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텍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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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톨텍 제국은 10세기부터 12세기 중반까지 번성했던 메소아메리카 문명으로, 멕시코 중부의 툴라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톨텍은 뛰어난 건축, 조각,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케찰코아틀과 같은 전설적인 통치자들이 등장했다. 톨텍은 툴라를 떠난 케찰코아틀의 영향으로 유카탄 반도에 정착하여 치첸이트사와 같은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 내부 갈등과 기근으로 쇠퇴하여 멸망했으며, 톨텍의 유산은 아즈텍을 비롯한 여러 메소아메리카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톨텍 제국설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며, 톨텍의 실제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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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텍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일반 명칭 | 톨텍 제국 |
| 토착어 명칭 | 알테페틀 톨란 |
| 시대 | 고전 시대/후기 고전 시대 |
| 존속 여부 | 논쟁 중 |
| 정부 형태 | 군주제 |
| 수도 | 톨란-시코코티틀란 |
| 공용어 | 나우아틀어 믹스테크어 토토나크어 오토미어 파메어 기타 |
| 종교 | 톨텍 종교 |
| 역사 | |
| 시작 연도 (논쟁 중) | 674년 |
| 시작 사건 | 톨텍족이 마므-헤-미에 도착하여 톨란으로 개명 |
| 종료 연도 (논쟁 중) | 1122년 |
| 종료 사건 | 톨란-시코코티틀란의 버려짐 |
| 사건 2 | 토필친 세 아카틀 케찰코아틀이 추방되어 틀라팔란으로 떠남 |
| 사건 2 날짜 (논쟁 중) | 947년 |
| 통치자 | |
| 초대 틀라토아니 | 찰치우틀라네친 또는 믹스코아마차친 (6세기 ~ 8세기) |
| 마지막 틀라토아니 | 토필친, 테크판칼친 또는 우에마크 (10세기 ~ 11세기) |
| 통계 | |
| 기준 연도 | 1000년 |
| 인구 | 450만 명 |
| 이전 국가 | |
| 이후 국가 | |
2. 역사
톨텍의 역사는 구전과 기록을 통해 전해 내려오지만, 신화적 요소와 실제 역사가 혼재되어 있어 주의 깊은 해석이 필요하다. 1960년대 서구 연구자들은 유리 크노로조프의 마야 문자 해독 성과를 바탕으로 톨텍 제국에 대한 설을 제시했다.[51][52] 이 설에 따르면, 톨텍 제국은 멕시코 서부의 우토아즈텍어족에 속하는 톨텍-치치메카족과 멕시코만 연안의 장인 집단인 노노알카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중심은 톨텍-치치메카였다고 한다.
톨텍은 10세기부터 12세기 중반까지 번성했다.[53] 전설적인 지도자 미슈코아틀("구름의 뱀", 즉 "은하수")[54]의 인도로 서부 시에라마드레 산맥 남부에서 중앙 고원으로 이동하여 쿨와칸에 정착했다. 미슈코아틀의 아들 세-아카틀-토필친은 성인이 된 후 '''케찰코아틀'''로 불렸으며, 수도를 쿨와칸에서 툴라로 옮겼다.
세-아카틀-토필친은 종교적 고행을 실천하고 인신 공양을 금지하는 등 "행동의 본보기"를 보이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테스카틀리포카[55]를 신봉하는 전사 집단과의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케찰코아틀"(세-아카틀-토필친으로 추정)[56]은 "테스카틀리포카"[57]의 계략으로 풀케 술에 빠져[58][59] 수도를 떠나야 했다.
"케찰코아틀"은 멕시코만 연안[65]에서 뱀 뗏목을 타고 동쪽으로 떠났으며, 마야의 쿠쿨칸과 동일시된다.[66] 987년에 마야 지역을 정복했고, 치첸이트사 등에서 멕시코 중고원 세력의 영향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다.[66] 세-아카틀-토필친이 툴라를 떠난 연대는 기록에 따라 895년[68] 또는 987년[69]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톨텍족은 ("위대한 손")이라는 신관의 인도로 투란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했다. 톨텍 족장들은 차르치우트라토나크를 왕으로 추대했다. 세-아카틀-토필친 퇴위 후, 994년에 [70][71]가 왕위에 올랐으나 폭정을 일삼았다.
톨텍은 가뭄, 치치메카족과 노노알카족과의 항쟁 등으로 쇠퇴했고, 웨마크는 1156년 또는 1168년에 차풀테펙(멕시코시티 서부)으로 천도하여 자살했다. 툴라에 남은 사람들은 촐룰라로 이동했다.[73] 히메네스 모레노 설에 따르면, 미슈코아틀 시대에 쿨루아칸을 거점으로 정복 활동이 이루어졌고, 세 아카틀 토필친 시대에 범 메소아메리카 세력으로 성장했다. 987년 정쟁에서 패한 후 툴라를 떠나 마야-톨텍 문명을 탄생시켰다. 톨텍 제국은 1162년 웨마크의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1960년대에는 톨텍 제국이 멕시코 중앙부 대부분을 지배했다는[75] 견해가 있었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다.[76] 톨텍 제국의 영향력은 툴라 주변의 좁은 범위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2. 1. 기원
마리아노 데 베이티아[6]와 카를로스 마리아 데 부스타만테[7] 같은 역사가들은 19세기 초에 톨텍족의 기원에 대한 구전을 수집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후에우에틀라팔란(Huehuetlapallan)이라는 도시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에 틀라치카친(Tlachicatzin)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곳 주민들은 솜씨 좋은 장인으로서의 명성 때문에 틀라치카친 사람들을 "톨텍"이라고 불렀다.[6] 583년, 찰칼친(Chalcaltzin)과 틀라카미흐친(Tlacamihtzin)이라는 두 명의 유명 인사가 이끄는 톨텍족은 후에우에틀라팔란의 지배자들에게 반란을 일으켰고,[7] 13년의 저항 끝에 틀라치카친에서 도망쳤다.[6] 그 후 톨텍족의 일부는 604년에 틀라팔란콘코(Tlapallanconco)라는 새로운 정착지를 세웠다.[7]이러한 톨텍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마누엘 가미오,[8] 엔리케 플로레스카노,[8] 로레트 세주르네[9]와 같은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들은 톨텍 도시 톨란(Tollan)을 테오티우아칸과 동일시했지만, 이 가설은 많은 학자들, 특히 역사학자 미겔 레온-포르티야[10]에 의해 비판받았다.
2. 2. 툴라 도착과 초기 통치자
코덱스 치말포포카(Anales de Cuauhtitlan)에 따르면 톨텍 민족은 토끼 해(674년)에 툴라 지역에 도착하여 신정 정치를 세웠으며, 700년경 군주제로 바뀌었다.[1] 일부 학자들은 톨텍족이 726년에 툴라에 도착하여 752년에 군주국을 세웠다고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12]톨텍의 왕조사는 여러 기록에 남아있지만, 내용이 서로 달라 신뢰하기 어렵다. 어떤 기록에는 후엠악(Huemac)[13]이라는 남자가 톨텍족을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반면, 다른 기록에는 찰치우틀라네친(Chalchiutlanetzin),[32] 믹스코아마차친(Mixcoamatzin),[13] 또는 세 아카틀 토필친 케찰코아틀[14] 등이 초기 통치자로 언급된다.
알프레도 차베로 등의 역사가들은 페르난도 데 알바 익스틀릴쇼치틀, 후안 데 토르케마다 등의 기록과 코덱스 치말포포카와 같은 자료들을 연구했다. 차베로는 톨텍 왕조 기록이 중세 유럽의 샹송 드 제스트[1]와 유사하여 전설적인 요소가 많다고 보았다. 특히 톨텍 군주의 통치 기간이 메소아메리카 달력의 52년 주기[1]와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대부분의 기록이 전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렸다.[1]
2. 3. 세 아카틀 토필친 케찰코아틀의 통치

《쿠아우티틀란 연대기》에 따르면, 톨란-시코코티틀란은 923년부터 947년까지 사제-왕 세 아카틀 토필친 케찰코아틀이 통치했다.[13] 그는 895년에[18][25] 멕시코 고고학자 위게르토 히메네스 모레노에 따르면 현재 테포스틀란 근처, 모렐로스주에 위치해 있을 수 있는 미차틀라우코에서 태어났다.[19]
케찰코아틀은 톨란을 "거주민 - 톨텍 - 이 훌륭한 자질을 갖춘 번영하는 도시"로 만든 현명하고 자비로운 통치자로 여겨졌다.[20] 동시에 그는 정기적으로 고행을 실천하는 경건하고 신성한 사람이었다.[20] 세 아카틀 토필친은 인신 공양 관행에 반대하며, 자신의 이름을 딴 최고 신이 의례적인 살생 행위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1]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에 따르면,[22] 어느 날, 토필친 케찰코아틀은 젊어지게 해줄 "약"을 제공하는 노인(변장한 테스카틀리포카로 알려짐[20])의 방문을 받았다. 이 약은 그저 풀케 한 그릇이었고, 맛을 본 후 왕은 여동생이자 여사제인 케찰페틀라틀을 초대하여 함께 마셨고, 둘은 곧 취했다.[23] 취한 탓에 두 남매는 신성한 의무를 잊고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여[20] 평판에 손상을 입었다. 이 굴욕 이후, 케찰코아틀은 947년에 톨란을 떠나 동쪽으로, 전설에 따르면 멕시코만 해안에 위치한 틀라팔란으로 여행했다.[18] 그곳에서 케찰코아틀은 카누를 타고 자신을 불태웠다.[20]
2. 4. 내부 갈등과 유카탄 정착
케찰코아틀 사망 이후, 톨텍 내부에서는 테스카틀리포카 숭배자들과 케찰코아틀 지지자들 사이에 종교적 갈등이 발생했다.[25][26] 케찰코아틀의 추종자들은 세 아카틀 토필친의 통치 기간 동안 억제되었던 대규모 인신 공양을 선호하지 않았지만, 테스카틀리포카의 추종자들은 인신 공양을 종교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겼다.[25] 케찰코아틀과 그의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노알카 출신인 반면, 테스카틀리포카 숭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치치메카 출신이었다.[26]디에고 두란에 따르면, 이 갈등은 짧았지만 결국 두 집단 사이에 두 번째 전쟁으로 이어졌다.[25] 이 전쟁은 1046년부터 1110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케찰코아틀 추종자들의 패배로 끝났다.[25] 폭력 사태로 인해 세 아카틀 토필친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톨란에서 도망쳤고, 이 망명자들의 상당수는 마야 문화 지역으로 향했다.[27] 멕시코 고고학자 로만 피냐 찬에 따르면, 케찰코아틀 숭배(유카탄에서는 쿠쿨칸으로 알려짐)는 기원후 987년경 잇차에 의해 이 지역에 도입되었다.[27] 잇차는 혼합된 푸툰 마야와 톨텍 혈통의 집단으로, 유카탄 반도로 이동하는 톨란에서 온 이민자들을 환영했으며 톨텍의 종교적 가르침을 받아들였다.[27]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세 아카틀 토필친의 일부 추종자들은 그의 모범을 따라 "케찰코아틀"이라는 이름과 그에 상응하는 마야어인 "쿠쿨칸"과 "Q'uq'umatz"를 스스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30][28] 멕시코 역사가 미겔 레온-포르티야에 따르면, 이 새로운 "케찰코아틀" 지도자들은 종종 마야인들을 상대로 군사 행동을 수행하도록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었다.[30] 이 인물들의 행적은 수세기 동안 연구자들에게 오해와 혼란의 원인이 되었는데, 그들이 종종 세 아카틀 토필친과 혼동되기 때문이다.[28]

톨텍족과 관련된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는 그들이 치첸이트사와 어떤 관계였는가 하는 것이다. 두 도시 간의 유사점은 두 도시 사이의 관계 본질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제기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이 분야의 전문가들의 완전한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19세기 프랑스 고고학자 데지레 샤르네는 툴라와 치첸이트사의 주요 광장이 유사하다는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인물이었으며, 이는 그가 이 도시가 토필친 케찰코아틀이 이끄는 톨텍족에게 정복되었을 수 있다고 가정하게 만들었다. 샤르네는 그를 쿠쿨칸이라고 불렀다.[41]
샤르네와 스핀든의 정복 가설은 현대 고고학에서 대부분 폐기되었는데, 톨텍족에 의한 치첸이트사의 정복 대신 이트사족이 유카탄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톨텍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더 많기 때문이다.[27] 또한 멕시코 역사가 미겔 레온-포르티야에 따르면, 마야 자료에 나오는 "케찰코아틀", "쿠쿨칸" 또는 "Q'uq'umatz"라는 이름을 가진 지도자에 대한 많은 언급은 Cē Ācatl 토필친 케찰코아틀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와 스스로 깃털 달린 뱀 신의 이름을 딴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30][28]
2. 5. 멸망과 톨텍 디아스포라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 톨텍은 내부 갈등과 기근[26]으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두란에 따르면, 1115년에 치치메카족, 오토미족[25], 우아스테크족[26] 등 북부 부족이 톨란을 공격했다. 1116년 톨텍족은 패배했고, 사제왕인 우에마크는 다른 톨텍족과 함께 도시를 버리고[21] 멕시코 계곡의 찰토칸으로 남쪽으로 향했다.[25]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에마크는 측근들에게 버려졌고,[25] 대부분의 톨텍족은 메소아메리카 전역으로 흩어졌다.[26][21]1122년, 우에마크는 차풀테펙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21][25] 1150년경[16] 툴라는 사실상 버려졌다. 일부 톨텍족은 쿨루아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26] 톨텍 망명자 집단 중 하나는 1200년경 촐룰라를 점령했다.[29]
톨란이 멸망한 후, 이전 톨텍 지배 지역은 나우아틀어로 "알테페틀"이라고 알려진 수많은 소규모 도시 국가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톨텍 귀족의 후손에 의해 통치되었다.[26] 톨텍 유산은 메소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귀족의 표준이 되었다. 아즈텍 황제, 오아하카의 믹텍 왕, 과테말라의 키체와 카크치켈 통치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통치자들이 톨텍 혈통을 주장했다.[30][31]
3. 통치자 목록
페르난도 데 알바 코르테스 익스틀릴소치틀에 따르면, 톨텍의 통치자는 다음과 같다.[32]
| 이름 | 통치 기간 | 생애 | 가문 |
|---|---|---|---|
| 찰치우틀라네친 | 510년-562년 | ||
| 익스틀릴쿠에차우악 | 562년-614년 | ||
| 후에친 | 614년-666년 | ||
| 토테페우 | 666년-718년 | ||
| 나카속 | 718년-770년 | ||
| 틀라코미우아 | 770년-826년 | ||
| 시히쿠에니친 | 826년-830년 | ||
| 테판칼친 이스탁칼친 | 830년-875년 | ?-911년 | |
| 메코네친 | 875년-927년 | ||
| 미틀 | 927년-979년 | ||
| 시우틀라친 | 979년-983년 | ||
| 테판칼친 | 983년–1031년 | ||
| 토필친 | 1031년–1063년 |
아노니모 멕시카노(Anónimo Mexicano)의 저자에 따르면, 톨란의 통치자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통치자는 52년 동안 통치했으며, 유일한 예외는 짧은 통치 이후 의회 과도기를 거쳤다.[33]
| 이름 | 통치 기간 |
|---|---|
| 찰치우틀라네친 | 511년[34]-563년 |
| 익스틀릴쿠에차우악 | 563년-615년 |
| 후에친 | 615년-667년 |
| 토테페우 | 667년-719년 |
| 나카스카요틀 | 719년-771년 |
| 미틀 | 771년-823년 |
| 시우츠알친 | 823년-827년 |
| '과도기'[35] | 기간 미상 |
| 테판칼친[36] | "52년"[37] |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클라비헤로[32]는 매우 유사한 목록을 제공하며, 시작 및 종료 연도만 수정하고 익스틀릴소치틀의 "아노니모"의 이름을 사용하고, 마지막 통치자에 대한 대체 이름을 사용한다.
| 이름 | 통치 기간 |
|---|---|
| 찰치우틀라네친 | 667년-719년 |
| 익스틀릴쿠에차우악 | 719년-771년 |
| 후에친 | 771년-823년 |
| 토테페우 | 823년-875년 |
| 나카속 | 875년-927년 |
| 미틀 | 927년-979년 |
| 시우틀라친 | 979년-983년 |
| '과도기' | 983년-1031년 |
| 토필친 | 1031년–1063년 |
쿠아우티틀란 연대기(Anales de Cuauhtitlan)에 따르면,[11] 톨텍 통치자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각 날짜에 52년의 달력 주기를 더하여 대체 기간을 얻을 수 있다.
| 이름 | 통치 기간 |
|---|---|
| 믹스코아마차친 | 701년-767년 |
| 후에친 | 767년-782년 |
| 일후이티말 | 783년–821년 |
| 세 아카틀 토필친 케찰코아틀 | 822년–844년 |
| 마틀락소치틀 | 844년–880년 |
| 나우히오친 | 880년–895년 |
| 마틀라코아친 | 896년-924년 |
| 틀릴코아친 | 925년-947년 |
| 우에막 (아테크파네카틀) | 948년–1023년 |
간략 기념록(Memorial Breve)은[38] 톨텍 통치자 두 명만을 언급하며, 첫 번째 통치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 이름 | 출생 | 통치 기간 | 비고 |
|---|---|---|---|
| 우에막 | 963년 | 993년-1029년 | 콜후아칸의 왕 토테페우의 아들 |
| 아크시틀 토필친 | 1002년 | 1029년-1051년 | 톨란은 1036년에 불안정해졌고, 그 백성들은 1040년까지 대부분 떠나 흩어졌다고 한다. "해 뜨는 곳을 지나; [...] 연기의 땅, 색깔의 땅으로 갔다고 한다." |
- 모든 날짜는 서기(AD)이다.
4. 사회
톨텍 시대의 노예 신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우아스테크 등 다른 민족들이 희생 의식의 제물이나 파멸될 운명의 재산으로 툴라로 끌려가 울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39]
5. 예술

톨텍은 뛰어난 건축 기술과 조각 기술을 보유했다.[40] 툴라의 건축과 조각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각각의 하위 문단을 참조하라.
5. 1. 건축
툴라는 대부분 격자형으로 설계되었다. 건물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흙으로 마감했다. 툴라의 아틀란테스는 전사 복장을 한 틀라위스칼판테쿠틀리(Tlahuizcalpantecuhtli) 신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신전의 큰 방 지붕을 받치는 기둥으로 사용되었다.[40]

5. 2. 조각
툴라의 아틀란테스는 톨텍 조각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거석들은 높이가 4.5미터가 조금 넘으며, 현무암으로 조각되었다. 톨텍 신 틀라위스칼판테쿠틀리를 전사의 복장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나비 모양 가슴받이를 착용하고 아틀라틀, 다트, 부싯돌 칼, 그리고 톨텍 문화에서 전사상을 특징짓는 곡선형 무기를 들고 있다.[40]기념비적인 아틀란티데스는 틀라위스칼판테쿠틀리 신전 (일명 "새벽별") 꼭대기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 모든 주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조각품들은 거대한 크기와 세부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6. 국제 관계
톨텍은 베라크루스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39] 또한 유카탄 반도의 여러 마야 도시들과 교류하거나 영향을 미쳤다. 8세기 중반[45], 고전 마야 문명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925년경, 유카탄 반도의 주요 마야 도시 대부분은 식량 부족과 농민 반란으로 인해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46] 톨텍족이 마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과 거의 같다.
당시 유카탄 반도의 일부 마야 도시는 다음과 같다.


톨텍과 치첸이트사의 관계는 학계에서 논쟁적인 주제이다. 두 도시 간의 유사성은 여러 가설을 제시했지만,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는 가설은 없다. 19세기 프랑스 고고학자 데지레 샤르네는 툴라와 치첸이트사의 주요 광장이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토필친 케찰코아틀(쿠쿨칸으로도 불림)이 이끄는 톨텍족에게 치첸이트사가 정복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41] 현대 고고학에서는 잇차족이 유카탄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톨텍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더 많기 때문에 이 가설은 대부분 폐기되었다.[27]
추피쿠아로 문화는 기원전 500년경에 미국 남부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최초의 과나후아토 주민들이 이 문화에 속했다는 이론이 있을정도로 이 지역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중요했다.[48]
추피쿠아로 도시는 기원전 800년에서 서기 1200년 사이에 거주했다. 추피쿠아로는 과나후아토, 미초아칸, 게레로, 멕시코주, 이달고주, 콜리마, 나야리트, 케레타로 및 사카테카스의 광대한 지역에서 발전했다.
6. 1. 토토나카판
톨텍족은 베라크루스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39]6. 2. 마야 지역
톨텍은 유카탄 반도의 여러 마야 도시들과 교류하거나 영향을 미쳤다. 8세기 중반[45], 고전 마야 문명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925년경, 유카탄 반도의 주요 마야 도시 대부분은 식량 부족과 농민 반란으로 인해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46] 톨텍족이 마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과 거의 같다.
당시 유카탄 반도의 일부 마야 도시는 다음과 같다.
6. 2. 1. 치첸이트사
톨텍족과 치첸이트사의 관계는 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이다. 두 도시 간의 유사성은 여러 가설을 제시했지만, 전문가들의 완전한 지지를 받는 가설은 없다. 19세기 프랑스 고고학자 데지레 샤르네는 툴라와 치첸이트사의 주요 광장이 유사하다는 점을 처음으로 지적했으며, 토필친 케찰코아틀(쿠쿨칸으로도 불림)이 이끄는 톨텍족에게 치첸이트사가 정복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41]
이 가설은 20세기에 미술사학자 허버트 조셉 스핀든이 옹호했는데, 그는 종종 가짜 역사적 자료를 사용하여 케찰코아틀에 의한 이트사 마야족 정복 주장을 뒷받침했다.[42]
샤르네와 스핀든의 정복 가설은 현대 고고학에서 대부분 폐기되었다. 잇차족이 유카탄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톨텍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더 많기 때문이다.[27] 또한 멕시코 역사가 미겔 레온-포르티야에 따르면, 마야 자료에 나오는 "케찰코아틀", "쿠쿨칸" 또는 "Q'uq'umatz"라는 이름을 가진 지도자에 대한 많은 언급은 세 아카틀 토필친 케찰코아틀 자신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와 스스로 깃털 달린 뱀 신의 이름을 딴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30][28]
치첸이트사는 결국 유카탄에서 인구가 최소 5만 명에 달하는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43] 이는 고전기에 코바에 살았던 사람들과 거의 같은 수였다.[44]
6. 2. 2. 기타 유카탄 지역
톨텍은 유카탄 반도의 다른 마야 도시들과도 교류하거나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 고고학자 로만 피냐 찬에 따르면, 케찰코아틀 숭배(유카탄에서는 쿠쿨칸으로 알려짐)는 기원후 987년경 잇차에 의해 이 지역에 도입되었다.[27] 잇차는 푸툰 마야와 톨텍 혈통이 섞인 집단으로, 유카탄 반도로 이동하는 톨란 출신 이민자들을 환영했으며 톨텍의 종교적 가르침을 받아들였다.[27]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세 아카틀 토필친의 일부 추종자들은 그의 모범을 따라 "케찰코아틀"이라는 이름과 그에 상응하는 마야어인 "쿠쿨칸"과 "Q'uq'umatz"를 스스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30][28]8세기 중반[45], 고전 마야 문명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톨텍족이 마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점과 거의 같은 시기인 925년경, 유카탄 반도의 주요 마야 도시 대부분은 식량 부족과 농민 반란으로 인해 이미 버려졌다.[46] 당시 유카탄 반도의 일부 마야 도시는 다음과 같다.
6. 3. 추피쿠아로
추피쿠아로 문화는 이 지역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중요했다. 기원전 500년경에 미국 남부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최초의 과나후아토 주민들이 이 문화에 속했다는 이론도 있다.[48]추피쿠아로 도시는 기원전 800년에서 서기 1200년 사이에 거주했다. 추피쿠아로는 과나후아토, 미초아칸, 게레로, 멕시코주, 이달고주, 콜리마, 나야리트, 케레타로 및 사카테카스의 광대한 지역에서 발전했다.
7. 군사
톨텍족은 전투에 능숙하고, 용맹하며,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정규군, 수비대, 요새, 예비대로 구성된 군대는 톨텍족이 탐내는 지역의 주민들과 적들을 상대로 강력한 무기였다. 톨텍족은 전투 기술과 용맹함 덕분에 주변 국가들에게 충분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심어주어 툴라와 같은 도시를 중무장 방어 없이 건설할 수 있었다.
톨텍 군대의 상위 계급은 코요테, 재규어, 독수리로 구성되었다.[49] 이들은 적의 화살과 창을 막기 위해 두껍게 패딩 처리된 면 갑옷을 착용했으며, 전사가 해당 동물 토템의 기사단에 속한 경우 코요테, 재규어 또는 독수리 형상의 흉갑을 착용했다. 둥근 방패를 들고 싸웠으며, 칼은 허리띠로 고정했다. 짧은 킬트가 몸통 하반부를 보호했고, 다리와 발목은 샌들과 끈으로 덮었다. 케찰 깃털로 전사의 헬멧을 장식했으며, 가죽, 깃털 및 기타 재료는 그들이 섬기는 특정 신 또는 기사단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전사들이 코 장식을 착용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귀족 계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전사들은 수염을 길렀다.[50]
8. 톨텍 제국설에 대한 비판
20세기 중반까지 톨텍은 광대한 영역을 지배한 제국으로 여겨졌으나,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톨텍의 실제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본의 학자 오이 쿠니아키는 히메네스 모레노의 톨텍 제국설을 비판하며, 문헌 기록의 연대 문제와 자료 조작 가능성을 지적했다.[73] 그러나 이러한 오이의 주장은 구미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연구자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1960년대에는 톨텍 제국이 멕시코 중앙부 대부분을 지배했다는[75] 견해가 있었지만, 타운젠트는 "고고학상의 확실한 단서는 거의 없다"라고 전제하면서, 톨텍의 영향력은 툴라 주변의 좁은 범위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76]
8. 1. 문헌 비판
20세기 중반까지 톨텍은 광대한 영역을 지배한 제국으로 여겨졌으나, 문헌 기록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톨텍의 실제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일본의 학자 오이 쿠니아키는 히메네스 모레노의 톨텍 제국설을 비판하며, 문헌 기록의 연대 문제와 자료 조작 가능성을 지적했다.[73] 오이는 히메네스 모레노가 문헌의 연대가 모두 틀리고 위조되었으며, 다른 도시의 다른 인물의 역사로 되어 있는 것을 특정 한 도시의 특정 한 인물의 기술이라는 전제로 자료를 조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이는 문헌의 연대는 기본적으로 옳고, 위조는 기술 내용에만 국한된다고 주장했다.
오이 쿠니아키는 구체적인 예시로, 톨텍-치치메카족의 역사서 『톨텍-치치메카사』에서 툴라에 도착한 것은 1064년이라는 기술이 있는 한편, 『쿠아우티틀란 연대기』에서는 같은 해에 톨텍 시대가 끝났다는 기술이 있는 점, 치치메카족이 톨텍족을 자칭할 뿐 툴라를 건설했다고는 언급하지 않은 점, 치치메카족은 테오테낭고라는 도시를 정복한 후 테오테난카라고 명명한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이의 주장은 구미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연구자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1960년대에는 톨텍 제국이 멕시코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멕시코 중앙부 대부분을 지배했다는[75] 견해가 있었지만, 이러한 톨텍 제국설의 근거로 제시된 것의 대부분은 매우 불완전하다. 타운젠트는 "고고학상의 확실한 단서는 거의 없다"라고 전제하면서, 톨텍의 영향력은 기껏해야 툴라 주변에서 약간 서쪽의 톨루카 분지에서 멕시코 분지 일부까지 포함하는 좁은 범위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76]
톨텍 제국이 실재했다는 근거로 "툴라" 북쪽 450km에 위치한 사카테카스 주의 라 케마라가 터키석 교역로를 지키기 위한 톨텍 제국의 요새로 추정되었지만, 최근 조사에 의해 고전기 후기 유적임이 밝혀져 "툴라"의 전성기와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한, 연납 유약 도기 장식에서 "툴라"의 종교적 상징과의 유사성이 발견되면서 과테말라 태평양 연안이 "툴라"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단순히 생산지인 소코누스코 지방의 도기 제작자가 자발적으로 시장 취향에 맞춰 생산한 것이 메소아메리카 각지에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8. 2. 고고학적 검증
마이클 코 등 일부 연구자들은 톨텍 제국이 실재했다고 주장하며, 사카테카스 주의 라 케마라 유적을 그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라 케마라는 톨텍 제국이 미국 남서부와의 터키석 교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요새로 추정되었다.[73]그러나 최근 벤 넬슨의 조사에 따르면, 라 케마라는 고전기 후기인 650년~750년에 건설된 유적으로, 톨텍의 전성기(950년경~115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73] 이는 톨텍 제국의 영향력이 멕시코 중앙 고원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연납 유약 도기 장식에서 틀랄록 신 등 툴라의 종교적 상징과 유사성이 발견되어, 과테말라 태평양 연안이 툴라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도기는 단순히 생산지인 소코누스코 지방의 도기 제작자가 시장의 수요에 맞춰 제작한 것이 메소아메리카 각지에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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