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밀턴 블라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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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슈아 밀턴 블라히는 1971년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에서 태어난 크란족 출신으로, 라이베리아 내전 중 잔혹 행위로 악명을 떨친 군벌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족 주술사가 되어 인신공희와 식인 풍습에 참여했으며, 사무엘 도 대통령의 영적 조언자가 되기도 했다. 내전 중에는 '엉덩이를 깐 여단'을 이끌며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고, 1996년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는 목사가 되어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활동을 했다. 그는 라이베리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자신의 전쟁 범죄를 증언했으며, 현재 전쟁 범죄 법정 설립을 촉구하고 있다. 그의 삶은 다큐멘터리와 뮤지컬 등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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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 밀턴 블라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조슈아 밀턴 블라히 |
| 원어 이름 | Joshua Milton Blahyi |
| 별칭 | '벌거벗은 엉덩이 장군 (General Butt Naked)' |
| 출생일 | 1971년 9월 30일 |
| 출생지 | 몬로비아, 라이베리아 |
| 직업 | 복음주의 설교가, 작가 |
| 국적 | 라이베리아 |
| 군 경력 | |
| 별칭 | '벌거벗은 엉덩이 장군 (General Butt Naked)' |
| 소속 | ULIMO |
| 복무 기간 | 1991년 – 1996년 |
| 부대 | 전라 기지 특공대 (Naked Base Commandos) |
| 전투 |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
2. 어린 시절과 부족 주술사
조슈아 밀턴 블라히는 1971년 9월 30일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서 크란족으로 태어났다.[1][2] 크란족은 라이베리아 남부 시노에 카운티 등지에 거주했으며, 당시 크란족 사회에서는 아동 희생이나 흑마술과 같은 믿음이 퍼져 있었다.[1]
블라히는 7살 때 부족 장로들에게 맡겨져 전사로 길러졌으며, 1982년 11세의 나이에 고위 사제로 임명되었다.[1][2] 그는 자신이 11세 때 첫 인신공희 의식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악마의 환영을 보고 힘을 키우기 위해 인신공희와 식인을 계속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블라히는 이 경험이 자신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술회했다.[1]
이후 크란족 지도자들은 블라히를 고위 주술사로 인정했고, 이를 통해 그는 같은 크란족 출신으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사무엘 도 대통령의 영적인 조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2]
2. 1. 출생과 초기 성장
1971년 9월 30일,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란족 출신으로, 이 부족은 라이베리아 남부 시노에 카운티에 주로 거주했다. 당시 크란족 사회에서는 아동 희생과 흑마술에 대한 믿음이 퍼져 있었다.7살 때, 블라히의 아버지는 그의 양육권을 부족 장로들에게 넘겼다. 장로들은 블라히를 전사로 키웠으며, 1982년, 그가 11살이었을 때 고위 사제로 임명했다. 블라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고위 사제의 역할 중 하나가 인신 제사를 감독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크란족 사제들처럼 환상을 통해 희생될 사람을 정했고, 이후 마을 장로들과 함께 희생자를 납치하여 제단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설명했다. 블라히는 자신이 11세 때 첫 인신 제사에 참여했으며, 이때 악마가 나타나 힘을 키우려면 인신 제사와 식인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크란족의 최고 주술사였으며, 같은 부족 출신인 사무엘 도 대통령 역시 자신의 영적 권한 아래 있었다고 주장했다.

1980년, 라이베리아군 상사였던 사무엘 도는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대통령 윌리엄 톨버트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블라히는 도가 1985년 라이베리아 총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신을 고용하여 흑마술 의식을 치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 도의 선거 승리에는 반대파의 투표용지를 대량으로 파기하는 등 보다 직접적인 방법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블라히는 나중에 자신이 도와 같은 크란족 출신이라는 부족적 동질감 때문에 그를 지지했다고 설명했다.
2. 2. 부족 주술사 임명
조슈아 밀턴 블라히는 1971년9월 30일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란족 출신으로, 이 부족은 라이베리아 남부 시노에 군 등지에 거주했다. 당시 크란족 사회에서는 아동 희생이나 흑마술과 같은 믿음이 퍼져 있었다.블라히가 7살 때 그의 아버지는 양육권을 부족 장로들에게 넘겼다. 장로들은 블라히를 전사로 키웠으며, 1982년 그가 11살이 되던 해에 고위 사제로 임명했다. 블라히는 자신이 11세 때 부족 주술사가 되어 첫 번째 인신공양 의식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3일간의 의식 중 악마가 나타나는 환상을 보았으며, 그 악마(훗날 자신의 수호신 '니안비아웨'라고 믿게 됨)가 힘을 키우려면 인신공양과 식인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블라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고위 사제로서 인신공양을 주관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크란족 사제들처럼 환상을 통해 제물로 바칠 사람을 정했다고 한다. 환시를 본 후 희생자의 성(姓)을 마을 장로들에게 알리면, 장로들은 희생자의 집까지 행렬을 이끌고 가 그를 납치하여 제단 위에서 제물로 바쳤다. 블라히가 기도문을 외우면 희생 의식이 진행되었으며, 희생자는 의례적으로 토막 내어졌다.
1980년 라이베리아 군대(AFL) 상사였던 사무엘 도가 쿠데타를 일으켜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을 축출했다. 이후 크란족 지도자들은 블라히를 고위 사제로 인정했고, 그는 사무엘 도 대통령의 영적 조언자가 되었다. 블라히는 자신이 "크란족 최대 신의 고위 주술사였으며, 같은 부족 출신인 사무엘 도 역시 자동적으로 나의 권한 아래로 들어왔다"고 진술했다.
블라히는 도가 1985년 라이베리아 총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신을 고용하여 흑마술 의식을 치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 도의 승리에는 반대파의 투표용지를 대량으로 파기하는 등의 부정한 방법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히는 자신이 도를 지지한 이유가 같은 크란족 출신이라는 부족적 유대감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2. 3. 인신공희와 악마의 환영
조슈아 밀턴 블라히는 1971년 9월 30일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이베리아 남부 시노에 카운티에 거주하는 크란족(Krahn) 출신이다. 당시 크란족 사회에서는 아동 희생과 흑마술에 대한 믿음이 퍼져 있었다. 블라히가 7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에 대한 양육권을 부족 장로들에게 넘겼다. 장로들은 블라히를 전사로 키웠으며, 1982년 그가 11살이 되던 해에 고위 사제로 임명했다.블라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고위 사제의 역할 중 하나가 인신공희를 감독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크란족 사제들처럼 환상을 통해 희생될 사람을 결정했다. 환상을 본 후, 블라히는 희생자의 이름을 마을 장로들에게 알렸고, 장로들은 희생자의 집으로 가서 그를 납치한 뒤 제단 위에서 제물로 바쳤다. 블라히가 기도를 외우면 희생자는 의례적으로 살해되었다.
블라히는 자신이 11세 때 처음으로 인신공희 의식에 참여했으며, 3일간 이어진 의식 도중 악마가 나타나는 환영을 보았다고 말했다. 환영 속의 악마는 그에게 위대한 전사가 될 것이며, 힘을 키우기 위해 인신공희와 식인을 계속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블라히는 나중에 이 악마가 자신의 수호신이라고 믿게 된 '니안비아웨'(Nyanbe-a-weh)라고 생각했다. 니안비아웨는 블라히에게 의식을 위한 제물을 계속 요구했다고 한다.
크란족 출신인 사무엘 도는 1980년 라이베리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블라히는 크란족의 고위 주술사로서 같은 부족 출신인 사무엘 도 대통령의 영적인 조언자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가 1985년 라이베리아 총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신을 고용하여 흑마술 의식을 수행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의 선거 승리는 반대파의 투표 용지를 대량으로 파기하는 등 다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블라히는 자신이 도를 지지한 이유가 같은 크란족 출신이라는 부족적 유대감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2. 4. 사무엘 도의 영적 조언자
크란족 지도자들은 블라히를 고위 주술사로 임명했다. 이를 통해 블라히는 당시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던 사무엘 도의 영적인 조언자가 될 수 있었다. 블라히는 자신이 크란족의 고위 주술사였기 때문에 같은 부족 출신인 사무엘 도가 자신의 권한 아래 있었다고 주장했다. 블라히는 도를 지지한 이유가 같은 크란족이라는 부족적 충성심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1980년, 라이베리아군(AFL) 상사였던 사무엘 도는 쿠데타를 일으켜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블라히는 도가 1985년 라이베리아 총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신을 고용하여 흑마술 의식을 수행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의 선거 승리는 반대파의 투표 용지를 대량으로 파기하는 등 다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3. 전쟁 경험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기간 동안 조슈아 밀턴 블라히는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 통합 해방 운동(ULIMO) 소속 군벌로 활동했다. 그는 주로 소년병으로 구성된 'Naked Base Commandos|네이키드 베이스 코만도eng' 또는 'Butt Naked Brigade|벗 네이키드 브리게이드eng'라 불리는 부대를 이끌었다. 블라히와 그의 부대원들은 전투 시 신발과 마법 부적 외에는 나체 상태로 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총알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블라히는 'General Butt Naked|제너럴 벗 네이키드eng'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부대는 극도의 잔혹 행위로 악명이 높았으며, 인신공양과 인간 식인 풍습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히는 전투 전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그 심장을 먹는 의식을 치렀다고 스스로 증언했다.[1][2] 또한 부대원들에게 마약을 복용시켜 전투력을 높이고 통제했으며, 라이베리아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민병대와 싸우고 마약 카르텔과 거래하기도 했다. 1996년 수도 몬로비아에서 벌어진 격렬한 시가전에도 참여하여 악명을 더했다. 전쟁 중 블라히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3. 1.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참전
1989년, 라이베리아 애국 전선(NPFL)의 지도자 찰스 테일러가 사무엘 도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1990년 도가 살해되고 정권이 붕괴된 후, 1991년에는 크란족과 만딩카족 난민, 그리고 구 정부군(AFL) 출신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 통합 해방 운동(ULIMO)을 결성했다. 블라히는 ULIMO에 합류하여 NPFL 및 다른 경쟁 민병대와 싸웠으며, 이 시기 라이베리아 대부분은 여러 민병대가 장악하고 있었다.내전 동안 블라히는 주로 소년병으로 구성된 수십 명 규모의 전투 부대를 이끄는 군벌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네이키드 베이스 코만도'(Naked Base Commandos|네이키드 베이스 코만도eng)로 알려졌으며, 수도 몬로비아 근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블라히 자신을 포함한 부대원들은 신발과 마법 부적 외에는 나체 상태로 전투에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블라히는 나체가 자신과 병사들을 "총알로부터 면역" 상태로 만들어 준다고 주장했으며, 이 때문에 '벌거벗은 장군'(General Butt Naked|제너럴 벗 네이키드eng) 또는 '엉덩이를 깐 여단'(Butt Naked Brigade|벗 네이키드 브리게이드eng)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부대는 루스벨트 존슨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ULIMO 소속으로 활동했다.
블라히와 그의 부대는 내전 기간 동안 식인, 인신공양을 포함한 수많은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블라히는 훗날 자신이 악마로부터 환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위대한 전사가 되어 힘을 키우기 위해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1살부터 25살까지 매달 인신공양에 참여했다고 말했으며, 특히 어린아이를 제물로 선호했다. "대체로 어린 아이가 제물이 됐다. 그의 신선한 피가 악마를 만족시켜줄 테니까"라고 설명하며, 아기가 가장 강력한 보호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블라히는 자신의 잔혹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아이들이 노는 물 속에 들어가곤 한다.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한 아이를 붙잡고, 그를 품속에 끌고 나와 목을 꺾는다."고 말했으며, "죄 없는 아이를 죽이고 심장을 뽑아낸 후 잘라내 나눠 먹은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싸우러 나갈 때마다 아이를 희생시켰으며, 하루에 네다섯 명을 죽인 날도 있었다고 밝혔다. 아이를 희생 제단에 눕히고 등을 갈라 뛰는 심장을 꺼내 먹었다는 것이다.[2] 때로는 그의 병사들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의 성별을 알아맞히는 내기를 하기도 했다.[1] 또한, 블라히의 부대는 마을을 점령할 때마다 인신공양을 했으며,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축구공처럼 차기도 했다.
블라히는 부대원들에게 마약을 복용시켜 전투력을 높이고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전투 직전에는 술과 마약을 복용하고, 때로는 동네 청소년을 죽여 그 피를 마신 뒤 나체로 전투에 나섰다. 이들은 색색의 가발을 쓰거나 약탈한 물건을 지니기도 했다. 블라히는 자신의 부대가 술에 취해 겁 없이 움직였지만, 동시에 전략적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전쟁 중 블라히에게는 스스로를 투명하게 만드는 마법의 힘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특별한 힘'으로 혼자 마을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도 퍼졌다.
블라히의 부대를 포함한 여러 민병대들은 라이베리아의 수익성 높은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블라히는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과 금, 다이아몬드를 거래하여 무기와 코카인을 확보하기도 했다.
1996년 4월 6일, 찰스 테일러의 NPFL은 몬로비아 지역에서 ULIMO 지도자 루스벨트 존슨을 체포하려 시도했다. 블라히와 존슨을 지지하는 다른 민병대들은 무력으로 이에 맞섰고,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로 인해 몬로비아 인구의 절반이 강제 이주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한 목격자는 블라히가 트럭 위에 서서 "한 손에는 돌격소총을, 다른 손에는 남자의 잘린 성기를 들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결과적으로 내전은 찰스 테일러가 라이베리아를 장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3. 2. '벌거벗은 장군'과 잔혹 행위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기간 동안 블라히는 주로 소년병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이끌었다. 그의 부대는 '네이키드 베이스 코만도'(Naked Base Commandos영어) 또는 '엉덩이를 깐 여단'(Butt Naked Brigade영어)으로 불렸으며, 몬로비아 근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블라히 자신을 포함한 부대원들은 전투 시 신발과 마법 부적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 상태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자신들을 "총알로부터 면역" 상태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행태로 인해 블라히는 '벌거벗은 장군'(General Butt Naked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투에 임하기 전, 그의 부대원들은 술과 정신 활성 약물을 복용했으며, 때로는 마을 청소년을 죽여 그 피를 마시기도 했다. 이들은 알몸이나 여성 옷차림에 화려한 가발을 쓰고, 약탈한 물품을 들고 전투에 나섰다. 블라히는 자신의 군대가 술에 취해 겁 없이 움직였지만 전략적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다.블라히와 그의 부대는 내전 기간 동안 수많은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축구공처럼 사용했으며, 살해한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라고 알려졌다. 특히 인신공양과 인간 식인 풍습을 자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블라히는 전투에 나가기 전, 주로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쳤다고 훗날 고백했다. 그는 "신선한 피가 악마를 만족시킨다"고 믿었으며, 11살부터 25살까지 매달 인신공양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악마와 주기적으로 대화하며 환시를 받았고, 악마가 "위대한 전사가 되기 위해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을 행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애틀 포스트인텔리젠서와의 인터뷰에서 "때때로 나는 아이들이 노는 물 속에 들어가곤 한다.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한 아이를 붙잡고, 그를 품속에 끌고 나와 목을 꺾는다"고 말했으며, 2008년에는 "죄 없는 아이를 죽이고 심장을 뽑아낸 후 잘라내 나눠 먹은 적도 있다"고 시인했다. 마을을 점령할 때마다 살아있는 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했으며, 아이의 심장을 꺼내 먹었다고 회상했다. 아기가 가장 강력한 보호를 제공한다고 믿어 아기를 제물로 선호했으며, 심지어 부대원들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의 성별을 놓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 블라히에 따르면, 그는 하루에 네다섯 명의 아이를 희생시킨 적도 있으며, 아이의 등을 갈라 뛰고 있는 심장을 직접 꺼냈다고 한다.[2] 자신에게 투명해지는 마법의 힘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특별한 힘'으로 혼자 마을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블라히는 루스벨트 존슨의 자금 지원을 받아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 통합 해방 운동(ULIMO) 소속으로 활동하며, 찰스 테일러의 라이베리아 애국 전선(NPFL) 및 프린스 존슨의 민병대와 싸웠다. 그는 라이베리아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 같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민병대와 경쟁했으며, 멕시코 마약 카르텔과 금, 다이아몬드를 거래하여 무기와 코카인을 확보했다.
1996년 4월 6일, NPFL이 몬로비아에서 ULIMO 지도자 루스벨트 존슨을 체포하려 하자, 블라히와 존슨 측 민병대는 무력으로 저항했다. 이 충돌은 격렬한 시가전으로 번졌고, 몬로비아 인구의 절반이 강제 이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전투 중 블라히가 트럭 위에 서서 "한 손에는 돌격 소총을, 다른 손에는 남자의 잘린 성기를 들고 있었다"는 목격담이 『뉴요커』에 의해 보도되기도 했다.
3. 3. 인신공희와 식인
블라히는 전투에 참여하기 전 정기적으로 인신공희를 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체로 어린 아이가 제물이 됐다. 그의 신선한 피가 악마를 만족시켜줄 테니까"라고 말했으며, 나중에는 분쟁 중 악마로부터 환상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환상에서 악마는 그에게 "위대한 전사가 되어 힘을 키우기 위해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을 행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아기가 가장 큰 보호를 제공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기를 희생하는 것을 선호했다.[1]블라히는 자신의 잔혹 행위를 상세히 묘사하기도 했다. 시애틀 포스트인텔리젠서와의 인터뷰에서는 "때때로 나는 아이들이 노는 물 속에 들어가곤 한다.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한 아이를 붙잡고, 그를 품속에 끌고 나와 목을 꺾는다"고 말했으며, 2008년 1월에는 "죄 없는 아이를 죽이고 심장을 뽑아낸 후 잘라내 나눠 먹은 적도 있다"고 인신공희 사실을 고백했다. 남아프리카의 더 스타 기자에게는 11살부터 25살까지 매달 인신공희에 참가했으며, "사탄을 주기적으로 만나며 대화를 나눈다"고 주장했다.
그의 부대인 네이키드 베이스 코만도(Naked Base Commandos)는 전투 전에 술과 정신 활성 약물을 복용하고, 청소년을 죽여 그 피를 마시는 의식을 치렀다. 이후 병사들은 신발만 신은 채 나체로 전투에 나섰는데, 블라히는 이것이 자신과 병사들을 "총알로부터 막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그는 '벌거벗은 장군'(General Butt Naked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블라히는 마을을 점령할 때마다 "인신공양을 해야 했다"며, "병사들이 산 아이를 데려오면 도살하고 심장을 꺼내 먹었다"고 회상했다. 때때로 그의 군인들은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의 성별을 놓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1] 블라히는 하루에 네다섯 명의 아이를 희생시킨 적도 있으며, 싸우러 나갈 때마다 한 명씩 희생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들을 희생 제단에 눕힌 뒤 등을 갈라 뛰고 있는 심장을 꺼냈다고 묘사했다.[2]
블라히의 군대는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고, 머리를 잘라 축구공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살해한 사람의 수는 수백 명이 넘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 중 그에게는 스스로를 투명하게 만드는 마법의 힘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96년 4월 6일, 찰스 테일러의 라이베리아 국민 애국 전선(NPFL)이 몬로비아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연합 라이베리아 해방운동(ULIMO)의 반군 지도자 루스벨트 존슨을 체포하려 하자, 블라히와 존슨 측 민병대들은 무력으로 저항했다. 이어진 격렬한 총격전으로 몬로비아 인구의 절반이 강제 이주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뉴요커』지의 데이먼 테이버에 따르면, 당시 한 목격자는 블라히가 트럭 위에 서서 "한 손에는 돌격 소총을, 다른 손에는 남자의 잘린 성기를 들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블라히의 부대는 라이베리아의 수익성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민병대들과 자주 싸웠다. 그는 무기와 코카인을 얻기 위해 멕시코 마약 카르텔과 금, 다이아몬드를 거래하기도 했다.
3. 4. 마약 사용과 다이아몬드 거래
블라히는 자신의 소년병들이 전투에서 더욱 경계 태세를 갖추고 명령에 쉽게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해 정신 활성 약물을 사용하게 했다. 그의 부대원들은 전투에 나서기 직전 술과 마약을 복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블라히의 부대를 포함한 여러 민병대들은 라이베리아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다. 블라히는 이렇게 얻은 금과 다이아몬드를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과 거래하여 무기와 코카인을 사들였다. 이는 내전 수행과 부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3. 5. 몬로비아 전투
1989년, 라이베리아 국민 애국 전선(NPFL)의 지도자 찰스 테일러가 당시 대통령 사무엘 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1990년 도가 살해되고 정권이 무너지자, 1991년 크란족과 만딩카족 난민 및 구 라이베리아 국군(AFL) 출신 군인들이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 통합 해방 운동(ULIMO)을 결성했다. 블라히는 ULIMO에 합류하여 NPFL 및 경쟁 민병대와 싸웠다.내전 기간 동안 블라히는 주로 소년병으로 구성된 수십 명 규모의 부대를 이끄는 군벌로 활동했다. 그의 부대는 '네이키드 베이스 코만도'(Naked Base Commandoseng) 또는 '엉덩이를 깐 여단'(Butt Naked Brigadeeng)으로 불렸으며, 주로 몬로비아 근교에서 활동했다. 블라히 자신을 포함한 부대원들은 신발과 마법 부적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로 전투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총알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블라히는 '벌거벗은 장군'(General Butt Nakedeng)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부대는 전투 전 술과 마약을 복용했으며, 인신공양과 인육을 먹는 행위를 포함한 수많은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블라히는 훗날 내전 중 악마로부터 환상을 받았으며, 악마가 위대한 전사가 되기 위해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을 행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때때로 나는 아이들이 노는 물 속에 들어가곤 한다.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한 아이를 붙잡고, 그를 품속에 끌고 나와 목을 꺾는다. ... 아이들을 그냥 죽일 때도 있었다"고 잔혹 행위를 회상했다. 또한 "죄 없는 아이를 죽이고 심장을 뽑아낸 후 잘라내 나눠 먹은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블라히에 따르면, 그의 부대가 마을을 점령할 때마다 인신공양을 해야 했으며, 산 채로 아이를 데려와 도살하고 심장을 꺼내 먹었다고 한다. 특히 아기의 심장이 가장 큰 보호를 제공한다고 믿어 아기를 제물로 선호했으며, 싸우러 나갈 때마다 아이를 희생시켰다고 말했다.[1][2] 때로는 그의 병사들이 임산부의 배 속에 있는 아기의 성별을 놓고 내기를 하며 배를 가르기도 했다.[1] 블라히의 부대는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잘린 머리를 축구공처럼 차기도 했다. 또한, 라이베리아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민병대와 싸웠으며, 멕시코 마약 카르텔과 금, 다이아몬드를 거래하여 무기와 코카인을 확보하기도 했다.
1996년 4월 6일,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NPFL은 몬로비아 지역에서 ULIMO의 반군 지도자 루즈벨트 존슨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블라히와 존슨을 지지하는 다른 민병대들은 무력으로 이에 맞섰다. 이 대립은 격렬한 총격전으로 번졌고, 이로 인해 몬로비아 인구의 절반 가량이 강제 이주되는 결과를 낳았다. 총격전 중 한 목격자는 블라히가 트럭 위에 서서 "한 손에는 돌격 소총을, 다른 한 손에는 남자의 잘린 성기를 들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4. 종교적 개종과 그 이후
1996년 라이베리아 내전이 끝나갈 무렵, 조슈아 밀턴 블라히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과거의 학살 행위를 중단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을 경험하고 죄를 뉘우치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복음주의 설교자가 되었다.
1997년 가나 부두부람(Buduburam)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목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내전 당시 자신을 따랐던 전직 전투원들과 함께 라이베리아 난민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펼쳤으며, 설교 중 과거 행적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블라히는 조시 목사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피해자들의 보복을 우려하여 한동안 가나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2006년부터는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의 빈민가를 방문하여 전직 소년병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에는 이들의 사회 재통합을 돕는 비정부 기구 '폭력 반대 여정'(Journeys Against Violenceeng)을 설립했다.
2008년 라이베리아로 돌아온 블라히는 라이베리아 진실 및 화해 위원회에 출석하여 증언한 최초의 군벌이 되었다. 그는 자신과 부대원들이 최소 2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자백했으며, 위원회로부터 기소 사면을 권고받았다. 이 증언은 라이베리아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블라히는 자신을 포함한 전쟁 범죄 혐의자들을 기소하기 위한 전쟁 범죄 법정 설립을 공개적으로 촉구했으며, 특히 전 군벌이자 현 라이베리아 상원 의원인 프린스 존슨 등이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 행위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깊은 후회를 느낀다고 밝혔다.
설교자로서 활동하며 뉴욕시의 목사 보얀 얀시치(Bojan Jancic) 등 국제적인 후원자들을 얻기도 했다. 얀시치는 2013년 출간된 블라히의 자서전 ''아프리카 군벌의 구원''(The Redemption of an African Warlordeng) 서문에서 그의 개종을 사도 바울의 회심에 비견하며 높이 평가했다.
4. 1. 예수 그리스도의 현신과 개종
1996년 라이베리아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블라히의 학살극도 끝이 났다. 그는 자신의 손에 아이의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했다. 이 환영에서 예수는 블라히에게 "노예가 되는 것을 멈추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그는 비숍 쿤 쿤(Bishop Kun Kun) 목사가 있는 교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교회 신도들은 블라히를 구원하기 위해 54일간 단식 기도를 했고, 이후 영적인 힘을 얻어 블라히에게 접근해 설교했다고 전해진다. 설교 후 블라히는 빛처럼 나타난 예수가 자신을 아들이라 칭하며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개종 후 블라히는 복음주의 설교자가 되었다. 1997년에는 가나 부두부람(Buduburam)으로 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는 가나에서 내전 당시 자신을 따랐던 전직 전투원들과 함께 라이베리아 난민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펼쳤다. 목사가 된 블라히는 설교 중 자신이 살해했던 사람들의 친척들과 마주칠 때마다 과거 자신을 지배했던 악마의 힘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는 조시 목사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피해자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가나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2006년부터 블라히는 몬로비아의 빈민가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그곳에 사는 전직 소년병들을 만나고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에는 전직 전투원과 거리의 아이들의 사회 재통합을 돕는 비정부 기구 '폭력 반대 여정'(Journeys Against Violenceeng)을 설립했다.
2008년, 블라히는 라이베리아로 돌아와 라이베리아 진실 및 화해 위원회에서 증언한 최초의 라이베리아 군벌이 되었다. 이 위원회는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중 벌어진 잔학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라이베리아 입법부가 설립한 기구였다. 라이베리아 전역에 생중계된 증언에서 블라히는 자신과 그의 부대 '네이키드 베이스 코만도'가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최소 2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이 숫자를 인정했으며, 그에게 기소 사면을 권고했다.
블라히의 증언은 라이베리아 내에서 엇갈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대중들은 그의 전쟁 중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비판했다. 이 증언으로 그는 라이베리아 언론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데일리 메일''과 ''바이스 미디어'' 등 여러 국제 언론사 기자들이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라이베리아를 찾았다. 블라히는 자신을 포함한 전쟁 범죄 혐의자들을 기소하기 위해 라이베리아에 전쟁 범죄 법정을 설립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그는 특히 전 군벌이자 현 라이베리아 상원 의원인 프린스 존슨과 같은 인물들이 "내전 시기 저지른 잔학 행위와 전쟁 범죄에 대한 역할과 부대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이베리아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자녀를 잃게 만든 부모들"과 "부모를 빼앗긴 아이들" 때문에 거의 항상 후회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복음주의 설교자로서 활동하며 블라히는 국제적인 후원자들을 얻었다. 뉴욕시 웨스트 빌리지의 기독교 목사인 보얀 얀시치(Bojan Jancic)는 2013년 데스티니 이미지 출판사(Destiny Image Publishers)에서 출간된 블라히의 자서전 ''아프리카 군벌의 구원''(The Redemption of an African Warlordeng)의 서문을 썼다. 얀시치는 서문에서 "다마스쿠스 길에서 다소의 사울이 개종한 이후, 나는 이보다 더 급진적으로 설득력 있는 개종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4. 2. 진실화해위원회 증언
2008년, 블라히는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자행된 잔학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라이베리아 입법부가 설립한 라이베리아 진실 및 화해 위원회(TRC)에서 증언한 최초의 라이베리아 군벌이 되었다. 라이베리아 전역에 생중계된 그의 증언에서[3] 블라히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자신과 부대가 최소 20,000명 이상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3] 위원회는 이 증언 내용을 인정했으며[3], 블라히에게 기소에 대한 사면을 권고했다.이 증언은 라이베리아 내에서 엇갈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대중들은 블라히의 전쟁 중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비판했다. 이 증언으로 블라히는 라이베리아 언론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데일리 메일''과 ''바이스 미디어'' 등 여러 국제 언론사 기자들이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라이베리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위원회 증언 이후, 블라히는 자신을 포함한 전쟁 범죄 혐의자들을 기소하기 위해 라이베리아에 전쟁 범죄 법정을 설립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그는 특히 전 군벌이자 현 라이베리아 상원 의원인 프린스 존슨과 같은 인물들이 내전 중 저지른 잔학 행위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히는 한 토크쇼에 출연하여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자녀를 잃은 부모들과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거의 항상 후회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위원회가 끝난 뒤 전쟁범죄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을 찾아 용서를 구하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3년 기준으로 77명의 피해자들을 만나 그 중 19명에게 용서를 받았다.[3]
4. 3. 용서를 구하는 활동
1996년, 라이베리아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블라히는 자신의 손에 아이의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자신에게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그는 비숍 쿤 쿤(Bishop Kun Kun) 목사가 있는 교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교회 사람들은 블라히를 구원하기 위해 54일간 단식 기도를 했고, 이후 영적인 힘을 받아 그의 집회장에 가서 설교했다고 전해진다. 설교 후 블라히는 빛처럼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아들이라 부르며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1997년 블라히는 가나의 부두부람(Buduburam) 난민 캠프로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후 목사가 된 그는 복음주의 설교자로 활동하며, 과거 자신을 따랐던 전직 전투원들과 함께 가나의 라이베리아 난민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설교 중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친척과 마주칠 때마다 과거 자신을 지배했던 악마의 힘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2006년부터는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의 빈민가를 방문하여 그곳에 사는 전직 소년병들을 만나고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2007년에는 전직 전투원과 거리의 아이들의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한 비정부 기구(NGO)인 '폭력 반대 여정'(Journeys Against Violenceeng)을 설립했다.[3]
2008년, 블라히는 라이베리아 군벌 중 처음으로 라이베리아 진실화해위원회에 출석하여 증언했다. 이 위원회는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자행된 잔학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였다. 라이베리아 전역에 생중계된 증언에서 그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자신과 부대원들이 최소 2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이 숫자를 인정했으며, 그에게 기소 사면을 권고받았다.
그의 증언은 라이베리아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중들은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비판하는 등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블라히는 라이베리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데일리 메일''과 ''바이스 미디어'' 등 여러 국제 언론사 기자들이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라이베리아를 찾았다.
진실화해위원회 증언 이후, 블라히는 스스로를 '조슈아'라 칭하며 목사 활동을 이어갔다. 슈피겔에 따르면 2013년 10월 기준으로 그는 쿤 쿤 목사가 있는 몬로비아의 한 교회에서 성서를 가르치고, 과거 자신의 소년병이었던 이들을 위한 전도단을 운영했다. 또한 전쟁 범죄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까지 77명의 피해자를 만났고, 그중 19명에게서 용서를 받았다.[3]
블라히는 라이베리아에 전쟁 범죄 법정을 설치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쟁 범죄 혐의자들을 기소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특히 전 군벌이자 현 라이베리아 상원 의원인 프린스 존슨 같은 인물들이 내전 중 저지른 잔학 행위와 부대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이베리아의 한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자녀를 잃게 한 부모들과 부모를 잃게 한 아이들 때문에 거의 항상 후회하며 살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의 목회 활동은 라이베리아 외부에서도 주목받아 후원자들이 생겨났다. 뉴욕시 웨스트 빌리지의 기독교 목사인 보얀 얀시치(Bojan Jancic)는 2013년 데스티니 이미지 출판사(Destiny Image Publishers)에서 출간된 블라히의 자서전 ''아프리카 군벌의 구원''(The Redemption of an African Warlordeng)의 서문을 썼다. 얀시치는 서문에서 "다마스쿠스 길에서 다소의 사울이 개종한 이후, 이보다 더 급진적이고 설득력 있는 개종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블라히는 2016년까지 총 5권의 책을 출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4. 4. 전쟁 범죄 법정 설립 촉구
블라히는 라이베리아가 자신을 포함한 전쟁 범죄 혐의자들을 기소하기 위해 전쟁 범죄 법정을 설립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그는 현 라이베리아 상원 의원인 프린스 존슨과 같은 전직 군벌들이 "라이베리아 내전에서 저질러진 잔학 행위와 전쟁 범죄에 대한 각자의 역할과 그들의 부대 행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라이베리아 토크쇼에 출연하여 블라히는 "자신이 무자녀로 만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모를 빼앗은" 아이들 때문에 거의 항상 후회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5. 대중 문화에서의 묘사
블라히의 악명과 공개 증언은 대중 문화에서 여러 차례 다루어졌다.
2010년, 바이스 뉴스 기자들은 기행 시리즈 ''The Vice Guide to Travel''의 일부로 ''The Vice Guide to Liberia''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블라히가 몬로비아에서 수많은 전직 소년병 앞에서 설교하는 모습이 담겼다.
2011년, 영화 제작자 에릭 스트라우스(Eric Strauss)와 다니엘레 아나스타시온(Daniele Anastasion)은 블라히에 관한 다큐멘터리 ''The Redemption of General Butt Naked''를 제작하여 2011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주로 블라히의 ULIMO 반군 지도자 시절 경력과 기독교로 개종한 후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그의 지휘 하에 있던 전직 군인들을 재활시키고, 그의 잔혹 행위 피해자들과 화해하려는 노력을 기록했다. 2008년 전쟁 범죄 증언 영상도 중간중간 삽입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커크 허니컷(Kirk Honeycutt)은 영화가 "어떤 개인적인 판단도 배제하고 관객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했다"고 칭찬하며, 제작자들이 "병 속의 번개를 잡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데이비드 다시(David D'Arcy) 역시 긍정적인 리뷰를 통해 제작자들이 라이베리아 내전의 영향을 잘 묘사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다큐멘터리가 "충격적으로 영화적"이며 "탁월한 시각적 장식"을 갖추었고, 존 워터스 감독의 영화 ''I love 페커'' 이후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고 평했다.
같은 해인 2011년, 트레이 파커, 로버트 로페즈, 맷 스톤이 각본을 쓴 풍자 뮤지컬 코미디 ''몰몬경 (뮤지컬)''에는 "제너럴 버트 퍼킹 네이키드(General Butt Fucking Naked)"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 캐릭터는 악명 높은 우간다의 신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 LRA) 사령관 조셉 코니를 모델로 삼아 우간다 군벌로 묘사된다. 그러나 파커는 ''Comingsoon.net''과의 인터뷰에서 "라이베리아의 군벌들은 매우 다채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제너럴 버트 네이키드라는 사람에 대해 읽었고, 기본적으로 그의 농담(이름)을 가져왔다"고 언급하며 블라히의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시사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Penitent Warlord: Atoning for 20,000 War Crimes
https://abcnews.go.c[...]
2013-11-02
[2]
뉴스
From monster to minister: Is the past about to catch up with Liberia’s war criminals?
https://www.telegrap[...]
The Telegraph
2024-06-29
[3]
간행물
http://weekly.kh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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