전차 5대를 추가로 격파했다.[1]

독일군 네벨베르퍼 부대의 지원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소비에트 적군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레미 슈라이넨이 부상당한 상황에서 플로터스 SS 상사가 위생병을 부르러 갔으나, 그들은 적의 함포 사격에 의해 모두 전사했다. 슈라이넨은 혼자서 대전차포를 5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동시켰다. 원래 진지는 적의 함포 사격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1]

새롭게 T-34 전차 30대와 스타린 중전차 4대가 쇄도했다. 슈라이넨은 혼자서 대전차포를 운용하여 T-34 전차 1대를 격파했고, 이어서 T-34 전차 3대와 스타린 전차 3대를 추가로 격파했다. 전투단 지휘관 게오르크 도하제는 슈라이넨이 막힌 유탄을 부지깽이로 밀어 넣고 적 전차를 격파하는 모습을 묘사했다.[1] 슈라이넨은 격파된 대전차포에서 20미터 정도 날아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1]

7월 28일 저녁, "도하제" 전투단의 잔여 병력은 "고아원 언덕"에 대한 반격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많은 장병이 부상을 입었고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것이 "고아원 언덕"을 탈환하려는 마지막 시도였다.[1]

7. 5. 1944년 7월 29일 전투 4일째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레오니드 고보로프 장군의 공격은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소비에트 공군공격기는 지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공격했고, 폭격기는 전장 전체를 폭격했다. 100량이 넘는 소비에트 적군 전차는 독일군 진지를 향해 진격했다.

"노르게" 연대 제II대대, "도하제" 전투단, 제20SS무장척탄병사단의 생존자는 소규모 그룹으로 나뉘어 전투를 계속했다. 제11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의 파울-알베르트 카우슈SS 소령이 이끄는 제11SS 전차 대대 "헤르만 폰 잘차" 소속의 전차와 돌격포는 진격해오는 소비에트 적군 전차를 잇따라 격파하며 소비에트 적군을 후퇴시켰다. 이 공격 와중에 제11SS 전차 대대 "헤르만 폰 잘차"의 장병들은 부상당한 레미 슈라이넨과 그의 격파된 대전차포, 그리고 그 대전차포 앞에 버려진 12량에 가까운 소비에트 적군 전차를 발견했다. 슈라이넨은 카우슈 SS 소령의 지휘 전차 승무원에 의해 발견되어 토일라(Toila)의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소비에트 적군은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를 시작했다.

8. 제27SS 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 탄생

1944년 가을, 연합군이 벨기에로 진격해 오면서 벨기에 내 파시스트들은 독일로 도피했다. 이에 따라 제6SS의용돌격여단 랑게마르크 및 제5SS의용돌격여단 발로니엔은 1944년 10월 18일 사단으로 확대되었다.

9. 역대 지휘관

취임퇴임계급(당시)성명
1939년 10월 20일1942년 6월 13일친위대 소령미하엘 리페르트
1942년 6월 14일1943년 2월 3일친위대 중령한스 알베르트 폰 레토우-포어베크
1943년 2월 4일1945년 3월 9일친위대 대위할만
1945년 3월 10일1945년 5월 9일친위대 중령요제프 피츠툼
1943년 2월 4일1945년 3월 9일친위대 소령콘라트 셸롱크
1945년 3월 10일1945년 5월 9일친위대 상급대령토마스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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