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로 마요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템플로 마요르는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있었던 주요 사원이다. 스페인 정복 이후 파괴되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아즈텍 문명의 중요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템플로 마요르는 4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형태였으며, 꼭대기에는 위칠로포치틀리와 틀랄록에게 헌정된 신전이 있었다. 사원은 아즈텍의 우주관과 신화를 상징하며, 다양한 의식과 행사의 중심지였다. 현재는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멕시코의 피라미드 - 엘 카스티요 (치첸이트사)
멕시코 유카탄 반도 치첸이트사에 위치한 엘 카스티요는 쿠쿨칸 신에게 바쳐진 9층 피라미드로, 춘분과 추분에 뱀 그림자가 나타나는 현상으로 유명하며, 마야 건축 기술과 천문학 지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 아즈텍 유적 - 테노치티틀란
테노치티틀란은 텍스코코 호수 위에 건설된 아즈텍 제국의 수도로, 정교한 도시 계획, 운하, 다리, 공공 건축물, 활기찬 시장을 갖춘 메소아메리카 최대 도시 중 하나였으나, 1521년 파괴된 후 현재 멕시코시티의 기반이 되었다. - 아즈텍 유적 - 소치밀코
소치밀코는 멕시코시티 남부에 위치한 자치구이자 도시로, 아즈텍 시대부터 멕시코시티에 식량을 공급하는 근교 농업 지역이었으며, 현재는 운하와 치남파 경관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템플로 마요르 |
---|
2. 발견과 발굴
테노치티틀란이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점령된 후, 아즈텍 제국의 중심 신전이었던 템플로 마요르는 철저히 파괴되어 그 위에 새로운 유럽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로 인해 사원의 정확한 위치는 수 세기 동안 잊혔다.[7]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고고학적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레오폴도 바트레스와 마누엘 가미오 등이 멕시코 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주변 등에서 부분적인 발굴을 시도하여 사원의 일부 흔적을 찾아냈으나,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4][5]
템플로 마요르 발굴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1978년 2월 21일에 찾아왔다. 멕시코 시티 도심에서 전력 회사 인부들이 공사 중 우연히 거대한 돌 원반을 발견한 것이다.[5][36][37] 지름 3.25m, 두께 30cm이며 무게 8.5ton에 달하는 이 원반에는 아즈텍 신화 속 달의 여신 코욜사우키가 새겨져 있었다.[5]
이 발견을 계기로 멕시코 정부는 에두아르도 마토스 모크테수마의 지휘 아래 대규모 발굴 프로젝트(템플로 마요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5][9][36]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진행된 발굴을 위해 주변의 건물 13채가 철거되었으며,[5][36] 이 과정에서 7,000점이 넘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과 유적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해 1980년대 초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이 건립되었다.[5][9]
2. 1. 초기 발굴 (19세기 ~ 20세기 초)
테노치티틀란이 스페인 정복 이후, 템플로 마요르는 도시의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해체되어 새로운 스페인 식민 도시 건설 자재로 사용되었다.[7] 이 과정에서 사원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그 정확한 위치는 오랫동안 잊혔다. 19세기까지 사원의 위치는 불분명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고학자들이 옛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템플로 마요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된다.19세기 말, 고고학자 레오폴도 바트레스는 멕시코 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 과거 템플로 마요르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을 것이라 추정하고 대성당 아래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4] 당시 많은 연구자들은 대성당이 사원 유적 위에 지어졌다고 생각했다.[4]
20세기 초, 마누엘 가미오는 사원의 남서쪽 모퉁이 일부를 발견하여 대중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이 발견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발굴 지역이 당시 상류층 주거 지역과 가까워 추가 발굴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5] 이후에도 부분적인 발굴은 계속되었다. 1933년 에밀리오 쿠에바스가 계단과 기단 일부를 발견했고,[4] 1948년에는 우고 모에다노와 엘마 에스트라다 발모리가 뱀 머리 모양 조각과 제물이 담긴 플랫폼을 발굴했다.[4] 1966년에는 에두아르도 콘트레라스와 호르헤 앙굴라가 마누엘 가미오가 처음 조사했던 지점에서 제물을 담은 상자를 다시 발굴했다.[4]
이처럼 20세기 초중반까지 여러 차례 부분적인 발굴 시도가 있었으나, 템플로 마요르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2. 2. 본격적인 발굴 (1978년 ~ 현재)
템플로 마요르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20세기 후반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던 1978년 2월 21일, 멕시코 시티 도심에서 전력 공급 회사인 연방 전력 위원회(CFE)의 인부들이 공사를 위해 땅을 파던 중 예상치 못한 유물을 발견했다.[5][36][37] 이 지역은 과거 약간 높은 지대여서 홍수 때 길 잃은 개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개의 섬"으로 알려져 있었다. 인부들은 지면에서 2m가 조금 넘는 깊이에서 거대한 원반 모양의 돌 유물을 찾아냈다.
이 돌 원반은 지름 3.25m, 두께 30cm, 무게는 8.5ton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였다.[5] 나중에 이 원반은 15세기 말경에 제작되었으며, 표면에 새겨진 부조는 아즈텍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이자 위칠로포치틀리의 누이동생인 코욜사우키가 살해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밝혀졌다.[5][36] 이 발견은 템플로 마요르 발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코욜사우키 원반 발견 이후, 멕시코 정부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고고학자 에두아르도 마토스 모크테수마의 지휘 아래 대규모 발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5][9][36] 초기 조사를 통해 템플로 마요르 유적이 예상보다 훨씬 잘 보존되어 있으며 연구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8] 발굴을 위해 해당 부지에 있던 13개의 건물이 철거되었는데, 이 중 9개는 1930년대에 지어진 것이었고 나머지 4개는 19세기 식민지 시대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건물들이었다.[5][36]
발굴 과정에서 7,000점이 넘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신들의 모습이 새겨진 점토 항아리, 거북, 개구리, 악어, 물고기 등 동물들의 두개골, 순금으로 만든 신상, 알라바스터나 믹스텍 양식의 조각상, 베라크루스 지역에서 온 도자기 항아리, 현재의 게레로 주에서 온 가면, 구리 방울, 흑요석과 부싯돌로 장식된 해골과 제례용 칼 등 다채로운 제물들이 있었다.[5] 이렇게 발굴된 유물들은 템플로 마요르 유적과 출토 유물을 보존하고 연구하며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1980년대 초에 특별히 건립된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5][9]
3. 구조와 상징
템플로 마요르(스페인어: Templo Mayor, "주 신전")는 아즈텍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에 위치했던 가장 중요한 신전이었다. 나와틀어로는 웨이테오칼리(Huēyteocalli|웨이테오칼리nah), 즉 "큰 신의 집"이라고 불렸다.[30] 이곳은 아즈텍 제국 전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종교 및 정치 행사가 열리는 제국의 심장부였다. 한 스페인 역사학자에 따르면, 템플로 마요르를 중심으로 약 70개가 넘는 부속 사원과 건물들이 성역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신전의 기본 구조는 서쪽을 향해 세워진 거대한 계단 피라미드 형태였다.[30]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두 개의 신전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는데, 남쪽(오른쪽) 신전은 전쟁과 태양의 신이자 멕시카 민족의 수호신인 위칠로포치틀리에게, 북쪽(왼쪽) 신전은 비와 농업의 신인 틀랄록에게 바쳐졌다.[30][5][7][13] 이 구조는 아즈텍 신화에 등장하는 두 개의 중요한 산, 즉 위칠로포치틀리가 누이 코욜샤우키를 물리친 '코아테페크'(뱀의 산)와 틀랄록이 인간에게 줄 곡식과 물을 보관하는 '토나카테페틀'(식량의 산)을 상징했다.[33] 또한, 템플로 마요르는 아즈텍인들의 우주관에서 하늘과 땅, 지하 세계가 만나는 우주의 중심축으로 여겨졌다.[10][19]
1390년경부터 여러 차례 증축을 거듭하여[34],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도착했을 때는 일곱 번째로 재건된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코르테스와 그의 군대는 테노치티틀란 정복 과정에서 인신공양 의식에 혐오감을 느끼고, 결국 1521년 도시를 함락시킨 후 템플로 마요르를 포함한 모든 신전을 철저히 파괴했다.[14][4][33] 신전의 귀중한 장식물들은 약탈되었고, 그 자리에는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을 비롯한 새로운 스페인 식민 도시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8][4] 현재는 발굴 작업을 통해 일부 유적만이 남아 과거 아즈텍 문명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3. 1. 구조
템플로 마요르(스페인어: Templo Mayor, "주 신전")는 나와틀어로 웨이테오칼리(Huēyteocalli|웨이테오칼리nah), 즉 "큰 신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다.[30]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에는 약 25ha 넓이의 벽으로 둘러싸인 성역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78개 정도의 건물이 있었다.[30][31] 템플로 마요르는 이 성역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이었다.템플로 마요르의 계단 피라미드는 서쪽을 향해 세워졌으며,[30] 4개의 경사진 테라스가 층층이 쌓여 있는 구조였고 각 층 사이에는 통로가 있었다.[5][7][13] 피라미드의 맨 아래 부분은 한 변의 길이가 약 82m인 정사각형 형태였고,[34] 전체 높이는 약 60m에 달했다.[12] 미국 인류학자 앤서니 아베니에 따르면, 템플로 마요르는 정서쪽에서 남쪽으로 7도 기울어져 세워졌는데, 이는 춘분에 두 신전 사이로 해가 떠오르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32] 전설에 따르면 이 피라미드는 두 개의 신성한 산을 상징하는데, 하나는 위칠로포치틀리가 그의 누나인 코욜샤우키와 싸워 이긴 코아테페크(뱀의 산)이고, 다른 하나는 틀랄록이 인간에게 줄 씨앗과 물을 보관했다는 토나카테페틀 산이다.[33]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두 개의 신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구조물을 마주보고 오른쪽(남쪽) 신전은 전쟁과 태양의 신이자 멕시카 민족의 수호신인 위칠로포치틀리에게, 왼쪽(북쪽) 신전은 비와 풍요의 신 틀랄록에게 바쳐졌다.[30][5][7][13] 각 신전 앞에는 신성한 불이 계속 타오르는 큰 화로가 놓여 있었다.[5][7][13] 신전 입구 양쪽에는 건장한 남성 모습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거대한 휘장이 늘어뜨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전 안에는 각 신의 형상을 본뜬 신상이 모셔져 있었으며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7] 위칠로포치틀리의 신상은 아마란스 씨앗을 꿀, 그리고 사람의 피와 섞어 만들었으며, 그 안에는 신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옥, 뼈, 부적 등이 든 작은 가방들이 들어있었다. 이 신상은 매년 새로 만들어졌고, 축제 기간에는 화려한 옷과 황금 가면을 씌워 신전 밖으로 꺼내 행진하며 사람들의 경배를 받았다. 축제가 끝나면 사제들은 이 신상을 부수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했다.[7]
두 신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각각 분리되어 있었으며, 양옆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계단 맨 아래, 즉 기단부에는 뱀 머리 모양의 조각 장식이 붙어 있어 사원의 위용을 더했다.[5][7][13] 이 계단은 오직 고위 사제들과 희생 제물들만이 오르내릴 수 있었다.[5][7][13] 건물 전체는 원래 회반죽과 다채로운 색상의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 멀리서도 빛을 반사하며 밝게 빛났다고 한다.[5][7][13]
에르난 코르테스가 1519년 아즈텍 제국에 도착했을 때 본 신전은 일곱 번째로 재건된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 과정에서 신전은 심하게 파괴되고 약탈당해 현재는 그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북쪽 기단과 남쪽 광장으로 향하던 일부 돌계단만이 남아 식별 가능한 정도이다.
=== 재건과 확장 ===
템플로 마요르는 1325년경 건설이 시작되어[10] 1390년경부터 스페인에 의해 파괴되는 1521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증축되었다.[33] 아즈텍의 통치자(틀라토아니)에게 신전을 확장하는 것은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으며, 기존 피라미드 위에 새로운 구조물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0][34]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최소 7단계의 건설 과정이 확인되었다.[10][34]
단계 | 건설 시기 | 통치자 | 주요 특징 | 발견 유물 |
---|---|---|---|---|
1단계 | ~1375? | (기록 없음) | 흙과 썩기 쉬운 나무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스코코 호 바닥의 높은 지하수위 때문에 발굴이 불가능하며, 역사 기록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10][5][7][11] | (없음) |
2단계 | 1375년–1427년 | 아카마피치틀리, 우이칠리우이트, 치말포포카 | 상층부 일부가 발굴되었으며, 북쪽 면에 회반죽으로 덮인 두 개의 석조 신사가 드러났다.[5][7] | 차크몰, 남쪽 면의 téchcatl|테치카틀nah 희생 제단과 조각된 얼굴.[5][7] |
3단계 | 1427년–1440년 | 잇스코아틀 | 계단에 여덟 개의 석조 기수상이 세워졌는데, 이는 상층 신전을 지키는 "신성한 전사" 역할을 했다.[5][7] | 해 네 개의 갈대(1431년)가 새겨진 상형 문자.[5][7] |
4단계 | 1440년–1481년 | 모테쿠소마 1세, 아샤야카틀 | 건축 장식과 조각이 가장 풍부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거대한 플랫폼은 뱀과 화로(일부는 원숭이 모양, 일부는 틀랄록 형상)로 장식되었다. 틀랄록 신전으로 향하는 계단은 구불거리는 뱀 한 쌍으로 구분되었고, 이 신전 중앙에는 조각된 개구리 한 쌍이 있는 작은 제단이 있었다.[5][7] | 코욜샤우키의 둥근 석조 기념물.[5][7] |
5단계 | 1481년–1486년 | 티소크 |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플랫폼을 회반죽으로 덮고 의식 광장을 포장했다.[5] | (없음) |
6단계 | 1486년–1502년 | 아우이촐 | 신성 구역을 뱀 머리로 장식된 벽으로 둘러쌌다. 세 개의 신전과 독수리 전사들의 집을 지었다.[5] | huei teocalli|웨이 테오칼리nah 기념비. 1487년 12월 19일 신전 개장을 기념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5] |
7단계 | 1502년–1520년 | 모테크소마 2세 |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당시의 신전이다. 당시 가장 크고 중요한 의식 중심지였으며, 성역 내 78개 건물 중 가장 높이 솟아 있었다.[11] 이후 대성당 건설 과정에서 대부분 철거되었다.[5] | 북쪽의 플랫폼 일부와 남쪽 안뜰의 포장 부분만 남아있다.[5] |
=== 발굴된 현장 ===
현재 발굴된 템플로 마요르 유적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사원 자체의 유적으로, 여러 단계의 건축 과정을 보여주도록 노출 및 표시되어 있다. 둘째는 사원과 관련된 다른 건물들과, 작고 깨지기 쉬운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지어진 박물관이다.[9]
=== 성역 내 다른 구조물 ===
템플로 마요르가 위치했던 성역은 "코아테판틀리"(Coatepantli|코아테판틀리nah, 뱀의 벽)라고 불리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20] 이 성역 안에는 템플로 마요르 외에도 여러 중요한 건물이 있었다.
- 독수리 전사들의 궁전 (Palace of the Eagle Warriors): 템플로 마요르 측면에서 발굴된 가장 잘 보존되고 중요한 구조물 중 하나이다. 사원의 네 번째 단계(기원후 1469년경) 시기에 지어졌다. 독수리 머리 조각으로 장식된 계단이 있는 큰 L자형 방이며, 입구는 두 개의 독수리 전사 조각상이 지키고 있었다. 독수리 전사는 신 위칠로포치틀리에게 헌신하고 독수리처럼 옷을 입은 특권 계급이었다. 궁전 내부 벽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긴 벤치에는 물결치는 뱀 무늬와 피 흘리는 의식을 행하는 무장한 전사들의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이 궁전은 툴라 유적의 양식을 많이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21] 이 지역에서는 죽음의 신 믹틀란테쿠틀리를 묘사한 거의 동일한 두 개의 큰 도자기 조각상이 발견되기도 했다.[22][23][24]
- 오셀롯 전사들의 사원: 오셀롯 전사들은 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헌신했으며, 그들의 사원은 현재 템플로 마요르 남쪽에 있는 세크레타리아 데 하시엔다 이 크레디토 푸블리코 박물관 아래에 위치한다.[3][4]
- 칼메카크 (Calmecac): 사제들의 기숙사이자 귀족 자제들을 위한 학교로, 신학, 문학, 역사,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 현재 멕시코 시티의 돈셀레스 거리에 그 위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
- 케찰코아틀 신전: 템플로 마요르 서쪽에 위치했으며, 신의 뱀 속성 때문에 직사각형이 아닌 원형 기단을 가졌다. 춘분에는 태양이 위칠로포치틀리와 틀랄록 신전 사이에서 떠올라 이 신전을 직접 비추었다고 한다.[3]
- 구기장 (Tlachtli): 틀라치틀리 또는 테우틀라치틀리라고 불린 구기장은 템플로 마요르 서쪽, 쌍둥이 계단 근처에 동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선수들은 맨발로 무거운 고무공을 엉덩이로 쳐서 돌 고리에 넣는 경기를 했다. 구기장 옆에는 희생자들의 두개골을 석고로 덮어 장식하여 보관하던 "후에이 촘판틀리"(Hueyi Tzompantli|후에이 촘판틀리nah, 큰 해골 진열대)가 있었다.[3]
- 태양 신전: 템플로 마요르 서쪽에 위치했으며, 그 유적은 현재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아래에 있다.[3]
에르난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의 신전들의 수와 웅장함에 감명을 받았다고 기록했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신공양 의식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느꼈다고 밝혔다.[8] 1519년 11월 14일, 코르테스는 황제 모테크소마 2세를 사로잡은 후 아즈텍의 모든 종교적 상징물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으며, 템플로 마요르의 신상을 끌어내 부수고 그 자리에 가톨릭 십자가를 세우도록 했다.[14] 이후 벌어진 전투와 스페인의 최종적인 테노치티틀란 정복(1521년) 과정에서 템플로 마요르를 포함한 모든 신전들은 철저히 파괴되고 약탈당했다.[4][33] 코르테스는 옛 아즈텍 수도의 폐허 위에 새로운 유럽식 도시 건설을 명령했고, 한때 제국의 심장이었던 템플로 마요르와 성역은 땅 밑에 묻히게 되었다. 템플로 마요르가 있던 자리의 서쪽 절반에는 스페인 교회가 세워졌고, 이후 현재의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8][4]


3. 2. 상징
전설에 따르면 템플로 마요르는 신 우이칠로포치틀리가 멕시카인들에게 약속의 땅에 도착했음을 나타내는 징표, 즉 뱀을 입에 문 노팔 선인장 위의 독수리를 보여준 정확한 장소에 위치해 있다.[7]템플로 마요르는 멕시카 신화에서 중요한 장소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우선, 이곳은 우이칠로포치틀리가 태어난 신성한 산인 코아테펙( Coatepec|코아테펙nah, '뱀의 산')을 부분적으로 상징했다.[13][33] 신화에 따르면, 우이칠로포치틀리는 이곳에서 자신과 어머니 코아틀리쿠에를 죽이려 했던 누이 코요울사우키와 형제들인 센촌 우이츠나우아와 싸워 승리했다. 그는 누이를 죽여 사지를 절단하고 언덕 아래로 던졌는데, 이 이야기는 사원 구조에도 반영되었다. 대사원의 남쪽 부분(우이칠로포치틀리에게 헌정된 쪽)은 코아테펙을 상징했으며, 코요울사우키의 사지가 절단된 모습이 새겨진 거대한 돌 원반이 이쪽 사원 발치에서 발견되었다.[10][18] 반면, 사원의 북쪽 부분은 비와 풍요의 신 틀랄록의 산간 고향인 토나카테페틀( Tonacatepetl|토나카테페틀nah, '식량의 산')을 상징했다. 틀랄록은 이 산에 인간에게 줄 씨앗과 물을 보관하고 있다고 여겨졌다.[10][18][33]

템플로 마요르는 아즈텍 세계관, 즉 우주론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기도 했다. 사원은 기본적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과 정확히 정렬되어 있었으며, 각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과 연결되는 문이 있었다.[10][18] 이는 템플로 마요르가 인간이 사는 세계의 평면이 천상의 13개 층(토판)과 지하 세계의 9개 층(믹틀란)과 교차하는 우주의 중심점임을 상징한다.[10] 고고학자 에두아르도 마토스 모크테수마는 템플로 마요르를 멕시카 우주관의 총체적인 표현으로 해석했다. 그는 "수평 및 수직 평면이 교차하는 주요 중심 또는 배꼽, 즉 천상의 또는 상위 평면과 지하 세계의 평면이 시작되고 우주의 네 방향이 생겨나는 지점은 테노치티틀란의 템플로 마요르이다"라고 설명하며, 사원이 모든 신성한 힘이 집중되고 모든 우주적 층이 교차하는 살아있는 신화(우이칠로포치틀리와 코요울사우키의 탄생과 투쟁 신화)의 구현체라고 주장했다.[19]
천문학적인 의미 또한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멕시코 침략 직후에 도착한 스페인 수사 프라이 토리비오 데 모톨리니아는 아즈텍의 틀락사페우알리츠틀리( Tlacaxipehualiztli|틀락사페우알리츠틀리nah) 축제가 "태양이 [템플로 마요르의]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전 중앙에 위치했을 때, 즉 분점일 때 열렸다"고 기록했다.[16] 이는 메소아메리카 사원과 천문 현상을 명확히 연결 짓는 드문 기록이다. 실제 사원 측량 결과, 후기 건설 단계의 동서축 방향은 특정 일몰 날짜와 연관 있음이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4월 4일의 일몰 방향은 1519년 율리우스력으로 3월 25일에 해당했는데, 이는 바로 틀락사페우알리츠틀리 축제의 마지막 날이자, 당시 성모 영보 대축일로서 전통적인 춘분과 동일시되던 날이었다. 따라서 모톨리니아는 정확한 천문학적 분점보다는, 축제일과 태양 현상, 그리고 당시 기독교 달력상의 춘분 날짜 사이의 일치를 지적한 것으로 해석된다.[17] 다른 연구자인 앤서니 아베니는 템플로 마요르가 정서 방향에서 남쪽으로 7도 기울어져 건설되었으며, 이는 춘분에 두 신전 사이로 정확히 태양이 떠오르도록 의도된 설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32]
사원 주변의 구조물들도 이러한 상징성을 강화했다. 쌍둥이 사원 계단 아래에 위치한 신성한 볼 코트( Tlachtli|틀라치틀리nah)와 해골 선반( Huey Tzompantli|후에이 촘판티nah)은 우이칠로포치틀리가 코욜샤우키의 잘린 머리를 놓았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모방하여 신화적 갈등을 재현하는 역할을 했다.[18][3] 사원 전체를 둘러싼 "코아테판틀리"( Coatepantli|코아테판틀리nah, '뱀의 벽') 역시 신성한 공간을 구분 짓는 상징적인 경계였다.[20]
4. 아스텍의 멸망과 템플로 마요르
에르난 코르테스가 1519년 아즈텍 제국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템플로 마요르는 일곱 번째로 재건되어 위용을 떨치던 상태였다.[5] 스페인 정복자들은 처음에는 테노치티틀란에 세워진 신전들의 수와 웅장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신전들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신공양 의식을 목격하고는 혐오감을 느꼈다고 기록했다.[8] 1519년 11월 14일, 코르테스는 황제 몬테수마 2세를 사로잡은 뒤, 아스텍의 모든 신상과 종교 유물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템플로 마요르의 신상을 끌어내려 부수고, 그 자리에 기독교의 십자가를 세우도록 했다.[14] 이후 벌어진 스페인과의 전쟁 과정에서 신전은 더욱 훼손되었다.[15]
마침내 1521년, 스페인이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정복한 후, 템플로 마요르를 포함한 모든 신전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신전에 있던 모든 금과 보석 등 귀중품을 약탈하여 본국으로 보냈다.[4] 코르테스는 기존의 아스텍 수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유럽식 도시 건설을 명령했으며, 한때 아스텍 제국의 심장부였던 템플로 마요르와 성스러운 구역은 철거되어 땅에 묻혔다. 템플로 마요르가 있던 자리에는 가톨릭 대성당이 세워졌다.[8][4] 이러한 파괴로 인해 일곱 번째로 지어진 신전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는 북쪽 기단과 남쪽 광장의 일부 돌 계단 등 극히 일부 유적만이 식별 가능한 상태이다.[5]
4. 1. 스페인의 침략
에르난 코르테스가 1519년 아즈텍 제국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신전은 일곱 번째로 재건되어 위용을 떨치던 상태였다.[5]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은 테노치티틀란에 세워진 신전들의 수와 웅장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신전들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신공양 의식을 목격하고 충격과 혐오감을 느꼈다고 기록했다.[8]1519년 11월 14일, 코르테스는 황제 몬테수마 2세를 사로잡은 뒤, 아즈텍의 모든 신상과 종교 유물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템플로 마요르의 신상을 끌어내려 부수고, 그 자리에 기독교의 십자가를 세우도록 했다.[14]
코르테스가 다른 원정을 위해 잠시 테노치티틀란을 비운 사이, 그의 부관 중 한 명인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아즈텍인들이 스페인인들을 공격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알바라도는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종교 축제가 열리던 성스러운 구역에서 아즈텍인들을 학살했다. 이 공격으로 무방비 상태였던 약 8,000명에서 10,000명의 아즈텍 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 소식이 퍼지자 아즈텍인들은 즉시 반격에 나섰고, 스페인 군인 7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으며, 스페인 군대는 수적 열세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아즈텍 군대는 스페인 군대를 포위하여 68명을 생포했다. 이들 중 10명은 즉시 신전에서 인신공양으로 희생되었고, 잘린 머리는 스페인 군대에게 다시 보내졌다. 나머지 포로들도 스페인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템플로 마요르에서 제물로 바쳐졌다. 희생된 스페인인들의 시신은 참수되어 제국 전역으로 보내졌는데, 이는 아즈텍 제국의 힘을 과시하고 동맹 도시들의 배신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15]
1521년, 스페인이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정복한 후, 템플로 마요르를 포함한 모든 신전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신전에 있던 모든 금과 보석 등 귀중품을 약탈하여 본국으로 보냈다.[4] 코르테스는 기존의 아즈텍 수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유럽식 도시 건설을 명령했다. 한때 아즈텍 제국의 심장부였던 템플로 마요르와 성스러운 구역은 철거되어 땅에 묻혔고, 그 자리에는 가톨릭 대성당이 세워졌다.[8][4] 이 파괴로 인해 일곱 번째로 지어진 신전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는 북쪽 기단과 남쪽 광장의 일부 돌 계단 등 극히 일부만 식별할 수 있다.[5]
4. 2. 아스텍의 저항과 몰락
에르난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은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한 후 도시의 웅장한 신전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그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신공양 의식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8] 1519년 11월 14일, 코르테스는 아스텍 황제 몬테수마 2세를 사로잡고 템플로 마요르를 포함한 제국 내 모든 신전의 우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기존의 신상을 끌어내려 부순 자리에 기독교의 십자가를 세우도록 했다.[14]코르테스가 다른 원정을 위해 잠시 테노치티틀란을 비운 사이, 그의 부관 중 하나였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아스텍인들이 스페인인들을 공격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알바라도는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종교 축제가 열리고 있던 성스러운 구역에서 무방비 상태의 아스텍 귀족들을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약 8,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아스텍 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아스텍인들의 격렬한 반격으로 스페인 군대 역시 7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했으며, 결국 수적 열세로 후퇴해야 했다. 스페인 군대가 퇴각한 후, 아스텍 군대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스페인 군대를 포위하고 68명을 포로로 잡았다. 포로 중 10명은 즉시 템플로 마요르로 끌려가 희생 제물로 바쳐졌고, 잘린 머리는 스페인 군대 진영으로 던져졌다. 나머지 포로들도 스페인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템플로 마요르에서 희생되었다. 희생된 스페인인들의 시신은 참수되고 피부가 벗겨졌으며, 태닝 처리된 얼굴은 아스텍 제국의 힘을 과시하고 동맹 도시들의 배신을 경고하기 위해 제국 전역으로 보내졌다.[15]
1521년, 스페인 군대는 마침내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템플로 마요르를 비롯한 모든 아스텍 신전들은 철저히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신전에 장식된 모든 금과 보석을 떼어 본국으로 보냈다.[4] 코르테스는 파괴된 아스텍 수도의 폐허 위에 새로운 유럽식 도시 건설을 명령했고, 한때 아스텍 제국의 심장이었던 템플로 마요르와 성스러운 구역은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템플로 마요르가 있던 자리에는 가톨릭 대성당이 세워졌다.[4][8] 이 파괴 과정에서 신전의 구조물 대부분이 사라졌고, 현재는 북쪽 기단과 남쪽 광장의 일부 포장된 돌 부분만이 남아 그 흔적을 보여준다.[5]
5.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
템플로 마요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1978년 2월 21일, 전기 회사 인부들이 우연히 거대한 원반 모양의 석조 유물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지름 3.25m, 두께 30cm, 무게 8.5ton이 넘는 이 석조 원반은 약 15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아즈텍 신화 속 달의 여신이자 우이칠로포치틀리의 누이인 코욜샤우키가 새겨져 있었다. 이 발견을 계기로 1978년부터 1982년까지 대대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예상보다 잘 보존된 유적과 함께 약 7,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 중에는 신들의 모습이 새겨진 점토 항아리, 동물 두개골, 순금 신상, 흑요석 단검, 산호, 조개껍데기 등이 있었다.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1987년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박물관은 '템플로 마요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보관하는 중심 기관으로, 이 프로젝트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1991년에는 주요 광장 주변의 오래된 도시 지역 발굴을 목표로 하는 '도시 고고학 프로그램'이 프로젝트의 일부로 통합되었다.[4] 박물관 건물은 건축가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가 설계했으며, 주변의 식민지 시대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되었다. 총 4층으로 구성되어 3개 층은 상설 전시 공간, 나머지 1개 층은 사무 및 연구 공간으로 사용된다.[26]
박물관은 총 8개의 주요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전시관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4]
전시관 | 주제 | 주요 전시 내용 |
---|---|---|
1관 | 코아틀리쿠에와 코욜샤우키 | 19세기 발견 유물부터 코욜샤우키 석조 원반까지, 사원 관련 초기 발굴품 전시 |
2관 | 의례와 희생 | 고위층 매장 항아리, 장례 제물, 악기, 칼, 두개골 등 자기 희생 및 인간 희생 관련 유물 전시 |
3관 | 조공과 무역 | 아즈텍 제국의 경제 활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지역의 완제품 및 원자재 전시 |
4관 | 우이칠로포치틀리 | 사원 내 가장 중요했던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의 다양한 이미지와 제물, 독수리 전사들의 집에서 발견된 믹틀란테쿠틀리 조각상 전시 |
5관 | 틀랄록 | 메소아메리카의 오래된 신 중 하나인 틀랄록의 다양한 이미지 (주로 녹색, 화산석, 세라믹 재질) 전시. 특히 푸른색 안료가 남은 큰 항아리가 중요 유물임 |
6관 | 동식물 | 아즈텍인에게 신성시되었던 메소아메리카의 동식물 관련 유물 및 제물 전시 |
7관 | 농업 기술 | 옥수수 재배와 떠 다니는 정원으로 불린 친암파 건설 등 당시 농업 기술 전시 |
8관 | 고고학과 역사 | 템플로 마요르 유적지의 발굴 과정과 역사 소개 |
또한, 과테말라의 인권 운동가 리고베르타 멘추가 수상한 노벨 평화상 메달도 이 박물관에 기증되어 보관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El Templo Mayor (Distrito Federal)
http://www.mexicodes[...]
2010-04-25
[2]
웹사이트
Study the... WIND GOD
http://www.mexicolor[...]
[3]
웹사이트
EL RECINTO CEREMONIAL Y EL TEMPLO MAYOR Evolución de la Gran Tenochtitlan
http://www.mexicomax[...]
2008-11-09
[4]
간행물
Templo Mayor de Tenochtitlan
http://www.arqueomex[...]
2008-11-09
[5]
백과사전
Templo Mayor
Sabeca International Investment Corp
[6]
웹사이트
Estadística de Visitantes
http://www.estadisti[...]
INAH
2018-03-25
[7]
간행물
El Templo Mayor de Mexico-Tenochtitlan
http://www.mexicodes[...]
2008-11-09
[8]
서적
Early Spanish American Narrative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Texas Press
[9]
웹사이트
Templo Mayor Project
http://archaeology.l[...]
2008-11-09
[10]
서적
Time, History and Belief in Aztec and Colonial Mexico
University of Texas Press
[11]
웹사이트
Model of the ceremonial precinct of Mexico-Tenochtitlan
http://archaeology.l[...]
2008-11-09
[12]
웹사이트
Templo Mayor
https://www.worldhis[...]
2021-12-30
[13]
웹사이트
Templo Mayor
http://archaeology.l[...]
2008-11-09
[14]
서적
Dictionary of Mexican Rulers 1325-1997
Greenwood Publishing Group
[15]
서적
War in the Early Modern World 1450-1815
Taylor & Francis Inc
[16]
서적
Skywatchers: A Revised and Updated Version of Skywatchers of Ancient Mexico
University of Texas Press
[17]
간행물
Astronomical alignments at the Templo Mayor of Tenochtitlan, Mexico
[18]
서적
Gender and Power in Prehispanic Mesoamerica
University of Texas Press
[19]
서적
The Aztec Templo Mayor
Dumbarton Oaks Research Library and Collection
[20]
웹사이트
Sacred Precinct
http://archaeology.l[...]
2008-11-09
[21]
웹사이트
The House of the Eagles
http://archaeology.l[...]
2008-11-09
[22]
웹사이트
The Discovery of the Images
http://archaeology.l[...]
2008-11-09
[23]
웹사이트
The tasks of exploration and restoration of the sculptures
http://archaeology.l[...]
2000-11-30
[24]
웹사이트
The morphology and the orientation of the images
http://archaeology.l[...]
2008-11-09
[25]
웹사이트
Ritual and Sacrifice
http://archaeology.l[...]
2008-11-09
[26]
웹사이트
Templo Mayor Museum
http://archaeology.l[...]
2008-11-09
[27]
서적
水中考古学 クレオパトラ宮殿から元寇船、タイタニックまで
中央公論新社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Smith (1996) p.230
[37]
서적
Smith (1996) p.209
[38]
서적
Smith (1996) p.232
[39]
서적
Smith (1996) p.233
[40]
웹사이트
El Templo Mayor (Distrito Federal)
http://www.mexicodes[...]
2010-04-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