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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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봉유설은 17세기 초 조선의 문신 이수광이 저술한 백과사전으로, 당시 사회의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다. 이수광이 붕당 정치와 임진왜란을 겪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 견문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1614년에 완성했으며, 그의 사후 두 아들에 의해 1633년에 간행되었다. 천문, 지리, 군사,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며, 객관적인 사실 전달과 실용적인 학문 강조,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개방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실학 사상의 선구자로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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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유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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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유설 | |
![]() | |
저자 | 이수광 |
분야 | 유서, 백과사전 |
언어 | 한문 |
발표 | 조선 |
출판년도 | 1614년 |
상세 정보 | |
다른 이름 | 지봉집 |
권수 | 20권 |
내용 | 천문학, 지리학, 인사, 물산, 병기, 예악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음 |
가치 |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침 |
특징 | 중국의 백과사전인 본초강목, 삼재도회 등을 참고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내용을 구성함 |
참고 문헌 | |
원전 | 지봉유설 원문 (국립중앙도서관) |
관련 서적 | 지봉유설 (역주, 신승운 역) 지봉유설 연구 (이경남 저) |
2. 저술 배경
이수광이 살았던 17세기 초 조선은 안팎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안으로는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이 심해졌고, 밖으로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여진족(만주족)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가 바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14년 이수광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지봉유설》을 완성했다.
2. 1. 임진왜란의 영향
임진왜란(1592년)은 이수광에게 전란의 참상을 직접 체험하게 된 계기이자,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시금 되짚어보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2. 2. 붕당정치와 계축옥사
1613년 대북 세력이 주도한 계축옥사는 대규모 정치 보복으로 이어졌다. 이수광은 이 사건의 여파로 관직을 그만두고 동대문(흥인지문) 바깥에 있던 그의 자택에 은거하면서 그간 틈틈이 견문한 내용들을 모아 《지봉유설》을 완성하게 된다.3. 편찬 과정 및 간행
4. 구성
《지봉유설》은 총 2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문, 지리, 군사, 정치, 유학, 경서, 문학, 인물, 언어, 인사, 기술, 종교, 궁실, 복식, 식물, 동물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3,435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4. 1. 분류 체계
芝峯類說|지봉유설중국어은 천문, 지리, 군사, 정치, 유학, 경서, 문학, 인물, 언어, 인사, 기술, 종교, 궁실, 복식, 식물, 동물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각 권별 분류 체계는 다음과 같다.권수 | 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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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천문부(天文部), 시령부(時令部), 재이부(災異部) |
2 | 지리부(地理部), 제국부(諸國部) |
3 | 군도부(君道部), 병정부(兵政部) |
4 | 관직부(官職部) |
5 | 유도부(儒道部), 경서부(經書部)1 |
6 | 경서부(經書部)2 |
7 | 경서부(經書部)3, 문자부(文字部) |
8 | 문장부(文章部)1 |
9 | 문장부(文章部)2 |
10 | 문장부(文章部)3 |
11 | 문장부(文章部)4 |
12 | 문장부(文章部)5 |
13 | 문장부(文章部)6 |
14 | 문장부(文章部)7 |
15 | 인물부(人物部), 성행부(性行部), 신형부(身形部) |
16 | 언어부(言語部) |
17 | 인사부(人事部), 잡사부(雜事部) |
18 | 기예부(技藝部), 외도부(外道部) |
19 | 궁실부(宮室部), 복용부(服用部), 식물부(食物部) |
20 | 훼목부(卉木部), 금충부(禽蟲部) |
5. 내용
1613년 계축옥사의 여파로 관직을 그만두고 동대문(흥인지문) 밖에 은거하면서 틈틈이 견문한 내용들을 모아 《지봉유설》을 완성하였다. 1614년에 탈고되었으며, 책의 서두에는 이수광의 교우였던 김현성의 서문과 이수광 자신이 직접 쓴 서문, 그리고 편찬 원칙을 밝힌 3칙의 '범례'가 수록되어 있다. 1633년 두 아들에 의해 《지봉선생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출간되었다.
천문·지리·병정(兵政)·관직·유도(儒道)·경서·문학·인물·궁실·복용(服用) 등에 관하여 3,435개조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사실을 설명할 때는 주관적인 견해는 피하고 고서(古書)나 고문(古聞)에서 널리 참고하고 근거로 삼아 이를 채집, 인용하였고, 고서와 견문에서 발췌한 경우는 반드시 그 출처를 적었다.
5. 1. 다양한 출처 인용
이 책에는 육경(六經)부터 저자가 살았던 당시의 소설, 문집까지 348종의 서목(書目)과 2,265명의 인명이 인용되었다. 자료를 인용할 때 출처를 명확하게 밝혀서 신뢰성을 높였다.5. 2. 실용적 학문 강조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실천에 힘써야지 입으로만 떠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학문을 폭넓게 섭렵하되, 이단이라 해도 선입견에 빠져 배척하기보다 그것이 갖는 유용성에 가치를 두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었다. 인조반정 직후, 1625년에 국가 중흥을 위한 방책으로 그가 제시한 상소문은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해 제도를 개혁할 것을 추구하는 성리학자로서의 그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사회의 주류적인 사상이 성리학 이념이었고, 이수광 자신도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자였지만, 성리학의 모든 측면을 신념화하지 않고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강조하는가 하면, 성리학 이념을 보완할 수 있는 다른 사상 체계의 수용에도 적극성을 보였다.5. 3. 국제 정세와 해외 문물 소개
안남에서부터 유구, 섬라, 일본, 대마도, 진랍국, 방갈랄, 석란산 등 동남아 국가의 역사와 문화, 종교에 대한 정보들과 함께, 회회국, 불랑기국, 남번국, 영길리국, 대서국 등 유럽 국가들에 대한 정보까지 소개하였다. 이들 국가에 대해서는 자연환경, 경제 상황, 역사, 문화, 종교 등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실용적인 측면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불랑기국(포르투갈)이나 영길리국(영국)에 대해서는 이들 국가가 보유한 군함이나 화포에 대한 내용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직후 이수광이 서양의 국방력에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대서국(이탈리아) 항목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으로 들어와 《천주실의》를 소개하였다고 적었는데, 이는 조선의 기록에서 최초로 천주교 관련 내용이 등장하는 부분으로 평가받는다.5. 4. 조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
이수광은 서문에서 "예악의 나라로서 이름난 우리 문화와 행적이 뛰어난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데에"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지봉유설》 곳곳에는 이러한 정신이 담겨 있다. 「제국부」'본국'조에서는 여러 자료를 통해 우리 역사에서 논쟁이 되는 부분을 설명하고, 중국 《산해경》 등을 인용하여 우리나라가 군자국이라 불렸으며 동방은 전통적으로 착한 품성을 지닌 곳으로 여겨졌음을 강조한다. 고려라는 국호는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유래했으며, "중국에는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보기를 원한다는 시가 있으니 금강산의 이름이 천하에 떨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라며 우리나라 경치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또한 명나라에서 외국 사신들의 서열을 매길 때 우리나라를 첫째로 둔 이유가 "조선은 예의지국이고 시서가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언어부」'잡설'조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사람보다 나은 점 네 가지는 부녀자의 수절, 천인(賤人)의 장례 및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 쏘는 재주이다.", "우리나라에만 나는 것 네 가지는 경면지, 황모필, 화문석, 양각삼이다."라며 우리나라의 미풍양속과 물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술에 대해서는 "함부로 술 마시는 사람 치고 일찍 안 죽은 사람 없다. 술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여색보다도 더 심하다."라고 비판하면서도, 거창의 감, 보은의 대추, 밀양의 밤, 충주의 수박, 회양의 해송자(잣), 안변의 배를 우리나라 대표 과일로 꼽았다.
6. 평가 및 의의
《지봉유설》은 조선 시대 문화 백과사전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수광이 살았던 시대는 붕당정치가 본격화되고 임진왜란(1592년)과 같은 사건으로 대외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수광은 국가 발전과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으며, 이는 《지봉유설》에 반영되었다.
6. 1. 문화 백과사전의 효시
《지봉유설》은 당대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총합된 문화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초반의 저술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다양한 세계의 정보는 저자 이수광이 세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경험에서 얻은 것이었다. 명에서 사신 활동을 하면서 만난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신들과 서양인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수광은 이들 나라의 문물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조선에 비추어 보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점은 고유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 문화를 수용하는 데에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점이다.《지봉유설》은 조선 문화 백과사전의 효시를 이루는 저술로서, 당시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과제를 인식하고 국부 증진 및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학문적 모색을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다. 이수광의 학풍은 성리학 외의 다양한 학문을 거부감이나 선입견 없이 두루 탐구하는 박학풍과 외국에 대한 개방적인 인식을 보였으며, 이는 학문을 국가 발전이나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실현시키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 이러한 학풍은 후대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지봉유설》 이후 저술된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의 저술에서 보이는 백과사전적 학풍은 바로 《지봉유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수광 이후 실학이 지향한 실용적, 개방적 학풍도 《지봉유설》이 제공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이르면 이수광은 국학자들에 의해 실학의 선구자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6. 2. 실학 사상의 선구
이수광은 성리학 외 다양한 학문을 거부감 없이 탐구하고 외국에 대한 개방적인 인식을 보였으며, 이는 국가 발전과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학문을 실현하려는 목표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이수광의 학풍은 후대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지봉유설》은 이러한 학풍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이후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백과사전적 학풍의 저술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수광의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학풍은 《지봉유설》을 통해 후대에 전해져 실학 사상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1930년대에는 국학자들에 의해 실학의 선구자로 공식화되었다.6. 3. 객관적 세계 인식
이수광은 세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국제 정세와 해외 문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세계와 함께 공존하는 사회임을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수광이 살았던 시대는 조선 안으로는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정치 세력 간의 정쟁이 심화되었고, 밖으로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여진족(만주족)이 흥기하면서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특히 임진왜란(1592년)은 이수광에게 전란의 참상을 직접 체험하게 하고,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다.6. 4. 국학 연구의 중요 자료
芝峯類說중국어은 이수광이 52세 때인 1614년(광해군 6년)에 탈고한 책으로, 한 가지 사실을 체계적으로 논술하여 일시에 완성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오랜 시일에 걸쳐 보고 들은 사실, 평소에 느끼고 깨달은 바를 그때그때 메모했다가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분류 편찬한 것이다. 1633년(인조 11년) 저자의 두 아들에 의해 芝峯先生集중국어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출간되었다. 책의 서두에는 이수광의 교우였던 김현성의 서문과 함께 이수광 자신이 직접 쓴 서문, 그리고 편찬 원칙을 밝힌 3칙의 '범례'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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