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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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운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봉오동 전투의 숨은 영웅으로 불린다. 1885년 옌볜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거부가 된 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부대 통합을 이끌고, 대한북로독군부 창설에 기여했으나, 재산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사용하고 여러 차례 투옥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45년 광복을 앞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최운산은 1885년 11월 7일, 고종이 파견한 동간도 옌볜 관리책임자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군사 경력을 쌓았으며,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북만주 제1의 거부'로 불릴 만큼 큰 재산을 모았다. 그는 이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봉오동 일대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장 부대를 양성하는 데 헌신했다.[2]
형제 중 최진동은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나, 최치흥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다가 대한민국으로 귀환한 최치흥의 후손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6]
최운산의 형인 최진동은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나, 다른 형 최치흥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다가 국내로 귀환한 최치흥의 후손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1]
저널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https://news.naver.c[...]
서울신문
2019-04-03
2. 생애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군무도독부 창설에 참여하여 참모장으로서 병참을 책임졌고, 1920년에는 여러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이끌어 대한북로독군부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에 가까운 막대한 군자금(당시 5만 원, 현재 가치 약 1500억원)을 지원하고 무기 구매를 주도하는 등 독립군의 전력 강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2][3] 이러한 준비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의 대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이 승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고 이후 청산리 대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후 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총 여섯 차례의 옥고를 치렀으며, 봉오동 전투 이후에도 여러 전투에 참전하며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말년에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45년 7월 5일, 광복을 불과 40여 일 앞두고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다.[3]
봉오동 전투 승리의 숨은 주역이었음에도 그의 공적은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사후 32년 만인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이르러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으로 격상되었다. 2008년에는 '최문무'라는 이름으로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이것이 최운산의 다른 이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4][5]
2. 1. 초기 생애와 배경
1885년 11월 7일,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동간도 옌볜(延邊)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1908년 동삼성(동북 3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다. 최운산은 왕청현 총대로도 활동했으며, 동삼성 일대의 지적 정리 과정에서 광대한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목장에서 키운 소들은 최소 100마리에서 수백 마리 단위로 훈춘을 거쳐 연해주로 팔려 나갔고, 콩기름 공장 등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며 북만주 제1의 거부로 성장했다. 그는 이 자산을 바탕으로 동간도의 지리적 요충지인 봉오동 골짜기에 신한촌과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장 독립군대를 양성하여 국내 진공의 기회를 모색했다.[2]
1912년, 최운산은 1개 중대 병력으로 자위대를 처음 구성했으며, 부대 규모는 점차 확대되었다. 1915년에는 봉오동에 막사를 짓고 연병장을 마련하여 부대원들을 본격적으로 훈련하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같은 해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670명 규모의 자위부대를 대한군무도독부라는 이름의 정식 독립군 부대로 재창설했다. 이 부대에서 최운산은 참모장을 맡아 병참을 책임졌고, 형 최진동이 사령관, 동생 최치흥이 참모를 맡았다.[2]
2. 2. 독립운동 투신과 봉오동 기지 건설
최운산은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동간도 옌볜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 1885년 11월 7일 태어났다.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1908년 동삼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하며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왕청현 총대로 활약하던 중, 동삼성 일대의 지적 정리 과정에서 광대한 황무지를 헐값에 사들일 기회를 얻었다. 그는 목장에서 소 수백 마리를 키워 훈춘을 거쳐 연해주로 판매하고, 콩기름 공장 등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며 북만주 제1의 거부로 불릴 만큼 큰 재산을 모았다.
최운산은 이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삼았다. 동간도의 지리적 요충지인 봉오동 골짜기에 신한촌과 함께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에 맞서 싸우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2] 1912년에는 약 1개 중대 규모의 자위대를 조직했으며, 부대 규모가 점차 커지자 1915년 봉오동에 막사와 연병장을 건설하여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운산은 670명 규모의 자위부대를 대한군무도독부라는 이름의 정식 독립군 부대로 재편성했다. 그는 참모장을 맡아 군수물자 보급 등 병참을 책임졌고, 형 최진동이 사령관, 동생 최치흥이 참모를 맡아 삼형제가 부대를 이끌었다. 이듬해에는 봉오동 기지 내에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1920년 5월, 최운산은 분산되어 있던 여러 독립 세력을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로군정서, 대한국민회, 군무도독부, 대한신민단, 광복단, 의군부 등 6개 단체 대표들이 봉오동에 모여 연석회의를 열었고, 그 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을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이 통합 부대에서 최운산은 참모장을 맡았으며, 부장(사령관 격)에는 최진동, 부관에는 안무가 임명되었고, 홍범도는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을 맡았다.
독립군 운영과 전투 수행에 필요한 무기, 식량, 피복 등 모든 군수물자 조달은 주로 최운산이 담당했다. 그는 자신의 땅을 팔아 당시 화폐로 5만 원(현재 가치 약 15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군자금을 마련했다. 이 자금력은 독립군의 무장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 내전에 휘말렸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귀국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판매하려 했을 때, 최운산의 자금과 러시아 내 네트워크를 통해 독립군이 이 무기들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독립군들은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하는 작전을 산발적으로 펼쳤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며 국경 지역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20년 6월 4일 새벽, 박승길이 이끄는 신민단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자, 일본군은 보복으로 두만강을 넘어 지린성 허룽현 삼둔자까지 침입하여 양민들을 살육했다.
이 소식을 접한 대한북로독군부는 철수하는 일본군을 삼둔자에서 매복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이는 봉오동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였다. 이에 격분한 일본군은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6월 6일 밤,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최운산이 구축한 봉오동 기지의 지형을 활용한 유인 및 매복 작전으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망 157명, 부상 300여 명의 큰 피해를 입은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2명에 불과했다.
청산리 대첩, 대전자령 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으며, 독립군 연합에 대한 열망과 기대도 높아졌다. 이는 그해 10월 항일 무장 투쟁 역사상 최대의 승리로 평가받는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봉오동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여러 부대를 통합하여 봉오동 전투 승리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최운산의 공로는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도 그의 역할은 형 최진동의 동생으로서 군자금 5만 원을 지원하고 삼형제가 함께 부대를 조직했다는 정도로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한때 '만주 최고 부호'로 불렸던 최운산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봉오동 산중에 독립 투쟁 기지를 건설하고 무기와 군자금을 지원한 숨은 영웅이었으며, 그가 없었다면 봉오동 전투의 승리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3]
2. 3. 대한북로독군부 창설과 봉오동 전투
동간도의 중요한 지역인 봉오동 골짜기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장 독립군을 키워 국내로 진공할 기회를 엿보았다.[2] 1912년에는 자위대를 조직했으며, 1915년에는 봉오동에 막사와 연병장을 마련하여 부대 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기존의 자위대를 확대하여 대한군무도독부라는 이름의 독립군 부대로 정식 창설했다. 그는 이 부대의 참모장을 맡아 군수 물자 지원 등 병참을 책임졌으며, 형 최진동이 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5월, 최운산은 여러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주도했다. 북로군정서, 대한국민회, 군무도독부 등 여러 단체 대표들이 봉오동에 모여 회의를 열었고, 그 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을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이 통합 부대에서 최운산은 참모장을 맡았으며, 부장(사령관)에는 최진동, 부관에는 안무가 임명되었다. 홍범도는 북로 제1군사령부 부장을 맡았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운영과 전투에 필요한 무기, 식량, 피복 등 모든 군수 물자는 최운산이 책임지고 조달했다. 그는 자신의 땅을 팔아 마련한 군자금 5만 원(현재 가치 약 150억 원 추정)을 투입했으며, 이 자금과 인맥을 활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 군단이 판매하는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독립군을 무장시켰다.
1920년에 들어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 작전을 벌였고,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며 만주 내 한인 마을을 공격하고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20년 6월 4일, 신민단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의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자 일본군은 두만강을 넘어 중국 영토인 삼둔자까지 추격해 와서 보복으로 양민을 학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대한북로독군부는 삼둔자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는 봉오동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삼둔자 전투였다.
삼둔자 전투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왔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유인 및 매복 작전을 통해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며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망 157명, 부상 300여 명의 큰 피해를 입었으나,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2명에 불과했다.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와 더불어 독립군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만주에서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 사이에 벌어진 첫 대규모 전투였다. 이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부대 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봉오동 전투의 승리에는 봉오동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부대 통합을 이끌었으며,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한 최운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으나, 그의 공적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만주 최고 부호'로 불릴 만큼 부유했던 그는 전 재산을 독립군 지원과 기지 건설에 투입했으며, 그의 헌신이 없었다면 봉오동 전투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3]
2. 4. 봉오동 전투 이후의 활동과 시련
봉오동 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진지 구축과 부대 통합을 이끌어낸 최운산의 공로는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최진동의 동생으로 군자금 5만 원을 지원하고 이들 3형제가 합심해 도독부 및 독군부를 조직했다"는 정도로만 간략히 기재되어 있을 뿐이었다.[2]
'만주 최고 부호'로 불릴 만큼 부유했던 최운산은 독립군에게 무기와 군자금을 제공하며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봉오동 산중에 투쟁 기지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으며, 이 때문에 "최운산이 없었다면 1920년 봉오동 전투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3]
그러나 재산 대부분을 군자금으로 사용한 뒤, 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에는 일본 경찰서 습격,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의 혐의로 다시 10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등 평생 총 6번의 감옥살이를 겪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 전투, 나자구 전투, 대황구 전투, 도문대안 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직접 참전하며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말년에는 더욱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일본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평양으로 피신했다. 최운산 역시 광복 직전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풀려나자마자 아들이 있는 평양으로 피신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1945년 7월 5일, 광복을 불과 40여 일 앞두고 평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32년 만인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5등급인 애족장으로 격상되었다. 한편, 국가보훈처가 2008년 '최문무'라는 인물에게 애국장을 추서했는데, 이 최문무가 최운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주장[4]과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5]
2. 5. 최후와 사후 평가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군자금으로 사용한 최운산은 이후 어려운 삶을 살았다. 그는 일생 동안 총 여섯 차례의 옥고를 치렀는데, 1924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투옥되었고, 1939년에는 일제 경찰서 습격,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의 이유로 다시 10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 전투, 나자구 전투, 대황구 전투, 도문대안 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직접 참여하며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말년에는 일본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 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 평양으로 피신하는 아픔을 겪었다. 최운산 역시 광복 직전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풀려난 직후 아들이 있는 평양으로 피신했으나 끝내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45년 7월 5일, 광복을 불과 40여 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3]
그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봉오동 전투에서의 핵심적인 역할, 특히 독립군 기지 구축과 부대 통합을 이끌어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공로는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도 그의 역할은 형 최진동의 동생으로서 군자금을 지원하고 3형제가 함께 독립군 부대를 조직했다는 정도로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었다.[2][3]
순국한 지 32년이 지난 1977년에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으로 격상되었다. 한편, 국가보훈처가 2008년 최문무라는 인물에게 애국장을 추서했는데, 이 최문무가 최운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주장[4]과 이에 대한 반론[5]이 제기되기도 했다.
3. 가족 관계
부인은 김성녀이다. 김성녀는 광복 이전까지 만주에서 독립군 대부대가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군복 제작, 독립군 식사 준비, 비밀 첩보 활동, 군자금 모금, 정보 전달 등 독립군의 살림 일체를 담당하며 독립 전선에서 활동했지만, 현재 자료 부족으로 서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성녀 본인이 남편 최운산의 서훈을 위해 작성했던 진정서에는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나마 담겨 있다.[7]
최운산과 김성녀 사이에는 11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그중 4명은 어려서 잃었다. 성장한 자녀는 딸 넷(청옥, 영옥, 옥순, 계순)과 아들 셋(봉우, 봉학, 호석)으로 총 7남매이다. 현재 막내아들 최호석이 생존해 있다.[8]
3남 4녀의 자녀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장남 최봉우는 한국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셋째 아들 최호석은 큰누나, 둘째 형과 함께 중국 도문에 남겨졌다. 그러다 1986년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대한민국에 살던 큰형 최봉우와 재회했고,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화했다. 최호석은 국내 대학에서 중국어 강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나, 당뇨병과 척추 및 목 수술 등으로 인해 가계가 어려워졌다. 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의 14평짜리 빌라에 거주하며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지급되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9]
4. 최운산에 대한 재조명
2018년 8월 13일, EBS 1TV는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발굴추적, 어느 삼형제의 선택>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최씨 삼형제를 새롭게 조명했다.[6]
최운산의 부인 김성녀는 만주에서 독립군 대부대가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한 인물이다. 그녀는 군복 제작, 독립군 식사 준비, 비밀 첩보 활동, 군자금 모금, 정보 전달 등 독립군의 살림 전반을 책임지며 독립운동에 기여했지만, 현재는 자료 부족으로 서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성녀 본인이 남편의 서훈을 위해 작성한 진정서에는 당시 독립운동 상황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7]
최운산과 김성녀 사이에는 11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4명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청옥, 영옥, 옥순, 봉우(鳳羽), 봉학(鳳鶴), 계순, 호석 등 3남 4녀, 총 7남매가 성장했다. 현재는 막내아들 최호석이 생존해 있다.[8]
자녀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뿔뿔이 흩어졌다. 장남 최봉우는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셋째 아들 최호석은 큰누나, 둘째 형과 함께 중국 도문에 남겨졌다가, 1986년 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을 계기로 한국에 살던 큰형 최봉우와 재회하여 한국으로 귀화했다. 최호석은 국내 대학에서 중국어 강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나, 당뇨병과 척추 및 목 수술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현재는 서울 화곡동의 작은 빌라에 거주하며 독립유공자 후손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9]
참조
[2]
저널
독립운동가 최운산을 아십니까?
https://news.naver.c[...]
시사IN
2019-01-05
[3]
저널
친일파 백선엽이 전쟁영웅? 100세 생존 독립운동가의 일갈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7-03
[4]
저널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봉오동 전투의 숨은 영웅 최운산을 아시나요"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9-07-04
[5]
저널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과 최문무는 이명동인(異名同人)인가?
https://blog.naver.c[...]
김광석블로그
2019-06-21
[6]
저널
한국 독립전쟁의 숨은 공신 ‘최씨 삼형제’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8-08-12
[7]
저널
“여성독립운동가 서훈자 확대해야… 추가 자료 제출”
http://www.newscj.co[...]
천지일보
2018-10-23
[8]
저널
"[연재] 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 8. 그의 자녀들(1)"
http://www.hanion.co[...]
한겨레온
2019-03-05
[9]
저널
하루 살기도 벅찬 ‘투사의 후손’들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1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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