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체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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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체서용은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패배한 후, 전통적인 중국의 가치관과 제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사상이다. 아편 전쟁 이후 위원이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펑구이펀은 "중국의 윤리, 명교를 근본으로 삼고, 여러 나라의 부강한 기술을 돕는다"는 사상을 제시했다. 장즈둥은 "구학을 체로 삼고, 신학을 용으로 삼는다"는 표현으로 중체서용을 구체화했다. 하지만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중체서용론의 한계가 드러났고, 이후 변법자강 운동과 5·4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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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무운동 - 이홍장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기여하고 직례총독으로서 외교를 주도하며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나, 청일 전쟁 패배와 부패 논란 등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의 삶은 청나라 격변기와 근대화 노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 양무운동 - 심보정
심보정은 청나라 말기의 관료로, 임칙서의 사위이며,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참여하고 양무운동 시기 푸저우 병창을 설립하여 해군 육성에 기여했으며, 모란사 사건 이후 일본과의 협상을 담당하고 대만 방위를 위해 행정 개혁을 단행하다가 사망 후 태자태보로 추증되었다.
중체서용 | |
---|---|
개요 | |
이름 | 중체서용 (中體西用) |
로마자 표기 | Jungcheseoyong |
영문 명칭 | Chinese Learning as Substance, Western Learning for Application |
관련 개념 | 동도서기 |
역사적 배경 | |
주창 시기 | 19세기 후반 |
주창 세력 | 양무운동의 실학자 관료 |
배경 | 태평천국의 난 진압 과정에서 서양 군사 기술의 효용성 인식 애로호 전쟁 패배 후 서양 문물에 대한 위기의식 고조 |
내용 | |
핵심 내용 | 중국의 전통적인 윤리, 도덕, 정치 체제 등 '본체'(體)는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 군사 기술 등 '응용'(用)적인 측면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사상 |
한계 | 서양의 기술 수용에만 집중하고, 사회 제도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는 비판 존재 '중체'와 '서용'의 구분이 모호하고, 근대화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지적 존재 |
영향 | |
영향 | 양무운동의 이론적 기반 변법자강운동으로의 발전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화 운동에 간접적 영향 |
평가 | |
긍정적 평가 |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중국 근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한 반발을 줄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다는 평가 |
비판적 평가 | 근본적인 사회 개혁 없이 기술적인 측면만 받아들여 한계가 있었다는 비판 서양의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드러냈다는 비판 |
2. 역사적 배경
‘체’(體)는 ‘본체’, ‘용’(用)은 ‘곁가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학문과 제도를 주체로 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기술 문명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1840년 아편 전쟁과 1857년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패배한 이후, 청나라 내부의 한족 관료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3]
이들은 황제 중심의 지배 체제와 유교적 가치관은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도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제도 자체를 서구화한 일본에 패배하면서, ‘중체서용론’에 기반한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났다.[3]
이후 청나라에서는 정치 체제 개혁을 목표로 하는 변법자강 운동과 청나라 타도를 주장하는 쑨원 등의 혁명 운동이 나타났다.[3]
위원은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이 서양의 선박 건조 기술과 무기 생산을 배워 외세 침략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1843년 저서 《해국도지》에서 이러한 생각을 담았다.[3] 19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외세의 위협에 맞서 근대화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청나라가 멸망 위기에 처하면서 서구의 정치 시스템까지 수용하려는 진보주의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대립이 나타났다.[3]
2. 1. 아편 전쟁과 청나라의 위기
1840년 아편 전쟁과 1857년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서구 제국에 패배하면서, 청나라 한족 관료들 사이에서 기술 혁신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3]그러나 이들은 황제의 절대 권력과 유교 중심의 기존 가치관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청나라는 서양의 기술 도입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여러 현대식 시설을 건설했다. 하지만 1894년 청일 전쟁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제도 자체를 서구화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중체서용론’에 기반한 양무운동의 한계가 명확해졌다.[3]
이후 청나라 개혁파 관료들은 스스로 정치 체제 개혁을 시도한 변법자강 운동을 일으켰고, 쑨원 등은 청나라 타도를 목표로 하는 혁명 운동을 전개하며 상황은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3]
2. 2. 양무운동과 중체서용론의 대두
‘체’(體)는 ‘본체’, ‘용’(用)은 ‘곁가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학문과 제도를 주체로 하고,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서양의 기술 문명을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840년에 발생한 아편 전쟁, 이어진 1857년의 제2차 아편 전쟁(애로우 전쟁)에서 청나라가 서구 제국에 패배한 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한족 관료를 중심으로 국내의 기술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다.[4]그러나 그들은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의 지배 체제나 유교적 색채가 강한 기존의 가치관은 정통성과 우위성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청나라는 기술만 도입하여 군사력 강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많은 현대식 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헌법 제정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제도 자체를 서구화한 일본에게 1894년 청일 전쟁에서 대패하자, ‘중체서용론’에 근거한 양무운동에 한계가 드러났다.[4]
이후 청나라의 개혁파 관료가 스스로의 손으로 정치체제 개혁을 감행한 변법자강 운동과 청나라 자체를 타도하겠다는 쑨원 등의 혁명 운동으로 급진화되어 갔다.[4]
펑구이펀은 "중체서용"에 해당하는 사상을 처음 주창했다. 태평천국 운동 중인 1861년, 상하이 조계로 피난한 펑구이펀은 『교빈로항의(校邠廬抗議)』를 저술하여 "以中國之倫常名教為原本,輔以諸國富強之術중국어" (중국의 윤리, 명교를 근본으로 삼고, 여러 나라의 부강한 기술을 돕는다)라고 말했다. 펑구이펀은 서양의 병기를 도입하여 새로운 군대를 창설할 것을 리훙장에게 진언했고, 이를 받아들인 리훙장은 양쯔강에서 태평군을 격파했다. 리훙장은 『교빈로항의』를 칭찬했다. 리훙장 등 양무파 관료들은 태평군과의 전투에서 서양의 공업 기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병기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서양 문명의 부분적인 도입을 도모하게 되었다.
"중체서용"이라는 말은 1898년 (양무운동 말기, 무술변법의 해)에 간행된 선수캉의 『광시책(匡時策)』의 "中学為体,西学為用중국어" (중학을 체로 삼고, 서학을 용으로 삼는다) 또는 장즈둥의 『권학편』의 "旧学為体,新学為用중국어" (구학을 체로 삼고, 신학을 용으로 삼는다)에서 유래한다.[29][30] 1921년 (중화민국 시기)에는 량치차오가 『청대학술개론』에서 장즈둥을 "중체서용"의 주도자로 평가했다.[30]
2. 3. 청일 전쟁과 중체서용론의 한계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는 헌법 제정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제도 자체를 서구화한 일본에게 대패하였고, 이를 통해 ‘중체서용론’에 근거한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났다.[1] 청일 전쟁은 아편 전쟁과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서구 열강에 패배한 이후, 청나라가 기술 혁신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근본적인 정치 체제의 개혁 없이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1]이후 청나라에서는 개혁파 관료들이 스스로 정치 체제 개혁을 시도한 변법자강 운동과, 쑨원 등 혁명가들이 청나라 타도를 목표로 한 혁명 운동이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1]
3. 중체서용론의 주요 내용과 논쟁
양무파 관료들은 중국의 유교 중심 전통 학문과 제도를 주체로, 부국강병의 수단으로서 서양의 기술 문명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1840년 아편 전쟁과 1857년 애로우 전쟁에서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패배한 것을 계기로, 한족 관료를 중심으로 기술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 중심의 지배 체제와 유교적 가치관의 우위성을 고수하며 기술 도입만으로 청나라 체제 유지와 군사력 강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중체서용론에 기반한 양무 운동은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이후 청나라에서는 개혁파 관료들이 정치 체제 개혁을 시도한 변법자강 운동이나, 쑨원 등의 혁명 운동이 나타나며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펑구이펀은 "중체서용" 사상을 처음 주창한 인물로, 1861년 『교빈로항의(校邠廬抗議)』에서 "중국의 윤리, 명교를 근본으로 삼고, 여러 나라의 부강한 기술을 돕는다"라고 주장했다.[29] 펑구이펀의 주장은 리훙장에게 받아들여져 회군 건군에 영향을 주었다.[30] 리훙장 등 양무파 관료들은 태평천국 운동 진압 과정에서 서양 병기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서양 문명의 부분적 도입을 추진했다.
"중체서용"이라는 용어는 1898년 선수캉의 『광시책(匡時策)』 또는 장즈둥의 『권학편』에서 유래한다.[29][30] 1921년 량치차오는 장즈둥을 "중체서용"의 주도자로 평가했다.[30] 그러나 옌푸는 "중체서용"의 "체・용" 용법이 전통적인 용법의 오용이라고 비판했다.[31]
1980년대 개혁개방 시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리쩌허우가 "중체서용"을 본받아 "서체중용"을 주장하기도 했다.[31]
3. 1. 장지동의 권학편
1898년 장지동(張之洞, 1837-1909)이 저술한 『권학편(勸學篇)』에서 제시된 "중체서용(中體西用)"은 보수주의자와 개혁주의자 사이의 타협점으로 여겨졌다. 장지동은 "사회의 전통 유교적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며, 서양 사상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사회의 물질적 기반, 특히 아편 전쟁(1839-42) 이후 중국에 대한 유럽의 침략을 고려하여 군사 장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 일부 학자들은 "중국적 본질"을 중국의 유교적 전통을 강화하는 보수적인 관점으로 비판했지만,[5] 다른 학자들은 이 슬로건을 정당한 서양 연구의 문을 여는 것이자 중국의 근대화를 향한 긍정적인 발걸음으로 보았다.[6]"중체서용"이라는 말은 1898년(양무운동 말기, 무술변법의 해) 장즈둥의 『권학편』에서 나온 "旧学為体,新学為用중국어"(구학을 체로 삼고, 신학을 용으로 삼는다)에서 유래한다.[29][30] 1921년(중화민국 시기) 량치차오는 『清代學術概論|청대학술개론중국어』에서 장즈둥을 "중체서용"의 주도자로 평가했다.[30]
3. 2. 개혁파의 비판과 '중서합일론'
청일 전쟁 이후 개혁파는 기존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이론에서 벗어나 "중국과 서양의 통합"이라는 새로운 문화 개념을 제안했다. 학자 옌푸는 "중학(中學)과 서학(西學)은 모두 고유한 체용(體用)을 가지고 있다. 분리하면 모두 의미가 있지만, 합치면 둘 다 의미를 잃는다."라고 주장했다.[7] 캉유웨이, 량치차오 및 백일유신의 다른 구성원들도 "중국적 본질"의 제약을 깨고 서양의 정치 체제, 산업화, 자본주의를 채택하려고 노력했다.옌푸는 "중체서용"의 "체・용" 용법이 전통적인 "체・용"의 오용이라고 비판했다.[31]
3. 3. 량수밍의 '문화 통일론'
량수밍(1893-1988)은 "중체서용"에 동의하지 않았다. 량수밍에게 문화는 하나의 통일된 인간적 태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중국 문화와 서양 문화의 쉬운 혼합을 부정했다.[8] 그는 중국 문화와 서양 문화가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으며, 중국 문화는 자율적인 도덕적 원칙과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데 목표를 두는 반면, 서양의 본질은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강조로, 이는 인간 본성의 특정한 측면에서 파생되거나 도덕적 원칙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다.[9]그러나 량수밍은 서양의 과학 기술만이 중국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서양 문화의 "완전한 수용"을 옹호했다.[10] 그의 저서 《동서방 문화와 그 철학》(《東西方文化及其哲学》)에서 그는 중국이 서양의 과학과 정부를 수입하려면 서양 문화 또한 수입하고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오류를 개혁하면서 서양 문화를 완전히 수용"해야 한다는, 핵심적인 문제를 흐리는 해결책을 제시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11]
3. 4. 허린의 '신유가 사상'
허린(1902-1992)은 논문 《유가사상의 새로운 전개》(儒家思想的新开展)에서 유교를 "본질"로, 서양 문화를 "응용"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12] 이후 《문화의 체와 용》(文化的体与用)에서 "정신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본질"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중국부터 외국까지의 모든 문화"를 "응용"으로 보는 것으로 생각을 수정했다. 그는 중국이 서양 철학 연구를 통해 유교 사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양 예술을 차용하여 유교적 미학을 풍부하게 하고, 서양 종교를 배워 유교적 의례 습관을 강화하며, 도교, 묵가, 법가를 흡수하여 유교를 풍요롭게 할 것을 장려했다.[13]허린은 소위 "중국 표준 문화 이론"을 비판하며,[14] 중국인들이 넓은 시야와 자유롭고 독립적인 정신으로 서양 철학과 문화의 정수를 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인들이 서양 철학의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음미하여 자신만의 사상적 성과로 소화하도록 장려했다. 이를 통해 서양 문화를 초월하고 버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3. 5. 리쩌허우의 '서체중용론'
리쩌허우(李泽厚, 1930년~)는 1986년에 "서학을 바탕으로, 중학을 활용한다"는 글을 써서 “중학을 바탕으로, 서학을 활용한다”는 주장을 뒤집었다.[15] 리쩌허우는 인민들의 실제 삶, 생산 방식, 경제만이 "바탕"(본질)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본질"은 물질적 생산과 정신적 생산을 포함하는 사회적 존재이며, 사회 발전에 초석이 되는 과학 기술 역시 "본질"의 일부이다.[16] 중국의 "활용"은 서양의 "본질"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 문화의 활용도 포함한다.장즈둥과 달리, 리쩌허우는 '체'(體, 바탕/본질)와 '용'(用, 기능/활용)이 두 개의 다른 실체/방식이 아니라 동일한 문제의 두 측면(''체용불이'' “體用不二”)으로, 둘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그의 맥락에서 근대화가 곧 중국화임을 의미한다.[17]
3. 6. 마르크스주의와 중체서용론
장대년은 1930년대에 "중체서용"에 반대하며, 이 개념이 중국 학문을 서양 학문과 대립시키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21] 1987년, 장대년은 "종합적 혁신의 문화적 관점"을 제시하며, "중국 민족은 새로운 사회주의 중국 문화를 건설하는 주체이며, 사회주의는 중국의 새로운 문화를 위한 지도 원리이다. 과학 기술은 모두 이 민족의 주체를 위해 봉사하며, 모두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한다."라고 주장했다.[22]팡커리는 1988년 "마르크스주의 정신, 중국의 체제, 서양의 응용" (马魂中体西用|마혼중체서용중국어)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23]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지침으로 삼고 중국 민족 문화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중국 학문, 서양 학문, 마르크스주의를 통합하려 했다. "종합적 혁신의 문화적 관점" 연구를 심화하며, 팡커리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새로운 문화 건설"에 긍정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정신"과 "서양의 응용"이 "중국의 본질"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24][25]
4. 중체서용론과 관련된 사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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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태평천국 운동]]
태평천국 운동은 19세기에 "서양 학문"의 부정적인 중국화의 한 예로 여겨졌다. 태평천국 운동은 부분적으로 이단 기독교 집단이자, "평등"이라는 서양적 가치에 기반한 원시 공산주의 농민 민병대로 볼 수 있다.[1]4. 2. [[변법자강 운동]]
캉유웨이를 중심으로 한 개혁가들은 서구 모델에 따라 제도 및 교육 개혁을 시도했지만, 명시적으로 유교 전통을 언급했으며, 실제로 개혁이 공자의 원래 의제라고 주장했다. 이후 청나라의 개혁파 관료들은 스스로 정치 체제 개혁에 착수한 변법자강 운동이나, 청나라 자체의 타도를 목표로 한 쑨원 등의 혁명 운동으로 급진화해 갔다.[29]4. 3. [[5·4 운동]]
5·4 운동의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은 낡은 전통(유교)과 새로운 전통(마르크스주의) 모두를 거부하고 새로운 형태로 "완전한 서구화"를 요구했다. 차이위안페이와 같은 주요 인물들은 새로운 전통(마르크스주의)을 개방하고 중국 문화 전통과 새로운 "서양 학문"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다.5. 대한민국과 중체서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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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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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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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文館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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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s Only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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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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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岱年文化哲学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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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jing Book Co. Inc.
2014-11-01
[29]
간행물
現在の中国における中体西用論研究の動向
学習院大学史学会
[30]
간행물
「中体西用」論と「学戦」——清末「中体西用」論の一側面と張之洞『勧学篇』
https://spc.jst.go.j[...]
中国研究所
[31]
서적
中国思想文化事典
東京大学出版会
[3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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