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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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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경매는 당나라 말기에 형남 번진을 점거하고 가혹한 통치를 펼친 환관이다. 3천 명의 친위 군단인 충용군을 조직하여 절도사 단언모를 살해하고 형남을 장악했다. 형남을 지배하며 장교와 상인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여 부를 축적했다. 이후 진유에게 축출당하고, 장괴에게 살해당하며 재산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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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원어 이름朱敬玫(Zhu Jingmei)
출생일불명
출생지중국 당나라
사망일885년
사망지강릉(江陵)
직업당나라 환관, 형남감군(荊南監軍)

2. 생애

주경매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6][7] 그는 880년[8]882년[9] 사이 어느 시점에 형남(荊南, 현 후베이성 징저우 시 일대)의 감군환관이 되었다.

형남 감군환관이 된 주경매는 '충용군(忠勇軍)'이라는 3천 명 규모의 친위대를 조직하여 직접 지휘했다.[4] 이로 인해 당시 형남 절도사였던 단언모와 갈등을 겪었고, 882년 주경매는 단언모를 선제적으로 공격하여 살해했다.[4][9] 이후 그는 자신의 수하였던 진유를 내세워 형남 번진(藩鎭)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당 희종은 결국 진유를 884년 말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4][9]

주경매는 형남 번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동안, 여러 구실을 만들어 수많은 장교들과 상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등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5][10] 심지어 당 희종이 그를 소환하려 했을 때도 명령을 거부하고 강릉에 계속 머물렀다.[5][10]

885년, 절도사 진유는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워진 충용군을 제거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군사적 혼란이 발생했다.[10] 얼마 지나지 않아 회남(淮南) 번진의 무장 장괴가 형남을 침공하여 진유를 축출하고 강릉을 점령했다. 장괴는 주경매가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는 사실을 알고 밤중에 병사들을 보내 그를 살해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10]

2. 1. 출신 배경

주경매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당나라정사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여러 유명 환관들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지만, 주경매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6][7]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880년[8] 이후, 그리고 882년[9] 이전 사이에 형남(荊南, 현 후베이성 징저우 시 일대)의 감군환관이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양복광이 형남 감군환관으로 있었다.

형남 감군환관이 된 후, 주경매는 '충용군(忠勇軍)'이라 불리는 3천 명 규모의 정예 친위대를 조직하여 직접 지휘했다. 이로 인해 당시 형남 절도사였던 단언모와 갈등을 겪게 되었고, 단언모는 주경매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882년, 주경매가 먼저 단언모를 공격하여 살해했다. 이후 그는 강릉소윤(江陵少尹, 현 후베이성 징저우 시 장링 현의 부시장급) 이수(李燧)를 유후(留後, 임시 책임자)로 임명했다. 당시 황소의 난으로 수도 장안을 빼앗기고 성도로 피난 가 있던 당 희종은 과거 형남절도사를 지낸 경험이 있는 병부시랑(兵部侍郞) 겸 판탁지(判度支) 정소업(鄭紹業)을 다시 형남절도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정소업은 주경매를 두려워하여 부임하지 못했다. 결국 주경매는 자신의 부하였던 압아(押牙) 진유를 지부사(知府事)로 삼았고, 이후 당 희종은 이 임명을 승인하여 진유를 유후로 임명했으며, 884년 말에는 절도사로 정식 임명했다.[9]

주경매는 형남 번진(藩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동안, 여러 구실을 만들어 수많은 장교들과 상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한번은 당 희종이 그를 소환하고 다른 환관인 중사(中使) 양현회(楊玄晦)를 대신 보내려 했으나, 주경매는 소환을 거부하고 강릉에 눌러앉아 계속 머물렀다.[10]

2. 2. 단언모와의 대립과 형남 번진 점거

주경매가 형남 감군환관의 지위를 차지한 후, 그는 충용군(忠勇軍)이라는 3천 명의 정예 친위 군단을 조직하여 직접 지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절도사 단언모와 대립하게 되었고, 단언모가 그를 제거하려 하자 882년에 선수를 쳐 단언모를 공격하여 살해하였다.[4][9]

단언모를 제거한 후, 주경매는 강릉소윤(江陵少尹, 현 후베이성 징저우 시 장링 현의 차관) 이수(李燧)를 유후(留後)로 임명하여 번진을 통치하게 했다. 당시 황소의 난으로 수도 장안을 잃고 성도로 피난해 있던 당 희종은 이 소식을 듣고 과거 형남절도사를 지냈던 정소업(鄭紹業)을 다시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정소업은 주경매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주경매는 자신의 수하였던 압아(押牙) 진유를 지부사(知府事)로 삼아 번진의 실무를 맡겼고, 이후 희종은 이를 승인하여 진유를 유후로 임명하였다. 최종적으로 884년 말, 희종은 진유를 정식 절도사로 임명하였다.[4][9]

주경매는 형남 번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동안 여러 구실을 만들어 많은 장교들과 상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한번은 희종이 그를 소환하고 다른 환관인 양현회(楊玄晦)로 교체하려 했으나, 주경매는 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강릉에 눌러앉아 권력을 유지했다.[5][10]

2. 3. 가혹한 통치와 재산 축적

주경매는 형남절도의 환관 감찰관이 된 후, 정예병 3,000명으로 구성된 충용군(忠勇軍)을 조직하여 직접 지휘했다.[4] 그는 절도사 단언모와 갈등을 겪다가 882년에 선제적으로 단언모를 공격하여 살해하였다.[4] 이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장교 진유를 절도사 대행으로 내세웠고, 당 희종 황제는 이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4]

형남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주경매는 매우 가혹한 통치를 펼쳤다. 그는 여러 구실을 만들어 수많은 장교와 상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5] 이러한 행위는 당시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 환관 세력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된다. 심지어 당 희종 황제가 그를 소환하고 양현회를 후임으로 임명하려 했을 때에도, 주경매는 소환에 응하지 않고 강릉에 계속 머무르며 자신의 세력을 유지했다.[5]

2. 4. 최후

885년, 당시 형남절도사 진유(陳儒)는 자신이 임명했던 충용군(忠勇軍)이 점차 통제를 벗어나 기강이 해이해지자 위협을 느끼고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전 절도사였던 정소업(鄭紹業) 시기, 대장 신도종(申屠琮)은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소 토벌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장안으로 파견된 바 있었다. 885년 신도종과 그의 군대가 형남으로 복귀하자, 진유는 신도종에게 충용군을 제거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 충용군 장수 정군지(程君之)는 이 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부대를 이끌고 낭주(朗州, 현 후난성 창더 시)로 도주하려 했으나, 신도종의 추격을 받아 도중에 병력 100여 명을 잃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이 사건으로 신도종이 잠시 형남 번진의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0]

얼마 지나지 않아, 진유는 형남 일대를 자주 약탈하던 낭주자사(朗州刺史) 뇌만(雷滿)을 토벌하기 위해 회남(淮南, 본거지는 현 장쑤성 양저우 시) 번진의 무장 장괴(張瓌)와 한사덕(韓師德)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장괴는 뇌만을 공격하는 대신 군대를 돌려 형남의 중심지인 강릉(江陵)을 급습하여 진유를 축출했다. 진유는 희종이 머물던 성도(成都)로 피신하려 했으나, 도중에 장괴에게 사로잡혀 강릉에 구금되었다. 이후 장괴는 주경매가 상당한 를 축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밤중에 병사들을 보내 그의 저택에서 주경매를 살해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10]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New Book of Tang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구당서 https://zh.wikisourc[...]
[7] 서적 신당서
[8]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9]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10]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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