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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헤르만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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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헤르만 프랑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체코인과 유대인을 증오하는 인종 철학을 갖게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 복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독일 우익 단체에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 주데텐란트의 독일 편입을 주장했다. 나치당에 입당하여 친위대 소장으로 활동했으며, 체코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가 되어 유대인과 반체제 인사 색출에 앞장섰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프라하 봉기 진압을 지휘하고 연합군 환영 군중에게 발포하여 많은 체코인을 학살했다. 독일 패전 후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어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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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헤르만 프랑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1년 경 카를 헤르만 프랑크
1941년 경
출생일1898년 1월 24일
출생지카를로비바리, 보헤미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망일1946년 5월 22일
사망지프라하 판크라치 교도소, 체코슬로바키아
사망 원인교수형
안장지프라하 댜블리체 묘지, 체코슬로바키아
정당DNSAP (1919–1923)
SdP (1933–1938)
NSDAP (1938–1945)
배우자안나 뮐러 (1925–1940, 이혼)
카롤라 블라셰 (1940년 결혼)
자녀5명
알려진 이유리디체 학살
범죄 상태사망
유죄 판결전쟁 범죄
형벌사형 (교수형)
군사 경력
소속슈츠슈타펠
지휘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고급 SS 및 경찰 지도자
훈장전쟁 공로 십자장 검 부착, 2급 및 1급
정치 경력
직책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담당 국무장관
임기 시작1943년 8월 20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지도자아돌프 히틀러 (총통으로서)
기타 직책
직책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부 차관
임기 시작1939년 4월 30일
임기 종료1943년 4월 20일
직책나치 독일 국회의원
선거구주데텐
당선 횟수1회
임기 시작1938년 12월 4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직책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주데텐란트 제국 대관구 지도자 대리
임기 시작1938년 11월 4일
임기 종료1939년 3월 15일
직책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의원
선거구7구 (카를로비바리)
임기 시작1935년 5월 19일
임기 종료1938년 10월 30일
직책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HSSPF
임기 시작1939년 4월 28일
임기 종료1945년 4월
직책주데텐란트 HSSPF
임기 시작1944년 2월 25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직책친위대 상급 지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지도자
임기 시작1944년 3월 11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2.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로비바리에서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강한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반체코 감정을 배우며 자랐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시도했으나 신체적 문제로 거부되었고, 이후 프라하에서 법학을 잠시 공부했으나 마치지 못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여러 독일 우익 단체 활동에 참여했다. 1933년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주데텐 독일 향토 전선'(Sudetendeutsche Heimatfront, SdH) 창설에 참여했고, 이 조직이 1935년 주데텐 독일인당(SdP)으로 개편되자 선전부장을 맡았다. 같은 해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당 부대표가 되어 주데텐란트나치 독일 병합을 강력히 주장하는 급진 노선을 이끌었다.

1938년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할양되자 부가우라이터가 되었고, 나치당과 SS에 가입하여 하인리히 힘러의 후원으로 친위대 소장 계급을 받았다. 1939년 독일이 체코를 병합하여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을 설치하자, 프랑크는 보호령의 상급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겸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체코인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주도했다.

1941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부총독으로 부임하자 초기에는 경쟁 관계였으나 곧 긴밀히 협력하며 공포 정치를 강화했다. 1942년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자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복 학살을 지시했으며, 후임 부총독 쿠르트 달루에게와 함께 리디체 학살 등 잔혹 행위를 이어갔다. 1943년 달루에게가 병으로 물러나고 빌헬름 프리크가 명목상 총독으로 임명되자, 프랑크는 신설된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담당 '''국무상'''(Staatsminister)에 올라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전쟁 말기 프라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45년 5월 9일 독일 패전 후 미군에 투항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었다. 프라하 인민 법정에서 전쟁 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5월 22일 판크라치 교도소에서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2.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체코슬로바키아 시절 (초기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로비 바리(현재 체코 카를로비 바리)에서 독일계 초등학교 교사 하인리히 프랑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파울리나(옛 성 에벨하르트)였다. 동생으로는 작가 에른스트 프랑크가 있다. 아버지는 게오르크 리터 폰 쉐네러의 정책을 지지했으며, 프랑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체코인유대인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1903년부터 1916년까지 카를스바트의 초등학교와 인문 김나지움에 다녔다. 1912년에는 독일 청년 운동 조직인 반더포겔의 카를스바트 지부를 공동 창설하고 1916년까지 리더를 맡으며 유스호스텔 건설과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는 에거란트에서 농업 봉사 활동 운동의 리더를 맡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육군 보병 연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오른쪽 눈의 시력 문제로 거부당했다. 이후 네 차례 더 입대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준군사 조직인 '청년 방위대'(Jungsschutz)에 소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카렐 대학교 법학부에서 1년간 공부했으나 학위는 취득하지 못했다. 돈을 벌기 위해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17년부터 1918년까지는 프라하의 비즈니스 대학 과정도 수강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그의 고향 카를스바트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가 되었다. 프랑크는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비트코비체에서 공무원으로 일했고, 이후 서점에서 근무했다. 1932년부터는 카를스바트에서 직접 서점을 운영했는데, 주로 나치 관련 서적을 취급했다.

프랑크는 여러 독일 민족주의 우익 단체에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19년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하여 1923년까지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DNSAP)의 북부 보헤미아 및 실레지아 지부 설립에 관여했다. 1933년 10월 1일에는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주데텐 독일 향토 전선'(Sudetendeutsche Heimatfront, SdH) 창설에 참여하여 카를스바트 지역의 준군사 조직 설립을 담당했다.

1935년 4월 19일, SdH가 주데텐 독일인당(Sudetendeutsche Partei, SdP)으로 개편되자 프랑크는 초기 당원(당원 번호 18)으로 합류하여 당의 선전·선동 부서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19일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선거에서 카를스바트 선거구 SdP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35년 12월에는 SdP의 부당수 겸 당 중앙정치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나치 노선을 대변했으며, 처음에는 주데텐란트의 체코슬로바키아 잔류를 고려했던 당수 헨라인에게 영향을 미쳐 독일 편입을 강력히 주장하는 입장으로 선회시켰다.

1938년 10월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할양되자, 프랑크는 주데텐란트의 부가우라이터가 되었다. 그는 1938년 11월 1일 공식적으로 나치당과 SS에 가입했으며(SS 번호 310,466), 하인리히 힘러의 초청으로 입대하여 친위대 준장 계급을 부여받았다. 같은 해 12월 4일에는 주데텐란트 지역구에서 독일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 2. 나치 독일 시절

1938년 10월 주데텐란트 지방이 독일에 할양되자 프랑크는 콘라트 헨라인의 대리로 임명되었다. 11월 1일에 SdP에서 나치당(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이적했으며(당원 번호 6,600,002), 같은 날 하인리히 힘러의 초청으로 친위대(SS)에 입대하여(대원 번호 310,466) 친위대 소장(SS-''Gruppenführer'') 계급을 받았다. 1938년 12월 4일에는 주데텐란트 선거구에서 독일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4월 28일, 독일에 병합된 체코(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상급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30일에는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보호령 총독 아래 국무장관이 되었다. 힘러는 그를 보호령 내 최고위 친위대 장교로 만들었으며, 프랑크는 게슈타포, SD, 크리포를 포함한 보호령 내 나치 경찰 조직을 통제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국무장관이자 경찰 수장으로서 프랑크는 반체제 체코인에 대한 가혹한 탄압 정책을 추구했고, 보헤미아-모라바 총리 알로이스 엘리아슈의 체포를 밀어붙였다. 이러한 프랑크의 강경책에 맞서 노이라트는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며 반독일 저항을 부추겼는데, 이는 프랑크를 좌절시키고 노이라트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보헤미아-모라바에서 더욱 강경한 접근을 원했던 히틀러는 1941년 9월 23일 노이라트를 실권 없는 명목상 총독으로 남겨두고 해임했다. 프랑크는 자신이 부총독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길 바랐으나, 히틀러는 대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선택하여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 분쇄와 군수품 생산 할당량 유지 임무를 맡겼다. 야심차고 잔혹했던 프랑크와 하이드리히는 처음에는 서로 경계했지만, 곧 긴밀히 협력하며 보호령에서 공포 정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를 체포 및 살해하고, 유대인들의 강제 수용소 이송을 가속화했다. 하이드리히에 따르면, 1942년 2월까지 4,000명에서 5,000명이 체포되었고 400명에서 500명이 처형되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프랑크를 유대인 혐오자이자 "슈트라이허 부류"의 인물로 묘사하며, 그가 유난히 잔혹하게 억압을 자행했다고 평가했다.

리디체 파괴


1942년 5월 27일, 하이드리히가 영국과 체코 망명 정부가 보낸 암살 부대에 의해 습격당하자(→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프랑크는 즉시 체코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심되는 체코인 157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하이드리히가 사망하자 프랑크는 다시 부총독 자리를 노렸으나, 히틀러와 힘러는 질서 경찰청장 쿠르트 달루에게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달루에게와 프랑크는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체코 마을인 리디체와 레자키를 파괴하는 리디체 학살을 주도했다. 특히 리디체 주민들에 대해 프랑크는 프라하의 보안 경찰(SiPo) 및 보안국(SD) 책임자인 호르스트 뵈메에게 모든 남성을 사살하고, 모든 여성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며, 소수의 "독일화" 가능 아동을 제외한 나머지 아동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9월 1일까지 총 3,188명의 체코인이 체포되었고, 그중 1,357명이 즉결 처형되었다.

1942년 9월, 쿠르트 달루에게와 카를 헤르만 프랑크. 배경은 에밀 하하 보헤미아-모라비아 국가 원수.


1943년 6월, 프랑크는 SS-''오버그루펜퓌러''이자 프라하 경찰청장으로 승진했으며, 무장 친위대의 장군 계급도 받았다. 1943년 8월, 병석에 누운 달루에게가 모든 직위에서 사임하고 명목상 총독이었던 노이라트도 공식 해임되었다. 신임 총독으로 전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가 임명되었지만 이는 사실상 좌천 인사였고 실권은 없었다. 같은 해 8월 20일, 프랑크는 히틀러 내각에 신설된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담당 '''국무상'''(Staatsminister)에 임명되었다. 이는 제국 장관(Reichsminister)보다는 낮은 직위였으나 의전상 동급 대우를 받으며, 프랑크는 보호령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10월 28일에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독일 적십자사 지도자가 되었다.

1944년 2월 25일부터는 수데텐란트의 상급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를 겸임했다. 같은 해, 그는 얀 지슈카 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모라바에서 벌어진 유격대 토벌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3,000명의 병력을 동원하고 유격대를 도운 민간인들을 즉결 처형하는 등 강경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유격대를 완전히 소탕하지 못하고 위협이 제거되었다고 잘못 판단했다.

대전 말기 프라하 봉기가 일어나자 프랑크는 잔혹한 진압을 명령했으며,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기 가담자들은 피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연합군이 프라하로 진격해오자 이를 환영하려는 군중에게 독일군과 경찰이 발포하도록 명령하여 수많은 체코인을 학살했다.

독일 패전 후 프랑크는 1945년 5월 9일 미군에 투항했지만, 신병은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어 프라하의 인민 법정에 세워졌다.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판크라치 교도소 앞뜰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처형을 보기 위해 5,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2. 3. 전범 재판 및 처형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프랑크는 1945년 5월 9일 플젠 근교 로키차니 지역에서 미국 육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신병은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어 프라하의 인민 법정에 회부되었고, 1946년 재판을 받았다.

프라하 인민 법정 앞의 프랑크, 1946년 5월 21일


프랑크는 전쟁 범죄 및 리디체와 레자키 마을 파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5월 22일, 프라하의 판크라츠 감옥 안뜰에서 5,000여 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처형 장면은 영상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의 최후의 말은 Es lebe das deutsche Volk! Es lebe der deutsche Geist!|에스 레베 다스 도이체 폴크! 에스 레베 데어 도이체 가이스트!de (독일 민족 만세! 독일 정신 만세!)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프라하 댜블리체 묘지의 이름 없는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3. 가족 관계

프랑크는 평생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Anna Müller|안나 뮐러deu(1899년 1월 5일 카를스바드 출생)로, 1925년 1월 21일에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Harald|하랄드deu(1926년 1월 20일생)와 Gerhard|게르하르트deu(1931년 4월 22일생)가 태어났다. 이들은 1940년 2월 17일에 이혼했으며, 같은 해 안나 뮐러는 프랑크의 후임 주데텐란트가울라이터이자 SA-여단지도자였던 프리츠 쾰러(Fritz Köllnerdeu)와 재혼했다.

두 번째 부인은 의사 Karola Blaschek|카롤라 블라셰크deu(1913년 8월 13일 브뤽스 출생)로, 1940년 4월 14일에 재혼했다. 카롤라는 주데텐 독일인 당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Edda|에다deu(1941년 8월 16일생)와 Holle-Sigrid|홀레-지그리트deu(1944년 3월 8일생), 아들 Wolf-Dietrich|볼프-디트리히deu(1942년 8월 20일생)가 태어났다.

4. 기타


  • 뉘른베르크 재판 중 인터뷰에서 빌헬름 프리크는 프랑크에 대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후, 히틀러는 보복으로 5만 명의 체코인을 살해하라고 명령했지만, 프랑크는 체코인에게도 가족이 있다고 말하며 규모를 축소하도록 간접적으로 진언했다"라고 증언하며 그에게도 일부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 신앙은 원래 가톨릭이었지만, 친위대의 방침에 따라 1942년에 교회를 떠났다.

5. 계급

wikitext

날짜계급
1938년 11월 1일친위대 이등병
1939년 1월 30일친위대 소장
1939년 3월 18일차관
1940년 1월 24일친위대 중장
1942년 7월 1일경찰 중장
1943년 6월 21일친위대 대장
1944년 6월 20일무장친위대 및 경찰 대장


6. 서훈 내역


  • 전공 십자 훈장
  • * 검 부착 2급 훈장 (1942년 수훈)
  • * 검 부착 1급 훈장 (1942년 수훈)
  • * 검 부착 기사십자 철십자장 (1945년 5월 1일 수훈)
  • 1938년 10월 1일 기념 메달
  • * 약장 "프라하 성"
  • 1938년 3월 13일 기념 메달
  • 금테 당원장 (1939년 1월 30일)
  • 금테 히틀러 유겐트 명예장
  • 근속 훈장 Dienstauszeichnungde
  • * 나치당 근속 훈장
  • ** 동장
  • ** 은장
  • 친위대 명예 링
  • 친위대 전국 지도자 명예 장검 (1939년 1월 13일 수훈)
  • 이탈리아 왕관 훈장 Ordine della Corona d'Italiait
  • * 대장교장 (1941년 2월 12일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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