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회담 (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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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네바 회담 (1954년)은 1954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회담으로, 주요 의제는 한국 문제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었다. 회담에는 한국, 프랑스, 미국, 영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등 여러 국가가 참여했다.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진전 없이 한국 휴전 협정의 재확인 수준에 그쳤지만, 인도차이나 문제와 관련하여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분할하고 1956년 총선거를 통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 회담의 결과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고,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게 되었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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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회담 (195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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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1954년 제네바 회담 |
영문 명칭 | 1954 Geneva Conference |
협정 체결 | |
서명일 | 1954년 7월 21일 |
서명 장소 | 제네바 |
관련 문서 | 제네바 협정 |
참가국 | |
주요 참가국 | 베트남 민주 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프랑스 영국 |
목적 | |
주요 내용 | 인도차이나 국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독립 승인 정전 및 정전 감시단 파견 베트민군의 남베트남 철수 및 프랑스군의 북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철수 베트남을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리, 군대 재편성 후 1956년 7월 자유 선거를 통한 통일 |
결과 | |
주요 결과 | 베트남의 분단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 통치 종식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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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54년 2월 18일, 베를린 회담에서 참가국들은 "인도차이나의 평화 회복 문제는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및 기타 관련 국가의 대표가 초청될 [한국 문제에 관한] 회담에서 논의될 것"에 합의했다.[4]
제네바 회담은 1954년 4월 26일 스위스 국제 연맹 본부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의제는 한국 문제였고, 그 다음은 인도차이나 문제였다.[4]
한국 전쟁이 끝난 뒤 한국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정치적 회담은 지연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하며 철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제네바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4]
2. 1. 한국 전쟁
한국 전쟁의 종전과 함께 체결된 한국 휴전 협정은 3개월 이내에 정치 회담을 열도록 규정했다. 이 기한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회담을 통해 "한국에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협상으로 해결"해야 했다.[6]2.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아시아에서 탈식민화가 진행됨에 따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독립을 얻었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는 프랑스군과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베트민은 서방 기술에 의존하는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다. 1950년에서 1954년 사이에 일련의 공세를 통해 프랑스가 점령한 영토를 점차 줄여나가다가,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철수하게 되었고, 제네바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4]베트남 독립 동맹(베트민)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생긴 군사적 공백을 이용하여 베트남 8월 혁명을 일으켜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인도차이나에 복귀한 프랑스군과의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군에 의해 도시에서 쫓겨난 베트민은 농촌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프랑스는 1949년 베트남국(바오 다이 정부)를 수립하여 베트남인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같은 해 베트남과 인접한 중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고,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아시아에서의 냉전 대립이 격화되자,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군사 원조를 받아 프랑스 주둔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 국내에서는 염전 분위기가 확산되어 전쟁의 지속은 프랑스 정부의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1954년에 들어 베트남 북서부의 디엔비엔푸에서 결전의 시기가 다가오자, 평화 회담이 개최될 운명이 되었다.
3. 경과
본 회담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및 한국의 재통일 문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평화 유지와 베트남 분단 협약에 대한 논의라는 두 가지 주요 의제를 다루었다.[28]
1954년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인도차이나 평화 교섭은 난항을 겪었지만, 5월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고, 6월에 프랑스 총리에 취임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1개월 이내의 평화 실현을 공약하자, 참가국 간에 타협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베트민) 측의 팜 반 동 대표단은 국토 대부분을 제압하고 있다는 점을 배경으로 군사 분계선 설정 등에서 마지막까지 강경한 자세를 보였지만, 회담 최종일에 소련·중국 양국의 설득으로 타협하여 7월 21일 평화 협정이 성립되었다.
3. 1. 참가국
소련, 미국, 프랑스, 영국, 중화인민공화국은 회의 전체에 참가하였고, 한국 전쟁과 인도차이나 전쟁 문제 해결과 관련된 여러 나라도 각 문제 토론에 참가하였다.[29] 이 나라들은 유엔을 통해 한국전쟁에 파병한 나라들과 프랑스와 비엣민 간의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이다.1954년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관계국 대표들이 모여 인도차이나 평화 회담을 시작하였다. 참가국은 프랑스, 미국, 영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왕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민), 소련, 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동시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도 참가하여 한반도 문제도 논의되었지만, 이미 한국 전쟁 휴전 협정으로 정전이 실현되었던 한반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전도 얻지 못했다.
3. 2. 주요 의제

본 회담은 두 가지 주요 의제를 다루었다. 첫째는 한국 전쟁의 공식적인 종료를 위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한국의 재통일 문제였고, 둘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평화 유지 가능성과 베트남 분단 협약에 대한 논의였다.[28]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대표는 대한민국이 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북한 지역에서 유엔 주도의 선거를 실시하고, 중국군은 철수하되 전쟁 당사자인 유엔군은 안정을 위해 잔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한 대표는 남북한 동등한 인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모든 외국군이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은 중립국이 선거를 감독할 것을 제안했고 북한이 이를 수용했으나, 미국은 소련이 북한을 괴뢰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한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결국 연합국 대부분이 침묵을 지켰고, 회담 최종일인 1954년 6월 15일까지 어떤 선언도 만장일치를 얻지 못하고 종료되었다.[8]
인도차이나 문제의 경우, 회의체는 '''제네바 합의'''라 불리는 일련의 문서를 만들어냈다. 이 합의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었다. 북베트남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호찌민 중심의 베트민이, 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전 황제 바오다이를 수장으로 하는 베트남국이 통치하게 되었다. 회의 최종 선언은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하기 위해 1956년 7월 이전에 보통선거를 실시할 것을 규정했으나, 남베트남과 미국 대표들은 이 문서 채택에 동의하지 않았다.[7]
4. 한반도 문제 논의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은 3개월 이내에 정치 회담을 열어 "한국에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협상으로 해결"하도록 규정했지만,[6] 기한은 지켜지지 않았다.
회담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미국은 소련이 북한을 괴뢰 국가로 만들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한민국 입장을 지지했고, 대부분의 동맹국은 침묵했다.[8]
1954년 6월 15일, 한국 문제에 대한 회담 마지막 날, 소련과 중국은 통일되고 민주적이며 독립적인 한국을 지지하는 선언을 제출하며, 협상이 적절한 시기에 재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벨기에와 영국 대표단은 "소련과 중국 제안을 받아들일 의향은 없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9] 그러나 결국, 회담 참가자들은 어떤 선언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4. 1. 대한민국 (남한)의 입장
대한민국 대표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유엔 감시 하에 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해야 하며, 중국군은 철수해야 하고, 전쟁 당사자인 유엔군은 경찰력으로 남아야 한다고 제안했다.[8]북한 대표는 전 한반도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모든 외국군은 사전에 철수하며, 선거는 남북한 동수로 구성된 전 한반도 위원회에서 관리하고, 남북한 간의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증진할 것을 제안했다.[8]
중국 대표단은 선거를 감시할 '중립' 국가 그룹을 두는 수정안을 제안했고, 북한은 이를 수락했다. 미국은 소련이 북한을 괴뢰 국가로 만들려 한다고 말하며 대한민국 입장을 지지했다. 대부분의 동맹국들은 침묵했고, 적어도 영국은 대한민국-미국 제안이 불합리하다고 여겼다.[8]
대한민국 대표는 유엔 감시 하에,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따라 전 한반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결국, 회담 참가자들은 어떤 선언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4.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의 입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대표는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모든 외국군은 사전에 철수하며, 선거는 북한과 남한에서 동수로 구성된 전 한반도 위원회에서 관리하고, 북한과 남한 간의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증진할 것을 제안했다.[8]중국 대표단은 선거를 감시할 '중립' 국가 그룹을 두는 수정안을 제안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를 수락했다.
4. 3. 미국의 입장과 저우언라이-덜레스의 갈등
일부 참가국들과 비평가들은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을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미국의 패권을 지키기 위하여, 한반도를 이용하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의 재통일에 대해 고의적으로 주춤하고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비난하였다. 중국 외교부장 저우언라이가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협상을 요구했지만, 덜레스가 논의조차 거부하여 더 이상 협상이 진행되지 못했다.[32] 미국은 제네바 회의 기간 동안 고의로 전쟁 포로 송환, 휴전 협정 준수, 미국 외교 정책 등 다른 주제를 거론하며 한반도 통일 관련 핵심 주제 논의를 회피하였다.[29][33][34]
당시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반공주의자였으며, 중국 대표단과의 접촉을 금지했고, 저우언라이와 악수하는 것을 거부했다.[4] 덜레스는 영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단결된 행동과 미국의 입장을 지원하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여 영국 대표 앤서니 이든과 다퉜다. 그는 5월 3일에 제네바를 떠났고 그의 부관 월터 베델 스미스가 그를 대신했다.[4]
4. 4. 논의 결과
1954년 1월 17일, 제네바 회담을 앞두고 서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곧 미국을 팔아넘기는 것과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30][31]첫 안건은 한국 전쟁을 공식으로 종료하고 한국의 재통일을 위한 한반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일부 참가국들과 비평가들은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을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미국의 패권을 지키기 위하여 한반도를 이용하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재통일에 대해 고의적으로 주춤하고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비난하였다.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이 존 포스터 덜레스 당시 미국 국무장관에게 협상을 요구하였지만, 덜레스가 논의조차 거부하여 더 이상 협상이 진행되지 못하였다.[32] 제네바 회의 기간 동안 미국은 전쟁 포로 송환, 휴전 협정 준수, 미국의 외교 정책 등 다른 주제를 거론하며 한반도 통일 관련 핵심 주제 논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29][33][34]
남한 대표는 대한민국이 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한국 북부에서 유엔 주도의 선거를 실시하고, 중국군은 철수하며, 전쟁 당사자인 유엔군은 안정을 위해 잔류할 것을 주장하였다. 북한 대표는 남북 동수 인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로 한국 남부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이 모두 철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중국은 중립국이 선거를 감독할 것을 제안하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미국은 소련이 북한을 괴뢰국가로 만들고자 한다며 한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연합국 대부분은 침묵했고, 회담 최종일인 6월 15일까지 어떤 선언도 만장일치를 얻지 못하고 끝났다.
대한민국 대표는 유엔 감시하에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따라 전 한반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6월 15일, 한국 문제에 대한 회담 마지막 날, 소련과 중국은 통일되고 민주적이며 독립적인 한국을 지지하는 선언을 제출하며, 이를 위한 협상이 적절한 시기에 재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벨기에와 영국 대표단은 "소련과 중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의향은 없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9] 그러나 결국, 회담 참가자들은 어떤 선언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5. 인도차이나 문제 논의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 회의체는 '''제네바 합의'''라는 일련의 문서를 만들어냈다. 이 합의에 따라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쪽은 소련 진영의 호찌민이 이끄는 비엣민이, 남쪽은 미국 진영의 바오다이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베트남국이 통치하게 되었다.[35]
프랑스는 1949년 베트남국을 수립하여 베트남인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1950년 한국 전쟁 발발로 아시아에서의 냉전 대립이 격화되자, 베트민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대량의 군사 원조를 받아 프랑스 주둔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져 전쟁 지속은 프랑스 정부에 부담이 되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결정적인 패배를 겪으면서 프랑스는 철수하게 되었고, 제네바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954년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미국, 영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왕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민), 소련, 중화인민공화국이 참가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도 참가하여 한반도 문제도 논의되었지만, 한국 전쟁 휴전 협정으로 이미 정전이 실현된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인도차이나 평화 교섭은 난항을 겪었지만,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고, 피에르 멩데스 프랑스가 프랑스 총리에 취임하면서 1개월 이내의 평화 실현을 공약하자 타협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베트민 측 대표단은 국토 대부분을 제압하고 있다는 점을 배경으로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회담 최종일에 소련과 중국의 설득으로 타협하여 7월 21일 평화 협정이 성립되었다.
서방 연합국은 인도차이나와 관련하여 회담의 목표에 대한 통일된 입장이 없었다. 영국 대표 앤서니 이든은 분쟁의 협상 타결을 선호했다. 프랑스 대표단을 이끈 조르주 비도는 국가의 군사적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입지를 어느 정도 유지하려고 했다.[4] 미국은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또 다른 "얄타"로 비난받거나 인도차이나를 공산주의자들에게 "잃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를 원했다.
회담 당시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반공주의자였으며, 중국 대표단과의 접촉을 금지했고, 중국의 수석 협상가인 저우언라이와 악수하는 것을 거부했다.[4] 덜레스는 영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단결된 행동과 미국의 입장을 지원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하여 영국의 대표 앤서니 이든과 다퉜다. 그는 5월 3일에 제네바를 떠났고 그의 부관 월터 베델 스미스가 그를 대신했다.[4]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휴전을 비동맹 인도가 의장을 맡는 감독 위원회가 감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저우언라이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상황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별도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외국 기지가 없으면 중립 국가로 취급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라니엘 프랑스 정부가 무너지고 피에르 멩데스 프랑스가 총리가 된 후, 새 프랑스 정부는 분할을 추구하거나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베트남 국가에 대한 이전의 보증을 포기하고, 베트민 대표단과 비밀리에 협상했다. 멩데스 프랑스는 베른에서 저우언라이와 비밀리에 만났다. 저우는 즉각적인 휴전이 필요하고, 세 국가는 별도로 처리해야 하며, 베트남에 존재하는 두 정부를 인정해야 한다는 중국의 입장을 요약했다.[4]
5. 1. 베트남 분단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인도차이나 문제와 관련하여, 이 회의체는 '''제네바 합의'''라는 일련의 문서를 만들어냈다. 이 합의에 따라 베트남은 소련 진영의 호찌민을 주축으로 하는 비엣민이 통치하는 북부 지역과, 미국 진영의 전 황제 바오다이를 수장으로 하는 베트남국이 통치하는 남부 지역으로 분단되었다.[35] 회의체의 영국인 의장이 선언한 "회의 최종 선언"은 1956년 7월 이전에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이나 미국의 대표들은 이 문서에 동의하지 않았다.[7]베트남은 1956년까지 국제적인 감시와 후원 아래 민주적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17도선을 기준으로 분할하기로 결정되었다.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은 이에 동의했다. 호치민은 남부보다 인구가 더 많은 북부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따라서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아시아 전역에 도미노 효과로 공산주의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7월 20일 오후, 분할선을 17도선에 두고 재통일 선거를 휴전 2년 후인 1956년 7월에 실시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4] "베트남에서의 적대 행위 중단에 관한 협정"은 프랑스 및 베트민 군사 사령관에 의해서만 서명되었다. 국제 통제 위원회 (ICC)가 휴전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4] 서명되지 않은 "제네바 회담의 최종 선언"은 재통일 선거를 요구했고,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ICC가 이를 감독할 것으로 예상했다. 베트민은 선거에 대한 ICC의 권한을 수용하지 않았다. 참석한 9명의 대표 중 미국과 베트남 국가만이 선언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베델 스미스는 미국의 입장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선거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국제 연합이 감독하는 자유 선거를 통해 통일을 달성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세 가지 협정(후에 제네바 협정으로 알려짐)은 7월 21일 아침에 서명되었다.[4]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인도차이나 제국(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독립
- 휴전과 휴전 감시단의 파견
- 베트민 군의 남베트남 철수와 프랑스군의 북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철수
- 베트남을 17도선으로 남북으로 분리하고, 철수한 베트민 군과 프랑스군의 세력을 재편성한 후 1956년 7월에 자유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을 도모한다.
이 합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프랑스, 영국이 서명했지만, 미국과 베트남국은 서명하지 않았다.
5. 2. 1956년 총선거 합의와 무산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일시 분단하여 통치하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제네바 합의'''라는 일련의 문서가 만들어졌다. 이 합의로 베트남은 소련 진영의 호찌민이 이끄는 비엣민이 통치하는 북부와 미국 진영의 바오다이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베트남국이 통치하는 남부로 분단되었다. 회의체의 영국인 의장은 "회의 최종 선언"을 통해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하기 위해 1956년 7월 이전에 보통선거를 실시할 것을 규정했다. 그러나 남베트남과 미국 대표들은 이 문서 채택에 동의하지 않았다.[7]베트남은 1956년까지 민주적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17도선을 기준으로 분할하기로 결정되었다. 호찌민은 남부보다 인구가 더 많은 북부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따라서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은 이에 동의했다.[7]
7월 20일 오후, 분할선을 17도선에 두고 재통일 선거를 휴전 2년 후인 1956년 7월에 실시하기로 합의하면서 미결 사항이 해결되었다.[4] "베트남에서의 적대 행위 중단에 관한 협정"은 프랑스 및 베트민 군사 사령관에 의해서만 서명되었다. 서명되지 않은 "제네바 회담의 최종 선언"은 재통일 선거를 요구했고,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국제 통제 위원회 (ICC)가 이를 감독할 것으로 예상했다. 베트민은 선거에 대한 ICC의 권한을 절대 수용하지 않았으며, ICC의 "관할권은 양 당사자의 적대 행위 중단에 관한 협정의 이행에 대한 감독 및 통제로 제한된다"고 말했다. 참석한 9명의 대표 중 미국과 베트남 국가만이 선언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베델 스미스는 미국의 입장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선거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국제 연합이 감독하는 자유 선거를 통해 통일을 달성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반복했다.
결국, 제네바 합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 인도차이나 제국(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독립
- 휴전과 휴전 감시단의 파견
- 베트민 군의 남베트남 철수와 프랑스군의 북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철수
- 베트남을 17도선으로 남북으로 분리하고, 철수한 베트민 군과 프랑스군의 세력을 재편성한 후 1956년 7월에 자유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을 도모한다.
이 합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프랑스, 영국이 서명했지만, 미국과 베트남국은 서명하지 않았다.
5. 3. 제네바 협정의 주요 내용
The Geneva Accords영어라 불리는 일련의 문서에 의해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호찌민을 주축으로 하는 베트민이 통치하는 북쪽 지역과 바오다이를 수장으로 하는 베트남국이 통치하는 남쪽 지역으로 나뉘었다.[35] 1956년 7월 이전에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하기 위한 보통선거를 실시할 것을 규정하였으나, 남베트남이나 미국의 대표들은 이 문서를 채택하지 않았다.1954년 7월 21일 협정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명시했다.[10]
- 대략 북위 17도선을 따라 "임시 군사분계선"을 긋고 "양측의 군대는 철수 후 재집결할 것"[13]
- 경계선 양쪽에 폭 약 4.83km 비무장지대를 형성할 것
- 프랑스 연합군은 전선 남쪽으로, 베트민은 북쪽으로 재집결할 것
- 300일 동안 구역 간 인구의 자유로운 이동
- 양측은 군사동맹에 가입하거나 군사력 증강을 추구하지 않을 것
- 휴전을 감시하기 위해 캐나다, 폴란드, 인도를 의장으로 하는 국제통제위원회 설립[4][11]
- 1956년 7월 국제통제위원회의 감독 하에 비밀 투표에 의한 자유 총선거 실시 (이는 회담의 서명되지 않은 최종 선언에만 기록되었다.)
이 협정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 프랑스,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영국에 의해 서명되었다. 베트남국은 이 협정을 거부했고,[12] 미국은 휴전 협정을 "주목"하고 "그것을 방해하기 위한 무력 위협이나 사용을 삼갈 것"이라고 선언했다.[4]
분할이 영구적이라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서명되지 않은 최종 선언 제6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회의는 베트남과 관련된 협정의 본질적인 목적이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기 위해 군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군사 분계선은 임시적이며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13]
캄보디아와 라오스와 관련하여 각각 캄보디아 왕국과 라오스 왕국은 별도의 협정을 서명했다. 협정의 조건에 따라 라오스는 카오 왕실이 통치하고 캄보디아는 노로돔 시아누크 왕실이 통치하게 되었다. 군주제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협정은 또한 "VWP 관련 라오스군"이 삼 누아와 퐁살의 지방을 운영하도록 허용하여 인도차이나 내에서 북베트남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공산군은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다.[5]
5. 4. 결과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독립과 휴전, 그리고 휴전 감시단 파견이 결정되었다.[10] 베트민 군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고, 프랑스군은 북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철수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리되었으며, 철수한 베트민 군과 프랑스군은 재편성 후 1956년 7월에 자유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을 이루기로 합의했다.[13]이 협정에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프랑스, 영국이 서명했다. 그러나 미국과 베트남국은 서명하지 않았다.[12] 특히 미국은 협정에 포함된 일부 조항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4]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약 200만 명의 베트남인이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피난했다.[27] 남베트남에서는 응오딘지엠이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베트남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응오딘지엠은 북베트남과의 자유 선거 협의를 거부하여, 협정에 명시된 남북 통일 선거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남북 간의 경쟁을 심화시켰고, 북베트남은 게릴라를 파견했으며, 미국은 이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네바 정치회의에 참가한 미국 등의 유엔 참전국들은 과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이뤄진 모든 유엔 결의, 예컨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 원칙 등이 유효하며, 제네바 정치회의의 어떠한 결정도 다른 유엔 결의를 위배해서는 안 된다고 합의했다. 정치회의 개최와 관련해 제일 먼저 겪은 진통은 소련의 참가 자격이었다. 공산 측은 중립국 자격을 주장했지만, 유엔군 측은 정치회의는 ‘참전국 쌍방’의 대표 간 회의이므로 중립국 자격은 있을 수 없다고 응수했다. 소련은 법적으로는 교전국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전쟁 중 공산 측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고 심지어 공군 전투기까지 파견한 실질적인 교전국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유엔군 측이 소련을 ‘특별 초청’하는 형식으로 해결했다.[35]
6. 여파
프랑스군을 패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공산주의 세력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을 결합했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은 남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 잔재나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여겼다. 반면 다른 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을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꼭두각시로 여겼다.
1954년 적대 행위가 중단된 후 양측에서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자유를 향한 항로 작전 동안 북베트남에서 가톨릭 신자, 지식인, 사업가, 토지 소유자, 반공 민주주의자, 중산층 등이 휴전선 남쪽으로 이동했다. 국제 통제 위원회(ICC)는 최소 892,876명의 북베트남인이 공식 난민소를 통해 처리되었다고 보고했으며, 언론인들은 베트민 군인들이 반대자들을 자주 구타하고 때때로 살해하지 않았다면 200만 명이 더 도망쳤을 것이라고 보고했다.[15]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14,000~45,000명의 민간인과 약 100,000명의 베트민 전투원이 북쪽으로 이동했다.[16][17][18]
미국은 남부에서 권력을 주장한 응오딘지엠을 지원하여 프랑스 세력을 대체하였고, 1956년 4월 28일 마지막 프랑스군이 베트남을 떠났다. 응오딘지엠은 국내에서 공산 세력을 탄압하였고 베트민은 모두 철수하지 못하고 난민의 이동이 억눌러졌다. 제네바 회담은 1956년 전국 총선을 위한 명확한 방법론을 제공하지 않았고, 1955년 7월 응오딘지엠은 제네바 회담에 구속력이 없으며 자유 선거 실시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회의 개최를 거부하였다. 이에 호치민 정부는 북베트남군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을 창설하여 무력 충돌을 벌임으로서 베트남 전쟁을 개시하였다.
6. 1. 한반도
1954년 1월 17일, 제네바 회담을 앞두고 서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곧 미국을 팔아넘기는 것과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30][31]한국 전쟁의 종전과 함께 체결된 한국 휴전 협정은 3개월 이내에 정치 회담을 열도록 규정했다. 이 기한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회담을 통해 "한국에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협상으로 해결"해야 했다.[6]
대한민국 대표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유엔 감시 하에 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해야 하며, 중국군이 철수해야 하고, 전쟁 당사자인 유엔군은 경찰력으로 남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는 전 한반도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모든 외국군은 사전에 철수하며, 선거는 북한과 남한에서 동수로 구성된 전 한반도 위원회에서 관리하며, 북한과 남한 간의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증진할 것을 제안했다.[8]
중국 대표단은 선거를 감시할 '중립' 국가 그룹을 두는 수정안을 제안했고, 북한은 이를 수락했다. 미국은 소련이 북한을 괴뢰 국가로 만들려 한다고 말하며 대한민국 입장을 지지했다. 대부분의 동맹국들은 침묵을 지켰고, 적어도 영국은 대한민국-미국 제안이 불합리하다고 여겼다.[8]
대한민국 대표는 유엔 감시 하에,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따라 전 한반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6월 15일, 한국 문제에 대한 회담 마지막 날, 소련과 중국은 통일되고 민주적이며 독립적인 한국을 지지하는 선언을 제출하며, 이를 위한 협상이 적절한 시기에 재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벨기에와 영국 대표단은 "소련과 중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의향은 없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9] 그러나 결국, 회담 참가자들은 어떤 선언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6. 2. 베트남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 문제는 이른바 '''제네바 합의'''라는 일련의 문서를 통해 다루어졌다. 이 합의에 따라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쪽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호찌민 중심의 비엣민이, 남쪽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바오다이 전 황제를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국이 통치하게 되었다. 회의의 영국인 의장은 1956년 7월까지 통일 베트남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규정한 "회의 최종 선언"을 발표했으나, 남베트남과 미국 대표는 이 문서 채택을 거부했다.[35]프랑스군을 패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공산주의 세력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결합했고, 남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 잔재나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여겼다. 반면 다른 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을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꼭두각시로 여겼다. 적대 행위 중단 후 양측에서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자유를 향한 항로 작전 동안 북베트남에서 가톨릭 신자, 지식인, 사업가, 토지 소유자, 반공 민주주의자, 중산층 등이 휴전선 남쪽으로 이동했다. 국제 통제 위원회(ICC)는 최소 892,876명의 북베트남인이 공식 난민소를 통해 처리되었다고 보고했으며, 언론인들은 베트민 군인들이 없었다면 200만 명이 더 도망쳤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14,000~45,000명의 민간인과 약 100,000명의 베트민 전투원이 북쪽으로 이동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지원하여 남은 프랑스 세력을 대체하였고, 1956년 4월 28일 마지막 프랑스군이 베트남을 떠났다. 응오딘지엠은 국내에서 공산 세력을 탄압하였고 베트민은 모두 철수하지 못하고 난민의 이동이 억눌러졌다. 제네바 회담은 1956년 전국 총선을 위한 명확한 방법론을 제공하지 않았고, 1955년 7월 응오딘지엠은 제네바 회담에 구속력이 없으며 자유 선거 실시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회의 개최를 거부하였다. 이에 호치민 정부는 베트콩을 창설하여 무력 충돌을 벌임으로서 베트남 전쟁을 개시하였다.
아시아에서 탈식민화가 진행되면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독립했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에 남기로 했다. 이는 프랑스군과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베트민은 서방 기술에 의존하는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다. 1950년부터 1954년 사이에 일련의 공세를 통해 프랑스가 점령한 영토를 점차 줄여나가다가,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철수하게 되었고, 제네바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베트남은 국제적인 감시와 후원 아래 1956년까지 민주적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17도선을 기준으로 분할하기로 결정되었다.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은 이에 동의했다(호치민은 남부보다 인구가 더 많은 북부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따라서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냉전의 정신에 입각하여, 미국은 1954년 8월 3일자 국가 정보 추정에서 서술된 것처럼 아시아 전역에 도미노 효과로 공산주의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7]

7월 20일 오후까지, 남은 미결 사항은 당사자들이 분할선을 17도선에 두고 재통일 선거를 휴전 2년 후인 1956년 7월에 실시하기로 동의하면서 해결되었다.[4] "베트남에서의 적대 행위 중단에 관한 협정"은 프랑스 및 베트민 군사 사령관에 의해서만 서명되었다. 서명되지 않은 "제네바 회담의 최종 선언"은 재통일 선거를 요구했고,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국제 통제 위원회(ICC)가 이를 감독할 것으로 예상했다. 베트민은 선거에 대한 ICC의 권한을 절대 수용하지 않았다. 참석한 9명의 대표 중 미국과 베트남 국가만이 선언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베델 스미스는 미국의 입장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반복했다. "우리는 선거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국제 연합이 감독하는 자유 선거를 통해 통일을 달성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세 가지 협정(후에 제네바 협정으로 알려짐)은 7월 21일 아침에 서명되었다.[4]
1954년 7월 21일에 발표되어 (이틀 후 발효된) 협정[10]은 베트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명시했다.
- 대략 북위 17도선을 따라 설정된 "임시 군사 분계선"[13]
- 분계선 양쪽에 약 4.83km 비무장 지대 설치
- 프랑스 연합군 병력은 분계선 남쪽으로, 베트민 병력은 북쪽으로 재배치
- 300일 동안 지역 간 인구의 자유로운 이동 허용
- 양쪽 지역 모두 어떤 군사 동맹에도 가입하거나 군사적 증원을 추구하지 않음
- 휴전을 감시하기 위해 캐나다, 폴란드, 인도를 의장국으로 하는 국제 통제 위원회 설립[4]중화인민공화국, 소련, 영국에 의해 서명되었다. 베트남국은 이 협정을 거부했고,[12] 미국은 휴전 협정을 "주목"하고 "그것을 방해하기 위한 무력 위협이나 사용을 삼갈 것"이라고 선언했다.[4]
분할이 영구적이라는 생각을 특별히 없애기 위해, 서명되지 않은 최종 선언 제6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회의는 베트남과 관련된 협정의 본질적인 목적이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기 위해 군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군사 분계선은 임시적이며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13]
프랑스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산군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을 연결했다. 많은 공산주의 동조자들은 남베트남을 프랑스 식민 잔재, 나중에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보았다. 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은 북베트남을 국제 공산주의의 꼭두각시로 여겼다.
적대 행위 중단 이후,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북베트남인, 특히 가톨릭 신자, 지식인, 사업가, 토지 소유주, 반공 민주주의자, 중산층 구성원들이 자유로의 통행 작전 기간 동안 협정에서 규정한 휴전선 남쪽으로 이동했다. ICC는 최소 892,876명의 북베트남인이 공식 난민 수용소를 통과했다고 보고했으며, 언론인들은 베트민 군인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최대 200만 명의 사람들이 더 탈출했을 수 있다고 전했다. 베트민 군인들은 종종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때로는 살해했다. 동시에, 약 14,000~45,000명의 민간인과 약 100,000명의 베트민 전사가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16][17][18]
미국은 남부에서 권력을 주장한 베트남 국가의 총리인 응오딘지엠을 위한 정치적 지원자로서 프랑스를 대체했다. 제네바 회담은 1956년에 계획된 국민 선거에 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제공하지 않았고, 지엠은 남부가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구속되지 않았으며 공산주의 북부에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선거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공산주의 반대 세력을 억압하려 했다.[19][20]
1955년 5월 20일, 프랑스 연합군은 사이공에서 해안 기지로 철수했고, 1956년 4월 28일, 마지막 프랑스군이 베트남을 떠났다.[4]
북베트남은 모든 베트민 군대를 남베트남에서 철수시키지 못하고, 북베트남 난민의 이동을 방해하고, 북베트남 군대의 무장 사단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리는 군사적 증강을 수행하면서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 미국 군사 고문들은 베트남 공화국군을 계속 지원했다.
1955년 7월, 응오 딘 지엠은 남베트남이 국가 통일을 위한 선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베트남 국가가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말했다.[21] 통일 실패는 호치민 정부에 의해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일명 베트콩)의 창설로 이어졌다. 그들은 북부의 베트남 인민군 (VPA)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는 북베트남군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7. 평가 및 비판
프랑스의 패배에 큰 영향을 준 공산군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을 결합했다. 많은 공산주의 지지자들은 남베트남을 프랑스 식민 잔재, 나중에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간주했다. 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은 북베트남을 국제 공산주의의 꼭두각시로 여겼다.[15]
자유로의 통행 작전 기간 동안, 협정에 따라 많은 북베트남인, 특히 가톨릭 신자, 지식인, 사업가, 토지 소유주, 반공 민주주의자, 중산층 구성원들이 휴전선 남쪽으로 이동했다. 국제 감시 위원회(ICC)는 최소 892,876명의 북베트남인이 공식 난민 수용소를 통과했다고 보고했지만, 언론인들은 베트민 군인들이 없었다면 최대 200만 명이 더 탈출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베트민 군인들은 종종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때로는 살해하기도 했다. CIA는 "성모 마리아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와 같은 슬로건을 사용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려 했다.[15]
응오딘지엠 총리는 남베트남이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구속되지 않으며, 공산주의 북부에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1956년에 계획된 전국 선거를 거부했다.[19][20] 대신 그는 공산주의 반대 세력을 억압하려 했다.
북베트남은 모든 베트민 군대를 남베트남에서 철수시키지 않고, 북베트남 난민의 이동을 방해하고, 북베트남 군대의 무장 사단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리는 등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
1955년 7월,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이 국가 통일을 위한 선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베트남 국가가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이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말했다.[21] 베트남 국가는 협정에 구속된 프랑스 연합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22][23] 통일 실패는 호찌민 정부에 의해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베트콩) 창설로 이어졌다. 이들은 북부의 베트남 인민군(VPA)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베트남군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는 1954년 협정이 "너무 서둘러 초안이 작성되었고 모호하게 표현되어 국제법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쪽의 위반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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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Script : "I have recieved many letters and telegraphic cable messages from all over the world mostly from america. Some of which say 'Do not let them sell out Korea'. I thanked them all for their statement. I wish to tell them in return 'Do not let them sell out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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