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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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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플레브스 출신으로, 기원전 102년 집정관을 역임한 로마의 정치가이다. 그는 킴브리족과의 전쟁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승리했으나, 이후 마리우스와 대립했다. 카툴루스는 웅변가이자 시인이었으며, 헬레니즘 문화를 로마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건축 활동을 통해 로마를 장식했으며, 말년에는 마리우스의 정적에 의해 기원전 87년에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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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로마자 표기Quintus Lutatius Catulus
출생기원전 150년경
사망기원전 87년
출신 계급평민
씨족루타티우스 씨족
가족 관계
배우자도미티아
세르빌리아
클라우디아
자녀Q.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루타티아
경력
법무관기원전 109년 이전
집정관기원전 102년
전직 집정관기원전 101년
군사 경력
참전 전쟁킴브리-테우토니 전쟁

2. 출신

카툴루스는 플레브스(평민) 루타티우스 씨족 출신이다. 카툴루스라는 코그노멘(셋째 이름, 가족명)은 강아지를 의미한다. 이 씨족 최초의 집정관은 기원전 242년의 집정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이며, 동명의 아들도 기원전 22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25] 그러나 그 후 100년 이상 씨족에서 고위 관직자는 나오지 않았다.[26] 이 때문에 역사가 F. 뮌처는 노빌레스(신귀족)로서의 루타티우스 씨족은 기원전 2세기 말에는 몰락했다고 추측하고 있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툴루스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파트리키(귀족) 세르빌리우스 씨족[28]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기 때문에[29], 루타티우스 씨족이 로마 상류 계급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5] 아내의 형제는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지지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30]

카툴루스의 아버지 프레노멘도 퀸투스였지만,[31] 카툴루스가 어렸을 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25] 카툴루스의 어머니는 플레브스 포필리우스 씨족 출신이었지만,[32] 파트리키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재혼했다.[25] 율리우스 씨족은 오래된 씨족이지만 기원전 267년의 루키우스 율리우스 리보 이후 집정관이 된 것은 기원전 157년의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뿐이었다.[33] 이 재혼으로 태어난 카툴루스의 이복 동생으로는 기원전 90년의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가 있다.[34][35] 두 동생과는 나이 차이가 났지만, 평생 따뜻한 관계를 유지했다.[25]

3. 초기 경력

카툴루스는 대략 기원전 150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청년기는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기원전 129년 사망)와 그라쿠스 형제(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 사망,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21년 사망) 시대였다.[36] 키케로에 따르면 카툴루스는 "스키피오 서클"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키케로의 『변론가에 대하여』에서 카툴루스는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3명이 그리스 철학자의 로마 도착을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여러 번 그에게 말했다고 언급했다.[37] 카툴루스는 군 경력의 시작으로 스키피오가 지휘한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에서의 누만티아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25] 그곳에는 후에 유명해지는 많은 젊은이들이 종군했는데, 가이우스 그라쿠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후의 알로브로기쿠스, 기원전 121년 집정관), 셈프로니우스 아셀리오(역사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기원전 105년 집정관), 가이우스 멤미우스(아마도 기원전 111년의 호민관[38]), 가이우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후의 카프라리우스, 기원전 113년 집정관), 누미디아 왕자 유구르타 등이다.[39]

카툴루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두 번의 호민관 임기 동안 (기원전 122년-121년) 그 연설을 들었을 것이다.[25]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카툴루스에게 "당신이 나보다 그의 일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40] 후에 그라쿠스의 사용인이자 과학자였던 리키니우스가 카툴루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어 이전 주인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41]

늦어도 기원전 121년까지 카툴루스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에피오(기원전 140년 집정관)의 딸과 결혼했다.[25] 처남이 되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에피오(기원전 106년 집정관)는 기원전 110년대에 많은 집정관을 배출한 메텔루스 가문의 정치적 동맹자였다. 기원전 107년 이전의 카툴루스의 정치 경력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기원전 107년 말에 치러진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빌리우스 법의 규정에서 역산하여 늦어도 기원전 109년까지는 프라에토르(법무관)를 역임했을 것이다.[42] 기원전 109년의 집정관이 처남의 동맹자인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인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기원전 109년에 법무관을 역임하고 시칠리아 속주와 같은 식량 수출 지역의 총독으로 파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43]

4. 집정관 선거

카툴루스는 기원전 107년 말부터 집정관 선거에 여러 번 출마했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비롯한 신인(노부스 호모)들에게 번번이 패배했다.[44][45] 세 번의 낙선 끝에, 기원전 102년 집정관 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되었다.[47][49]

카툴루스는 기원전 107년 의형제 카이피오와 함께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카이피오는 당선되었지만 카툴루스는 낙선하였다. 다른 당선자는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였다.[44] 이듬해에는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와 함께 출마했지만, 또다시 그나이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패배하였다.[45] 기원전 105년에는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에게 패배하여 세 번 연속 낙선하였다.[25]

기원전 104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두 번째 집정관에 취임한 이후 5년 연속 집정관직을 맡게 되면서, 사실상 동료 집정관을 선택할 권한까지 가지게 되었다.[48] 기원전 103년에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가 선출되었고, 기원전 102년에는 카툴루스가 선출되었다.[49]

카툴루스의 당선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반(反) 마리우스파의 승리로 "영구 집정관"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했다는 설,[50][51] 플루타르코스가 언급한 대로, 카툴루스가 귀족과 민중 양쪽에게 호감을 얻어 마리우스가 타협했다는 설,[52][25] 오히려 마리우스의 지원 덕분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25] 마리우스는 자신의 아내와 카툴루스 어머니가 모두 율리우스 씨족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지나치게 독립적이지 않은 동료를 원했을 수 있다.[25] 또한 카툴루스가 마리우스에게 접근함으로써, 메텔루스 가문에게 타격을 주었을 수도 있다.[53][54]

5. 집정관

기원전 102년, 카툴루스는 집정관으로서 킴브리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갈리아 키살피나로 파견되었다.[57] 킴브리족은 브레너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려 했고, 카툴루스는 알프스의 다른 고개를 점령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다.[61] 그러나 선발 기병대가 킴브리족과의 첫 전투에서 패배했고, 레가투스(부사령관)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겁을 먹고 자결했다.[62][63][64] 카툴루스는 아테시아 강 요새에 농성하려 했으나, 킴브리족이 포위하려 하자 후퇴했다.[66][67]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툴루스는 퇴각하는 군대의 맨 앞에 서서 지휘함으로써 로마군의 사기를 유지하려 했다.[68][69] 이는 패배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병사들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68][69] 카툴루스의 결단은 패배의 인상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71]

카툴루스는 패배했지만, 이듬해 프로콘술(전 집정관) 권한으로 임페리움(군사 지휘권)이 연장되었다.[72]

6. 베르켈라이 전투

기원전 101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프로콘술(전 집정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포강을 건너 베르켈라에 근처에서 킴브리족과 결전을 벌였다.[74][75]

고대 기록에 따르면 게르만족의 군세는 매우 컸으며,[76] 보병 진형은 폭이 30스타디온(5.8 km)에 달했고 15,000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78] 시켈리아의 디오도로스는 총 병력을 40만으로 기록했으나,[79] 현대 역사학자들은 킴브리족의 병력을 25,000~48,000명 정도로 추정한다.[80][81] 로마군의 총 병력은 52,300명이었으며, 그 중 20,300명을 카툴루스가 지휘했다.[25]

마리우스는 카툴루스의 군대를 중앙에, 자신의 부대를 양 측면에 배치했다. 카툴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훗날 마리우스가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이러한 배치를 했다고 주장했지만,[25]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82] 킴브리족 보병은 카툴루스 분견대와 "우연히" 조우했고,[25] 이곳이 주 전장이 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리우스의 병사들은 킴브리족 기병을 격퇴한 후 양익에서 킴브리족 야영지 근처로 합류하여 퇴로를 차단했다.[86] 카툴루스는 킴브리족 주력의 공격을 견뎌냈고, 마리우스 군대가 후방에서 공격을 시작하면서 전투는 학살로 변했다.[87] 고대 자료에는 12만~14만 명이 전사하고 6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8][25][89]

전투 직후, 승리의 주역을 놓고 병사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파르마에서 파견된 사절이 중재에 나섰고, 카툴루스 휘하 병사들은 킴브리 병사의 몸에 꽂힌 창 대부분에 카툴루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보여주었다.[25] 중재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논쟁은 당시 흔했으며 카툴루스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91][92]

마리우스와 카툴루스는 공동 개선식을 거행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로마 시민들은 마리우스 단독 개선식을 요구했지만, 마리우스는 카툴루스 병사들의 불만을 우려하여 공동 개선식을 택했다고 한다.[25]

7. 킴브리 전쟁 이후

카툴루스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 마리우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2세기 역사가 아피아누스는 이를 두고 은혜를 모른다고 비난했다.[97] 그 이유로는 마리우스에 대한 질투,[98] 단순한 추종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점,[99] 승자 편에 서고 싶었던 점[100] 등이 거론된다.

카툴루스는 킴브리·테우토니 전쟁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여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고 마리우스의 공적을 과소평가했다는 주장이 있다.[101][102] 그러나 베르켈라에 전투(7월 30일)에서 연말 선거까지의 기간이 짧아 회고록을 쓰고 널리 알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103]

기원전 100년 12월, 카툴루스는 포풀라레스(민중파)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개혁에 반대하는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사투르니누스가 대립 후보를 살해하자 원로원은 "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원로원 최종 포고)"을 내렸다. 키케로는 결전 전날 밤 상크스의 신전과 국가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받은 전직 집정관 중 한 명으로 카툴루스를 언급했다.[104] 사투르니누스는 과거 "마리우스파"였기 때문에, 카툴루스가 더 일찍부터 사투르니누스와의 전투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있다.[105]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카툴루스는 기원전 90년 의붓형제인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레가투스(부사령관)로 참전했다.[108] 아피아누스는 이 때의 부사령관 중 한 명으로 카툴루스를 언급하고 있다.[110] 루키우스 율리우스의 다른 부사령관으로는 술라와 티투스 디디우스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반(反) 마리우스파였다.[111]

기원전 88년, 술라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출정하자 마리우스파가 로마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술라는 로마로 돌아와 이를 진압하고 마리우스와 다른 정치가들에게 프로스크립티오(국가의 적)를 선언했는데, 카툴루스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25]

8. 최후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마리우스가 동맹을 맺고 로마로 진격했다. 원로원은 카툴루스를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파견했으나, 피우스의 군대는 킨나와의 전투를 거부했다.[112][113] 마리우스는 로마를 점령하고 옵티마테스(벌족파) 원로원 의원들에게 복수를 시작했고, 카툴루스도 그 대상이 되었다.[114]

카툴루스는 법정에 소환되었는데,[25][116]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비롯한 마리우스파(포풀라레스, 민중파) 주요 인사들이 재판을 요구했다는 견해가 있다.[117] 다른 견해로는, 카툴루스에게는 재판에 회부될 공식적인 이유가 있었다고도 한다.[118]

카툴루스를 고소한 것은 호민관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였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119] 역사학자들은 이 고소가 억지였다는 의견과,[120] 마리우스 등에 대한 국가의 적 선언의 위법성과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의 살해에 대한 고소이며 카툴루스가 사형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의견으로 나뉜다.[121]

카툴루스의 친구들이 구명을 탄원했으나, 마리우스는 "카툴루스는 죽는 것이 좋다"고 반복했다.[122][123] 카툴루스 자신도 자비를 구했으나 소용없었다고 한다.[124] 결국 카툴루스는 판결 전에 자결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자물쇠를 걸고 숯에 불을 붙여 질식사했다.[25][125][126] 플로루스는 카툴루스가 불 속에 몸을 던졌다고 기록했다.[127]

9. 가족 관계

카툴루스는 도미티아, 세르빌리아, 클라우디아와 결혼했다.[25]

부인자녀비고
도미티아아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기원전 78년 집정관, 기원전 65년 감찰관)아헤노바르비 가문 출신
세르빌리아딸 루타티아 (퀸투스 호르텐시우스의 아내)카에피오네스 가문 출신
클라우디아없음마르켈리 가문 출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딸로 추정. 마리우스 지지 계열. 기원전 103-87년경 결혼.



카툴루스의 결혼 관계에 대한 대략적인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시기사건
기원전 126년경도미티아와 결혼
기원전 125년 또는 124년아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출생
기원전 111년경도미티아 사망 또는 이혼
기원전 109년경세르빌리아와 결혼
기원전 108년경딸 루타티아 출생 (호르텐시아의 어머니)
기원전 105년아라우시오 참사,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에피오의 불명예와 투옥
기원전 104년카에피오 망명, 카툴루스는 세르빌리아와 이혼
기원전 103년클라우디아와 결혼, 기원전 102년 집정관으로 선출



카툴루스의 어머니 팝일리아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재혼하여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를 낳았다.[34][35]

10. 저술 및 문학 활동

카툴루스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시인, 산문 작가였으며, 그리스 문학에도 정통했다. 그는 자신의 집정관직에 대한 회고록인 ''De consulatu et de rebus gestis suis''(집정관과 그 공적)을 크세노폰의 방식에 따라 저술했다.[12] 플루타르코스가 이 회고록을 인용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대비열전의 마리우스 전기에는 마리우스가 킴브리족과의 전투에서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하려 했다고 카툴루스가 비난한 내용이 담겨 있다.[25] 또한, 게르만족과의 결전에서 킴브리족은 더위에 약했지만 로마 군인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킴브리족을 쓰러뜨린 것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했다.[25]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이 회고록은 매우 편향된 것으로 평가된다.[139]

킴브리 전쟁에 대한 서사시를 썼다는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는 아르키아스가 썼을 가능성이 더 높다.[12] 카툴루스는 헬레니즘 경구시를 로마에 도입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3]

플리니우스는 카툴루스를 짧지만 엄격하지 않은 시(''versiculi parum severi'')를 쓴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았다.[14] 카툴루스의 경구시는 단 두 편만 보존되었는데, 키케로는 카툴루스가 유명한 배우 로시우스에 대해 쓴 대구시를 보존하고 있으며, 그를 "신보다 더 아름다운 듯하다"라고 묘사했다.[15] 아울루스 겔리우스칼리마코스의 시를 본떠 만든 또 다른 경구시를 인용했다.[16]

카툴루스는 『공유하는 역사(Communes historiae)』라는 작품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는 3개의 단편으로 판단컨대 신화에 관한 것이었던 것 같다.[25]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시인 아이디투스, 포르키우스 리키니우스와 함께 카툴루스를 "더욱 우아하고 세련되며 매력적이며 비교할 만한 것은 그리스어, 라틴어 어느 쪽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142]

10. 1. 카툴루스 서클

카툴루스는 로마와 그리스 시인들을 후원하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일종의 문화 공동체인 "카툴루스 서클"을 형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서클에는 시돈의 안티파트로스, 아르키아스, 아이디투스, 포르키우스 리키니우스 등이 포함되었다고 한다.[25]

11. 건축 활동

카툴루스는 막대한 재산을 로마를 아름답게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는 베르켈라에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포르투나 후이우스케 디에이 신전(오늘의 행운 신전)을 건설했다.[74][75] 또한 킴브리족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판매한 수익으로 포르티쿠스 카툴리를 건설했다.[94]

카툴루스는 전리품으로 얻은 이익으로 팔라티노 언덕에 대저택을 짓고,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저택 부지에 포르티코를 건설했다.[94] 이 두 건물은 모두 전리품으로 장식되었다. 그는 포르투나 신전을 페이디아스가 제작한 두 개의 조각상으로 장식했다.[95][96]

12. 평가

고대 작가들은 카툴루스를 대체로 높이 평가했다. 이는 그의 자결이 순교자 이미지를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47] 카툴루스의 회고록에서 역할이 축소되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조차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카툴루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148]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카툴루스를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149]이라 칭하고, 그의 연설 중 하나에서는 "가장 위대한 지혜", "드문 용기", "비범한 친절함"을 칭송했다.[150] 키케로는 또한 카툴루스를 "두 번째 가이우스 레리우스 사피엔스"라 부르며[25]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에 비유했다.[151] 『웅변가에 관하여』에서는 카툴루스를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삼았다. 키케로에 따르면,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처럼 훌륭한 인물을 자살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공적을 지워버렸다.[25] 카툴루스는 기원전 2세기 후반의 "스키피오 서클"에서 기원전 1세기의 지식인들에게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5]

플루타르코스는 카툴루스를 "훌륭한 인물"이며, 그다지 유능하지는 않지만[25] 자신의 영광보다 로마를 더 소중히 여기는 "고귀하고 흠 잡을 데 없는" 사령관으로 묘사했다.[25]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를 "의심할 여지 없는 킴브리족 정복자"라 부르며, "어떤 의혹"만으로,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우스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한다.[152] 에우트로피우스는 킴브리 전쟁에서 카툴루스의 행운을 마리우스와 비교하여 기록하고 있다.[153]

아피아노스는 카툴루스가 그의 파트로누스인 마리우스를 배신한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 평가하지만, 이는 고대 평가에서는 예외적이다.[25]

현대 연구자들은 베르켈라이 전투에서의 승리에 마리우스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154][155][156] 반면 카툴루스는 마리우스에 대한 은혜를 잊은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진다.[25][157][158][159]

참조

[1] 서적 Gaius Marius
[2] 서적 Gaius Marius
[3] 서적 Gaius Marius
[4] 서적 Gaius Marius
[5] 서적 Gaius Marius
[6] 서적 Gaius Marius
[7] 서적 Gaius Marius
[8] 서적 Life of Marius
[9] 서적 Life of Marius
[10] 서적 Divine Qualities: Cult and Community in Republican Rom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null
[11] 서적 A Commentary on Cicero, De officii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null
[12] 서적 De Grammaticis
[13] 서적 Latin Literature: A History https://books.googl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null
[14] 서적 Epistula http://www.attalus.o[...]
[15] 서적 De Natura Deorum
[16] 서적 Epigram
[17] 서적 The Fragmentary Latin Poets https://books.google[...]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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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서 カピトリヌスのファステ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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