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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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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키온은 고대 아테네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45번이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플라톤의 제자였으며, 엄격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선량한 자'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마케도니아와의 관계에서 온건한 입장을 취하며 데모스테네스 등 강경파와 대립했다.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걸쳐 마케도니아와의 외교를 주도했으며, 라미아 전쟁 이후 안티파트로스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를 통치했다. 이후 폴리페르콘과의 갈등 속에서 반역죄로 고발되어 사형당했으나,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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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키온

2. 어린 시절

포키온은 어렸을 적에 플라톤크세노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아카데메이아에 출입하며 자유주의 관념을 탐구했다. 이러한 철학적 교육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는 철학자가 아닌 군인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19] 그는 카브리아스 장군을 따라 기원전 357년에 카브리아스가 전사할 때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각지를 전전했다.[7]

2. 1. 가계와 초기 생애

포키온의 아버지는 철 도구를 생산하는 선반을 운용하는 사람이었다.[19] 그의 할아버지는 기원전 411년 키노세마 전투에서 사망한 트리에라르크 포키온일 가능성이 있다.

어렸을 적에 포키온은 자유주의 관념을 탐구했다. 그는 플라톤( Πλάτων|플라톤grc )과 크세노크라테스( Ξενοκράτης|크세노크라테스grc )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아카데메이아에 출입했다.[19],[6] 그러한 철학적 교육을 통해, 포키온은 덕을 가진 도덕적 인격을 갖춘 인물로 성장했고, 사려분별력이 있는 신중한 충고를 주곤했다.[19]

2. 2. 혼인과 가족

포키온의 첫 번째 아내는 조각가 케피소도투스의 여동생이었다.[3][4] 그의 두 번째 아내는 겸손함으로 아테네에서 유명했는데, 자신의 유일한 장식은 포키온이 스무 번째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된 것이라고 말했다. 포키온의 아들 포코스는 젊은 시절 방탕하게 파티와 술에 중독된 생활을 했으나, 포키온은 그를 절약하는 생활 방식으로 유명한 스파르타로 잠시 보냈다.[2]

3. 초기 군사 경력

포키온은 젊은 시절 플라톤크세노크라테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아카데메이아에 다녔다.[6] 기원전 357년 카브리아스가 전사할 때까지 그를 따라 지중해 각지를 돌아다녔다.[7]

데모스테네스 등 반(反) 마케도니아파 정치인들과 대립했고, 민회에서는 에우브로스, 아이스키네스 등을 지지했다. 45번이나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어 풍부한 군사 경험을 쌓았다.[8]

기원전 350년경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에우보이아 섬에 진출하자,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엘레트리아의 독재자를 몰아내고 그리스인 포로들을 해방시켰다. 기원전 340년 필리포스가 페린토스와 비잔티온을 공격하자, 아테네는 포키온에게 군대를 맡겨[9] 메가라와 비잔티온을 구원하게 했다. 포키온은 필리포스 2세의 평화 정책을 지지하며 화친을 주장했으나, 주전파인 데모스테네스의 주장이 채택되어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했다.[10] 필리포스 2세 사후, 알렉산드로스와 협상했고,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의 능력과 조언을 높이 평가하여 빈객으로 대우했다.

기원전 322년 라미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군의 아티카 침입을 막고, 적장 미키온과 레온나토스를 격파했다.[11]

3. 1. 카브리아스 휘하 복무

어린 포키온은 차브리아스의 군대에 입대하여 많은 원정에 참여하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차브리아스는 포키온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보완해 주었기에 그를 높이 평가했다. 포키온은 원정에서 주요한 활약을 펼쳐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2]

기원전 376년, 포키온은 낙소스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의 좌익을 지휘하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해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의 첫 번째 명백한 승리였기에, 아테네인들은 군사 지도자들을 크게 기렸으며, 이 전투는 엘레우시스 비의의 주요 날에 벌어져 여러 해 동안 기억되었다.[2]

3. 2. 제2차 아테네 동맹 관리

카브리아스는 제2차 아테네 동맹의 지역 공물을 징수하기 위해 포키온을 에게 해로 파견했다. 아테네의 대표들은 '피지배' 동맹국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포키온은 20척의 군함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포키온은 "만약 섬 주민들과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지만, 동맹국으로서 방문하는 것이라면 한 척의 배로 충분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2] 그는 자신의 삼단 노선 한 척만 가지고 출발했다. 포키온은 각 도시에서 징수액을 매우 외교적으로 협상하여 연합 함대를 이끌고 귀환했는데, 이 함대는 그들의 재산을 보호했다. 동맹국들은 심지어 그를 기리기 위해 화려한 퍼레이드를 열었다.[2]

4. 아테네 민회에서의 역할

포키온은 아테네 민회에서 가장 엄격하고 현명한 정치인으로 인정받았지만, 동료들에게 반대하는 태도를 보여 종종 비판을 받았다. 델포이신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정치인들과 대립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오자, 포키온은 자신이 바로 그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 한번은 민회에서 자신의 연설이 박수를 받자, "내가 무심코 역겨운 말을 한 건가?"라고 묻기도 했다.[2] 데모스테네스는 그를 "내 연설을 자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2]

포키온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정치적 경쟁자를 돕기도 했다. 그는 아테네의 공적 기능이 정치와 군사 분야로 분리된 것에 불만을 품고, 과거 정치인들이 두 분야 모두를 관리했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그는 반대자들의 웅변을 막기 위해 현명한 개념과 고대에 유명했던 간결한 격언을 사용했다. 그는 선동적인 스타일을 피했고, 그의 어조는 꾸밈없이 거칠고 요구하는 편이었다. 또한 많은 아이디어를 짧은 구절로 압축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는 연설을 하기 전에 내용을 어떻게 줄일지 오랫동안 고민했으며, 친구에게 "내가 하려는 연설을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라고 말하기도 했다.[2]

4. 1. 일화

포키온은 엄격한 표정과 간결한 언변으로 유명했으며, 여러 일화를 남겼다.

어떤 사람이 그의 엄격한 표정에 대해 농담하자, 사이가 좋지 않은 지역 정치인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나의 찡그린 얼굴은 아직 당신들을 슬프게 한 적이 없지만, 이 유쾌한 사람들은 당신들에게 많은 슬픔을 안겨주었소."라고 말했다.[2]

데모스테네스는 언젠가 포키온에게 사람들이 이성을 잃으면 그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포키온은 "그렇소. 하지만 그들이 정신을 차린다면 당신을 죽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2]

포키온이 전체 의회에서 심하게 공격받던 중, 스파르타식 생활 방식을 흉내 내는 것을 좋아했던 아르키비아데스에게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대중의 편을 들어 포키온에게도 반대했다. 그러자 포키온은 스파르타식 수염을 잡고 "이제 면도할 때가 되었군."이라고 말했다.[2]

또 다른 의원인 아리스토게이톤은 보통 전쟁을 외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소집령이 내려졌을 때 그는 다리에 붕대를 감고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포키온은 일어나 징집관에게 소리쳤다. "아리스토게이톤도 다리를 절고 부적격자로 기록하시오."[2] 얼마 후 아리스토게이톤은 감옥에 갇혔고, 그의 요청에 따라 포키온은 그를 자주 방문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것에 대해 그를 비난했지만, 그는 "자, 아리스토게이톤을 방문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소?"라고 대답했다.[2]

테베와의 국경 분쟁 중에 포키온은 협상을 촉구했지만,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전쟁을 외쳤다. 그는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인 당신들의 혀로 싸우는 것이 낫소."라고 주장했다.[2]

몸매가 좋지 않은 아테네 정치인 폴리유크토스는 한때 마케도니아필리포스 2세와의 전쟁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면서,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기 위해 여러 번 멈췄다. 그런 휴식 중에 포키온은 "우리를 전쟁으로 이끌 훌륭한 사람이군. 연설하는 것만으로도 지쳐 죽을 뻔했는데, 적을 만나기 위해 방패와 갑옷을 들고 가면 어떻게 할 것 같소?"라고 말했다.[2]

포키온은 아테나이가 군사적으로 약화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계속 지적했으며, 보이오티아와의 국경 분쟁, 카이로네이아 전투, 라미아 전쟁도 중단시키려 했다.[15] 정치인으로서의 포키온은 단호하게 매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테네에서는 이례적인 존재였다.[17] "고결한 사람(Ho clestos)"이라는 것이 그의 별명이었으며, 한 아테나이인도 그가 웃거나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자신을 군인으로 키워준 카브리아스에 대한 은혜 때문에, 카브리아스의 아들 크테시포스가 경박하고 어쩔 수 없는 녀석임을 알면서도 돌봐주었다.[18] 자부심에 넘쳐, 그의 처형에 임해서도 슬퍼하는 동료에게 "그대는 포키온과 함께 죽을 수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5. 군사 경력

포키온은 젊은 시절 플라톤크세노크라테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아카데메이아에 출입했고,[6] 장군 카브리아스를 따라 지중해 각지를 전전했다.[7] 데모스테네스 등 반(反) 마케도니아 파 정치인들과 대립하면서도, 민회에서 45번이나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될 정도로 군사적 경험이 풍부했다.[8]

기원전 350년경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에우보이아 섬에 진출했을 때, 포키온은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엘레트리아의 독재자를 추방하고 포로들을 해방시켰다. 기원전 340년에는 필리포스 2세가 페린토스와 비잔티온을 점령하려 하자, 아테네 군대를 이끌고[9] 메가라와 비잔티온을 구원했다.

필리포스 2세가 평화 정책을 펴자 포키온은 화해를 주장했지만, 데모스테네스의 주장에 밀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했다.[10] 필리포스 2세 사후, 알렉산드로스와 교섭하여 빈객으로 대우받았다.

기원전 322년 라미아 전쟁에서는 마케도니아 군의 아티카 침입을 저지하고 레온나토스 등을 쳐부쉈다.[11] 마케도니아와의 협조를 주장하며 화의에 힘썼고, 라미아 전쟁 패배 후 안티파트로스의 후원으로 아테네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12] 기원전 319년 마케도니아 군의 피레아스 점령 저지에 실패하고,[13] 이듬해 폴리페르콘의 음모로 처형되었으나,[14] 곧 아테네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상을 세웠다.

5. 1. 에우보이아 원정

기원전 349년, 마케도니아필리포스 2세가 에우보이아를 침략하여 여러 지역에 참주들을 세웠다. 포키온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에우보이아로 파견되어 외교적 수단을 통해 에우보이아인들을 설득하려 했다.[2] 그러나 필리포스 2세는 강력한 매수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 정치인들을 타락시킨 상태였다.[2] 포키온은 타미나이 외곽 언덕에 야영지를 설치하고, 마케도니아에 매수된 자들을 무시하라고 명령했다.[2]

기원전 348년, 마케도니아의 지원을 받는 에우보이아 장군 칼리아스가 군대를 이끌고 포키온의 야영지를 공격했다. 포키온은 전투에 앞서 신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종교적 제물을 바쳤다. 이 과정이 길어지자 에우보이아 용병 부대가 먼저 공격해왔고, 아테네 기병대는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흩어져 패주했다.[2] 에우보이아군은 용병들을 격파하고 아테네 야영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포키온은 제물을 바친 후, 주력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적을 격파하고 패주시켰다.[2] 정예 부대와 함께 흩어졌던 병력을 규합하여 적 주력 부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포키온은 아테네인들이 포로들을 가혹하게 대할 것을 우려하여 풀어주었다.[2]

이후 포키온은 에우보이아 섬의 가장 좁은 부분에 위치한 자라케스 요새를 점령하고 아테네로 귀환했다.[2]

5. 2. 비잔티움 원정

기원전 339년, 포키온은 필리포스 2세로부터 비잔티온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2] 그는 비잔티움 출신 레온의 보증으로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아테네 군인들의 모범적인 규율과 용맹으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퇴했다.[2] 이후 포키온은 부상을 입고 아테네로 돌아갔다.[2]

메가라인들은 비밀리에 포키온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포키온은 군대를 이끌고 메가라에 도착하여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2] 그는 메가라에서 니사이에아 항구까지 두 개의 긴 성벽을 건설하여 메가라인들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였고, 아테네와 동맹을 맺게 하였다.[2]

6. 마케도니아와의 대립

포키온은 마케도니아와 대립을 피하고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와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를 떠오르는 강대국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데모스테네스, 리쿠르고스, 히페레이데스 등 전쟁을 원하는 선동적인 웅변가들을 선호했다.[2]

6. 1. 필리포스 2세 시대

포키온은 마케도니아와의 대립을 피하고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와의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를 떠오르는 강대국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데모스테네스, 리쿠르고스, 히페레이데스 등 전쟁을 원하는 선동적인 웅변가들을 선호했다.[2]

포키온은 아테네가 장군들에게 필리포스 2세와 대립하라고 명령했을 때, 민회에서 이 행동 방침에 반대하며 연설했다. 결국, 아테네와 동맹국들은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참패를 겪었다. 이후 아테네 귀족들은 포키온을 스트라테고스로 지명하는 것을 지지했고, 아레오파고스는 이를 통과시켰다.[2]

포키온은 패배한 아테네에 불가피하게 주둔군이 배치되는 것을 최대한 늦추었다. 처음에는 필리포스 2세와 직접 협상하는 것을 선호했다.[2] 나중에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한 후(기원전 336년), 포키온은 모든 축하 희생을 금지하며 "카이로네이아에서 우리를 패배시킨 군대는 단 한 명의 병사만 잃었소."라고 말했다.[2]

기원전 350년경 필리포스 2세가 에우보이아 섬에 진출했을 때, 포키온은 소수의 군세를 이끌고 엘레트리아의 독재자를 추방하고, 포로가 되어 있던 그리스인을 모두 해방시켰다. 기원전 340년에 필리포스가 페린토스와 비잔티온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자, 아테네는 포키온에게 군대를 이끌게 하여[9], 메가라와 비잔티온을 구원하게 했다. 그 무렵부터 필리포스가 평화 정책을 펴고 있으니 화해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고 민중에게 설득했지만, 주전파인 데모스테네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의 패배를 보았다.[10]

6. 2.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후,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을 존경하여 그의 제안에 귀를 기울였다.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가 반(反)마케도니아적인 아테네 정치인들을 인도하라는 요구를 완화하도록 설득했다. 이들은 포키온의 정적이었지만, 포키온은 정복자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2]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에게 조언을 구했고, 포키온은 "만약 마케도니아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포기해야 합니다. 만약 마케도니아가 영광을 원한다면, 그리스를 억압하는 대신 페르시아를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2]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한 후, 포키온은 왕이 서신으로 "안부"를 전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2]

이 기간 동안 포키온은 평화 정책을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네에 군함을 요구했을 때, 포키온은 "우월한 힘을 갖거나, 그들을 편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이를 지지했다.[2]

6. 3. 라미아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아테네인들이 마케도니아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포키온은 이에 반대했다.[2] 그는 "만약 그가 지금 죽었다면 내일도 죽어 있을 것이다. 축하하기 전에 조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포키온은 보이오티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60세 미만의 모든 아테네인들에게 입대를 요청하는 영리한 방법을 사용했다. 노인들이 항의하자 포키온은 "공평하다! 내가 80세지만 내가 공격을 이끌겠다."라고 대답하여 사람들을 진정시켰다.[2]

기원전 322년, 포키온은 라무누스에 상륙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파하고 미키온을 죽였다.[2] 그러나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에 의해 그리스 연합군은 크라논 전투에서 패배했다.[2] 이로 인해 아테네는 다시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7. 데마데스와 포키온의 과두정

라미아 전쟁 패배 후, 포키온은 마케도니아의 장군 안티파트로스의 후원을 받아 아테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영향으로 정의로운 인물들만이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지나치게 반항적인 사람들은 공직을 맡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2] 그러나 포키온은 안티파테르가 부정한 일을 요청했을 때는 "나는 그의 친구이자 아첨꾼이 될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2] 그는 데마데스와 함께 마케도니아에 의한 아테네 지배 정책을 지지했다.[12]

8. 폴리페르콘과의 갈등과 죽음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 대신 폴리페르콘이 마케도니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카산드로스는 이에 반발하여 폴리페르콘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고, 니카노르를 시켜 아티카를 통제하게 했다. 이때 포키온은 카산드로스를 돕고 니카노르의 피레우스 점령을 묵인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

아테네인들은 카산드로스를 지지하는 소수파와 폴리페르콘을 지지하는 다수파로 나뉘었다. 폴리페르콘은 민주정을 회복하고 망명자들의 귀환을 약속했기 때문에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포키온은 공개적으로 니카노르를 지지했고, 니카노르가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일축했다. 포키온이 니카노르를 공격하라는 민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이, 니카노르는 피레우스를 점령했다.[1]

기원전 318년, 폴리페르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테네 정치를 재정비하고 민중파를 지지하며 모든 자유를 회복했다. 아테네 망명자들은 민주주의를 배신한 정치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기대하며 귀환했다. 포키온은 스트라테고스에서 해임되었다.[2][5]

아테네의 웅변가 아그노니데스는 포키온을 반역죄로 고발했다. 포키온은 폴리페르콘을 직접 만나려 했으나, 폴리페르콘은 포키온의 말을 막고 그와 측근들을 구금했다.[2]

폴리페르콘은 포키온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심판받도록 했다. 아테네 집정관들이 재판을 진행했고, 군중은 과두 정치 세력에 대해 비난을 외쳤다. 포키온은 자신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잘못을 인정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포키온과 10명의 지인들은 독미나리를 마시고 죽는 형을 선고받았다.[2]

기원전 318년 5월 19일, 포키온은 독을 마시고 죽었다. 그의 시신은 아티카에서 매장되거나 화장될 수 없다는 법령이 내려졌다. 포키온의 아내는 밤에 그의 유해를 몰래 수습하여 집에 매장했다. 이후 카산드로스가 아테네를 장악하면서 포키온은 복권되고 그의 조각상이 세워졌다.[2]

9. 평가

포키온은 청렴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선량한 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여러 차례 마케도니아 지도자들의 뇌물 제안을 거절했다.[2][5] 그는 과묵하고 엄격한 태도를 지녔으며, 자신의 덕을 증명하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2]

조지 그로트는 포키온이 그리스의 자유를 잃게 하고 아테네를 예속 상태로 전락시킨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1] 그는 포키온이 필리포스 2세가 바라는 모든 것을 무상으로 행했으며, 데모스테네스의 노력을 무효화했다고 주장했다.[1]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포키온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엇갈린다. 더불어민주당은 그가 외세에 굴복하여 아테네의 자주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하는 반면, 국민의힘은 현실적인 판단으로 아테네를 보존하려 한 인물로 평가한다.

포키온은 아테네가 군사적으로 약화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계속 지적했으며, 보이오티아와의 국경 분쟁, 카이로네이아 전투, 라미아 전쟁도 중단시키려 했다.[15]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Greece, Volume 12 John Murray
[2] 서적 Phocion
[3] 서적 Phocion
[4] 간행물 Cephisodotus 2.
[5] 서적 Cornelius Nepos: Lives of Eminent Commanders http://www.tertullia[...]
[6] 서적 プルターク英雄伝(九) 岩波文庫
[7] 서적 プルターク英雄伝(九) 岩波文庫
[8] 서적 プルターク英雄伝(九) 岩波文庫
[9] 서적 プルターク英雄伝(九) 岩波文庫
[10] 서적 プルターク英雄伝(九) 岩波文庫
[11] 서적 プルターク英雄伝(九) 岩波文庫
[12] 서적 ギリシア文化史8 筑摩学芸文庫
[13] 서적 英雄伝 国文社
[14] 서적 プルターク英雄伝(九) 岩波文庫
[15] 서적 ギリシア文化史7 筑摩学芸文庫
[16] 서적 戦術書 国文社
[17] 서적 ギリシア文化史7 筑摩学芸文庫
[18] 서적 ギリシア文化史7 筑摩学芸文庫
[19] 서적 영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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