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SS의용척탄병사단 발로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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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8SS의용척탄병사단 발로니엔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에 소속된 벨기에 왈롱인으로 구성된 사단이다. 1930년대 벨기에 왈롱 지역에서 활동한 파시즘 단체 렉스당의 레옹 데그렐이 주도하여, 1941년 독일 국방군 소속 발로니엔 군단으로 창설되었다. 이후 무장친위대에 편입되어 동부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나르바 전투 등에 참여했다. 전쟁 후 데그렐은 스페인으로 도피하여 망명 생활을 했고, 사단 생존자들은 전후 대독 협력 혐의로 처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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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SS의용척탄병사단 발로니엔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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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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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레지옹 와로니 (와롱 군단) |
약칭 | 없음 |
기간 | 1941년 – 1945년 |
국가 | 없음 |
충성 | 나치 독일 |
군종 | 국방군 (1941–1943) 무장친위대 (1943–1945) |
종류 | 보병 |
역할 | 없음 |
규모 | 최대 병력 2,000명 총 7,000–8,000명 (1941–1945) 대대, 여단, 이후 사단 규모였으나 여단 규모를 넘지 못함. |
지휘 구조 | 없음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우크라이나의 파르티잔 소탕 작전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투 존넨벤데 작전 탄넨베르크 선 전투 |
주요 지휘관 | 레온 데그렐 (1944–45) |
식별 기호 | [[파일:Wallonische_Legion_Wimpel_Stabsbrigade_1942.svg|100px]] [[파일:Wallonische_Legion_Legionsfahne_1941.svg|100px]] [[파일:Wallonische_Legion_Kompaniefahne.svg|100px]] |
식별 기호 설명 | 깃발 |
제28SS 의용 척탄병 사단 "발로니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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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 1944년 10월 19일 |
해체 | 1945년 5월 8일 |
국가 | 나치 독일 |
소속 | 무장친위대 |
병종 | 척탄병 |
규모 | 사단 (실제로는 여단 규모) |
인원 | 와롱인, 독일인 |
위치 | 없음 |
상급 부대 | 제3게르만SS기갑군단 (1945년 2월 ~ 3월) SS사단 집단 "뮐러" (1945년 4월 15일) |
별칭 | 발로니엔 |
표어 | 나의 명예는 충성 (Meine Ehre heißt Treue) |
주요 전투 | 독소 전쟁 (독일 육군 제373와롱 보병 대대 시절) 그로모바야-발카 전투 청색 작전 (SS 돌격 여단 시절) 코르순 포위전투 에스토니아 전투 (제28SS 의용 척탄병 사단 시절) "존넨벤데" 작전 포메라니아 전투 알트담 교두보 방어전 실라스도르프 반격 작전 |
주요 지휘관 | 레온 데그렐 |
추가 정보 | |
프랑스어 명칭 | Légion Wallonie |
독일어 명칭 | 5. SS-Freiwilligen-Sturmbrigade „Wallonien“ 28. SS-Freiwilligen-Panzergrenadier-Division „Wallonien“ |
2. 역사적 배경
1930년대 벨기에 왕국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인 왈롱 지역에서는 여러 파시즘 단체가 활동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단체는 가톨릭 출판사 경영자인 Léon Degrelle|레옹 데그렐프랑스어이 이끌던 렉시즘(Rexisme)이었다. 렉스당은 가톨릭 블록의 한 분파에서 시작되었지만, 1935년 11월 2일에 분리되어 독립적인 포퓰리즘 정당을 형성했다.[7]
렉스당은 이념적으로 벨기에 민족주의를 지지했지만, 조합주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지지는 나치 이념과 유사한 측면을 보였다. 초기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1936년 벨기에 총선에서 전국 득표율의 11.5%를 얻으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독일의 침공 이전 몇 년 동안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고, 1939년 선거에서는 5%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변두리에 머물렀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서방 전역의 일환으로 벨기에 침공을 시작했을 때, 벨기에 당국은 친독, 친이탈리아적이었던 데그렐을 벨기에의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여 체포했다. 데그렐은 체포된 렉시즘 관계자들과 함께 프랑스로 보내졌고, 그중 21명이 총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형을 면했다. 이후 데그렐은 스페인 국경 부근의 르 베르네 수용소(Vernet d'Ariège)에 수감되었지만,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1940년 7월 20일에 독일군에 의해 석방되었다.[8]
독일군 점령하의 벨기에로 돌아온 데그렐은 렉스당의 활동을 재개하고, 왈롱인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착수했다. 다만, 독일은 게르만 민족인 플라망인(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 주민)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 게르만 민족인 왈롱인이 주체인 렉스당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1940년 5월 28일 벨기에 항복 이후, 독일 벨기에 및 북프랑스 군정은 점령지를 통치했다. 간접 통치 전략의 일환으로, 군정은 렉스당과 같은 변두리 정치 단체를 대체로 무시하고 기존 벨기에 정치 및 사회 엘리트와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다.[1] 렉스당은 더 많은 영향력과 독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점령 당국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2]
2. 1. 레옹 데그렐과 렉스당
1930년대 벨기에 왕국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인 왈롱 지역에서는 여러 파시즘 단체가 활동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단체는 가톨릭 출판사 경영자인 Léon Degrelle|레옹 데그렐프랑스어이 이끌던 렉시즘(Rexisme)이었다. 렉스당은 가톨릭 블록의 한 분파에서 시작되었지만, 1935년 11월 2일에 분리되어 독립적인 포퓰리즘 정당을 형성했다.[7]렉스당은 이념적으로 벨기에 민족주의를 지지했지만, 조합주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지지는 나치 이념과 유사한 측면을 보였다. 초기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1936년 벨기에 총선에서 전국 득표율의 11.5%를 얻으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독일의 침공 이전 몇 년 동안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고, 1939년 선거에서는 5%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변두리에 머물렀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서방 전역의 일환으로 벨기에 침공을 시작했을 때, 벨기에 당국은 친독, 친이탈리아적이었던 데그렐을 벨기에의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여 체포했다. 데그렐은 체포된 렉시즘 관계자들과 함께 프랑스로 보내졌고, 그중 21명이 총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형을 면했다. 이후 데그렐은 스페인 국경 부근의 르 베르네 수용소(Vernet d'Ariège)에 수감되었지만,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1940년 7월 20일에 독일군에 의해 석방되었다.[8]
독일군 점령하의 벨기에로 돌아온 데그렐은 렉스당의 활동을 재개하고, 왈롱인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착수했다. 다만, 독일은 게르만 민족인 플라망인(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 주민)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 게르만 민족인 왈롱인이 주체인 렉스당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2. 2. 벨기에 점령과 렉스당의 협력
1940년 5월 독일의 침공 당시, 벨기에는 나치 독일의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이상에 공감하는 여러 정당들을 가지고 있었다. 왈롱과 브뤼셀에서 가장 큰 정당은 레옹 드그렐이 이끄는 렉스당이었다. 렉스당은 벨기에 민족주의를 지지했지만, 조합주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지지로 나치 이념에 공감했다. 렉스당은 1936년 벨기에 총선에서 전국 득표율의 11.5%를 얻으며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 급격히 하락하여 1939년 선거에서는 5%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변두리에 머물렀다.1940년 5월 28일 벨기에 항복 이후, 독일 벨기에 및 북프랑스 군정은 점령지를 통치했다. 간접 통치 전략의 일환으로, 군정은 렉스당과 같은 변두리 정치 단체를 대체로 무시하고 기존 벨기에 정치 및 사회 엘리트와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다.[1] 렉스당은 더 많은 영향력과 독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점령 당국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2]
3. 발로니엔 군단의 창설 (1941–1942)
렉스당은 더 많은 영향력과 독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점령 당국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렉스당은 군사 부대를 창설하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플랑드르 민족주의 정당인 플람스 국민 연맹(Vlaamsch Nationaal Verbond, VNV) 또한 소련에서 독일군과 함께 싸울 "플랑드르 군단"을 결성하려 했고, 독일은 VNV에 우호적이었다.
1941년 7월, 렉스당은 발로니아 자유 군단(''Corps Franc Wallonie'') 또는 발로니엔 군단(''Légion Wallonie'')으로 명명된 자체 지원병 부대를 창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발로니엔 군단은 독일 국방군(Wehrmacht) 내에서 창설되었는데, 이는 발로니아인들이 나치 인종 이론가들에 의해 무장 친위대(Waffen-SS)에 들어갈 만큼 "게르만족"으로 충분히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9] 1941년 8월까지 총 850명의 남자가 자원하여 부대를 대대 규모로 만들었다.[12] 공식적으로 보병 제373대대(''Infanterie Bataillon 373'')로 지정된 이 부대는 독일 메제리츠에서 훈련을 받았다. 부대는 부르고뉴 십자를 휘장으로 채택했다.
군단의 초기 지원자 대부분은 렉시스트 간부였으며, 렉스당은 선전에서 반공주의적 측면을 강조하고 협력이 벨기에 애국심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7]
4. 동부 전선
발로니엔 군단은 1941년 11월부터 동부 전선 후방에서 "사소한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군단에서 복무한 러시아 이민자 로스티슬라프 자바츠키는 11월 말에 게릴라 혐의로 민간인을 총살한 것에 대해 일기를 썼다. 야전 헌병대 부대가 살인을 저질렀지만, 발로니엔 군단병도 참여했으며 벨기에 장교와 병사들이 지켜보며 사진을 찍었다.[9]
이후 루마니아군을 거쳐 제100엽병사단에 배속된 군단은 1942년 2월 28일 제17군의 일부로 도네츠크 근처 흐로모바 발카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첫 번째 주요 교전을 벌였다. 질병과 전투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첫 몇 달 만에 150명으로 줄어들었다. 1942년 내내 "엄청난 손실"을 계속 겪었다. 군단은 1942년 7월 돈 강에 배치된 후 남쪽 코카서스로 이동했다. 단 한 번의 작전에서 부대는 854명의 사상자를 냈고 레옹 데그렐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942년 11월까지 187명으로 줄었다.[9]
1942년 말, 하인리히 힘러는 왈로니아인을 게르만 민족으로 선언하여 1943년 6월 1일 무장친위대에 합류하는 길을 열었다.
4. 1. 독일 국방군 소속 (1941–1943)
발로니엔 군단은 1941년 11월부터 동부 전선 후방에서 "사소한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후 루마니아군을 거쳐 제100엽병사단에 배속되었다. 1942년 2월 28일, 제17군 소속으로 도네츠크 인근 흐로모바 발카에서 소련군과 첫 주요 교전을 벌였다. 질병과 전투로 큰 손실을 입었고, 1942년 내내 "엄청난 손실"이 계속되었다. 1942년 7월 돈 강을 거쳐 코카서스로 이동했다.[9] 높은 사상률로 인해 징집이 강화되었다. 1942년 초 자원병 연령 제한이 완화되었고, 2월에는 450명, 11월에는 1,700명을 추가 모집했다. 레옹 데그렐은 발로니엔 군단을 렉시스트 정당보다 효과적인 정치 도구로 보고, 그 정치적 잠재력에 주목했다. 군단의 전투 기록은 선전에 활용되어 데그렐의 정당성을 높였다.[10]- '''발로니 부대(Légion Wallonie) / 제373 발로니 보병대대(Wallonische Infanteriebataillon 373)''' 소속
소속 부대 |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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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엽병사단 | 1941년 12월 10일 ~ 1942년 5월 16일 |
제100엽병사단 / "마르쿨" 전투단(Kampfgruppe Markulj) | 1941년 1월 ~ 1942년 2월 16일 |
제100엽병사단 / "트뢰거" 전투단(Kampfgruppe Tröger) | 1942년 2월 17일 |
제100엽병사단에서 제101엽병사단으로 복귀 | 1942년 2월 17일 ~ 5월 16일 |
제68보병사단 | 1942년 5월 17일 ~ 5월 20일 |
제97엽병사단 | 1942년 5월 21일 ~ 1942년 11월 18일 |
4. 2. 무장친위대 소속 (1943–1945)
1942년 말, 하인리히 힘러는 왈로니아인을 게르만 민족으로 선언하여 1943년 6월 1일 무장친위대에 합류하는 길을 열었다. 왈로니아 군단은 2,000명 규모의 여단급 부대로 재편성되었으며, SS 돌격 여단 왈로니아(SS-Sturmbrigade Wallonien)로 알려졌다. 이적의 일환으로 부대와 렉스 사이의 연결 고리는 끊어졌다. 1943년 11월, 새로운 SS-돌격여단 왈로니아는 소련의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에 대응하여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었다.[7] 그곳에서 여단은 1944년 2월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SS 기갑사단 비킹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70%의 사상자를 냈다. 전투가 끝날 무렵, 부대의 실질적인 전력은 2,000명에서 632명으로 감소했다. 사망자 중에는 부대 지휘관인 뤼시앵 리페르|Lucien Lippert프랑스어도 있었다.[7] 그러나 레옹 데그렐은 체르카시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널리 찬사를 받아 "모든 유럽 협력자들의 포스터 보이"가 되었으며, 국방군의 잡지인 ''신호''에 실렸다.[7] 부대의 잔존 병력은 벨기에로 돌아와 1944년 4월 브뤼셀과 샤를루아에서 열병식을 개최했다.[7] 리페르트가 사망한 후 데그렐은 ''SS-돌격대지도자''로 진급하여 여단을 지휘했다.[7]1944년 6월 서방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벨기에를 향해 급속히 진격하기 시작했다. 동부 전선에서 여단은 7월에 프랑코니아에 있는 임시 캠프에서 급히 재배치되어 나르바 외곽의 탄넨베르크 선 전투에 플랑드르를 포함한 서유럽 출신의 다른 SS 부대와 함께 참여했다.[7] 1944년 9월 벨기에 해방 이후 데그렐은 연합군의 진격으로부터 도망치는 렉시스트 난민과 국가 사회주의 자동차 군단(NSKK)의 벨기에 자원병을 징집한 후 여단을 사단 지위로 승격시켰다.[7] 새로운 제28 SS 의용척탄병사단 왈로니아(28. SS-Freiwilligen-Grenadier-Division Wallonien)는 1944년 10월에 창설되었다.[7] 병력은 4,000명 미만으로, 전력이 크게 부족했다.[7] 청색 사단의 프랑스 군인과 스페인 군인들이 부대에 합류하여 병력을 늘렸다.[7]
1945년 초, 왈로니아 사단은 포메라니아 방어에 배치되었다. 2월 5일 슈타르가르트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 달 말까지 병력은 700명으로 줄어들었고, 오데르강의 러시아 교두보에 대한 값비싼 공격에 투입되어 650명의 병력을 추가로 잃었다.[7] 이 실패 이후 생존자 중 일부는 해상으로 독일 점령 덴마크로 대피하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로 향했다.[7] 데그렐은 플뢴에서 하인리히 힘러와 만났지만 실질적인 명령은 받지 못하고 노르웨이로 도망쳤다.[7] 사단의 생존 인원은 뤼베크에서 영국군에 항복하여 소련군에 의한 포로 억류를 피했다.[7]
5. 지휘관
(Wallonische Infanteriebataillon 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