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호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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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호일건은 1788년부터 1884년까지 이어진 사건으로, 고카쿠 천황이 아버지인 스케히토 친왕에게 태상천황의 존호를 올리려 했으나, 당시 막부의 로주였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반대하면서 조정과 막부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마쓰다이라는 주자학적 명분과 금중병공가제법도를 근거로 반대했고, 조정은 고대 일본의 사례를 들어 맞섰다. 이 사건은 단순한 존호 문제를 넘어, 사상적 대립으로 번졌으며, 마쓰다이라의 실각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재평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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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정실부인인 고다이인(1773년)은 사쓰마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의 딸로, 이에나리와의 혼인 후 고노에 가의 양녀가 되어 개명했으며, 쇼군의 장인인 아버지의 권세와 영향력 행사, 이에나리 사후 오오쿠에서의 영향력 유지, 그리고 그녀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 작품 제작 등의 특징을 지닌다. - 1788년 일본 - 덴메이 대기근
덴메이 대기근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1783년 아사마산 분화와 막부의 경제 정책 실패로 발생한 대규모 기근으로,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여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간세이 개혁의 배경이 되었다. - 1788년 일본 - 대정위임론
대정위임론은 에도 막부 시대에 쇼군이 천황으로부터 통치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정치 사상으로, 막부 권위 강화와 존왕론 견제를 위한 이론적 기반으로 활용되었으며, 국학적 위임론과 유학적 위임론으로 나뉜다.
| 존호일건 | |
|---|---|
| 존호 | |
| 명칭 | 존호 일건 |
| 로마자 표기 | Jonho Ilgeon |
| 시대 | 조선 |
| 관련 국왕 | 고종 |
| 발단 시기 | 1897년 |
| 종결 시기 | 1899년 |
| 배경 | |
| 주요 원인 | 대한제국 선포와 고종의 황제 즉위 |
| 경과 | |
| 1897년 |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 태조~현종의 존호를 황제로 추존 |
| 1899년 | 고종, 자신의 존호를 '태상황제'로 칭하려 시도, 독립협회의 반대로 무산 |
| 결과 | |
| 영향 | 독립협회 해산의 원인 중 하나가 됨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 강화 시도 좌절 |
| 관련 단체 | |
| 관련 단체 | 독립협회 |
| 기타 | |
| 참고 문헌 | 한국사 관련 서적, 조선왕조실록 |
2. 발단
고모모조노 천황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스케히토 친왕의 아들이 양자로 입적되어 고카쿠 천황으로 즉위했다. 고카쿠 천황은 아버지 스케히토 친왕이 황족 신분임에도 섭가보다 낮은 서열에 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에 고카쿠 천황은 아버지에게 태상천황 존호를 올리고자 했다. 이는 아버지와 자신의 권위, 즉 조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2. 1. 고카쿠 천황 즉위와 존호 추진 배경
고모모조노 천황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스케히토 친왕의 아들이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했는데, 이가 고카쿠 천황이다. 고카쿠 천황은 아버지 스케히토 친왕이 황족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섭가보다 낮은 서열에 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에도 막부가 제정한 금중병공가제법도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으며, 이는 막부의 권위를 상징했다. 하지만 금중병공가제법도는 막부의 초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한 조법(祖法)이었기에 이를 개정하는 것은 막부의 위엄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어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이에 고카쿠 천황은 아버지 스케히토 친왕에게 태상천황 존호를 올리고자 했다. 이는 아버지의 권위를 높이고 나아가 자신의 권위, 즉 조정의 권위 또한 높이려는 시도였다.3. 경과
尊号一件|존호일건일본어은 1789년(간세이 원년) 고카쿠 천황이 아버지 스케히토 친왕에게 태상천황 존호를 올리려다 막부의 반대로 무산된 사건이다.
3. 1. 조정과 막부의 대립
1788년(덴메이 8년) 나카야마 나루치카 등 공가가 고카쿠 천황의 뜻을 막부에 전달했지만,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태상천황 존호 부여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주자학을 근거로 한 마쓰다이라에 맞서, 조정은 에도 이전의 옛 사례를 제시하며 조정과 막부 간의 학문적 논쟁으로 발전했다. 1791년(간세이 3년) 12월, 고카쿠 천황은 군의(群議)를 열어 참의 이상 40명의 공경 중 35명의 찬성을 얻어 아버지에게 존호를 올리는 것을 강행하기로 했다.3. 2.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강경 대응
다카쓰카사 스케히라는 조정과 막부의 전면 대결을 우려하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대정위임론을 근거로 조정 대신들을 처벌하고, 존왕론자 다카야마 히코쿠로를 탄압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미토 도쿠가와 가문 등이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지지했고, 고사쿠라마치 천황도 고카쿠 천황을 설득하여 결국 존호 추진은 중단되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스케히토 친왕에게 1,000석을 추가 지급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1]4. 배경 및 원인
(존호일건 문서의 배경 및 원인 섹션은 하위 섹션들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별도의 내용을 추가하지 않는다.)
4. 1. 주자학과 막번 체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간세이 개혁을 통해 막번체제의 재건을 추진했고, 그 통치 이념으로 주자학을 내세웠다.[1] 주자학은 유교의 한 갈래로, 주군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학문이다.[1] 존호 사건은 이 두 가치의 충돌로 해석될 수 있는데,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게는 막부에 대한 충성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1]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양명학, 고학(국학), 존왕론 등 주자학에 반하는 사상들을 탄압하여 막부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1] 이는 막번체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였다.[1]
4. 2.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오고쇼 존호 문제
같은 시기에 막부의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도 친부 도쿠가와 하루사다에게 오고쇼 존호를 올리고자 했으나,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이를 반대했다.[3]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고산쿄 중 한 명으로 쇼군 자리를 노릴 수 있었기에, 하루사다에 의해 시라카와번으로 추방당한 적이 있었다.[3] 이 때문에 마쓰다이라는 하루사다를 정적으로 여겼는데, 하루사다가 오고쇼 존호를 받으면 권력을 장악할 우려가 있어 이를 막아야 했다.[3] 이는 존호 사건이 단순한 천황과 막부의 문제가 아닌, 막부 내부의 권력 투쟁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일로 마쓰다이라는 이에나리의 반감을 사 결국 실각하게 된다.[3]4. 3. 덴메이 대화재와 교토 재건 문제
덴메이 8년(1788년) 덴메이 대화재로 교토가 큰 피해를 입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내리 재건 과정에서 재정 문제를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조정은 막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내리 재건을 강행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막부의 막대한 지출을 초래했다. 이러한 사건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조정을 불신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이는 존호 사건의 배경에 조정과 막부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5. 결말 및 영향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실각 후에도 스케히토 친왕의 존호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카쿠 천황의 조카딸을 양자인 아리스가와노미야 쓰나히토 친왕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나, 황실이 간인노미야 가문(앞서 말한 조카딸의 가문)에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문제에 대해 막부는 조건을 붙이긴 했으나 대부분 천황의 뜻을 따랐다. 천황도 양위 직전에 막부가 많은 신사(神事)와 공사(公事)의 재건에 협력해준 것에 감사하며 이에나리에게 어의와 서한을 보내주었다. 이에 고카쿠 천황과 막부의 관계는 비교적 양호했다고 한다.[12]
존호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켜, 다양한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칙사로서 에도로 내려간 나카야마 마사치카가 에도성의 이에나리 앞에서 당당하게 항의했다는 전설이 생겨, 『반한비록』, 『나카야마 토카기』, 『나카야마 전기』와 같은 소설이 은밀히 쓰여졌다. 이학의 금을 통해 사상 통제에 나섰던 마쓰다이라도 백성들 사이의 풍문에는 무관심했기에 굳이 이를 막지 않았다.[8] 백성들에게도 엄격한 검약을 강조했던 마쓰다이라가 실각하자 나카야마의 전설은 더욱 퍼져나갔다.[9] 이러한 소설에는 황당무계한 기술도 있었지만, 당시 조정이나 막부의 내정을 취재한 것으로 보이는 기술도 있다. 황통(皇統)이나 조정과 막부 간의 역사를 논하거나, 스케히라 혹은 후임 로주인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를 규탄하거나, 마쓰다이라와 대립했다는 소문이 있는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하루마사가 등장하거나, 미토 도쿠가와가의 근왕적 움직임이 강조되는 등 당시 조정과 막부의 실정을 담아 다양한 전개를 보였다.[10] 다나카 도시다쓰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이본을 포함하여 103종류의 작품이 현존한다.[11]
1884년(메이지 17년)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직계 조상인 스케히토 친왕에게 게이코 천황(慶光天皇)이라는 시호와 태상천황 칭호를 추증하였다.[7] 같은 해, 존호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나카야마 나루치카에게도 종1위를 추서하였다.[7] 이는 존호 사건이 메이지 유신 이후 왕정 복고와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 확립 과정에서 재평가되었음을 보여준다.
5. 1. 존호 사건의 좌절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실각
다카쓰카사 스케히라는 조정과 막부의 전면 대결을 우려하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게 존호 거절 대신 스케히토 친왕의 대우 개선을 요청했다. 마쓰다이라는 대정위임론을 근거로 막부가 공가를 처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강경 대응했고, 미토 도쿠가와가의 지지와 고사쿠라마치 천황의 설득으로 고카쿠 천황은 결국 존호 가상을 포기했다. 대신 스케히토 친왕의 석고를 1,000석 늘려주는 것으로 대우를 개선했다.[1]마쓰다이라는 간세이 개혁을 통해 막번체제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그 사상적 기반인 주자학을 보호하고자 했다. 주자학은 유교 중에서도 대의명분, 충성, 군신의 예를 중시하는 학파로, 일본에서는 효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따라서 존호 문제는 충과 효의 충돌이며, 양명학, 고학, 존왕론 등 반(反) 주자학적 움직임을 억압하기 위한 강경책이었다.[1]
또한,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도 아버지 도쿠가와 하루사다에게 오고쇼 존호를 올리려 했으나, 마쓰다이라가 반대했다. 마쓰다이라는 고산쿄의 일원으로 쇼군 자리를 노릴 수 있었기에 하루사다에게 추방당한 적이 있었고, 하루사다가 오고쇼가 되면 권력을 장악할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이 일로 이에나리의 반감을 사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1]
덴메이 대화재로 피해를 입은 교토 도성 재건에 대해 마쓰다이라는 재정 문제를 이유로 반대했지만, 조정이 강행하여 막부는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다. 이는 마쓰다이라가 조정을 불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1]
5. 2. 이후의 변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실각 후에도 스케히토 친왕의 존호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고카쿠 천황의 조카딸을 양자인 아리스가와노미야 쓰나히토 친왕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나 황실이 간인노미야 가문(전술한 조카딸의 가문)에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문제에 대해 막부는 조건을 붙이긴 했으나 대부분 천황의 뜻을 따랐다. 천황도 양위 직전에 막부가 많은 신사(神事)와 공사(公事)의 재건에 협력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이에나리에게 어의와 서한을 보내주었다. 이에 고카쿠 천황과 막부의 관계는 비교적 양호했다고 한다.[12]존호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켜, 다양한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칙사로서 에도로 내려간 나카야마 마사치카가 에도성의 이에나리 앞에서 당당하게 항의했다는 전설이 생겨, 『반한비록』, 『나카야마 토카기』, 『나카야마 전기』와 같은 소설이 은밀히 쓰여졌다. 이학의 금을 통해 사상 통제에 나섰던 마쓰다이라도 백성들 사이의 풍문에는 무관심했기에 굳이 이를 막지 않았다고 한다.[8] 백성들에게도 엄격한 검약을 강조했던 마쓰다이라가 실각하자 나카야마의 전설은 더욱 퍼져나갔다.[9] 이러한 소설에는 황당무계한 기술도 있었지만 당시의 조정이나 막부의 내정을 취재한 것으로 보이는 기술도 있다. 황통(皇統)이나 조정과 막부 간의 역사를 논하거나, 스케히라 혹은 후임 로주인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를 규탄하거나, 마쓰다이라와 대립했다는 소문이 있는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하루마사가 등장하거나, 미토 도쿠가와가의 근왕적 움직임이 강조되는 등 당시 조정과 막부의 실정을 담아서 다양한 전개를 이루어내고 있다.[10] 다나카 도시다쓰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이본을 포함하여 103종류의 작품이 현존한다.[11]
메이지 천황 때인 1884년(메이지 17년) 스케히토 친왕의 현손에 해당하는 게이코 천황이라는 시호와 태상천황이라는 칭호가 올려졌다. 또한 같은 해에 나카야마에게도 종1위가 수여되었다(메이지 천황의 사친인 나카야마 요시코는 나카야마 나루치카의 현손이다. 따라서 천황은 나카야마의 후손이기도 하다).
5. 3. 메이지 유신 이후의 재평가
1884년(메이지 17년)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직계 조상인 스케히토 친왕에게 게이코 천황(慶光天皇)이라는 시호와 태상천황 칭호를 추증하였다.[7] 같은 해, 존호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나카야마 나루치카에게도 종1위를 추서하였다.[7] 이는 존호 사건이 메이지 유신 이후 왕정 복고와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 확립 과정에서 재평가되었음을 보여준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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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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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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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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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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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近世の摂家と朝幕関係
吉川弘文館
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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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官報 第貳百拾四號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88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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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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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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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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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近世の摂家と朝幕関係
요시카와 홍문관
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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