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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프레더릭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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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1838년 뉴욕주에서 태어난 미국의 신학자, 지질학자이다. 오벌린 칼리지와 오벌린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브라운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드루리 칼리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목사로 활동하며 지질학 연구를 병행했고,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관심을 가져 과학과 신앙의 조화를 모색했다. 초기에는 기독교 다윈주의를 지지했으나, 1881년 이후 기독교 근본주의로 노선을 변경하여 유신론적 진화론을 옹호했다. 주요 저서로는 《북미의 빙하시대》, 《인간과 빙하기》 등이 있으며, 종교와 과학의 관계, 특히 빙하기 이론에 대한 연구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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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프레더릭 라이트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조지 프레더릭 라이트
원어 이름George Frederick Wright
출생1838년 1월 22일, 미국, 뉴욕주, 화이트홀
사망1921년 4월 20일 (향년 83세),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
묻힌 곳오벌린의 오벌린 대학 묘지
학력 및 경력
모교오벌린 대학
직업신학자
회중교회 목사
지질학자
오벌린 신학 대학원 교수
분야신학
지질학
종교개신교 회중교회
저서 및 업적
주목할 만한 업적빙하 연구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 시도
저서"빙하기와 인간"(The Ice Age in North America and its Relation to the Antiquity of Man)
"기독교와 진화론"(The Relation of Evolution to Christian Thought)
"과학적 측면에서 본 성경의 권위"(The Divine Authority of the Bible)
"아시아와 유럽의 홍수 또는 빙하기 퇴각의 상관관계에 대한 새로운 지질학적 증거를 보여주는 빙하기의 기원과 성격"(Origin and nature of the glacial period : as shown in the glacial and modified drift of North America and Europe, with new geological evidence bearing upon the question of the antiquity of man)
가족 관계
배우자루이자 카멜리아 라이트
기타 정보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 서명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 서명

2. 생애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1838년 뉴욕주 화이트홀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집을 떠나 오벌린 칼리지에 진학하여 1859년에 졸업하였고, 1862년에는 오벌린 신학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887년에는 브라운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D.D.) 학위를, 드루리 칼리지에서 법학 박사(LL.D.) 학위를 받았다.

군 복무 이후 3년 만에 신학부 과정을 마친 라이트는 10년 동안 버몬트 주의 작은 회중 교회에서 목회했다. 목사로 지내는 동안 여가 시간에는 주변 지역을 탐사하며 지역 지질학과 빙하 퇴적물을 연구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찰스 라이엘의 《인간의 오랜 기원에 대한 지질학적 증거》를 읽으며 진화론을 공부하고, 과학과 신앙 사이의 조화를 모색했다. 1861년, 남북 전쟁 중에는 5개월 동안 북군에서 복무했다.

1872년,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의 자유 교회로 옮겨 목회를 계속하면서, 당시 미국 신학자들 사이에서 관심이 높아지던 다윈의 이론에 대한 논쟁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선사 고고학에 대한 최근 연구들〉을 《비블리오테카 사크라》에 기고했다. 보스턴의 과학 서클에서 식물학자 에이서 그레이를 만나 기독교 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둘의 협력으로 다윈주의 논쟁에서 중요한 5부작 논문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한 최근 저작들〉을 썼다. 라이트는 에이서 그레이와의 우정을 통해 자신의 복음주의 칼뱅주의 신앙과 새로운 생물학 및 지질학을 조화시키는 견해를 출판하도록 격려받았으며, 그레이의 에세이 모음집인 ''다윈주의'' 편집을 돕기도 했다.[1]

1881년, 오하이오주 오벌린 신학교의 신약 언어 및 문헌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892년에는 새로 창설된 "과학과 계시의 조화" 교수가 되었고, 1907년에는 명예 교수가 되어 카네기 연금으로 은퇴했다. 로웰 연구소에서 자주 강연을 하기도 했다. 1890년 미국 지질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라이트는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과 연대하면서 주류 과학계와 점점 멀어졌다. 1881년과 1882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지질 조사국의 조수 지질학자로, 1884년부터 1892년까지 미국 지질 조사소(USGS)에서 활동했다. 지질학적 관심으로 알래스카, 그린란드, 중국, 몽골, 만주, 시베리아, 투르키스탄, 코카서스 산맥, 레바논 산맥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며 저서를 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1900년에는 아들 프레드 라이트와 함께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모세스 B. 코츠워스와 메이블 벤트 부인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지질학, 특히 빙하기와 빙하에 대해 자주 서신을 주고받으며 코츠워스가 대륙의 영구적인 이동 이론을 공식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

라이트는 어린 시절 기독교 다윈주의자의 지도자로 부상했지만, 1890년대 찰스 오거스터스 브리그스의 고등 비평으로 인한 신앙의 위기를 겪은 후 성경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에 더 가까워졌다.[1] 후기 저술에서 그는 지질학적 시간은 받아들였지만, 인간의 기원은 신성한 개입이 필요하며, 새로운 종을 형성하기까지 확장되는 생물학적 변이는 설계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윈주의가 정당한 추론의 어떤 노력으로도 설계를 배제하도록 만들 수 없다."라고 말했다.[1] 즉, 그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했다.[1] 사망하기 직전인 1907년부터 오하이오 역사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3. 주요 입장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애서 그레이(Asa Gray)가 쓴 문장 중 "일반적으로 사건과 작용은 단순히 처음에 전달된 힘 덕분에 지속되지만, 가끔씩, 오직 가끔씩만, 하나님은 그 일에 직접 손을 대신다"라는 구절에 깊이 공감했다.

인간의 오랜 기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종들의 자연적인 기원과 하나님, 기적, 인간의 특별 창조 모두를 옹호했다. 보다 넓은 분류학적 집단에 대해서는 특별 창조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보다 작은 단계의 분류학 집단에 대해서는 자연선택에 의해 종 분화가 일어났다고 하였다.

성경이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할 필요가 있는' 일들을 예외로 한다면 오류가 없지는 않다고 하였다. 성경의 저자들은 과학, 역사 등에 대해 서술할 때는 그 시대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했다. 창세기가 쓰여진 경위는 다신론에 대한 반대때문이었지, 실제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구약의 족보에 대해서는 지구의 역사가 짧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입증하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았다.

1881년부터 기독교 근본주의로 노선을 변경한다. 1882년 창세기의 날들을 하나하나의 긴 시대로 보는 '날-시대 이론'을 부정했다. 1890년대에는 창세기가 다신론에 대한 반대 때문에 쓰여졌다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었다.

우주적인 진화를 옹호한 허버트 스펜서, 존 피스크(John Fiske, 1842-1901) 등을 비판했다. 자연선택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빙하기는 한번뿐이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에는 동일과정설을 공개 비판했다.

3. 1. 초기: 기독교 다윈주의 옹호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애서 그레이(Asa Gray)의 글에 공감하며, 하나님이 가끔씩 세상 일에 직접 개입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종의 자연적 기원과 함께 하나님, 기적, 인간의 특별 창조를 모두 옹호했다. 보다 넓은 분류학적 집단에 대해서는 특별 창조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그보다 작은 단계에서는 자연 선택에 의한 종 분화를 인정했다.

성경에 대해서는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할 필요가 있는' 내용을 제외하면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성경 저자들이 과학, 역사 등에 대해 서술할 때는 그 시대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창세기는 다신교에 대한 반박을 위해 쓰여진 것이지, 실제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구약의 족보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어린 시절 라이트는 기독교 다윈주의자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앤도버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라이트는 기독교 다윈주의자 에이서 그레이와 우정을 쌓았으며, 그가 자신의 일반적인 복음주의 칼뱅주의 신앙을 새로운 생물학과 지질학과 조화시키는 자신의 견해를 더 공개적으로 출판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또한 그레이의 에세이 모음집인 ''다윈주의''의 편집을 도왔다. 라이트는 인류가 여전히 특별 창조의 행위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경 창조 이야기는 신학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므로 과학적 지식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1890년대 찰스 오거스터스 브리그스의 고등 비평으로 인한 신앙의 위기 이후 그는 성경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에 더 가깝게 자신의 기원에 대한 견해를 조정했다. ''근본주의''에 기고한 그의 장을 포함한 후기 저술에서 그는 지질학적 시간을 받아들였지만, 인간의 기원은 신성한 개입을 필요로 하며 새로운 종을 형성하기까지 확장되는 생물학적 변이는 설계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윈주의가 정당한 추론의 어떤 노력으로도 설계를 배제하도록 만들 수 없다. 실제로, 변종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종이 하위 종에서 발전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것은 설계에서 표준적인 주장을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그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했다.

1881년부터 기독교 근본주의로 노선을 변경하여, 1882년 창세기의 날들을 긴 시대로 보는 '날-시대 이론'을 부정했다. 1890년대에는 창세기가 다신교에 대한 반대 때문에 쓰여졌다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었다.

우주적 진화를 옹호한 허버트 스펜서, 존 피스크(John Fiske, 1842-1901) 등을 비판했다. 자연선택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며, 빙하기는 한번뿐이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에는 동일과정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3. 2. 후기: 기독교 근본주의로 선회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애서 그레이의 글에 공감하며, 하나님이 때때로 세상 일에 직접 개입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인간의 오랜 기원에 대해서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며, 종들의 자연적인 기원과 함께 하나님, 기적, 인간의 특별 창조를 모두 옹호했다. 보다 큰 분류학적 집단에 대해서는 특별 창조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그보다 작은 단계에서는 자연 선택에 의한 종 분화를 인정했다.

성경에 대해서는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할 필요가 있는' 내용을 제외하면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성경 저자들이 과학이나 역사에 대해 서술할 때는 당대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창세기는 다신교에 대한 반대 때문에 쓰여진 것이지, 실제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구약의 족보는 지구의 역사가 짧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입증하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으로 해석했다.

1881년부터 라이트는 기독교 근본주의로 노선을 변경했다. 1882년에는 창세기의 각 날을 긴 시대로 보는 '날-시대 이론'을 부정했고, 1890년대에는 창세기가 다신교에 대한 반대 때문에 쓰여졌다는 기존의 입장도 바꾸었다.

그는 우주적 진화를 옹호한 허버트 스펜서와 존 피스크(John Fiske, 1842-1901) 등을 비판했다. 자연선택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며, 빙하기는 한 번뿐이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에는 동일과정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3. 3. 지질학 연구와 빙하기 이론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종교와 과학이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애서 그레이의 글에 공감하며, 사건과 작용이 처음의 힘으로 지속되지만, 가끔씩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인간의 오랜 기원에 대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며, 종들의 자연적 기원, 하나님, 기적, 인간의 특별 창조를 모두 옹호했다. 보다 넓은 분류학적 집단에서는 특별 창조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그보다 작은 단계에서는 자연선택에 의한 종 분화를 인정했다.

성경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며, 성경 저자들이 과학, 역사 등에 대해 서술할 때 당대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창세기는 다신교에 대한 반대로 쓰여졌고, 실제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구약의 족보는 지구의 역사가 짧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입증하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으로 보았다.

1881년부터 기독교 근본주의로 노선을 변경하여, 1882년 창세기의 날들을 긴 시대로 보는 '날-시대 이론'을 부정했다. 1890년대에는 창세기가 다신교에 대한 반대로 쓰여졌다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었다.

허버트 스펜서, 존 피스크(John Fiske) 등 우주적 진화를 옹호한 이들을 비판하고, 자연선택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빙하기는 한 번뿐이었다고 주장했으며, 20세기 초에는 동일과정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890년 미국 지질학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1884년부터 1892년까지 미국 지질 조사소(USGS)에서 활동했다. 지질학적 관심으로 알래스카, 그린란드, 중국, 몽골, 만주, 시베리아, 투르키스탄, 코카서스 산맥, 레바논 산맥 등을 탐험하며 저서를 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1900년, 아들 프레드 라이트와 함께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모세스 B. 코츠워스와 메이블 벤트 부인을 만났고,[1] 이들과 함께 여행하던 중 메이블이 말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라이트와 코츠워스는 친구로 남아 지질학, 특히 빙하기와 빙하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라이트는 코츠워스가 대륙의 영구적인 이동 이론을 공식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

어린 시절 라이트는 기독교 다윈주의자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에이서 그레이와의 우정을 통해 칼뱅주의 신앙과 새로운 생물학 및 지질학을 조화시키는 견해를 출판하도록 격려받았고, 그레이의 에세이 모음집인 ''다윈주의'' 편집을 도왔다. 라이트는 인류가 특별 창조의 행위일 수 있다고 믿었지만, 성경 창조 이야기는 신학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므로 과학적 지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1890년대 찰스 오거스터스 브리그스의 고등 비평으로 인한 신앙의 위기 이후, 성경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에 더 가깝게 자신의 기원에 대한 견해를 조정했다. ''근본주의''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지질학적 시간을 받아들였지만, 인간의 기원은 신성한 개입을 필요로 하며, 새로운 종을 형성하기까지 확장되는 생물학적 변이는 설계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윈주의가 정당한 추론으로 설계를 배제할 수 없다. 변종이 종으로 발전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것은 설계에서 표준적인 주장을 강화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했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딕슨(A. C. Dixon) 목사는 조지를 과학적, 신학적 지식을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하며, "진화라는 엉뚱한 개념을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몰아낼" 논문을 써줄 적임자라고 보았다. 1872년 메사추세츠 주에 거주하는 동안 여가 시간을 활용해 지질학 연구를 함으로써 동료 과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이에 따라 보스턴의 과학 서클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근본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다윈의 이론과 성경의 창조를 조화시켜 설명하려고 함으로써 다윈 이론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을 완화시켰으며, 찰스 다윈은 조지의 이런 노력에 대해 "힘 있게 썼고 대단히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4. 2. 부정적 평가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1892년 《인간과 빙하기》(Man and the Glacial Period)를 출판하면서 북미에서 인간이 출현한 시기와 동일한 단 한 번의 빙하기를 상정했는데, 이를 통해 몇몇 지질학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그가 근본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여러 과학자들이 그가 과학계에 참여한 것을 환영했었으나, 근본주의자가 된 이후에는 분위기가 변했다. 미국 지질조사원(The 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의 토마스 챔벌린(Thomas C. Chamberlin, 1843-1928)과 맥기(W. J. McGee, 1853-1912)는 그의 '빙하기가 한 번뿐이었다'는 주장을 비판했다. 챔벌린은 조지가 인간과 빙하기에 대한 증거를 잘못 해석했으며, 더 이상 미국 지질조사원의 부회원이 아님에도 책에서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교묘히 속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맥기는 사이언스 지에서 조지를 "악당", "얼간이", "목사 교수"라고 비난하였고, "《인간과 빙하기》가 없었다면 세상은 더 지혜로워졌을 것"이라 맹렬히 비판했다. 또한 맥기는 조지를 "독약을 처방하는 돌팔이"이며, "과학계에서 그런 흉악한 욕심쟁이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조지의 변호와 다르게, 과학계에서 수집되는 증거들은 단 한 번의 빙하기를 부정하는 쪽으로 나타났다.

4. 3. 한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5. 저서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다양한 주제에 걸쳐 광범위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Story of My Life''(1875), ''과학과 종교 연구''(Studies in Science and Religion, 1882), ''성경의 신적 권위''(The Divine Authority of Bible, 1884), ''북미의 빙하시대: 빙하시대와 인간의 오랜 기원의 관계''(The Ice Age in North America: And Its Bearing Upon the Antiquity of Man, 1889), ''인간과 빙하기''(Man and the Glacial Period, 1892), ''구약 역사의 과학적 증거''(Scientific Confirmations of Old Testament History, 1906) 등이 있다.

그는 ''기독교 증거 논리''(Andover, 1880), ''앤도버, 매사추세츠 역사 스케치'' 서문 (앤도버, 1880), ''죽음이 심판에 미치는 관계에 대한 고찰''(보스턴, 1882), ''오하이오, 인디애나, 켄터키의 빙하 경계''(클리블랜드, 1884), ''찰스 그랜디슨 피니''(보스턴, 1891), ''그린란드 빙원과 북대서양의 생명''(1896), ''기독교 증거의 과학적 측면''(1898), ''아시아 러시아'' (1902), ''인류의 기원과 고대성''(1912) 등을 저술했다.

또한 라이트는 ''근본주의: 진리에 대한 증언''에서 "오경의 모세 저작", "성경 진리에 대한 기념비의 증언", "진화의 종말" 등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비블리오테카 사크라'' (1884 – c. 1920)와 ''과거의 기록'' (1905 – c. 1920)의 편집자로도 활동했다.

6. 기사

조지 프레더릭 라이트는 ''비블리오테카 사크라'' (1884 – c. 1920)와 ''과거의 기록'' (1905 – c. 1920)의 편집을 담당했다. 그는 또한 ''비블리오테카 사크라''에 다수의 논문을 기고했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https://archive.org/details/logicchristiane01wriggoog/page/n5/mode/2up 기독교 증거 논리]'' (앤도버, 1880), ''[https://archive.org/details/historicalsketch00bailey/page/n23/mode/2up 앤도버, 매사추세츠 역사 스케치]'' 서문 (앤도버, 1880), ''[https://archive.org/details/studiesinscienc00wriggoog/page/n4/mode/2up 과학과 종교 연구]'' (1882), ''[https://archive.org/details/aninquiryconcer00socigoog/page/n3/mode/2up 죽음이 심판에 미치는 관계에 대한 고찰]'' (보스턴, 1882), ''[https://archive.org/details/divineauthority00wriggoog/page/n4/mode/2up 성경의 신성한 권위]'' (1884), ''오하이오, 인디애나, 켄터키의 빙하 경계'' (클리블랜드, 1884), ''[https://archive.org/details/iceageinnortham02uphagoog/page/n8/mode/2up 북미의 빙하기와 인류의 고대성에 미치는 영향]'' (뉴욕, 1889; 5판, 1911), ''찰스 그랜디슨 피니'' (보스턴, 1891), ''[https://archive.org/details/manandglacialpe02hayngoog/page/n14/mode/2up 인간과 빙하기]'' (뉴욕, 1892), ''그린란드 빙원과 북대서양의 생명'' (1896), ''[https://archive.org/details/scientificaspec00wriggoog/page/n7/mode/2up 기독교 증거의 과학적 측면]'' (1898), ''아시아 러시아''' (1902), ''[https://archive.org/details/scientificconfir00wriguoft/page/n7/mode/2up 구약 역사에 대한 과학적 확증]'' (오버린, 1907), ''[https://books.google.com/books?id=6vVYxqRv4CQC 초기 인류: 가족 내 평화 증진 방법]'', ''[https://archive.org/details/originantiquityo00wrigrich/page/n5/mode/2up 인류의 기원과 고대성]'' (1912) 등이 있다.

또한, 라이트는 ''근본주의: 진리에 대한 증언''에서 "[https://www.blueletterbible.org/Comm/torrey_ra/fundamentals/02.cfm 오경의 모세 저작]", "[https://www.blueletterbible.org/Comm/torrey_ra/fundamentals/16.cfm 성경 진리에 대한 기념비의 증언]", "[https://www.blueletterbible.org/Comm/torrey_ra/fundamentals/69.cfm 진화의 종말]" 등의 장을 저술했다.

그는 〈선사 고고학에 대한 최근 연구들〉(Recent Works on Prehistoric Archaeology),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한 최근 저작들〉, 〈Exaggeration of the Issues between Science and Religion〉(1883), 〈Professor Wright and Some of His Critics〉(1885), 〈The Debt of the Church to Asa Gray〉(1888), 〈Transcendental Science〉(1889), 〈Darwin on Herbert Spencer〉(1889), 〈The Divine Method of Producing Living Species〉, 〈Editorial Note on Genesis and Geology〉(1897), 〈Story fo My Life and Work〉(1916) 등의 기사를 작성했다.

참조

[1] 서적 Story of my life and work Bibliotheca Sacra Company 1916
[2] 서적 A Man Beyond Time: Moses Cotsworth's fight for the 13-month calendar Independent Publishing Network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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